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회


제2장. 돌아오다


5


전기로의 동음이 울려오는 넓고 길다란 강철직장건물안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눈에 뜨이는것이 1호전기로이다. 그옆으로 쭉 나가며 2호, 3호… 전기로들이 웅자를 자랑하며 틀지게 앉아있다.

1호전기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찾아오시여 현지지도하신 사적이 깃들어있고 1950년대말 첫 천리마작업반을 쟁취한 진응원영웅이 일하던 로이다.

그곁에는 전기로의 거창한 위용에 눌리워 사람들의 눈에 인차 뜨이지 않는, 경비초소처럼 자그마한 건물이 있다. 이 자그마한 건물이 바로 전기로 조작실이다. 거기서 처녀조작공들이 일한다.

《조작공외 출입금지!》 라고 붉은 글씨로 위엄있게 써붙인 조작실에서는 지금 교대인계인수가 진행되고있다. 낮교대에서 일한 강선희는 련심에게 작업중에 있었던 변동사항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련심은 지난해에 기능공학교를 졸업한 나어린 조작공이다.

불량한 접속단자들이 애를 먹일 때마다 쓰군 하는 나무막대기까지 넘겨주고난 강선희는 습관적으로 조작실을 한번 빙 둘러보았다.

전기로가 내다보이는 창문옆벽에는 검은 바늘이 한들거리는 계기들이 주런이 붙은 배전반이 놓여있고 그앞에는 까만 수동조절기들이 붙은 조작대가 있다. 다른쪽벽에는 처녀들이 일하는 장소에서 흔히 보게되는 길죽한 거울이 걸려있고 거울웃면에는 꽃장식을 하였었다.

전기로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쇠장대를 틀어쥐고 보안경을 쥔 용해공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쇠물이 처녀조작공들에 의해 녹여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녀들의 나긋나긋한 손가락에 의하여 철갑옷을 입은 장수와 같은 전기로가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움직인다. 우뢰소리같은 굉음을 내지르며 화광을 일으켜 강철을 녹인다.

거대한 동체를 기울여 주홍색쇠물을 토한다.

용해가 순조롭게 진행되면 용해공들은 의자에 앉아 탄산수도 마시고 마라초도 말지만 조작공처녀들은 계기에서 긴장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조절기에 매달려있다. 생산이 잘되고 월강철생산계획을 넘쳐 수행하게 되면(근년에 와서는 거의 계획을 하지 못하고있다.) 용해공들은 작업반에 차례지는 상금과 우대상품도 다 조작공처녀들에게 밀어주며 업고 다닐듯이 하다가도 전극의 질이 나빠 부러진다든가 1차전압이 낮아 용해시간이 길어지기라도 하면(그런 일은 빈번했다.) 그것이 조작공들의 탓이기나 한것처럼 얼굴이 감때사납게 이그러진다. 그쯤되면 강선희가 옛 로장의 손녀라든가 지배인의 사촌동생이라는것도 알바 없다는듯 눈을 부라린다.

전기로 동음소리도 무색할 지경으로 고함을 지르며 함마같은 큰 주먹을 내흔든다. 작업총화시간에는 눈알이 쑥 빠질 지경으로 달구어댄다.

그래도 처녀들은 눈물이 글썽해서 아무 대꾸도 못한다.…

선희는 거울을 쳐다보며 생긋 웃었다.

꽃장식을 한 거울을 바라보던 선희는 별스레 마음이 뜨는듯 한 느낌이 들어 다시한번 생긋 웃었다.

조작실을 인계해주고난 선희는 목욕을 하고와서 외출복을 갈아입은 다음 거울앞에 서서 이리저리 비추어보며 연하게 화장을 했다. 기계기름냄새가 나던 조작실안에 향긋한 분냄새가 풍긴다.

로에 파철을 장입하는중이여서 조작대에 가만히 앉아있던 련심이 그를 쳐다보며 아래입술을 비죽 내민다.

《아이참, 화장을 안해도 고와요. 영재동지가 밉다고 할가봐 걱정스러워요? 호호.》

《요건 까불면서…》

선희는 거울속에 보이는 련심에게 주먹을 흔들어보이며 웃었다.

퇴근준비가 끝나자 선희는 작은 손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럼 수고해!》

《잘 가세요.》

강철직장의 육중한 철문을 나선 강선희는 곧장 설계실쪽으로 걸어갔다. 곤청색가을양복을 단정하게 입은 그의 날씬한 모습에 눈이 끌린 총각들이 흘끔흘끔 쳐다보며 지나간다. 그러거나말거나 선희는 앞만 쳐다보며 걸어갔다. 곁눈 한번 팔지 않고 또박또박 걸어가는 경쾌한 그의 모습에는 처녀의 도고한 기품과 청춘의 활력, 생기가 넘쳐흐르고있었다. 그의 걸음은 날개라도 돋힌듯 가벼웠다.

오늘 작업총화때 정말 기쁜 소식을 들었다. 기업소자체의 힘으로 초고전력전기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는것이다. 그것도 자기가 일하는 1호전기로에

아마도 현대적전기로는 지금처럼 수동으로 조절하는것이 아니라 모든게 자동화되여있을것이다. 조작사고란 있을수도 없고…

현대적인 전기로에서 일해보고싶었던 소원이 당장 풀리는것 같았다. 영재동문 무슨 설계를 맡았을가? 젊은 설계가들중에서도 손꼽히는 그는 아마 중요한 부분을 맡았을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설계실이 있는 건물앞에 이른 강선희는 두릿두릿 사방을 둘러보았다.

박영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손목시계를 보니 퇴근시간이 지났다.

새로운 과업을 받고 벌써 설계를?… 그래서 퇴근시간도 모르는것이나 아닌지.…기다리지 말고 그냥 갈가?…

어쩐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밤교대로 한주일째 일하다보니 그를 만나본지도 오래다. 설계실에 올라가 잠간 만나볼가? 그러면 설계하는데 지장을 줄거야.…

한동안 망설이고있는데 누군가 그를 불렀다.

《선희가 아니냐? 거기서 뭘하니?》

돌아보니 사촌오빠 김성남이 빙긋이 웃으며 서있다. 맞은편 단층건물에 있는 지배인방에서 나오다가 선희를 보았던것이다.

《아, 오빠예요? 영재동무를 좀 만나려고…》

선희는 스스럼없이 말했다.

《그래… 어머님은 건강하시냐? 내 일이 바빠 들려보지 못한다.》

《걱정마세요. 다 잘있어요. 참 오빠, 초고전력전기로를 만든다는게 사실이예요?》

김성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재동문 무얼 맡았나요?》

김성남은 얼굴에 웃음을 담고 대답대신 설계실청사쪽을 눈짓했다.

《범이 제소릴 하면 온다더니… 저기 영재가 나오는구나. 네가 직접 물어봐라. 난 현장에 나가봐야겠다.》

《…》

김성남이 자리를 뜨자 박영재가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스적스적 다가왔다.

어깨에 가방이 메워져있는것을 보면 퇴근차림이 분명했다.

《오래 기다렸소?》

《금방 오는 길이였어요. 그런데 오빠를 만나서…》

선희는 얼핏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생각에 잠긴듯 별로 기뻐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다. 그의 얼굴표정의 변화를 잘 알고있는 선희에게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되였다.

그런다고 놀라거나 속상해할것 없다. 그의 기분을 전환시키는것은 그리 어려운것이 아니였기때문이다.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가 된게 아니예요?》

그래도 대꾸가 없다. 유화영상작품을 모신 세그루의 백양나무밑을 지나가는 동안 여전히 침묵이다.

기업소연혁소개실앞을 지날 때 선희가 영재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시원한 대동강가에 나가자요, 네?》

영재는 말없이 머리를 끄덕거린다. 그들은 대동강쪽으로 난 동쪽정문을 빠져나갔다. 평양에서 남포쪽으로 뻗은 넓은 도로가 나졌다.

큰길 아래쪽에는 대동강물이 유유히 굽이쳐흐르고있다. 거울처럼 맑고 넓은 강물우에는 희고 화려한 려객선과 대형짐배들이 물결을 헤가르며 지나간다.

높다란 마스트우에는 람홍색공화국기발이 펄펄 휘날린다. 려객선에서 일으킨 물결이 파도쳐와 강기슭을 철썩철썩 갈긴다. 갈매기들이 끼륵끼륵 날아예고 녀인들의 새된 웨침소리가 즐겁게 들려온다. 파도에 빨래감이 떠내려가는 모양이다.

강기슭에 내려가앉은 선희가 눈에 남실남실 웃음을 띄우며 놀리는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초고전력전기로설계에서 영재동지가 제외되였다는게 사실이예요?》

《그건 무슨 소리요? 오빠가 그래?》

《오빠는 무슨 오빠… 영재동지가 그랬지요.》

《뭐? 내가 언제?…》

《영재동지의 얼굴에 다 씌여져있단 말이예요, 호호.》

놀란 어린애처럼 눈이 둥그래진 그의 얼굴을 보며 선희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를 보세요.… 좀 웃으세요.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또다시 웃음이 터진다. 그 웃음이 어찌도 명랑하고 즐거웠던지 박영재는 저도 모르게 허허 따라웃고말았다.

《그런데 웬일이예요? 초고전기로를 건설한다는데 기쁘지 않아요. 시무룩해서… 정말 전기로설계에서 밀려난게 아니예요?》

연방 들이대는 선희의 질문에 그는 한동안 어정쩡해서 앉아있었다.

《난 전극승강장치의 자동화설계를 맡겠다고 했소.》

선희는 기뻐서 두손을 마주잡았다.

《그런데 아까는 왜 벙어리 랭가슴앓듯 했나요?》

《좀 …그럴 일이 있어서…》

《무슨 일이게요?》

박영재는 침묵으로 대답을 피했다. 생각이 많아졌다.

무엇보다 놀라운것은 년로보장을 받고 집에 들어갔던 로기술자들이 선뜻 초고전력전기로설계를 하겠다고 나선것이다. 학식이나 기술적으로 보아도 그들이 무슨 용단으로 그런 대담한 결심을 하였는지… 결국 젊은 기술자들이 머리를 쳐들수 없게 되였다.

책임일군들이 적극 지지해나섰고 전기로건설을 위한 조직사업까지 해놓았으니 모든 기술자들이 다 말려들었다.

언젠가 조인철이 그에게 말했었다.

새 세대 청년기술자답게 대오의 앞장에 서라고, 그러면 다 따라나설것이라고!

자신의 나약성에 대한 혐오감이 느껴졌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설계전투가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그런 내용을 선희에게 말할수도 없다.

초고전력전기로건설이 시작되고 자기가 사랑하는 박영재가 설계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흥그러워진 선희는 그의 행동이 리해되지 않는것이 있기는 했으나 구태여 알고싶지 않았다.

《난 할머니가 될 때까지 낡은 전기로에서 수동조절이나 하고있을줄 알았더니 드디여 해방되게 되였군요. 오늘은 내가 한상 내겠어요, 호호. …》

선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영재도 따라일어서며 선희의 두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 선희, 설계에서 내 한몫 단단히 하겠어.》

이때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강기슭을 환하게 비쳐주며 제강소의 하늘가에 불깃한 쇠물빛노을이 피여올랐다. 선희는 강철직장쪽을 바라보며 걸음을 떼지 못했다. 박영재가 재촉했다.

《어서 가기요.》

선희가 손을 들어 쇠물빛노을을 가리켰다.

《저걸 좀 봐요. 얼마나 아름다워요. 지금 2호전기로가 출강해요! 오늘 낮에 로상태가 좋지 않아 애를 먹더니 이제야 출강하는군요!》

박영재는 시틋해서 말했다.

《늘 보는걸 가지고 뭘 그러오.…》

《아니예요. 매일 보아도 보고 또 보고싶은게 저 쇠물빛노을인걸요!》

《…》

박영재는 처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가봐 더 재촉하지 않았다. 그의 곁에 붙어서서 아무런 흥심도 없이 쇠물빛노을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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