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회
제2장. 돌아오다
3
승용차가 정문을 통과하여 제강소구내길에 들어서자 운전사가 얼핏 지배인을 쳐다보았다.
《어디로 가시렵니까?》
《곧추 파철적재장으로!》
좀전에 김성남은 제강소에서 십여리 떨어진 원정동에서 살고있는 유진섭을 찾아갔었다. 그는 집에 없었다. 매일 파철수집을 나간다고 한다.
언제 들어오겠는지 기다릴수도 없는 일이여서 다시 제강소로 온것이다.
오는 도중에도 그러했지만 김성남은 차를 천천히 몰라고 이르고는 차창밖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구내길 한옆으로 손달구지를 끌고오는 사람을 보았던것이다.
머리를 수그렸으나 다부진 체격과 침착한 행동거지를 보면 십중팔구 유진섭이다. 마침 승용차소리를 들은 그가 머리를 쳐들었다.
하관이 넓은 얼굴이며 사색적인 눈, 그가 틀림없었다.
《차를 세우시오!》
지나가던 승용차가 멎어서고 지배인이 내려 다급히 자기쪽으로 걸어오는것을 본 유진섭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분명 자기에게로 오고있었다.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채 마주 바라보기만 하는 유진섭에게 김성남이 먼저 인사했다.
《그동안 건강하셨습니까?… 집에 가니 파철수집 나갔다더군요. 정말 수고가 많습니다.》
김성남은 다짜고짜로 손달구지채를 잡았다.
《이야기나 하면서 함께 끌고갑시다.》
《?!…》
놀라운 일이다. 떽떽거리던 지배인의 그 말씨부터가 달라졌다. 마음이 별스레 따뜻해진다. 도대체 무슨 일로 나를 찾는것인가?…다시금 마음이 긴장해졌다.
김성남은 옆에서 묵묵히 걷기만 하는 유진섭에게 눈길을 주었다.
집으로 들어간 때로부터 이렇게 파철수집을 하였을 유진섭아바이! 이런 량심적인 아바이에게 《기술공정실에 더 있을 필요가 있겠소?》라고 너무도 경솔하게 못박힌 말을 했던
김성남은 격해지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말했다.
《진섭아바이!… 그동안 저를 많이 욕했지요?》
《?!…》
김성남은 우리 힘으로 초고전력전기로를 건설할것을 결심하였다고,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유진섭은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그제서야 모든것을 알아차린 그는 손달구지채를 지배인과 함께 쥐고있다는 생각도 잊고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게… 사실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공정실에 있다가 들어간 로기술자들을 다 불렀습니다. 함께 토의해보자고 말입니다. 리규택아바이도 다시 나와 로체설계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유진섭은 잘 믿어지지 않는지 다시 물었다.
《그러니… 이 유진섭이가 필요하다는 말이요?!》
《전기에서는 유진섭아바이를 따를 기술자가 어디 있습니까! 지난날의 노여움을 풀고 다시 공정실에 나와주십시오!》
《!…》
유진섭은 목이 꽉 메여 대답을 못했다. 초고전력전기로를 자체로 건설하자고 찾는데야 그 노여움이 무슨 큰것이겠는가.
기술자로서의 자기 인생이 제강소의 현대화를 해보지도 못한채 끝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얼마나 고심하여왔던가.
저도 모르게 눈굽이 젖어올랐다.
《난… 지배인이 그렇게 결심하리라고…》
유진섭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김성남은 가슴이 뭉클했다.
기술대표단으로 나가자고 할 때는 단호히 거절하던 그가 함께 초고전력전기로를 건설하자고 하니 오히려 찾아주어 고맙다고 한다. 더우기 이 못난 지배인을 믿었다고 하니…
고모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기술도 높고 량심적인 그를 잘 도와주라고 얼마나 말해주었던가. 어머니처럼 생각하고있는 고모앞에서는 알겠다고 선선히 대답하였지만 인차 망각하고말았었다.
이런 량심적인 기술자, 천리마시대의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손달구지를 끌고 걸어가는 동안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수군거렸다.
《지배인이 집에 들어간 로기술자들을 만나는걸 보니 무슨 변이 날것 같구만!》
《초고전력전기로를 만들자고 한다던지…》
《꽤 해내겠나?》
《두고보아야 할 일이지.》
김성남은 집쪽으로 멀어져가는 유진섭을 지켜보며 오래도록 서있었다.
X
점심식사를 하고난 박영재가 책상우에 초고전력전기로와 관련한 기술문헌들을 펼쳐놓고 읽고있는데 1호전기로 작업반장인 조인철이 찾아왔다. 그는 책상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곁눈질해보며 나직이 말했다.
《?…》
그들은 그속에 들어가 잔디우에 앉았다.
《오늘 새벽교대를 한 다음 제일이한테 면회갔댔어.》’
설계원 리제일은 취장이 나빠 병원에 입원하고있는 그들의 중학교 동창생이다.
《병세가 좀 어때?》
《음, 더 악화된것 같아.》
《뭐?…》
얼마전
조인철은 가슴이 아픈지 담배를 피워물었다.
《제일인 그것이 가슴에 걸려 먹던 약도 단절하고 당장 퇴원하겠다는거야.
기업소에 젊은 기술자들은 뭘하고 초고전력전기로설계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 로기술자들을 데려내왔으니 그게 어디 됐는가고 하면서 말이야.》
박영재는 이제야 그가 찾아온 리유를 알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그들 셋은 딱친구였다. 조인철인 인민군대에 나갔고 제일이와
조인철이 직방 들이댔다.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초고전력전기로란 현대과학기술의 집합체로서 어느 한 사람이 나선다고 될 일이…》
조인철이 그의 말꼬리를 툭 잘랐다.
《기술적문제는 말하지 말자. 다만 난
《…》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리도 배짱이 없나. 에익, 차라리 담벽하고나 말하는게 낫지. 아, 그러니 서른이 넘도록 장가도 못 가고있는거야.》
박영재의 얼굴이 벌개졌다.
《무슨 말을 그렇게… 그건 너무해.》
《그런걸 아는 사람이 어째서 나서지 못하나 말이야. 그건 강선청년들의 수치야. 그걸 알아야 해. 그걸…》
그가 어찌도 큰소리로 열을 올렸던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여 흘끔흘끔 쳐다본다. 그러거나말거나 조인철은 목청을 낮추지 않았다. 인철이 말이 옳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왜 나보구만 해보는거야?》
《그럼 누구하고 해보겠나. 제일인 입원했지,
《?!…》
조인철이 우둘쩍거리며 자리를 뜬 후에도
얼마전에 열렸던 기술협의회장면이 얼굴 뜨겁게 안겨온다.
새 세대 기술자들속에서 현대적전기로설계를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던것만은 사실이다.
사실 박영재는 외국의 기술제안서들을 짬짬이 다시 연구분석해보았었다. 별로 신비한것이 없는것 같았다. 마음같아선 설계할수도 있을듯싶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했다.
설계도 중요하지만 그 실현단계, 즉 시공에도 문제가 있다. 지금처럼 모든것이 부족하고 어려운 때 재료와 설비를 설계의 요구대로 쓰지 못한다면 건설이 끝나고 운영하는 과정에 돌발적인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수 있겠는가.
그러면 건설에 투자된 막대한 자금과 로력의 랑비, 현대화의 실패 등 그뒤에 따르는 엄중한 후과는…
설계를 잘하여 그 대상이 성공하면 시공을 책임진 일군들과 건설자들이 평가받지만 실패할 경우엔 설계가가 법적책임을 지게 되는것이다.… 하물며 첨단기술인 초고전력전기로설계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제강소의 물질적잠재력이 너무 빈약하다…
이런저런 타산을 앞세우다나니 선뜻 나서지 못했던것이다.
그러나 지배인이 집에 들어간 로기술자들을 데려내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이제 그들이 초고전력전기로설계를 맡아나선다면 젊은 기술자들의 립장이 어떻게 되겠는가?…
X
서승민은 아무리 생각해도 리해되지 않았다.
지배인은 초고전력전기로를 자체로 해보겠다고 집에 들어갔던 로기술자들을 데려내오는 한편 그 준비사업을 다그치고있다.
박상근부상은 미국것들의 압력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대부금으로 현대적전기로를 들여올 작전을 벌린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것이야말로 실현가능한 일이다.
여러해동안 벌렸던 외교작전이 실패로 끝나다보니 서승민은 성에 소환되지 못했을뿐아니라 지난 기간 외교활동에서 세웠던 공적마저 빛을 잃게 되였다. 그래서 이번에 부상이 다시 벌리려는 대외사업을 두손 들어 지지해나섰던것이다. 도대체 지배인은 무슨 배심으로 그런 모험을 하려는것인가?…
성격이 과격한 그를 만나고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제강소현대화를 도와줄 성의 위임을 받고 나와있는 서승민으로서는 그러한 움직임을 모르는척 하고 외면할수가 없었다.
그는 김성남을 찾아갔다.
《지배인동무, 초고전력전기로건설을 하자고 로기술자들을 데려내왔다는게 사실입니까?》
사업일지에 무엇인가 쓰고있던 김성남은 원주필을 놓고나서 태연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김성남의 태도에 서승민은 마음이 언짢아져 들이댔다.
《지배인동문 성에서 전기로구입을 위한 외교작전을 다시 하기로 하였다는것을 모른단 말입니까?》
《알고있습니다.》
《초고전력전기로를 정 자체로 해보겠으면 부상동지의 승인을 받으시오.》
더는 참을수가 없어 김성남은 어성을 높였다.
《그런 걱정은 마시오. 때가 되고 필요하면 행정실무적인 절차는 밟겠소.
도대체 기사장동문 제강소를 도와주러 왔소, 아니면 통제나 하고 훈시하러 왔소?》
눈이 둥그래진 서승민은 벗어진 이마우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넘길 생각도 못했다.
《지배인동문 그걸 몰라서 묻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왜 하겠다는걸 막아나서는거요? 도와주지 못하는 나그네는 떠나갈 때에야 반갑다고 했소.》
서승민은 아연해서 얼굴이 꺼매졌다.
그의 과격한 성격을 모르는것은 아니지만 년로한 사람을, 제강소현대화를 위해 나와있는 자기에게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대할줄은 몰랐다.
《그 발언에 대해 책임질줄 아시오.》
서승민은 분기가 치밀어서인지 문을 쾅 열고 나갔다.
김성남은 자기가 너무했다는것을 느끼며 이마살을 찌프렸다. 상냥한 말로 상대방을 설복시킬수 없는 사람은 성난 목소리로도 설복시킬수 없는것이다.
남을 이기려면 우선 자기부터 이겨야 한다.
서승민뿐이 아니다. 기업소의 일부 일군들속에서 성에서 하는 납입작전의 결과를 보고 결심하자는 의견이 전혀 없는것도 아니였다.
서승민이 이 사실을 부상에게 보고하리라는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면 초고전력전기로를 들여와야 한다고 그루를 박고간 박상근부상이 어떤 태도로 나올것인가?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종소리에 김성남은 언듯 정신을 차리고 송수화기를 들었다.
책임비서에게서 온 전화였다.
《예, 김성남입니다.… 뭐라구요?…
김성남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