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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2 회


제4장. 믿음


3


강선희가 속한 중대는 화물차로 실어온 세멘트를 부리우고있다.

녀자들은 제외되고 남자들만 일했다. 남동무들만 일하는것을 보니 선희는 왜서인지 마음이 내려가지 않았다. 남자로 태여나지 못한것이 분했다. 그러면 자기도 옷을 벗어던지고 저속에 뛰여들었겠는데.…

처녀들은 그들에게 식사도 운반해주고 물도 떠다주면서 이것저것 심부름을 해주었다.

로에서 금방 꺼내온것인지 세멘트는 뜨거웠다.

그래서 발을 식히느라고 무엇인가를 붙잡고 때로는 서로 손을 마주잡고 발을 흔들어댄다. 춤을 춘다고 하면서… 와 웃음이 터져올랐다.

처녀들이 물고뿌를 그들의 입에 가져가며 배를 그러안고 깔깔 웃어댄다.

무엇인가 구실이 없어서 웃지 못했다.

하긴 가랑잎이 굴러가는것을 보고도 배를 그러안고 웃는 처녀시절이 아닌가.…

날이 어슬어슬해서야 작업이 끝났다.

처녀들은 다 집으로 가기로 하고 남자들만 남았다.

이제 또 들어오는 화물차를 기다렸다가 마저 부리운다는것이다.

처녀들이 들어가지 않겠다고 뻗치자 손아귀가 센 중대장 조인철이 막무가내로 등을 떠밀었다.

《동무들의 마음은 리해되지만 안되오. 오늘같은 날엔 있어야 부담이지. 일이 끝난 다음에는 데려다주어야 하지 않소.》

《?!…》

어찌보면 그것은 처녀들을 빨리 들여보내기 위한 구실이라고 할지.…

돌격대에는 침실이 없기때문에 일이 끝나면 식당취사원들과 지휘관들만 남고 집으로 가게 되여있다.

밤늦게까지 작업하다가 퇴근할 때에는 남자들이 처녀들을 집에까지 데려다주었다. 힘든 작업을 할 때마다 의례히 그 구실을 내대고 처녀들을 먼저 들여보내는것이다.

강선희가 휴계실로 가려는데 조인철이 손짓해 불렀다.

《나 좀 만나기요.》

《?…》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간 선희에게 그가 조용히 물었다.

《요즘 영재동무를 만나봤소?》

선희는 깔끔해서 머리를 저었다.

《그러니 영재동무가 다시 설계에 붙었다는걸 모르겠구만.》

《그가 그러던가요?》

《아니, 제일동무를 만났댔소. 자기와 함께 전극자동승강장치설계를 한다면서… 몹시 애를 먹고있는 모양이요.》

선희는 오연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이제 와서 그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들의 관계를 짐작하고있는 조인철은 타이르듯 서글서글하게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오. 자기를 뉘우치고 돌아서지 않았소. 영재동무도 아마 생각이 많을게요. 중요한 설계를 한다는데 선희동무가 잘 도와주어야 해.》

《!…》

전기로건설이 눈코뜰새없이 바쁜 속에서도 동무를 걱정하는 그의 참된 우애심에 가슴이 뭉클했다.

하긴 선희도 그를 잊으려고 모진 마음을 품었으나 때없이 떠오르는 영재생각을 막을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헤여질 때의 생각을 하면… 선희는 도고하게 대답했다.

《난 이미 그를 잊어버렸어요.》

《?…》

목욕을 하고 돌격대제복을 갈아입은 강선희는 생각에 잠겨 휴계실을 나섰다.

《함께 가요!》

몸집이 작고 오동오동한 련심이 뒤따라오며 소리쳤다.

함께 조작공을 하던 련심은 돌격대에 나와서도 한분대에서 일한다.

선희와 나란히 걸음을 옮기던 련심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보조개가 곱게 패운다.

《암만 보아도 돌격대제복이 몸에 어울려요. 날씬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게…》

《애두 참, 별소릴 다…》

별로 싫은 소리는 아니였지만 선희의 마음은 개운해지지 않았다.

《왜 그래요? 아까부터 심드렁해서… 참, 대렬참모동지가 그러는데 우리 강철직장에서 나온 사람들은 모두 도루 들어간다는것 같아요.》

《어째서?》

《그건 물어보지 못했어요.… 만약 그렇게 되면 어쩌겠어요?》

《넌?》

《일은 힘들어도… 어쩐지 돌격대원으로 그냥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래.…》

《그럼 우리 버티자요!》

《글쎄 …》

돌격대라고 하면 누구나 다 힘들다고 생각한다.

강선희도 그랬다. 손에서 피가 나도록 기초를 깠다. 난생처음 함마질을 해보았다. 손이 찔리우면서 철근조립을 하였고 손이 부르트도록 맞들이를 들고 질통을 메고 몰탈을 날랐다. 곱던 손이 거칠어졌다. 눈에는 피발이 서고 입술은 꺼칠꺼칠 부르텄다.

조종실에 앉아 3교대제로 조절기나 돌리던 선희에게는 정말 모든것이 힘에 부치였다. 그러나 떳떳했다. 제강소의 현대화를 위해 땀방울을 흘린다는 긍지와 자부심으로 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깊은 잠에 들군 했다.

돌격대는 조직된 첫날부터 군대식으로 생활했다.

아침인사를 하는것도 머리를 숙이는것이 아니라 거수경례를 한다.

처음엔 어색하였다. 웃음이 터져나오군 하여 지휘관들에게서 비판도 받았다.

지금은 익숙되여 제법 맵시있게 경례를 한다, 빙긋이 미소까지 지으면서.…

작업하기 전에 중대별로 대렬행진을 한다.

발을 높이 들어 힘차게 구르면서 목청껏 노래도 부르고… 그러고나면 온몸이 훈훈해지고 힘이 부쩍부쩍 나는것 같다.

중대, 소대, 분대별로 작업지시를 받고 일을 시작한다. 집체적으로 일을 하니 힘은 들어도 재미있었다. 휴식시간에는 오락회를 하고 남자들은 무릎싸움도 한다. 돌격대생활은 힘들지만 랑만과 웃음이 있는것이다. 하긴 랑만과 웃음이 없이야 어떻게 힘든 일을 감당해낼수 있겠는가.…

길지 않은 나날에 서로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돌격대생활에 정이 들었다. 선희는 그 생활을 잊지 않기 위해 매일 저녁 일기를 썼다. 하루생활의 가장 인상적인 사실들을 또박또박 기록해두었다. 쉴새없이 조잘대는 련심의 말을 들으며 걷느라니 어느새 설계실건물앞까지 왔다. 선희는 저도 모르게 3층창문을 흘끔 쳐다보았다.

오리털방석을 해가지고 가슴설레이며 찾아왔던 때가 엊그저께같이 느껴져 한숨을 내쉬였다. 추운 겨울은 지나가고 희망으로 부푸는 봄은 소리없이 찾아왔다. 구내도로 량옆의 키높은 가로수들에는 푸른 잎이 돋아나 봄바람에 살랑거린다.

꽃밭에는 노란 개나리꽃이 무더기로 피여나 꺾어질듯 드리워있다.

련심은 개나리꽃을 몇송이 꺾어다가 자기 머리에도 꽂고 선희머리에도 꽂아주면서 좋아라고 깔깔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희는 여전히 제 생각에 잠겨있다.

그들이 퇴근길에 오른 사람들로 붐비는 정문을 나섰을 때였다. 참새처럼 노상 조잘대가지고있던 련심이가 갑자기 말을 뚝 끊고 선희의 팔을 건드렸다.

《저기…》

련심이 가리키는 앞쪽을 바라보니 영재였다.

도서관에 갔다오는 길인듯 한쪽팔에 여러권의 책을 낀 그가 다른 손에 펼쳐든 책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며 걸어오고있었다. 그들이 지나치려는 순간 박영재가 이상한 감촉을 느껴서인지 눈길을 쳐들었다. 두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들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뚝 멈추었다. 서로가 후두둑- 높아지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나 먼저 가요.…》라는 련심의 목소리를 얼핏 들은것 같은데 벌써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영재에 대한 그때감정이 되살아난 선희가 도고하게 걸음을 떼려는데 《선희! 공원에 가서 잠간 앉기요!》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러운 그 목소리가 얼마나 절절하게 페부에 스며드는지 선희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박영재는 천천히 공원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그들이 자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곳이다.

박영재와 다투고 헤여진 후 선희는 기다렸다. 그를 너무도 사랑하고 믿었기에… 그가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다시 설계에 착수하길 바랐다. 그러면 너그럽게 용서하고 더 뜨겁게 사랑하리라고…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찾아갈 선희가 아니였다. 쇠물을 끓이는 처녀의 자존심이 강철마냥 도고했던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선희는 결연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의자에 앉지는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퇴근길에 오른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자전거 신호종소리만이 들려올뿐…

달마산마루에 비꼈던 저녁노을은 점점 사라지고 소공원에는 저녁어스름이 소리없이 스며든다. 공원의 나무가지에 깃든 뭇새들은 다정하지 못한 두 청춘남녀를 바라보며 불안스레 재잘거린다. 무슨 충돌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가 걱정스러운듯…

박영재의 눈길이 선희의 손이며 얼굴에 가멎었다.

해빛에 타 감실감실해진 얼굴, 바람에 거칠어진 살갖, 부르튼 입술, 무엇에 찢겼는지 붕대가 감겨진 손… 영재의 얼굴은 갑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로 이그러졌다. 선희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이 북받쳐 불쑥 이렇게 말해버렸다.

《선희,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았지.…》

선희는 모질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지 말자고 몇번이나 마음을 다잡던 선희였지만 왜서인지 저도 모르게 톡 내쏘았다.

《오해하지 마세요.… 난 마음고생을 하지 않았어요.》

《…》

박영재는 말없이 그의 울분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선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늦었어요.… 내가 영재동무를 얼마나 기다린줄 아세요? 더우기 박사원등교가 끝났을 때에는…

그런데 동문 오지 않았어요.… 설계실에도 다시 나가지 않았고… 오늘도 우린 우연히 만났을뿐이예요. 그러니 그 말이 지금에 와서 무슨 소용이 있어요?》

박영재는 갑자기 심장이 조여드는것 같았다.

대오에서 떨어진 락오자가 될가봐 그의 손을 꼭잡고 안타깝게 호소하던 선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릇에 담겨있던 물은 이미 쏟아졌다. 어떻게 다시 담을수 있겠는지.… 그러나 물러설수 없다. 선희는 그의 사랑이고 이제 와서 선희가 없는 생활은 생각할수가 없다.

《난 끝까지 선희를 사랑하겠소!》

《…》

그에게서 두번째로 듣는 사랑의 고백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그때였다면 선희는 행복으로 하여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을것이다. 하지만 사랑과 믿음이 여지없이 허물어진 이 시각, 영재의 그 말은 오히려 혐오감만 더해준다.

《그럼 대답해주겠어요.… 난 동무를 사랑할수 없군요. 그러니…》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무가지에 깃든 새들도 긴장해졌는지 재잘거리기를 그쳤다. 귀를 기울이며 엿듣는듯 고요가 흐른다.

강철직장의 지붕우에서 붉은 노을빛이 확 피여나며 갑자기 온 누리가 환해졌다. 그들의 눈길이 노을에 가멎었다. 어느 전기로에서 출강을 하는 모양이다. 선희는 그 위치를 보고도 몇호전기로에서 출강한다는것을 알아맞추군 하였으며 영재에게도 즐겨 이야기하군 했었다. 하지만 왜서인지 오늘은 말없이 바라보기만 한다.

서로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처럼…

이제 헤여지면 다시는 영영 만나지 못할수도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선희는 저 전기로의 노을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이야기해주고싶었다.

《솔직히 말해보세요. 영재동문 저 쇠물빛노을을 아름답다고 생각해본적이 있었어요?》

《…》

《없었을거예요.… 내가 저 노을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동문 늘 심상한 표정이였어요. 그저 랑만적인 처녀의 변덕으로만 생각하면서 빨리 가자고 독촉했을뿐…

모름지기 동문 여기를 떠나 어딘가 딴곳에 가서 일하게 될 때 강선의 쇠물빛노을이 어떤가고 묻는다면 그저 그래 하고 대답할거예요.

전기로의 쇠물에서 비쳐나오는 노을빛을 어떻게 태양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노을에 비길수 있겠어요.》

점점 붉게 타오르는 쇠물빛노을을 바라보며 선희는 열정에 겨워 말을 이었다.

《어린시절 난…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강선의 노을속으로 날아올랐다는 천리마에 대하여, 천리마발굽에서 튀여난 불꽃이 닿는 곳마다에서 먹을것, 입을것, 자동차며 뜨락또르 뭐나 없는것 없이 폭포처럼 쏟아져나온다는 전설을 환희에 넘쳐 듣군 했어요.

전설을 창조했다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천리마시대의 훌륭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옛말처럼 들으며 자랐어요. 그래서 지금도 한차지 또 한차지 쇠물이 쏟아져나올 때마다 우리가 그만큼 잘살게 되고 행복해지고 아름다운 미래가 앞당겨진다고 생각해왔어요.》

박영재는 멀리 타오르는 쇠물빛노을을 새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선희의 말이 다시 들려온다.

《그래서 저 쇠물빛노을이 그토록 아름다워보이는것이고 그 아름다운 노을이 꺼지지 않게 하자고 온 강선사람들이 떨쳐나서는거예요!… 그런데 동문 뭐예요.… 한사람의 기술자가 그리도 그리운 때 어떻게 행동했어요?… 하긴 동무에게 저 노을이 타오르든 스러지든 무슨 상관이 있었겠어요. 때가 되면 훌쩍 날아가버릴 계절조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어떻게 강선처녀를 사랑한다고 말할수 있겠나요.…아니, 난 믿을수 없어요.》

박영재는 쇠물빛노을에서 눈길을 뗄수 없었다.

무심하게만 보아오던 저 쇠물빛노을에 그처럼 소중한 추억과 아름다운 희망, 휘황한 미래를 담고있는줄을 어떻게 알았으랴.…

비록 바람과 해빛에 살갗은 타고 거칠어지고 두볼은 꺼졌어도 그처럼 아름다운 처녀는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을것 같았다.

선희가 자기와는 대비도 할수 없는 아득히 높은 세계에 올라서있다고 생각되였다.

《선희… 난 할말이 없소.…》라고 한 박영재는 자기를 믿어달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저 노을을 위해 생명이라도 스스럼없이 바치겠다는것을 말로써가 아니라 실천행동으로 보여주리라 결심하면서.…

그들은 다시 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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