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 회
제3장. 완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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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강소에 도착한 박상근은 서승민을 먼저 만날가 하다가 다시 생각하고 곧장 지배인실로 갔다.
그와 조용히 이야기하고싶었다. 김성남은 방에 없었다.
행정부원이 다급히 마주나오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지배인동진 설계실에 갔습니다. 전화하랍니까?》
《아니, 그만두오. 참, 요즘 기업소분위기가 어떻소?》
《예, 모두 초고전기로를 건설하자고 벅적거리는게 이제야 일하는것 같습니다.》
《그렇소? 좋은 일이구만!》
박상근은 설계정형도 알아볼겸 행정청사 3층에 있는 설계실로 올라갔다.
설계가들과 로부분설계를 토의하던 김성남은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떻게 련락도 없이 오셨습니까?》
박상근은 그의 인사에 건승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리규택에게 말을 걸었다.
《오래간만이요. 어떻소? 초고전기로설계가 잘돼가오?》
《예, 설계를 빨리 끝내자고 모두 불이 붙었습니다. 성에서도 잘 도와주십시오.》
박상근이 손을 내저었다.
《성에 무슨 힘이 있소.… 나라사정도 어려운데.…》
리규택의 말이 가관이다.
《하긴 우에서 도와주길 바라고 시작한것은 아니지요. 어떻게 해서나 우리 힘으로 해내겠수다.》
《?…》
원래 나서길 잘하는 그의 성미를 좋아하지 않는 박상근은 경고하듯 말했다.
《하지만 초고전기로는 규택동무가 가열로증발랭각장치를 도입할 때와는 다를게요. 알아보니 발전된 나라에서도 설계만 3년이 걸린다고 하더구만.》
역시 배심좋은 리규택은 말이 모자라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3년을 하든 몇년을 하든 상관있습니까. 저들은 그렇게 하라지요. 우리가 넉달동안에 해내면 그만이 아닙니까.》
리규택의 그 말이 어쩐지 자기를 빗대고 하는 소리같아 박상근은 쓴웃음을 지으며 설계실을 둘러보았다. 설계실 중간쯤 되는 설계도판앞에
《설계에 방해가 되겠는데 방에 내려가기요.》
설계실을 나서는 박상근의 머리엔 왜서인지 오래전에 있었던 리규택의 권투일화가 떠올랐다.
…박상근이 제강소기사장으로 사업할 때인 어느해 5. 1절에 있은 일이였다. 기업소에서는 직장별 대항체육경기를 조직하였다.
그때 설계실장으로 사업하고있던 리규택이 행정팀의 경기조직을 맡아서 주관했다. 설계실이 행정에 속해있었기때문이다. 행정에서는 축구를 할만 한 사람들이 없어 롱구나 배구선수들만 선발하여 훈련도 하고 예선경기에도 나갔다.
5. 1절날에 하게 되는 결승경기까지는 못 올라갔으나 겨우 등수권내에는 들게 되였다. 리규택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고 한종목이라도 1등을 하려고 애썼다. 행정의 명예이자 조직자인 그의 명예였기때문이였다.
개인경기로 권투종목이 있었는데 행정에서는 나갈 사람이 없었다. 권투를 해본 사람이 없었던것이다. 그때 리규택이 권투경기에 나섰다.
중학시절에 전국청소년권투경기에 나가 1등을 했다는것이다.
좀 의심스러운데가 있었지만 본인이 권투를 했다고 우기는 바람에 선수로 내보내기로 하였다. 이튿날부터 그는 어디서 구했는지 검은 권투장갑을 어깨에 메고 사무실 뒤마당에 나가기도 하고 회의실무대에도 올라가 련습하였는데 청년들이 까맣게 모여들었었다. 체육인답게 키가 늘씬한 그의 권투동작은 나무랄데가 없었다. 설계실의 리규택이 전국권투경기에서 1등을 했었다고 온 제강소에 소문이 꽉 퍼졌었다.
드디여 권투경기하는 날이 왔다. 그날은 5. 1절이여서 경기장은 수천명의 응원자, 관람자들로 흥성거렸다. 한쪽에서는 롱구, 배구결승경기가 진행되였고 다른쪽 옆에 설치한 무대같은데서 권투경기가 시작되였다.
경기는 승자전으로 이기는 사람이 결승까지 올라가게 되여있었다.
리규택은 75키로그람중량급에 출전하였다. 붉은 런닝그를 입은 늘씬하고 단단한 체격에 권투장갑을 낀 그는 유유히 권투장에 늘인 링줄을 벌리며 권투장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점잖게 권투동작을 해보이며 목이며 팔을 움직여 예비동작을 하였는데 참 가관이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그에게로 집중되였었다.
그런데 이상한 정황이 생겼다. 경기주심이 상대편선수를 나오라고 소리쳤으나 웬일인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리규택은 링줄을 잡고 허리운동도 하고 권투장갑을 낀 주먹을 힘차게 앞으로 내찌르기도 하면서 세련된 기술동작을 해보이고있었다.
상대선수가 나타나기만 하면 단매에 거꾸러뜨리기라도 할 기상이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상대편선수는 나오지 않았다. 리규택의 그 능란하고
아마도 전국청소년권투경기에서 1등을 하였다는 그의 권투경력에 위압된 모양이였다. 그때 중량급선수는 몇명 되지 않았는데 첫 선수가 기권하는 바람에 련쇄반응을 일으킨듯 다 기권하였다.
그래서 경기도 해보지 못하고 단연 1등을 하였었다. 그통에 리규택의 인기가 쑥 올라갔다.
문제는 그후에 있었다. 온 기업소의 젊은 축들이 설계실에 뻔질나게 찾아왔다. 권투를 배우겠다는것이였다. 처음엔 시간이 없다고 딱 잡아떼였다. 그러나 청년들의 성화에 견딜수가 없었다. 지어 집에까지 술병을 가지고 찾아왔으니…
그러자 하는수없이 솔직히 털어놓았다. 구기운동은 하였으나 권투는 전혀 할줄 모른다고…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작 상대편선수가 나오면 어쩔번 했는가고 묻자 그는 배포유하게 대답했다.
《그런걸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정작 맞선다 해도 다 사람이 하는노릇인데 그가 한대 줴갈기면 나도 한대 줴갈기면 되는거지.》
…
박상근은 그때 일이 너무도 생생히 떠올라 층계를 내려가던 걸음을 멈추기까지 했다. 박상근에게 리규택은 배짱이 있는 사나이로서뿐아니라 허풍이 좀 있는 다소 실속이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였었다.
좀전에 설계실에서 오고간 리규택과의 대화는 박상근으로 하여금 더더욱 그 인식을 공고히 해주었다.
X
지배인방에 들어간 박상근은 김성남과 마주앉았다.
《이보라구 성남동무, 그래 초고전력전기로건설을 기어이 해보겠다는건가?》
사업수첩을 펼쳐놓은 김성남은 머리를 쳐들었다.
《방금전에 리규택동무를 만나보셨지만 천리마시대의 로기술자들이 기치를 들었고 그들의 열의 또한 대단합니다. 주저하던 젊은 기술자들도 따라나섰습니다.… 어떻게 하나 우리 힘으로 해내겠습니다.》
담배를 꺼내 붙여문 박상근은 후- 하고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푸릿한 담배연기가 얼기설기 엉켜돈다. 풀기 힘든 명주실처럼…
《자네, 리규택의 권투일화를 알고있나?》
때아니게 끄집어낸 그 물음에 김성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음… 그 일화를 통해서도 알수 있지만 리규택은 나서길 좋아하고 명예심이 강하오. 그런 사람이 총설계를 맡았다니 그걸 어떻게 믿겠소?…》
《…》
김성남은 달리 생각했다. 리규택에게는 다른 설계가들에겐 없거나 약한 담력과 배짱이 있지 않는가. 거기에 많은 창안과 발명을 하면서 얻은 풍부한 경험과 기술도 있다.
그의 속생각을 짐작했는지 박상근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물론 리규택이 여러가지 창안과 기술혁신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난 세기의 설비개조에 불과한것이요.
지금이 어떤 시대요? 지난 세기 50년대 기술과 경제발전법칙을 가지고는 도저히 설명할수도 없는 지식경제시대가 아니요. 전통적인 공업부문들을 산업의 기둥으로 하던 지난 세기와는 달리 지식경제시대는 고도로 발전된 기술과 지능을 산업의 기초로 하고있소. 바로 초고전력전기로는 이 지식경제시대에 태여난 최첨단기술이란 말이요, 첨단기술!…
하물며 콤퓨터도 제대로 다룰줄 모르는 지난 세기 공장대학졸업생들이 어떻게 현대적전기로설계를 한다고 그러나… 설사 한다고 해도 그 믿음성을 무엇으로 담보한단 말인가.… 하겠다는 정신 하나만 가지고는 안되네, 안돼.…》
부상의 말을 인내성있게 듣고있던 김성남이 더 참지 못하고 반박하였다.
《그건 로기술자들에 대한 모욕입니다.…》
박상근은 불꺼진 담배를 재털이에 넣었다.
《내 말이 지나쳤다면 용서하게. 결코 그들을 무시해서 한 말은 아니니까. …》
기술실무적인 론쟁으로는 그를 납득시킬수 없다는것을 느낀 박상근은 말머리를 돌렸다.
《성남이, 우리 오늘 속을 툭 터놓고 한번 말해보자구.》
《?!…》
던져진 담배꽁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상근은 의미있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뗐다.
《우리가 서로 알게 된것은 자네가 여섯살나던 때부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성남이가 태여나기 전부터 자네의
할머니에게서 다 들어 알겠지만 그때 1호전기로 용해공이였던 나는 자네 아버지의 희생적인 투쟁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중의 하나였네. 자랑은 아니지만 나도 그렇고 리규택, 유진섭이도 적극 도와나섰댔지. 자네 어머니는 더 말할것도 없고… 부친이 사망된 후 자넨 유복자로 태여났네. 그후 어머니는 재가하고…》
부상의 입에서 뜻하지 않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김성남은 긴장해졌다.
그때 일을 생각하는지 눈을 쪼프려뜨고 멀리 창밖을 내다보던 박상근은 김성남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자네 잊지 않았겠지? 굴뚝에 올라갔던 일을…》
《그걸 제가 어떻게…》
《음… 그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자네 어머니가 나를 찾아왔었지.》
《우리 어머니가 말입니까?》 김성남의 눈이 둥그래졌다.
박상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자네가 괴로워할것 같아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네만 성남이를 만나보고 오는 길이라고 하면서 고맙다고, 친조카처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였지.…
눈물이 글썽해서 말하던 자네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구만. …난 지금까지 자네 어머니와의 약속을 진심으로 지켜왔네.…》
유치원에 찾아왔다가 하루밤 자고간 그 녀인이 어머니라는것을 썩 후날에야 알게 된 성남이였지만
그들은 묵묵히 자기 생각에 잠겨있었다.
박상근이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자네 나를 따라 대동강에 낚시질 나가던 일이 생각나나?…》
김성남은 빙긋이 웃었다.
《생각나지 않구요. 한번은 상근동지가 물에 빠질번 한 나를…》
《그래, 그래. 그날 낚시코에 물렸던 큰고기가 빠져달아나자 그것을 잡겠다고 덤벙덤벙 물에 뛰여들었다가 혼났지. 아무리 끌어내려 해도 어디 말을 들어야지. 그때 고집부리던것을 생각하면… 놓쳐버린 고기대신 끝내 한마리를 더 잡아가지고야 집으로 돌아왔지. 허허… 그 시절이 좋았어.…》
아득한 추억에 잠겨들며 그들은 다정한 형제처럼 오손도손 시간가는줄 몰랐다.
이윽고 박상근은 미더운 눈길로 김성남을 바라보고나서 말했다.
《지금까지 난 성남일 상하관계라기보다는 친동기처럼 생각하며 대해왔네. 지난날 자네 부모님과의 관계를 봐서도 그렇고 오늘날 자네와 나, 우리
나는 늘 성남의 사업성과이자 나의 성과라고 생각해왔네… 성남이, 말좀 해보게. 내가 언제한번 자네에게 해되는 지시나 일을 강요해본적이 있었던가?,‥》
《…》
《사실 난 자네가 설계를 시작했다고 했을 때 ㅌ설계연구소에서 도와주라고 하였었네. 그런데 거기서도 설계를 할만 한 기술력량이 없다고 하더구만.… 그래서 이러저러한 주객관적조건을 고려한 끝에 하루빨리 현대적전기로를 들여다가 강철생산을 꽝꽝 하여 강성국가건설에 이바지하자고 생각했을뿐이요. 이렇게 되면 성남이도 좋고 나도 좋은것이지. 안그렇나?…
털어놓고 말해서 지난 기간 내가 주관하였던 몇년간의 외교작전이 실패로 끝나고보니 부상으로서의 내 립장이 난처해진것만은 사실이요. 그렇다고 하여 이번에 하려는 외교전이 손상된 내 체면이나 세우려는것은 아니요. 물론 그런 생각이 전혀 없은것은 아니지만…
나도 이번 일이나 마무리하고는 조용히 물러서려고 마음먹고있소.… 이젠 내 나이도 70에 가깝지 않나…》
《?!…》
세월과 더불어 주름잡힌 얼굴이며 희슥한 귀밑머리를 새삼스레 바라보는 김성남의 가슴이 찌르르해났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박상근이 묻는듯 한 시선을 김성남에게 던졌다.
《그런데 성남인 내 마음을 도저히 리해하려 하지 않거던. 내게 무슨 의견이라도 있는게 아닌가?…》
김성남은 성급히 손을 내저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를 진심으로 도와주고 이끌어준 박상근동지를 저는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도 리해하고…》
박상근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음, 그렇겠지. 솔직히 자네 그 결심은 장한거야. 그러나 그 성공을 어떻게 기대할수 있겠나. 난 성남이가 잘못되는걸 옆에서 보고만 있을수 없어 내 주장을 내미는거야. 이걸 느끼기나 하는지,… 참, 성남이, 만약 실패하는 경우 엄중한 그 후과에 대해 생각해보기나 했나?(묵묵히 앉아있는 성남을 얼핏 쳐다보며) 그렇게 되면 이제 더는 자네를 도와줄 길이 나에겐 없네…》
김성남은 그가 정말 진심의 말을 하였다는것을 직감했다. 그만큼 자기에 대한 그의 믿음과 관심이 고마왔다.
그러나 설계는 이미 시작되였다. 뚝을 터치며 밀려내려가는 강물처럼…
만약 실패하게 된다면 어떤 운명이 기다린다는것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있던 김성남은 나직하나 힘있게 말했다.
《전… 이미 결심했습니다!》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에 대한 믿음이 여지없이 허물어짐을 의식한 박상근의 얼굴은 저도 모르게 이그러졌다.
고집스러운 성남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있는 그는 구태여 더 설복하고싶지도 않았다.
박상근은 손바닥으로 책상을 꾹-누르며 일어섰다. 그리고 단호히 입을 열었다.
《좋소, 마음대로 하오! 그렇게 의리도 모르는 사람인줄은 정말 몰랐구만.》
《?…》
박상근이 언제 나갔는지… 어떻게 바래주었던지… 김성남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였다.
책상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일어서던 박상근의 실망어린 얼굴이 눈앞에서 사라질줄 모른다.
《의리도 모르는 동무와 더 마주서고싶지 않소!》 라고 하던 그의 목소리만이 공명되여 가슴속을 꽉 채울뿐이다.
의리도 모르는
내가 그런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마음만 허전해진다.
박상근은 상급이기 전에 나의
그렇다면 그의 지시를 받아들이는것으로 의리를 지켜야 한단 말인가? 그럼 외국에서?… 더는 그 자존심 꺾이우는 일을 하고싶지 않다. 설사 이번 작전이 성공하여 빠른 시일내에 전기로가 들어온다 해도 우리는 초고전력전기로를 기어이 건설할것이다. 그 초고전력전기로에는 우리의 넋, 강선의 넋이 깃들어있어야 하기에…
이 시각 생명의
X
그날 저녁 박상근은 외래자합숙에서 전화로 아들을 불렀다. 밤이 이슥해서야
《아버지! 건강하셨습니까?》
《음…》
박상근은 머리를 끄덕이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몹시 축간것 같았다. 어쩐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합숙생활이 힘들지?》
《지배인아저씨도 그렇고 설금이 어머니랑 잘 돌봐주고있습니다. …》
《…》
박상근은 낮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 눈살을 찌프렸다.
아버지의 얼굴표정을 일별하고난
《어머닌 여전하신가요?》
《잘 있다. 참, 어머니가 뭘 좀 꾸려주더구나. 날씨가 차진다고 긴내의를 보낸다던지… 네가 좋아하는 음식과 당과류를 두루 넣었다고 하더라.》
박상근이 방구석에 있던 묵직한 려행가방을 그에게 내밀었다.
《박사원등교로 집에 갈것 같은데…》
《그래두 어디 그렇니? 네 엄마 성화에 안 가져오군 못 견딘다.》
《어머니두 참…》
박영재는 아버지의 고심어린 얼굴을 띄여보며 가방을 열고 음식을 하나하나 차대우에 꺼내놓았다. 아버지에게 드리려고 마침 준비해온 술을 유리고뿌에 찰랑찰랑 부었다.
《아버지, 한잔 드십시오!》
박상근의 가슴은 아들에 대한 부성애로 짜릿해났다. 너무도 일이 바빠 제강소에 왔다가도 언제한번 마주앉아 이야기해볼 기회도 없었다. 더우기 단둘이 있으면서 술잔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다.
갑자기 몰려드는 피로감을 느끼며 박상근은 아들이 부어준 술을 쭉 들이켰다.
《너도 좀 마시렴…》
《제가 술을 못한다는걸 아시면서도…》
《담배는 안 피워도 술이야 적당히 배워야지…》
책밖에 모르는 아들이다.
《너, 선희하고는 어떻게 지내냐?》
박상근은 아들을 내려보낼 때 계획이 있었다. 제강소현대화에 참가하여 최신야금기술에 대한 실무를 겸비하게 되면 앞으로 금속공업분야에서 권위있는 기술일군으로 두각을 나타낼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목표를 실현하기 전에는 결혼도 하지 않겠다는 아들의 결심도 적극 지지해주었었다.
그런데 현실은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제강소현대화가 진통을 겪으며 끌게 되다나니 여러해가 흘렀고
김성남과의 관계를 생각해서도 그렇고 어쩔수없이 반승낙하고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처녀가 입당하기 전에는 가정을 이루지 않겠다고 한다는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끌고있다. 아들이 나이를 먹고있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일이다.
오늘 김성남과의 생각지도 못했던 일까지 있고보니 어쩐지 심기가 좋지 않았다.
《?…》
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기분이 썩 좋지 못하다는것을 직감은 하였지만 선희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박영재였다.
지배인동지와 무슨 일이 있었는가? 분명 초고전력전기로건설때문이겠는데…
아무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는 아들을 지켜보던 박상근은 자기가 슬기운에 너무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인차 말머리를 돌렸다.
《그래, 이번 설계에서 넌 무얼 맡았냐?…》
《전극자동승강장치를 맡았습니다.》
《중요한거로구나…》
《전기로를 들여온다는 소리가 있는것 같던데 그 문제는…》
박상근은 말꼬리를 자르며 엄하게 말했다.
《그런건 알려고 하지 말아…》
성에서 벌어지는 사업상문제에 대해선 외아들인 자기에게도 일체 말하지 않는 아버지임을 잘 알고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