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제3장. 완강성


5


박영재는 자기가 맡은 설계가 마감단계에 이르러 잘 진척되지 않아 며칠째 고심하고있다.

설계에 선뜻 나서지 못했던 자책감으로 낮이나 밤이나 설계도판을 떠나지 않았던 영재였다.

온 강선사람들의 관심속에 설계는 공정계획대로 하나하나 진척되여가고있었지만 그가 자진하여 맡은 전극자동승강장치설계는 여전히 애를 먹고있다. 그것은 고도의 정밀성과 높은 기술을 요구하는것인데 전기로에 도입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오래전부터 선희가 바라던 소원이기도 하다.

설계가 시작되여 전기간 제기되는 많은 기술적문제들을 풀어온 영재지만 자동승강장치설계만은 한걸음한걸음 정말 힘들게 해나가고있다. 한 요소의 설계를 몇번이나 그렸다지웠다할 때에는 중요한 자동설비들은 수입해오는것이 실용적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다시 머리를 쳐들 때도 있었다.

며칠전부터는 대학박사원등교가는 문제가 머리속에서 같이 엉켜돌아간다. 래년이면 졸업이다. 이번 등교가 중요하다. 일이 너무 바빠 학위론문도 준비하지 못하고있다. 채 완성하지 못한 설계를 중단하고 훌쩍 떠날수도 없는 일이여서 가겠다는 말도, 론문준비하겠다는 말도 선뜻 내비치지 못하고있다. 어쨌든 맡은 설계를 끝내고보자.

여러가지 문제로 복잡한 머리도 쉬울겸 박영재는 점심시간을 리용하여 행정청사 2층에 있는 서승민의 방에 찾아갔다.

콤퓨터에서 외국의 야금설비들을 소개한 록화화면을 보고있던 서승민은 그를 보자 친절하게 자리를 권하였다.

《영재동무가 어떻게?》

그는 부상의 아들인 영재를 언제나 호의를 가지고 대했다. 영재도 무엇이 제기되거나 속상한 일이 생기면 뚝한 지배인보다 상냥한 서승민을 먼저 찾군 하였다.

설계와 관련하여 이말저말 나누던 서승민은 이마에 흘러내린 몇오리 안되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더니 그제야 생각난듯 불쑥 말머리를 돌렸다.

《인차 통신등교에 가야 하지 않나?》

《설계도 완성 못했는데… 어떻게…》

박영재를 한동안 바라보던 서승민이 얼굴에 웃음을 띠우며 말했다.

《내 귀가 번쩍 뜨이는 새소식을 알려줄가? 영재만 알고있으라구. 지금 성에서는 미국놈들의 압력이 통하지 않는 나라와 예비접촉을 하고있소.》

《예? 그것이 언제면 실현됩니까?》

《글쎄, 구체적인 날자는 딱 찍을수 없지만 인차 락착될거요. 너무 조급해할건 없고…》

《?…》

하긴 그 작전을 부상인 아버지가 주관한다는것을 짐작하고있었지만 그 깊은 내막까지는 모르고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잘하면 설계가 끝나기 전에 락착될수도 있지 않는가.

그렇게 되면 지금 하고있는 설계는?

그런것을 지배인아저씨가 모를리 없겠는데… 아버지도 그렇고.

그럼, 어떻게 된다는건가?

그의 속생각을 짐작한듯 서승민이 말했다.

《너무 신경을 쓰지 말라구. 참 영재동문 학위론문감을 어떤걸 잡았소?》

《아직은…》

《내 좋은 론문감을 주겠으니 한번 연구해보오. 이제 우리가 들여오게 되는 초고전력전기로에 거품슬라크조업방식을 도입하는거요.

지금 세계야금공업추세는 거품슬라크조업방식이요. 이것을 도입하면 열효률이 높아지고 제강시간이 단축되며 소음공해와 먼지발생량이 휠씬 줄어들뿐만아니라 전극의 산화손실도 적어지오. 우리 나라에선 아마 처음일거요. 어떻소? 해볼만 한게 아니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거품슬라크조업방식을 도입하자면 산소공장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건 이제 전망적으로 다 계획하고있소. 그래서 현대화가 아니요. 먼저 기술공학적리론이 선행되고 실천이 뒤따르는거요. 이제 들여오는 초고전력전기로운영을 위해 한몫 단단히 해야지.》

박영재는 그의 거침없는 언변에 감심되였다.

그렇게 놓고보면 경제적으로 실용성있는 해볼만 한 론문감이다.

박영재는 그길로 지배인을 찾아갔다.

《뭐? 박사원통신등교에 가겠다고?》

박영재의 제의에 한동안 아연해졌던 김성남은 인차 수습하고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음, 등교를 가야지, 가야하구말구. 그런데…》

김성남은 그가 맡고있는 전극자동승강장치가 아직 완성되지 못하였다는것이 상기되자 이마살이 찌프러졌다. 생각같아서는 설계가 완성되기 전에는 못 간다고 딱 자르고싶었지만 자제했다. 영재가 설계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많이 해결하였고 더우기는 부상이 제강소에 내려보내며 잘 돌봐달라고 부탁한 아들이 아닌가.

설계가 기본적으로 완성된 상태에서 그가 빠진다 하여 크게 걸릴것은 없다. 그러나 왜서인지 김성남은 박영재를 다시 쳐다보게 되였고 어쩐지 섭섭한 생각까지 들었다. 얼마전에 병원에 실려갔던 리제일이 또다시 퇴원하여 설계를 하겠다는것을 겨우 설복하여 눌러놓았다. 얼마나 대조적인가. 믿음이 컸던만큼 실망도 크다. 그렇다고 억지로 붙잡고싶지는 않았다.

그는 선선히 말했다.

《알겠소, 영재결심대로 하라구.》

《…》


X


새벽교대를 마치고 퇴근하던 선희는 행정청사근방에 이르자 설계실이 있는 3층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쯤 영재동문 내가 그리도 바라던 전극자동승강장치설계를 하느라고 여념이 없겠지…

며칠전 어머니와 함께 설계실을 찾았을 때 어찌나 설계에 열중했던지 가까이 다가가 찾아서야 자기를 알아보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선희는 살며시 가방에 손을 넣어 폭신폭신한 방석을 만져보았다.

오리털을 넣고 새로 만든 두툼한 방석이다. 초고전력전기로설계에 진입한 이후로는 정말 만나기 힘든 영재였다. 선희가 밤교대인데도 있지만 설계에 방해가 될가봐 찾아가기를 저어했던것이다.

영재를 빨리 만나고싶다. 그에게 힘을 주고 애로되는것이 있으면 온 강선을 다 뒤져서라도 풀어주리라.…

선희가 설계실로 올라가려고 걸음을 떼는데 청사나들문으로 설계용지퉁구리를 든 현옥이가 나왔다. 중학교동창인 그는 설계실에서 사도공으로 일한다. 날은 춥건만 솜옷도 수건도 걸치지 않은채로이다.

《현옥이! 요즘 몹시 바쁘겠구나.》

《괜찮아. 그런데 어딜 가니?》

《나? 보고싶은 사람이 있어서, 호호.》

《오! 그래그래, 영재동무. 그 동문 기술과로 도루 갔어.》

선희는 깜짝 놀라 눈을 치떴다.

《그건 무슨 소리야. 얼마전까지만 해도 설계를 했는데?》

현옥이 좀 주저하며 말했다.

《며칠전에 지배인동지가 실장한테 영재동무가 하던 설계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하더구나.》

《왜?》

《그건 모르겠어.》

선희는 그달음으로 기술과에 찾아갔다. 영재는 없었다. 안면이 있는 기술과장이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영재동문 박사원통신등교가 제기되여 출근하지 않았소. 그래서 설계에서도 손을 떼고…》

《?…》

문득 지배인이 설계실에 와서 그가 하던 설계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했다던 현옥의 말이 생각났다. 선희는 지배인방으로 찾아갔다.

사촌오빠가 친동생처럼 대해준다고 해도 웬간해서는 찾아가지 않던 선희였다. 뜻밖에 나타난 선희를 보자 어딘가 나가려던 김성남이 놀라서 물었다.

《네가 웬일이냐? 집에 무슨 일이 생겼니?》

선희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영재동무가 설계에서 손을 뗐다는게 사실이예요?》

그제야 알겠다는듯 김성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그런 일이 있었다. 박사원등교를 가야 한다면서 초고전력전기로운영과 관련한 학위론문을 쓰겠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그가 하던 설계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박사원등교도 학위론문도 다 중요한것이지.》

《?…》

선희는 무슨 정신으로 집에 왔는지 모른다. 어머니가 혼자 방안에서 장갑을 만들고있었다.

《청진에서 오신 어머닌 또 설계실에 나가셨나요?》

《그래, 나가셨다. 입안이 다 헤졌지. 몹시 힘들어하길래 며칠 쉬다 나가라는데두, 원…》

어머니의 말은 붙는 불에 키질하는 격으로 선희의 아픈 가슴을 태웠다.

조금 눈을 붙이고 행동하려고 웃방침대에 가서 누웠으나 정신만 또렷해지며 도무지 잠들수가 없다. 날씨가 더 추워지는지 바람소리까지 들린다.

한 어머니는 전기로건설을 돕겠다고 먼곳에서 찾아와 마지막까지 수고하고있는데 주인이라는 사람은 손님격이니…

어쩌면 그럴수 있단 말인가!

선희는 더는 누워있을수가 없어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어머니, 나 잠간 나갔다오겠어요.》

소연은 딸의 기색이 이상해서 조용히 물었다.

《선희야! 왜 그러니? 무슨 일이 있었냐?》

어머니에게 숨기는것이 없는 선희였으나 이 사실만은 말할수 없었다.

제가 저지른 일처럼 얼굴이 뜨겁고 수치스럽게만 느껴졌던것이다.

《아무 일도 없어요, 좀 갔다올데가 있어서…》

《?…》

집을 나선 강선희는 곧장 합숙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선희네 집은 공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므로 공장 가까이에 있는 합숙까지 가자면 한참 걸어야 했다.

왜 갑자기 설계를 그만둘 생각을 했을가? 등교? 론문집필?

아무리 생각해보아야 도무지 리해가 되지 않는다.

더우기 나에겐 아무 말도 없지 않았는가.

너무도 한생각에 옴해서 걷다보니 선희는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치기도 하고 발을 헛디디며 비칠거리기도 했다. 얼빠진 사람처럼 걸어가는 자기를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로 본다는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합숙접수를 통과한 선희는 2층으로 올라가 박영재가 들어있는 호실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소리가 있으나없으나 그는 문을 열었다.

훈훈한 방안공기가 확 풍겨나왔다.

박영재는 책상우에 놓여있는 노트콤앞에 앉아있었다. 콤퓨터의 마우스를 조작하고있던 그가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선희가 어떻게?》

그 목소리가 귀에 설었다.

《어떻게라니요? 난 여기에 나타나면 안될 사람인가요?》

영재는 당황한김에 말을 잘못했다는것을 느끼며 얼른 의자를 그앞에 밀어놓았다.

《됐어, 어서 앉으라구.…》

합숙생들이 별로 많지 않았으므로 영재는 독방을 쓰고있었다. 널직한 책상과 책들이 그쯘히 꽂혀있는 책장, 담요가 깔려있는 깨끗한 침대, 탁우에는 천연색텔레비죤도 놓여있다. 자주 보아오던 그 모든것이 왜서인지 오늘은 낯설게만 느껴진다.

선희는 자신을 극력 자제하느라 애쓰며 의자에 앉았다.

《설계에서 왜 손을 뗐어요?》

예견했던 질문이였지만 한순간 당황했던 그는 인차 수습하고 벙긋 웃었다. 불안스러운 마음을 웃음으로 가리우려는듯…

《그건 어떻게 알았어?》

《온 제강소사람들이 다 알고있는걸 나만 모르고있었어요.》

선희의 어조에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중대한 결심을 한 그에 대한 은근한 질책이 스며있었다.

《그럼 모든 사람들이 알고있는것처럼 리해하면 되지 않을가? 박사원통신등교때문이라고…》

《내가 더 보충하지요, 학위론문도 완성하고…》

콤퓨터화면을 정지시키려고 마우스를 누르려던 박영재가 흠칫 선희를 쳐다본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내 말이 틀렸는가요?》

조용히 단추를 눌러버린 박영재가 눈길을 쳐들었다.

《그건 죄다 사실이요. 그래 무엇이 잘못됐소?》

선희는 아연해졌다.

어쩌면 저렇게도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할수 있단 말인가.… 지금이 어느때라는걸 영재동무가 정녕 모른단 말인가? 등교를 가라고 떠밀어도 뿌리쳐야 할 때가 아닌가.…

선희는 머리를 가로 흔들며 격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예요, 그것이 아니예요. 난 진실을 알고싶어요.》

박영재는 불쑥 자기가 사랑하고있는 선희에게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교와 관련하여 그와 전혀 만나지 않은것만은 사실인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다 말해줄수는 없지 않는가.

《선희가 그걸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소. 이제 시간이 지나면 모든게 명백해질거요, 그땐 모든 사람들이 다 리해하게 될게고.》

그러나 선희는 자기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난 그때까지 기다릴수 없어요.》

박영재는 슬그머니 달아올랐다.

《무엇때문에?…》

무엇때문인가고?… 그럼 난 그걸 알아야 할 존재가치도 없는,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전기로조작공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그의 애인이 아닌가?

문득 선희는 자기들사이에 언제한번 사랑의 고백을 나눈적이 없었다는것이 상기되자 흠칫 놀랐다. 선희는 처음으로 자기들의 사랑을 의심해보았다. 과연 우리는 어떤 사이인가?

《무엇때문인가고요? 그럼 대답을 주세요. 난 박영재동무에게 어떻게 되는 사람인가요?》

《그거야 뭐, 새삼스레…》

《아니, 난 명백히 알고싶어요. 영재동문 절… 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가요?》

선희는 이렇게 묻고나서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눈길을 떨구었다. 가시돋힌 장미꽃마냥 성이 났을 때조차 아름다운 처녀의 상기된 얼굴이며 팽팽한 옷밑에서 세차게 오르내리는 가슴에서 애써 눈길을 피하며 박영재는 더듬거렸다.

《너무 격해 그러지 마오. 난 선희를 사랑하오. 선희없인…》

방안에는 야릇하고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서로의 가슴속에서 높뛰는 심장의 박동인양 탁상시계의 초침소리만이 고요를 깨뜨리며 찰칵찰칵 울려왔다.

선희는 눈길을 들었다.

《그럼 말해주세요, 진실을 말이예요.》

마우스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있던 영재가 무거운 입술을 뗐다.

《좋소, 초고전력전기로건설은 로기술자들이 기치를 들었고 기업소책임일군들이 적극 지지해나섰소. 하지만 성에서는 반대하는 일군들이 없지 않았지.… 제강소의 잠재력을 가지고는 시기상조라고… 설사 설계를 한다고 해도 그 성공여부가 묘연하여 승인하지 않았소.

게다가 지금 성에서 다시 벌리고있는 납입작전이 거의 마감단계에 이르렀다고 하오. 그러니 설계를 완성한댔자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소. 무용지물이 되고만단 말이요. 그럴바엔 차라리 새로 들여오는 초고전력전기로운영과 관련한 학위론문을 준비해가지고 통신등교에 가자는거요. 자, 이젠 리해가 되오?》

강선희는 머리칼이 흐트러지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리해할수가 없어요. 난…》

선희는 더 말하지 못했다. 가슴속에 무엇인가 꽉 차오르며 목이 꺽 막혔던것이다.

사실 영재가 설계에 선뜻 나서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섭섭한 마음이 전혀 없은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인차 설계에 달라붙었고 어렵고도 중요한 부분을 자진하여 맡아 밤을 새워가며 설계를 하고있는 영재를 보며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지배인오빠도 설계원들도 때없이 영재를 찾으며 힘든 문제들을 풀어나가는것을 목격했을 때 훌륭한 동무를 사랑하고있다는것으로 하여 얼마나 자랑스럽고 행복하기까지 하였던가! 그런데…

이 모든것을 부정하기에는 영재에 대한 선희의 사랑이 너무도 컸다.

《영재동무! 생각 좀 해봐요. 3년이 걸려도 할수 없다고 하던 그 방대한 설계는 지금 완성단계에 있지 않나요. 리규택아바이도, 전체 설계원들도 모두가 힘을 내여 마감설계를 다그치고있어요. 리제일동무는 아픈 몸이지만 쓰러지면서도 설계를 하였고…

이러한 때 동문 내가 그렇게도 바라던 전극자동승강장치설계마저 중도에서 버리고 등교에 가겠다고 하니 그걸 내가 어떻게 리해하란 말이…》

박영재가 선희의 말을 툭 가로챘다.

《그건 오해요. 선희, 현실을 랭정하게 보고 판단해야 하오. 현대적전기로를 인차 들여온다고 하지 않소.》

여전히 자기의 주장을 굽히려 하지 않는 영재를 선희는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난 성에서 왜 현대적전기로를 들여오려고 하는지 그건 몰라요. 또 알고싶지도 않아요. 다만 영재동무가 왜 거기에 먼저 귀기울이는지, 그것때문에 설계마저 그만두었다는것이 안타깝고 리해가 되지 않을뿐이예요.》

《…》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책상뽑이를 열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문 박영재가 딸깍딸깍 라이타 켜대는 소리만이 고요를 깨뜨릴뿐이다. 그리 즐기지 않는 담배를 피우는걸 보니 그가 몹시 흥분되였다는것이 느껴진다. 선희는 어쩐지 그가 측은해보였다. 아무 대꾸도 없이 담배연기만 내보내고있는 영재를 일별하고난 처녀가 안타깝게 속삭였다.

《난 이 강선땅에서 나서자라면서 많은걸 보고 듣고 느껴왔어요. 로장이였던 외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오빠, 우리 외가에서 있었던 가슴뜨거운 이야기들을 옛말처럼 들으며 자란 저예요.

우리 큰아버진 전쟁때 입은 부상자리가 도져 신고하면서도 전기로에 산소취입법을 기어이 성공시켜놓고서야 눈을 감으셨대요.

천리마시대 사람들은 무엇이나 하자고 결심하면 못해낸 일이 없었다고 해요.

다른 나라의 초고전력전기로도 사람이 만든것이지 우주인이 와서 만들어준건 아니겠지요? 난 우리 로기술자아바이들을 믿고싶어요, 꼭 해낼거라고… 그러니 영재동무랑 달라붙어 조금만 더 힘을 낸다면 얼마든지 만들수 있을거예요.》

선희의 말 한마디한마디가 어찌나 절절했던지 영재는 가슴이 뭉클해났다.

《선희, 너무 흥분하지 말고 진정해서 내 말을 듣소.… 선희의 말대로 나는 이제라도 설계에 다시 나설수도 있소. 그러나 좀 생각해보오. 성에서 전기로 들여오는것이 락착되면 건설을 승인할것 같소? 그렇게 되면 아마 지배인동지도 어쩔수없이 물러서게 될거요.》

《?…》

이것은 구실이고 일종의 도피다. 선희에게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되였다. 지금 이 시각 그는 전기로건설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데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책임일군들이 어련히 결심하고 내밀것이다. 다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온 제강소사람들이 그렇게 바라는 제강소현대화를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데 신경을 더 썼다. 박영재가 날아가는 제무리에서 홀로 떨어진 외기러기처럼 되지 말고 강선사람들의 지향에 발을 맞춰나가길 간절히 바랐던것이다.

그런데 박영재는 시종일관 손님격이다. 선희는 이것이 안타까왔다.

《사랑에 무슨 조건부가 필요한건 아니지만 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설계에 다시 참가해주세요, 네?》

박영재는 불꺼진 담배를 재털이에 구겨넣었다.

《사랑에 기술문제를 끌어들이지 마오.》

《?…》

놀라운듯 영재를 쳐다보던 선희가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기술이기 전에 나의 희망이였어요. 우리 손으로 만든 현대적전기로에서 하루빨리 일하고싶은 저의 마음을 영재동문 그렇게도 몰라준단 말이예요? 사랑한다면서도 저의 간절한 소원을 그렇게도 쉽게 저버리다니… 그렇게 하는것이 무슨 진정한 사랑이겠나요!》

선희의 절절한 마음앞에 한순간 감심되였으나 자기 주장에 대한 확신이 너무도 컸던 영재였다.

《초고전력전기로건설은 별개의 문제요. 성에서 승인하지 않을걸 뻔히 아는 이상 더 시간을 랑비하고싶지 않소! 그러니 날 너무 괴롭히지 마오.》

출선구에서 쇠물이 쏟아져나오듯 선희는 참고참았던 울분을 터뜨렸다.

《영재동문 금속성사람이예요? 우리 제강소 기술자예요?

먼곳에서 지원나온 어머니도 계속 설계실에 나가고있는데 동무만이 중도에서… 그건 변절행위와 같은거예요!》

영재가 자리에서 벌컥 일어섰다. 온화하던 그의 얼굴이 무섭게 이그러졌다. 그 마지막말에 더는 참을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뭐, 변절행위? 동문 뭐가 돼서 아무 말이나 탕탕 하는거요? 보자보자하니까 점점…》

선희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아츠러운 소리를 낸다. 리성을 잃은 두사람은 칼날처럼 마주섰다. 화살같은 두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 누구도 눈길을 떨구지 않았다.

그들은 제나름으로 자신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던것이다.

선희의 얼굴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돌려세우기 위해 최후수단까지 다한 처녀의 모질고도 단호한 결심이 번뜩이였다. 부딪치는 전극의 화광처럼…

《이젠 모든게 명백해졌어요. 동문 믿음이 없이 설계에 달라붙었어요, 그러다나니 서슴지 않고 물러선것이고… 동문… 사랑도 그렇게 할 인간이예요. 난… 동무와 같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

선희는 문을 밀고 뛰쳐나갔다, 문도 제대로 닫지 못하고…

영재는 저도 모르게 문쪽으로 한걸음 내짚었다가 우뚝 멈춰섰다. 남자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던것이다.

방안으로 복도의 찬 공기가 밀려들어와 싸늘해지기 시작했지만 영재는 문을 닫을념도 못하고 서있었다.


X


승용차좌석에 몸을 기댄 김성남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오늘 로기술자들의 가정을 돌아보고 오는 길이다.

초고전력전기로설계와 기술준비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다보니 그들은 집에 들어갈 짬도 없이 몇달동안 현장에 붙어있다.

겨울준비를 어떻게 하고있는지 알아보고싶었던것이다.

불이 잘 드는지 방바닥도 짚어보았고 쌀독이며 창고문도 열어보았다. 식량도 석탄도 넉넉치 못했다. 더우기 유진섭의 집은 온돌수리한지 오래다보니 아래목만 따스하고 다른 곳은 랭돌같았다. 부엌아궁이 내면서 가마도 잘 끓지 않았다.

당장 부뚜막과 온돌을 수리해야겠다고 걱정하는 김성남에게 부인이 다급하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일이 바쁜 지배인이 이렇게 찾아준것만도 고맙수다. 우리 걱정은 말고 하루빨리 현대적전기로를 잘 건설해주시우다. 나라의 큰 가마가 펄펄 끓어야 가정의 작은 가마도 잘 끓을게 아닙니까!》

《!…》

김성남은 가슴이 뜨거워 더 말을 못했다. 가정에서도 이럴진대 로기술자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뿐이 아니다. 그가 찾아갔던 가정들에서도 모두 자기 집보다 전기로건설을 더 걱정한다. 그럴수록 김성남은 자책감으로 가슴이 아팠다. 지금까지 일만 일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생활을 잘 돌봐주지 못한것으로 하여 머리를 들수가 없었다.

석탄이나 식량은 후방부서에서 해결한다치고 온돌수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추위가 닥쳐왔는데 당장 할수도 없는 일이고. 부뚜막만이라도 수리하도록 대책을 세워야겠다.

이제 초고전력전기로건설을 끝내놓고는 주택수리도 해주고 현대적인 문화주택건설도 많이 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털썩 차가 들추는 바람에 김성남은 정신을 차리고 차창밖을 내다보았다. 승용차는 용해공들과 함께 계시는 어버이수령님동상앞 광장을 지나 제강소합숙을 가까이하고있다. 언듯 한 처녀의 모습이 눈에 안겨왔다.

선희였다. 왜서인지 얼굴이 창백하였고 걸음마저 비칠거리는것 같았다. 수건도 쓰지 않고 깊은 생각에 빠져있다.

《차를 세우오!》

승용차가 길옆에 멈춰서자 김성남은 성급히 문을 열고 내리면서 소리쳤다.

《선희!》

처녀가 걸음을 멈추고 부름소리가 나는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김성남은 놀랐다. 선희의 속눈섭은 촉촉히 젖어있었고 볼엔 말라버린 눈물자욱이 확연히 알리였던것이다.

《너 왜 그러니? 어디 아픈게 아니냐?》

선희는 황황히 눈길을 떨구며 고개를 가로흔든다.

합숙쪽을 흘끔 바라보고난 김성남은 짐작되는바가 있어 더 묻지 않았다. 그냥 보내면 안될것 같아 싫다고 도리머리질하는 선희를 차에 태우고 고모네 집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승용차가 경적을 울리며 와서 멎고 거기서 성남이와 선희가 내리는것이 보이자 소연은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어머니에 대한걸 알고 찾아온게 아닌가?… 형님의 간곡한 당부로 아직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있었는데…

《설송이 아버지가 어떻게?…》

《고모, 일이 바쁘다나니 자주 와보지 못했습니다. 지나가다가 선희가 보이기에 그 애하고 좀 이야기할게 있어서…》

《?…》

아까 집을 나갈 때 딸애의 기색이 좋지 않았었다는것이 상기되였지만 그건 후에 물어보면 되는거고. 그러니 형님때문에 온것은 아니구나 하면서도 어쩐지 성남에게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한숨을 내쉬였다.

선희를 데리고 웃방으로 올라간 김성남은 수심어린 그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며 물었다.

《솔직히 말해봐라. 혹시… 영재때문에 그러는게 아니냐?》

선희는 이슬이 반짝이는 속눈섭을 살풋이 내리깔았다.

영재와 결별을 선언하고 뛰쳐나온 선희였다. 하지만 영재는 그의 사랑이였다. 영재를 알게 되면서 인생의 아름다운 감정, 황홀한 꿈과 희망, 미래에 대한 갈망과 행복으로 충만된 사랑의 세계를 알게 되였다. 이제 와서 그 세계와 리별한다는것은 그에게 있어서 너무도 가혹한것이다. 거창한 전기로를 다루는 담이 큰 선희였지만 사랑에서는 마음이 엷은 처녀였던것이다.

부드러운 오빠의 물음에 선희는 그만에야 참고참았던 설분을 터뜨리고야말았다. 책상에 엎드려 어깨를 떠는 선희를 바라보는 성남의 마음은 좋지 않았다. 말없이 그가 진정되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던 선희가 영재와 만났던 사연을 고스란히 털어놓았다.

김성남은 애꿎은 담배만 태울뿐 동생을 위로해줄 말을 찾을수 없었다.

초고전력전기로건설문제를 놓고 두 청춘남녀의 사랑이 결별에까지 이르게 되다니?

어떻게 되여 이런 일이 빚어졌단 말인가.

등교를 하겠다는 박영재의 제의를 좀 심중하게 생각해보고 승인했어야 하지 않았는가?

마치도 그것이 자기의 불찰로 벌어진것처럼 생각되여 더더욱 괴롭기만 하다.

선희가 너무 과격하게 나왔단 말인가?

들어보니 선희로서도 정당하다. 그렇다면?

이들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겠는가.

하지만 그는 이렇게밖에 말할수 없었다.

《선희야, 너무 속썩이지 말아. 통신등교 갔다와서는 영재도 설계에 다시 달라붙을게다.》

선희가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오빠! 내가 눈물을 흘린건 그와 결별한것이 가슴아파서가 아니였어요… 그런 사람을 지금까지 사랑해왔다는것이 분해서…》

《?…》

제강소로 달리는 차안에서도 김성남은 깊은 상념에 잠겨있었다. 초고전력전기로를 하자고 결심하던 나날에 있었던 가지가지 일들이 언듯언듯 떠올랐다.

아버지의 전우들이였던 리규택, 유진섭아바이들과의 불신과 오해, 아버지처럼 친근하던 박상근부상과의 마찰, 선희와 영재와의 결별… 자연히 생각이 깊어진다.

김성남은 자신의 어깨가 더 무거워짐을 의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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