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회


제3장. 완강성


3


설계실은 아늑하고 조용했다.

그속에서 맹렬한 두뇌전이 벌어지고있다. 수면은 잔잔해도 그 깊은 곳에서 세찬 격류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바다로 내닫는 강물처럼…

지지하는 사람, 반신반의하는 사람, 다시 벌리고있는 외교작전에 귀기울이는 사람… 온 제강소가 설계실을 지켜보고있다.

과연 넉달동안에 해낼수 있겠는지…

리규택은 흘러내리는 돋보기안경을 추슬러올리며 설계에 여념이 없다.

수정안경이여서 그런지 눈의 피로도 가셔지고 설계능률도 부쩍 올라갔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수가 없다. 아직 설계가 공정계획대로 진척되나가지 못하고있는것이다.

연필긋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사락사락…

리규택은 설계를 하며 그 소리를 음미해보았다. 그림을 잘못 그리고 연주를 잘못하면 관객을 잃는것으로 끝나지만 설계를 잘못하면 나라에 큰 손실을 주게 된다. 설계는 고도의 정신력으로 이루어지는 책임적이고 운명을 건 시험장이라 할수 있다. 그렇다고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직각자와 연필을 쥔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평행조절기가 규모있게 아래우로 오르내린다. 긴장한 마음의 반영인듯 시계추같은 중량조절기가 쉼없이 움직인다. 그는 이따금 피아노조절기를 밟듯 발디디개를 밟아 설계도판을 아래우로 조절한다.

피아노연주가가 음의 색갈을 가늠하며 건반을 두드리듯 설계가는 심혈을 기울여 짧은 선과 곡선을 그리고 점을 찍어나간다. 그 선과 원, 점선 하나하나에 막대한 나라의 재부가 좌우되는 량심적이고 책임적인것이다.

사락사락… 길게도 짧게도 들려오는 그 소리는 설계가만이 음미할수 있다.

설계가의 귀에는 그 소리가 황홀한 선률보다 더 조화롭고 우아한 음향으로 들린다.

설계는 살아움직이며 물질적부를 창조하는 벅찬 생활을 낳는다.

하기에 설계원들은 사락사락 연필긋는 소리에서 새것의 탄생을 예고하는 아름다운 창조의 선률을, 초고전력전기로의 우렁찬 동음을 듣는것이 아니겠는가…

어디선가 불협화음이 들려왔다.

《규택아바이, 규택아바이!》 조용하나 다급한 부름소리에 그는 머리를 돌렸다. 설계실장이다.

《아바이, 빨리 군병원에 가야겠습니다. 아들이…》

《?…》

며칠전 대보수에서 일하는 그의 아들이 쇠물남비를 수리하던중 떨어지는 내화벽돌에 머리를 다치고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래도 리규택은 설계실을 뜨지 못했던것이다.

《우리 철민이가 어떻다구요?》

《뇌타박이 심하여 대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립회로 아버지를 찾는다고…》

순간 리규택은 눈앞이 캄캄해지며 쥐고있던 연필을 떨구었다. 인민군대에서 제대된지 몇해 안되는 막내다. 장난질을 하다가 넘어져 무릎에 피가 나와도 둘쳐업고 병원으로 줄달음치던 외아들이다.

그 아들이 지금 정신을 잃고 수술대우에 누워있다니…

리규택은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병원으로 가야지!》

다음순간 그는 도판을 다시 쳐다보았다. 선들과 원, 점선들이 아직 이어지지 않은 미완성설계도면이 눈앞에 안겨왔다.

시간과 분초를 쪼개가며 그리고 지우고 또다시 그리는 설계가 아닌가…

총설계가 선행되여야 부분설계에 들어가고 설계를 제기한내에 끝내야 건설을 시작한다.

리규택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아니 난 갈수 없소.》

《무슨 소립니까? 아들의 생명이 위험한데…》

리규택이 나직이 대답했다.

《설계에 초고전력전기로의 운명이 달려있소!》라고 한 리규택이 망연히 서있는 실장에게 부탁했다. 《우리 집에… 철민이 에미에게 좀 알려주시우.》

리규택은 다시 연필을 틀어쥐고 도판앞으로 다가갔다.

한선, 한선 이어지며 그려지는 전기로의 모습이 수술대우에 누워있는 아들의 얼굴을 가리웠다.


X


《뭐요? 수술립회에… 알겠소.》

설계실장의 전화를 받은 김성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다급히 병원으로 갔다.

수술준비를 끝내고 시계를 쳐다보며 초조히 기다리던 의사들은 부모 대신 나타난 지배인을 보고 놀라는 기색이더니 아무말없이 서둘러 수술을 시작했다.

김성남은 위생복을 걸친채로 수술실 한쪽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았다.

코를 찌르는 소독수냄새, 천정에 매달린 둥그런 조명등, 그 밑에 철민이가 흰 백포에 가리운채로 머리만 내놓고 누워있다. 철민이, 아버지가 오지 않았다고 원망하지 말아라… 너의 아버지는 지금 큰일을 하고있다. 아버지와 전체 설계원들이 너의 수술이 잘되길 바라고있다. 맥을 놓아서는 안된다.

네가 수술을 이겨내는것이 아버지에게, 그들에게 힘을 주는것으로 된다…

절그럭절그럭 수술도구 부딪치는 소리, 나직이 주고받는 의사들의 긴장한 목소리…

한초한초가 긴장하게 흐른다.

집도자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간호원이 수건으로 훔쳐준다.

저 의사들의 손에 철민이의 생명이 달려있다. 생명이…

어째선지 이 시각에도 긴장한 전투를 벌리고있을 설계원들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구조계산, 열공학과 재료공학, 그밖의 기술공학적계산과제만도 얼마나 방대한것인가…

설계원들의 손을 거쳐 그들의 피타는 노력으로 한장한장 완성해야 할 수천매에 달하는 전기로설계!

어려운 조건에서 적은 인원으로 3년이 아니라 넉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성하여야 하는 설계이다.

그래야 2월부터 건설을 시작하게 되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9. 9절에 조업을 하게 되는것이다. 그런데…

설계가 시작되여 한달이 되여오건만 공정계획의 10프로계선에도 이르지 못했다.

이런 속도로 나가다가는…

마치도 초고전력전기로의 설계가 수술대우에 누워있는 철민이처럼 생각된다.

그의 생명이 의사들의 손에 달려있듯이 초고전력전기로의 운명은 설계원들의 손에 달려있다. 그 설계원들이 내놓을 완성된 설계에! 그렇다면 …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지배인동지!》

정숙을 깨뜨리며 울려오는 소리에 김성남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무슨 사고라도 생겼습니까?》

집도의사가 마스크를 벗었다.

《수술이 예상외로 잘되였습니다.》

《!…》

안도의 숨을 내쉬고난 김성남은 아직 마취에서 깨여나지 못하고있는 철민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수술을 이겨냈구나, 이겨냈어.》

끼고있던 고무장갑을 벗으며 의사가 긴숨을 내쉬였다.

《시간을 더 끌었더라면 위험할번 했습니다.》

《시간을?》

리규택의 모습이 우렷이 떠오른다. 무조건 넉달동안에 끝내야만 하는 설계이기에 얼마나 시간이 촉박하였으면 생사를 가름하는 외아들의 수술립회에도 오지 못했겠는가…

절대적으로 모자라는것이 시간이다. 시간!…

수술이 끝난 후 병원문을 나선 김성남은 기쁜 마음으로 리규택을 찾아갔다. 아들때문에 얼마나 걱정하고있겠는가…

《규택아바이, 철민이의 수술이 잘되였습니다!》

《지배인, 정말 고맙긴 하네만… 초고전력전기로설계가 되느냐마느냐하는 때에 지배인이 언제 그런데 다 다닐새가 있나. 우리 집사람도 있는데…》

《?!…》

데설궂은 리규택의 성미를 모르는바는 아니지만 김성남은 한순간 아연해서 서있었다. 다음순간 김성남은 그의 심정을 리해하였다. 그의 말이 옳은것 같다. 리규택이 비록 그렇게 나오긴 했으나 아들의 생명보다 초고전력전기로의 운명에 더 마음을 쓰는 그 고결한 의지는 얼마나 숭고한것인가. 가슴이 뭉클하고 머리가 숙어진다.

김성남은 설계에 지장을 줄것 같아 조용히 자리를 떴다.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