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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회


제2장. 돌아오다


7


저녁식사를 하고 자기 방에 올라간 김성남은 습관처럼 책을 펼쳐들었으나 글줄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낮에 차를 태워주었던 녀인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마음을 진정시킬수 없었던것이다.

오늘 그는 평양안경상점에 갔었다.

…며칠전 설계실에 올라갔던 그는 놀라운 사실을 목격하였다. 도판앞에서 설계를 하던 리규택이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비더니 앞에 놓인 몇개의 도수안경을 번갈아 눈에 끼여보며 안절부절 못하는것이였다.

김성남이 왜 그러는가 물었으나 리규택은 아무 대꾸도 없이 벗었던 안경을 다시 끼며 설계도면에 눈길을 박는것이다.

대동강가에서 만났을 때 못마땅한 눈길로 쳐다보며 곁을 주지 않던 리규택이 생각나 김성남은 더 묻지 않고 설계실장을 만났다.

《얼마전부터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서 +2도안경을 +2.5도로 바꾸었는데 또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실장의 말에 김성남이 얼굴을 찌프렸다.

《그런걸 왜 말하지 않았소?》

《아마 로시가 온 모양이라고 생각되여…》

《뭐요?》

설계실장은 듣기 좋게 로시가 왔다고 말했으나 김성남은 놀랐다. 설계는 눈이다. 설계는 이제 시작인데 총설계를 맡은 그의 눈이 보이지 않다니.…

알아보니 리규택뿐이 아니였다. 나이든 설계원들이 거의다 시력이 떨어져 안경을 바꾸었다는것이다. 이러다간 설계원들의 눈을 다 망칠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뜩 얼마전 평양에 있는 처남이 수정안경이라고 하면서 안해에게 가져다주던것이 생각났다. 급히 공장대학에 갔다.

《여보, 당신이 낀 그 수정안경이 어떻소?》

《이게 웬일이세요. 당신이 나의 안경에 관심을 가지다니.… 하나 사줄려고 그러세요?》

《그럴수도 있지.》 김성남은 눈을 끔뻑해보였다.

《아무리 책을 많이 보고 글을 써도 눈이 피곤하지 않고 시원해요!》

김성남이 안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좋구만. 됐소, 오빠가 그걸 어디서 구했다고 했소?》

《아이, 이 손을 놓고 말하세요. 사람들이 보는데.…》

《보면 뭐라오. 그래서 당신손을 잡아보는거지, 허허.》

그래도 영실인 손을 잡아빼며 말했다.

《평양안경상점이라고 했어요. 당신 정말 안경을 사려고 그래요?》

《그렇소. 몇십개를 사야겠소.》

그제야 영실은 남편의 속마음을 짐작했으나 모르는척 했다.

《아유, 뭘 그렇게까지. 난 하나면 되는데.…》

김성남이 허허 웃으며 전후사연을 털어놓았다.

《그러면 그렇겠지요. 별로 이상하다 했더니, 호호.》

영실은 로기술자들을 위한 남편의 마음을 적극 지지해주었다. 설계원들의 눈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깝지 않다면서.…

김성남은 경리과 일군들에게 맡길가 하다가 자기가 직접 평양안경상점으로 찾아갔다. 그의 말을 듣고난 안경상점 지배인녀인은 몹시 감동해하였다. 우린 비록 안경을 판매하는 상점이긴 하지만 어찌 그런분들에게 값을 받겠는가고 하면서 여러 종류의 고급수정안경을 무상으로 보장해주었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였다.

기쁜 마음으로 안경을 가지고 돌아오던 그는 려행가방을 메고 걸어가는 한 녀인이 눈에 띄우자 차를 세우고 태워주었던것이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였지만 웬일인지 그 녀인을 보는 순간 어린시절에 얼핏 만난적이 있는 어머니모습이 어렴풋이 눈앞에 떠올라 사라질줄 몰랐다.

가열로의 증발랭각장치를 완성시키던 나날 리규택이 어머니의 소식을 알고있는가고 물은 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허지만 아직까지도 어머니를 찾아보지 못하고있는 김성남이다. 결혼하여 아이들을 키워오면서, 자식들이 이따금 우린 할머니가 없나요- 하고 물을 때마다 한달음에 달려가 만나고싶은 어머니였건만 왜서인지 걸음을 내짚을수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를 따라 강선에 내려왔다는 어머니! 밤을 새워가며 현장에서 아버지의 새 기술혁신을 도와주어 성공시킨 어머니였다.

결혼하여 얼마 안있어 아버지를 잃은 그때 어머니의 가슴은 얼마나 아프셨겠는가.… 어린 나를 떼여두고 멀리로 떠났을 어머니의 마음은…

설겆이를 끝내고 올라온 영실은 의아한 눈길을 남편에게 주며 물었다.

《설송이 아버지, 무슨 생각을 하고있어요?》

《응, 그저 좀…》 김성남은 낮에 있었던 일을 안해에게 말하고나서 덧붙였다.

《아들집에 간다는 그 어머니를 보니 우리 어머님생각이 더욱 나는구만. 내 아직 당신에게 다 말하지 못했는데 난 어머니앞에 죄를 지은 불효자식이요.》

《?…》

김성남은 수십년세월 가슴속에 깊숙이 묻어두었던 어린시절에 있은 일을 털어놓았다.

굴뚝우에 올라갔던 사건이 있은 후 어느날이였다. 누가 찾아왔다면서 유치원교양원이 그의 손목을 잡고 마당에 나갔다. 웬 젊은 녀인이 기다리고있다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과자며 사탕봉지를 꺼내 그의 손에 쥐여주려고 한다. 성남은 손을 뒤로 가져가며 물러섰다.

《아지민 누구나요?》

그 녀인은 어째선지 눈물이 그렁해서 성남을 바라보았다.

《난… 네가 굴뚝에 올라갔을 때 밑에서 큰 보자기를 쥐고 서있던 엄마란다.》

성남은 그때 일이 생각나 싱긋이 웃었다.

《너 굴뚝꼭대기엔 왜 올라갔댔니?》

《천리마를 탄것처럼 높은 곳에 올라가 제강소를 내려다보고싶었지요 뭐. 우리 할머닌 늘 천리마전설을 이야기해주었어요. 그래서…》

한순간 놀라는 기색이던 그 녀인은 성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었다.

《참 용쿠나. 그러나 이제부턴 그런 높은데는 올라가지 말아.》 하면서 그를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춰주었다. 녀인은 그날 밤 성남이네 집에서 하루밤을 묵었다. 이튿날 성남이를 꼭 껴안아주고나서 떠나갔다. 이상한 녀인이였다. 그가 누구인가고 물으니 먼 친척벌되는 아지미라고 했다. 유복자로 태여난 김성남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아버지, 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아이들을 휘동해가지고 못된 장난을 하다가 걸리거나 애들을 쥐여박아 울려놓기라도 하면 의례히 《애비, 에미없이 자란 녀석》, 《할머니손에서 제멋대로 자란 덜된 녀석》이라는 욕을 먹군 했다. 어린 가슴에도 그 말이 내려가지 않았다.

할머니에게 물어보면 그건 죄다 거짓말이다, 내가 네 엄마다라고 했었다.

그것도 한두번이였다. 성남은 남달리 영특했다. 첫돌때 자기를 안고 찍은 녀인의 사진이 유치원에 찾아왔던 녀인과 비슷하다는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부모님들의 결혼사진도…

그런것을 내들며 꼬치꼬치 따지고드는 성남이를 보고 할머니는 더는 속일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해주면 애가 우울해질가봐 거짓말을 했다. 그전에 왔던 녀인이 어머니가 옳다는것, 아버지, 어머니는 먼데 가있는데 네가 공부를 잘하고 말 잘 듣는 착한 애가 되면 다시 온다고 했다. 성남은 그 말을 믿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그리울 때가 많았다.

학부형회의를 하거나 들놀이가는 날, 명절이나 쉬는 날 동네애들이 아버지,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나들이를 갈 때에도, 겨울날 동네애들이 아버지가 만들어준 썰매를 탈 때에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성남이 아버지, 어머니와의 상봉은 학용품과 생활필수품, 간식이 들어있는 소포를 통해서만이였다.

성남은 공부를 잘했다. 소학교때 해마다 최우등을 하여 표창장까지 받았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보여주겠다고 성적증과 표창장을 차곡차곡 소중히 건사하였다. 늘 어딘가에 계실 아버지, 어머니를 기다렸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왜 먼데 가있을가, 내가 보고싶지 않은가…

사진첩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결혼사진과 어머니가 자기를 안고 찍은 첫돌사진을 꺼내 공부하는 책상앞에 놓았다. 그러나 기다리고기다리는 아버지, 어머니는 돌아올줄 모른다.

어느해 소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로 진급할 때 담임선생님이 부모님들의 나이와 직업, 주소를 알아오라고 했었다. 더는 숨길수 없게 된 할머니는 성남을 앉혀놓고 모든 사연을 솔직히 말해주었다.

그때부터 성남은 우울해져서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왜 나를 버리고 딴 아버지한테로 갔을가, 내가 미워서?… 어머니가 유치원에 찾아와 자기를 입맞춰주던것을 생각하고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아니… 그러면 나하고 살기가 싫어서 그랬을가, 정말 거기가 더 좋을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리해할수가 없었다.

애타게 어머니를 그려보면 기다리던 마음은 증오심으로 변하였다.

어머니는 나쁜 사람이야. 이렇게 단정한 성남은 모진 마음을 먹었다.

사진첩에 붙어있던 몇장 안되는 어머니사진을 죄다 뜯어버렸다.

책상앞에 있는 결혼식사진과 첫돌사진에서 어머니모습만 가위로 오려냈다. 자기의 망막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깡그리 지워버렸다.

어머니가 소포로 보내준 간식이며 학용품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밀어던졌다. 성남이 고집이 하도 집요하여 할아버지,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면서도 어쩌지 못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보내주는 물건들은 할머니가 사왔다고 하면서 성남에게 주는 형편이 되였다.

성남의 행동은 12살 어린 소년이라 하기엔 너무도 당돌하고 결단성이 있었다. 이러다간 아들과 어머니가 영영 정을 잇지 못할것 같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모든 사연이 적힌 편지를 신옥에게 보냈다.

어느날 학교에 갔다온 성남이 집에 들어서니 방안에서 웬 젊은 녀인이 할머니와 이야기하고있었다.

할머니가 성남이의 손목을 잡고 그 녀인의 앞으로 이끌었다.

《네가 그리도 기다리던 어머니시다!》

녀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끌어안을듯 팔을 벌렸다.

《성남아!》

성남은 주춤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전에 유치원에 찾아왔던 녀인이 분명했다. 그리도 보고싶었던 어머니였으나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자기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딴 아버지한테 간 어머니. 기쁘고 즐거울 때나 서럽고 가슴아플 때나 어머니없는 슬픔으로 남몰래 눈물을 흘리던 허구한 나날들이 가슴아프게 떠오른다. 다음순간 성남은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저 낯선 녀인은 나의 어머니가 아니다. 아니야…

이상야릇한 반발심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성남은 뒤로 한발자국 물러서며 자기앞으로 다가오는 낯선 녀인에게 소리쳤다.

《나에겐 아버지만 계시지 어머니는 없어요. 죽었어요!》

성남은 방바닥에 놓았던 책가방을 집어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성남은 며칠동안 자기 동무네 집에서 자면서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후날 할머니말에 의하면 어머니는 책장에서 성남의 성적증이며 표창장들을 꺼내보며 기다렸다고, 마지막날엔 어머니얼굴만 오려버린 벽에 걸린 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 눈물만 흘리다가 돌아갔다고 한다.

그후 어머니는 두번다시 오지 않았다.

결혼식때 성의껏 준비한 소포만 보내왔었다. 할머니는 운명하면서 몰래 간수해두었던 어머니의 사진 한장을 그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네 엄마가 딸과 같았기에 등을 밀어 재가시켰으니 어머니를 리해하고 용서해주라고.…

김성남은 눈물이 글썽해서 듣고있는 안해를 쳐다보며 갈린 음성으로 말했다.

《할머님의 말씀이 어머니는 돌이 갓 지난 나를 데리고갈수도 있었다고 하오. 그러나 아버지의 넋이 깃든 강선땅에서 제강소를 위해 큰일을 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두고 갔다는거요.

그런데 나는 오래동안 어머니의 그 마음을 리해하지 못했소. 그저 날 버리고간 나쁜 어머니라고만 생각했었지. 그때 나에겐 아버지밖에 없다고, 어머닌 죽었다고 소리친 그 추태를 생각하면… 참, 내가 철이 없었지.…》

남편으로부터 처음으로 놀라우면서도 류다른 사연이 깃든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영실은 연방 눈가로 손수건을 가져갔다.

아버지의 사망과 어머니의 재가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있었을뿐 이렇게 깊이까지는 모르고있었던 영실이였다.

《어쩌면 당신은 그리도… 그때 어머니가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나요.》

《그렇소. 나는 어머니를 찾아갈 면목이 없소. 아마도 그 죄책감이 나의 두발을 얽어매놓은것 같소.…

늦게나마 어머니를 찾아가 용서를 빌고싶소.

허지만 어머니가 내게서 바라는것이 무엇이였겠소.

제강소의 현대화를 해놓고 찾아가는 길이 어머님앞에 떳떳이 나서는것이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미루어온것이요.》

《전기로건설이 끝나면 함께 어머님을 찾아가자요. 그리고 꼭 모셔오자요!》

김성남은 깊은 숨을 내쉬였다.

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움이 다시금 고패쳐와 진정할수가 없었다.


X


방안에 앉아 바느질을 하던 김소연은 얼핏 시계를 쳐다보았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다. 놀러나간 손자 철이가 아직도 들어오지 않는걸 보니 또 어디 가서 장난에 정신이 팔린 모양이다.

두 아들을 이미 세간내보내고 몇해전에는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자 너렁청한 집에 막내딸 선희와 단둘이 남게 되였다. 그 애마저 제강소에 나가 살다싶이 하니 소연은 너무 적적하여 손자녀석을 데려왔다. 그런데 여간 부잡스럽지 않다. 아직까지 배고프지도 않는지, 원.…

바느질감을 밀어놓고 밖으로 나온 소연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집사이로 난 골목길로 비닐구럭을 든 아낙네들이 말을 주고받으며 지나갈뿐 아이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큰 애들을 따라 대동강에 나가지 않았는지, 날씨가 서늘해져서 목욕은 하지 않는다 해도 고기잡이를 하는지 모른다.

며칠전에도 대동강에 나갔다가 고기는 고사하고 물에 빠진 생쥐모양 입술이 파래서 들어왔다. 혹시 굴뚝에 올라가는 장난을 하지 않는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후두두 떨린다. 소연은 철이를 찾아나갈가 하다가 그만두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그는 비자루를 들고 땅바닥에 떨어진 살구나무잎을 쓸어모았다. 누렇게 황이 든 나무잎들이 떨어지는걸 보니 이해도 다 갔구나 하는 생각에 허전한 마음을 금할수 없다.

올해에는 살구꽃이 필 때 황사인지 뭔지 하는것이 뽀얗게 끼더니 살구가 잘 열리지 않았다. 마당 여기저기를 쓸고난 소연은 퇴마루에 걸터앉아 울안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완연한 가을이다. 잎사귀가 다 떨어진 살구나무에는 앙상한 가지들만 남았다. 어제 집에 왔던 영재가 살구나무를 흔들면서 병든 가지와 잎을 다 떨구어버려야 래년에 살구가 잘 열린다고 하던 말이 떠오른다. 그는 올해에 살구가 몇알 열리지 않은걸 몹시 섭섭해했었다.

철이처럼 살구를 좋아한다. 이따금 쉬는 날이면 찾아와 이것저것 남자의 손길이 가야 할 일을 찾아해주군 하던 영재이다. 외아들로 누이들 밑에서 자라서인지 일이 매우 서툴렀다. 언제인가 부뚜막수리를 한다며 다 뜯어놓고는 어떻게 할지 몰라 이것저것 집었다 놓았다 하던 그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저절로 나간다. 선희가 두팔을 거두고나섰으니 망정이지 저녁도 해먹지 못할번 했었다. 소연이 혀를 끌끌 차며 《그렇게 일할줄 몰라서 어떻게 가정생활을 해나가겠나.》고 하자 《내가 있지 않아요.》 하며 선희가 깔깔 웃어댔다.

《원 애두, 벌써부터 영재편이냐? 어이구, 참…》 이렇게 말하면서도 소연은 영재가 좋았다. 대학졸업생이고 한다하는 기술자인 그가 어떻게 자기 딸과 눈이 맞았는지.…

《할머니!-》

손자녀석의 챙챙한 목소리에 소연은 머리를 들었다. 려행가방을 든 나이지숙하고 현숙해보이는 녀인이 철이의 손목을 잡고 서있다.

소연은 놀라서 일어섰다. 무슨 못된 장난을 하다가 덜미를 잡혀왔는가?…

그 녀인이 소연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저 보는것이 아니라 무슨 흔적을 찾으려는듯 뚫어지게 보고 또 본다.

이윽고 조용하고 떨리는듯 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연이가… 옳긴 옳소?…》

소연은 어정쩡해서 되물었다.

《그런데… 뉘신지…》

《날… 모르겠소? … 이 안신옥이를…》

《안신옥이라니?… 안신옥이라면… 그전에 우리 형님의 이름인데?… 그럼 우리 오빠의…》 소연은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그랬다. 그는 안신옥이였다. 소연의 입에서 형님이라는 부름소리가 나오자 목이 꽉 메여 고개만 끄덕였다.

아니… 그럴수 없다… 소연은 믿어지지 않았다. 그의 앞에 서있는 녀인은 형님이 아니였다. 아련하고 고운 모습은 다 어디 가고 주글주글한 주름살만이 남아있는 저 얼굴, 이 녀인이 과연 옛시절 오빠의 안해였으며 자기를 끔찍이 사랑해주던 그 형님이란 말인가.…

소연은 설레설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도 발볌발볌 낯선 녀인에게로 다가갔다.

두 녀인은 마주섰다. 서로 말없이 쳐다보았다. 세월의 년륜인양 실주름잡힌 이마와 흰서리내린 머리칼에서 흘러간 세월의 흔적을 보려고 애썼다. 해진 뒤의 후광처럼 희미하게 남아있는 옛시절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헤여지기가 서러워 눈물을 흘리던 그때처럼 와락 부둥켜안았다.

《형님!》

《소연이!》

두 녀인은 서로 다난한 인생행로를 돌이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오래간만에 다시 만나게 된 반가움으로 울었다. 나이를 먹으면 눈물이 헤퍼지는 모양이다.

할머니들이 서로 붙잡고 울음을 터뜨리자 곁에서 호기심어린 눈길로 지켜보던 철이가 입을 비죽거린다. 놀랐던지 아니면 저도 슬펐던지 왕- 울음을 터쳤다.

그래서야 두 녀인은 물러섰다. 안신옥이 가방에서 과자봉지를 꺼내주자 철이는 울음을 멈추었다. 언제 울었던가싶게 과자봉지에 매달린다. 이번에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방안에 들어온 그들은 두서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급히 서로 물어보고 듣느라고 여념이 없다.

소연은 나무라듯 물었다.

《형님, 그런데 왜 그사이 강선에 오지 않았소?》

안신옥이 한숨을 내쉬였다. 쌓이고쌓인 가슴속의 그 사연을 어떻게 한마디로 다 말할수 있단 말인가.…

소연은 형님의 아픈 마음을 헤집었다고 생각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헌데 우리 집은 어떻게 찾았수?》

안신옥이 빙긋이 웃었다.

《지배인고모라고 하니 모르는 사람이 없더구만. 그래서 이 근방까지 왔어. 마침 아이들이 모여노는것이 보이기에 그 애들에게 물었지. 그런데 이녀석이 쫄딱 나서는게 아니겠나. 자기 할머니가 지배인고모라면서. 호호…》

안신옥은 과자를 맛있게 먹고있는 철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소연은 무릎걸음으로 형님에게 다가앉았다.

《오늘 저녁 나하고 성남이네 집에 가자요. 며느리랑, 손자손녀랑 다 만나봐야지요.》

신옥은 아무말없이 철이의 머리만 쓰다듬어주었다.

아들이며 며느리, 손자손녀를 보고싶은 생각이야 오죽했던가.…

사람들에게 물으며 성남의 집문앞까지 찾아갔었지만 차마 들어갈수가 없었다. 왜서인지 주저하게 되였다. 일이 바쁜 아들에게 짐이 될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초고전력전기로에서 첫 쇠물이 쏟아지는 그날,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를 떳떳하게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서고 말았다. 결국 그날 밤은 려관에서 보내고 오늘 소연을 찾아온것이다.

《아니, 안 가겠네.》

《?…》

소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헌데… 어떻게 오셨소?…》

안신옥이 고개를 쳐들었다.

《강선에서 현대적인 전기로를 건설한다기에… 도와주고싶어서,》

《예?!…》

《내게 무슨 힘이 있으랴만… 설계실에서 사도라든가 심부름같은거야 할수 있지 않을가?…》

신옥은 자기가 품고있던 결심을 말해주었다.

그제야 소연은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 형님이 강선에 오게 된 사연을 알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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