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회
제2장. 돌아오다
6
차창밖으로 낯익은 제강소의 풍경이 멀리서 안겨오자 안신옥은 발치에 놓았던 려행가방을 집어들며 차장에게 소리쳤다.
《뻐스를 좀 세워달라구!… 내려야겠네.》
머리를 뒤로 꽁져맨 애어린 차장의 두눈이 동그래졌다.
《할머닌 강선까지 간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안신옥은 갑자기 대답이 궁해서 머뭇거렸다.
《저… 차멀미가 나서…》
《아이참, 어쩌나… 그럼 잠간 쉬였다 갈가요?》
안신옥이 다급히 손을 흔들었다.
《아니, 그만두라구. 바람도 쏘일겸 천천히 걸어가겠네.》
《힘들어서 어떻게…》
《일없어. 이젠 거의다 왔는데 뭘.》
《?…》
안신옥을 내려놓은 뻐스는 서서히 떠나 멀리 사라져갔다. 길옆을 따라 나지막하게 막아놓은 콩크리트보호턱에 걸터앉으며 안신옥은 가벼운 숨을 내쉬였다. 운동장같은 고속도로의 아래쪽에는 대동강이 흘러간다. 서늘한 늦가을바람에 실려 슴슴한 물비린내가 풍겨왔다.
그는 평양의 막내딸네 집에서 강선으로 오는 길이다.
안신옥은 이마우에서 흩날리는 희슥한 머리칼을 쓰다듬어넘기며 갈색연기가 희미하게 피여오르는 제강소쪽을 회오깊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강선땅을 떠난것이 어제일같은데 벌써 수십년세월이 흘러갔다.…
…새 가정을 이룬 신옥은 딸들을 낳아키우고 제철소 설계실에서 일하는 그 바쁜 속에서도 강선땅에 두고온 아들을 잊지 않았다.
아니, 잊을래야 잊을수가 없었다. 자주 느껴보는 충동이긴 하지만 강선에 달려가 아들애를 안아주고 업어주고싶었다. 먹고싶어하는 음식이며 가지고싶어하는 장난감을 한가슴 안겨주고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피나게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라는걸 눈치채게 되면 가슴아픈 정신적충격과 슬픔을 아들애에게 줄수 있다는 생각으로 애써 참았다.
아들애에 대한 생각은 딸들이 한살두살 먹어갈수록 더해갔다. 재롱부리는 딸애의 볼에 입술을 가져가다가도 흠칫 놀라며 굳어졌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 애 생각에 멍하니 앉아있는 때가 빈번했다.
리경준이 보다못해 성남이를 데려오자고, 함께 살자고, 여기서 야금기술자로 키우면 되지 않는가고 설복하기도 했었다. 그의 진정은 고마왔으나 그렇게 하고싶어도 할수 없는 신옥이였다.
날이 갈수록 그 애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하겠다는 충동을 막을수가 없었다.
아무리 내리눌러도 자꾸 솟구치려는 물에 뜬 공처럼…
시누이 소연이를 통해 몰래 아들의 성장을 알아보았고 옷이며 장난감, 간식을 보내주기도 했었다.
아들과 헤여진 후 그는 두번 강선에 갔었다.
한번은 성남이가 굴뚝에 올라간것을 어느 청년이 구원해주었다는 소식을 들은 때였고 한번은 성남이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시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강선에 갔던 안신옥은 청천벽력같은 아들애의 원망소리를 듣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아, 그때 성남이가 자기를 쏘아보며 소리치던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얼어든다.
그후 다시는 강선땅에 가지 못했다.
그래도 모성애는 집요한것이였다.
중학교때에는 물론 성남이 대학에서 공부할 때에도 시어머니와 몰래 약속하고 학용품과 생활필수품들을 할머니나 시누이이름으로 보내주군 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성남이 제강소에서 현장기사로 일한다는것을 알게 된 후에야 아들에 대한 신옥의 관심은 한동안 뜸해졌다. 재속에 묻힌 불찌처럼.…
설계실장으로의 승급과 그에 따르는 다양한 사업, 두 딸의 혼사문제 등 신옥에게도 제나름의 생활이 있었던것이다. 두 딸은 모두 청진광산금속대학에서 공부했고 졸업후 야금부문 일군들과 결혼하였다.
후날 소환되는 남편을 따라 평양으로 간 막내딸은 지금 금속공업성에서 일하고있다.
몇해후, 성남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신옥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로서 그의 앞날을 축복해주리라 수십, 수백번 별러왔었다. 이때까지 주지 못했던 정을 다 쏟아부으려는듯 결혼기념품을 하나하나 성의껏 준비했다.
그러나 결혼날자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아들과 만날 시각이 점점 박두해올수록 이름할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속으로 밀려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어린것을 할머니에게 맡겨놓고 훌쩍 떠난 주제에 무슨 체면으로 아들앞에 나타나 축복해주겠는가.… 사람들은 또 뭐라고 하겠는지.… 애가 자랄 때는 얼굴 한번 내밀지 않고있다가 다 자라 가정을 이루게 되였다니 어머니랍시고 찾아왔다며 비웃을것만 같았다.
젊어서는 크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 잠재의식이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죄의식으로 느껴졌다. 더우기 《나에겐 아버지만 있지 어머닌 없다고, 죽었다고》 하던 성남이의 웨침소리가 포승줄마냥 그의 발목을 얽어맸다.
신옥은 끝내 강선으로 걸음을 내짚지 못했다. 아들에 대한 끓어넘치는 정을 소포속에 고스란히 넣어보냈다. 눈물을 머금고 강선의 하늘가를 바라보며 아들의 행복을 빌고 또 빌었다.
세월은 빨리도 흘러갔다. 남편은 제철소 기사장으로 일하다가 병으로 사망했고 년로보장을 받은 신옥은 청진광산금속대학에서 교원을 하고있는 맏딸과 함께 살고있었다.
칠혹같던 머리는 희슥해졌고 총총하던 기억력도 무디여져 어제 있은 일도 잊을 때가 드문했다. 그러나 잊을수 없는것은 아들이였다. 아들의 소식을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금속공업성에 다니는 막내딸을 통하여 제강소소식을 듣군 했다.
어머니가 한때 강선제강소에서 일했다는것을 알고있는 딸은 아무런 의혹도 없이 궁금해하는 제강소소식을 즐겨 전화로 알려주군 하였다.
신옥은 제강소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제 언제인가 아들이 꼭 찾아올것 같이만 생각되였다. 모든 사연을 너그럽게 리해한 성남이가 《어머니!》 라고 정겹게 불러줄것이라고 믿고싶었다.
어느해인가는 제강소기사장을 하던 아들이 지배인으로 임명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도 대견하고 자랑스러워 그 소식을 알려준 딸에게 불쑥 《그가 바로 너의 오빠란다!》 라고 말하고싶은 충동을 누르느라고 눈물이 찔끔 났었다. 당장 아들에게 달려가 축하해주고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치밀었다. 그러나 가슴속 깊은 곳에 못박혀있는 죄의식이 그의 마음을 또다시 괴롭혔다.
오직 딸이 전해주는 제강소소식에 만족을 느낄수밖에 없었다.
신옥에게 있어서 아들이자 제강소였고 제강소소식이자 아들의 소식이였다. 신문에서 제강소에 대한 기사라도 보게 되면 그것을 가위로 오려가지고 보풀이 일고 글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큰일을 하는 아들이 찾아오지 못한대도, 죽는 순간까지 만나지 못한대도 여한이 없을것 같았다. 오직 제강소일이 잘되여 세상을 떠나며 그처럼 바라던 성남이 아버지의 소원이 성취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최근년간 설비를 갱신하지 못한 제강소에서 강철생산이 멎다싶이 하고 신문에 기사 한편 실리지 못하는것이 가슴에 걸려 입맛까지 잃었었다.
그처럼 큰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았건만 제강소현대화는 좀처럼 친척되지 않았다. 더우기 제강소현대화를 실현하지 못한 책임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신옥은 몸져눕기까지 했다. 성남이가 강선땅에서 어엿한 일군으로 자라났어도 강선의 넋을 잊고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갈마들었다.
내가 강선땅을 떠나온 그것만도 죄스러웠는데 아버지의 넋을 이어가라고 피눈물 머금으며 두고온 아들마저 그렇게 살지 못했다고 생각되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성남이가 락심하여 맥을 놓고나 있지 않는지.…
한시바삐 아들곁으로 달려가 힘을 주고싶었다.
그 애곁으로 가야 한다.
그 순간부터 신옥에게는 기나긴 세월 어린 아들을 두고 재가한 죄의식으로 살고있던 자기는 이미 없어진것처럼, 그전의 자기는 모성애의 불길속에서 깡그리 타버리고 재가 되여 어딘가 먼곳으로 날려가버린것처럼 느껴졌다.
그와 함께 모성애의 세태적인 감정을 초월한 보다 강하고 숭고한 의식,
제강소에서 자체로 대담하게 현대적인 전기로를 건설할 결심을 하고 설계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신옥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앉았다. 스러져가던 신옥의 육체에 생의 활력을 부어주었다.
천리마대고조시기 남편을 도와 전기로에 산소취입법을 도입하던 그때와 같은 열정이 온몸에 솟구치는듯 했다. 그 벅찼던, 가장 아름답고 희열이 넘쳤던 그 생활을 강선땅에서 다시 찾고싶었다.
살아숨쉬는 마지막순간까지 성남이가 하고있는 현대적전기로건설을 도와주자.
이것이 곧 죽기 전에 마음편히 떳떳하게 아들을 만날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되였다.
신옥은 강선으로 갈것을 결심하였다.
신옥은 맏딸과 사위를 앉혀놓고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수십년세월 가슴속깊이 묻어두었던 사연을 천천히 하나하나 이야기해주었다.
크게 감동된 딸과 사위가 강선까지 모셔다드리겠다고 하였으나 신옥은 굳이 거절했다. 혼자 조용히 가고싶다고… 초고전력전기로를 다 건설하기 전에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당부를 남겨놓고 청진을 떠났다. 평양에 도착한 그는 막내딸집에서 잠시 려행의 피로를 풀고나서 강선으로 왔던것이다.…
큰길로 지나가던 자동차 경적소리에 안신옥은 회상에서 깨여났다.
손목시계를 보니 12시가 되여온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어깨에 걸친 안신옥은 포장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하였다.
감회도 깊다. 대학을 졸업하고 김철우와 함께 이 길로 강선에 왔었고 이 길로 눈물을 머금고 떠나갔었다. 아들을 보려고 마지막으로 강선에 다녀온것도 이 길이였다. 지금은 많이 변모되였지만 신옥에게는 전혀 생소한감이 들지 않았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강선이다. 한발자국, 한발자국 가까와올수록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 단다. 어른으로 성장한 성남이모습을 눈앞에 그려보자고 아무리 애써도 겨우 떠오르는것 같다가는 먼저간 남편의 모습과 자꾸 뒤섞인다. 시부모님들의 모습과 함께 자기와 함께 있자고, 자기가 일생 동무해주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꼭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던 시누이의 모습도 안겨온다. 신옥의 걸음은 늙은이답지 않게 빨라진다. 숨이 차오른다. 심장이 흉벽밖으로 튀여나올듯 쿵쿵 뛴다.
제 생각에 옴해 걷다나니 신옥은 지나가던 승용차가 옆에 와서 멎어서는것도 알지 못했다.
《어머니! 차에 타십시오.》
정답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신옥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승용차뒤문이 열리며 점잖아보이는 사람이 몸을 반쯤 내밀고 손짓한다.
차에 올라야 할지, 그냥 걸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있던 신옥은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채 이끄는대로 허둥허둥 차에 올랐다.
그 사람은 친절하게 가방을 받아주며 차에 오르는 신옥을 부축여주었다.
차가 떠나자 그 사람이 안신옥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신옥은 별스레 마음이 긴장해짐을 느꼈다.
《어머니, 어디까지 가십니까?》
《강선까지 갑니다.》
《강선에 누가 있습니까?》
《저… 아들집에 좀…》
《오, 그렇습니까? 몹시 기쁘시겠습니다. 아들은 제강소에 다닙니까?》
《아, 아닙니다.…》
본의아니게 불쑥 거짓말을 한 신옥은 얼굴이 달아오르는감이 들어 괜히 궁싯거렸다.
혹시 아들이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조마조마해있는데 그 사람은 편안히 앉으라고 몇번 말할뿐 더 묻지 않는다.
깊은 생각에 잠겨 차창밖을 내다보기만 한다. 무슨 중책을 지닌 일군같았다.
정말 고마운분이구나 하며 다시한번 그를 바라보던 안신옥은 흠칫 놀라 굳어졌다.
반듯한 이마우에 드리운 굽실굽실한 머리칼, 영채도는 눈빛, 두툼한 입술이며 친절한 목소리… 무척 낯익어보인다. 어디선가 만났던것 같았다.
내가 일하던 사무실청사에서 보았던지.… 아니다. 그러면 혹시… 순간 심장이 흠칫 떨었다. 이어 리성이 가만히 속삭인다.
아들 성남이다, 성남이.…
그랬다. 아무리 기나긴 세월이 흘러갔어도 혈육은 숨길수 없는것이다. 더우기 어머니인데야.…
신옥은 아들을 알아보았다. 그 순간부터 돌부처가 되고말았다. 그가 무슨 말인지 한두마디 물은것 같지만 입이 얼어붙은듯 떨어지지 않았다. 제강소정문옆에 와서 내린 안신옥에게 아들집에서 잘 놀다 가시라고 그가 친절하게 말했으나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 눈물이 그렁하여 제강소정문안으로 사라져가는 차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