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회
제1장. 고뇌
7
한여름의 무더위를 식히며 소나기가 지나갔다. 이따금 들려오는 우뢰소리와 함께 구름장이 밀려가자 파란 하늘이 건듯 들렸다. 목욕을 하고나온듯 말쑥해진 해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해빛이 비친 광복거리는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왔다.
반짝이는 창유리와 벽체, 거리장식들이 더 선명하게 빛난다. 검은 강물처럼 번뜩이는 포장도로에는 고층건물들의 웅자가 거꾸로 비껴있다.
큰길량옆에 키 높이 자란 무성한 가로수의 잎새에는 수천억개의 구슬알을 마구 뿌려놓은듯 물방울이 반짝인다. 비를 긋고나서 웃고떠들며 오고가는 사람들이 그림같은 화폭에 생의 활력을 불어넣는다.
차안에는 금속공업성 부상 박상근이 앉아있다.
박상근은 천리마제강련합기업소에 나가는 길이다. 강선은 한때 지배인으로 사업하던 잊지 못할 고장이다. 처음으로 제대배낭을 풀어놓았었고 30여년 일해왔다. 지금은 대학을 졸업한 아들
론의의 초점은 제강소현대화문제였다. 성의 책임일군들속에서 론의가 분분했다. 지배인 김성남이 제강소현대화를 밀고나갈 인물이 못된다는것이다. 보다 능력이 있고 활동력이 있는 일군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거의 다수를 차지했다. 아마 박상근이 막아나서지 않았더라면 그의 운명이 다르게 되였을수도 있었다.
《김성남동무가 제강소의 현대화를 하지 못한 책임은 물론 본인의 사업능력에도 있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저의 실책이 더 크다고 봅니다.
강선의 현대화는 처음부터 내가 주관하여왔습니다. 알다싶이 A그룹과의 외교전을 벌려 모든 계약이 순조롭게 합의되였으나 끝내 좌절되고말았습니다. 이렇게 놓고볼 때 제강소현대화가 여러해동안 지연된 책임은 김성남동무의 결함만이 아닙니다. 이제 지배인을 교체한다면 새로 부임되는 사람이 제강소의 현실태를 료해하고 자기 사업을 원만히 수행하자 해도 적지 않은 시일이 요구될것입니다. 그만큼 제강소의 현대화는 늦어집니다. 김성남동무는 배짱도 있고 오래동안 제강소에서 일한 경험이 풍부하고 해외에 다니면서 현대야금기술에 대한 파악도 깊은 일군입니다. 이제 그만 한 새 지배인을 어디서 찾겠습니까? 그러니 한번 더 기회를 주었으면 합니다.》
이렇게 되여 김성남의 머리우에 드리웠던 검은구름이 일단 가셔지게 되였다. 그 문제와 관련해서는 제강소당위원회의 적극적인 보증도 있었던것이다. …
박상근은 안도의 긴숨을 내쉬였다.
그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에 승용차는 어느덧 제강소사무실 앞마당에 와서 멎었다. 박상근은 차에서 내려 지배인실로 들어갔다.
《그동안 잘 있었나?》
방에 들어선 박상근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인사를 하는 김성남에게 손을 들어보이고는 다부진 몸을 쏘파에 실었다. 그는 옆차대우의 보온병에서 찬물을 고뿌에 부어 천천히 마시며 김성남의 얼굴에 눈길을 주었다. 늘 배심좋게 어려있던 미소가 사라지고 미간에 주름살이 패운것을 보면 마음속 고충이 심한것 같았다.
박상근은 측은한 생각이 들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들고있던 고뿌를 차대우에 놓았다.
《그래, 요즘 일이 잘돼나가나?》
박상근은 응대가 없는 그를 띄여보고 자기 말이 너무 일반적이였음을 느꼈다.
《련속조괴기성능은 어떤가?》
그제서야 김성남은 조용히 대답했다.
《능력이 훨씬 높아졌습니다.… 쇠물을 미처 보장 못할 정도입니다.》
자기가 있을 때에는 련속조괴기가 너무 낡아 생산량이 얼마되지도 않는 쇠물마저 받아물지 못하는 형편이였었다.
박상근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이제는 전기로의 현대화를 내밀수 있는 준비가 된셈이구만! 오이는 거꾸로 먹어도 제맛이라고 련속조괴기의 개조도 제강소현대화의 한부분이지.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단말이야.
제강소에서 현대화라고 하면 먼저 전기로부터 꼽으니까. 하긴 그게 옳은것이지. 안 그런가?》
김성남은 묵묵히 듣기만 한다. 그는 박상근이 단순히 련속조괴기의 성능때문에 내려온것이 아니라는것을 짐작했지만 그렇다고 구태여 내색하고싶지 않았다.
생산과 관련된 실무적문제들에 대하여 이것저것 알아보던 박상근이 슬며시 말머리를 돌렸다.
《참, 며칠전에 상급당에서 료해하러 내려왔었다면서?…》
김성남은 대범하게 말했다.
《제강소를 현대화하지 못한 저의 잘못을 심각하게 반성하였습니다. 전 어떤 처벌도 다 받을 각오가 되여있습니다.…》
《대단한 결심이구만. 그러니 이젠 모든걸 포기하고 물러서겠다는건가?》
《뭐, 해임된다고 일을 못합니까? 무슨 직책에서 일하던 제강소현대화에선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음, 역시 쇠물집자손의 배심은 살아있구만. 내 자네에게 뭘 숨기겠나.》
박상근은 성에서 론의되였던 회의전말을 간단히 이야기해주었다.
김성남은 늘 변함없이 진심으로 도와주는 그에 대한 고마움을 깊이 느껴보면서도 스스로
《저같은건 워낙 지배인재목이 못됩니다.…》
《그런 소린 그만하고 이제부턴 작전을 잘 짜고들어야 하오.
새 세기초부터
문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ㅌ설계연구소 기사장 서승민이 들어왔다.
성에서 파견한 제강소현대화추진 지도소조책임자인 그는 부상이 내려왔다는 전달을 받고온것이다.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그에게 들어와앉으라고 손짓 한 박상근은 김성남에게 물었다.
《그래, 뭘 좀 구상한게 있소?》
잠시 생각에 잠겼던 김성남은 무겁게 말머리를 뗐다.
《초고전력전기로를 건설하려고 생각을 하고있는데 아직은…》
박상근은 김성남의 말을 더 들으려 하지 않고 물었다.
《기술자들은 뭐라고 하오?》
《고전력전기로정도에서 해보자고 제기합니다. 페기시킨 로에서 떼낸 로용변압기와 일부 설비들을 조금만 개조하여…》
박상근은 또다시 그의 말을 중도에서 잘랐다.
《고전력전기로라…》
말꼬리를 길게 끌며 쏘파에서 일어난 박상근은 가슴에 두팔을 겹치고 천천히 방안을 거닐었다. 무엇인가 자기 구상과 맞지 않을 때 하군하는 동작이다. 한동안 자세를 고치지 않고 걷던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서승민을 쳐다보았다.
《동무생각은 어떻소?》
갑자기 질문을 당한 서승민은 습관적으로 벗어진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전기로의 현대화라고 하면 초고전력전기로건설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강소실정에서는…》
서승민은 말을 채 맺지 않고 김성남을 얼핏 쳐다보더니 자리에 앉았다. 박상근은 머리를 끄덕거린다.
《옳소, 성남동무도 해외에 나가보아서 알겠지만 세계야금공업발전추세는 초고전력전기로란 말이요. 헌데 기술자들이 제기했다는 그 고전력전기로라는게 뭐요. 대담하지 못하게… 안 그렇소? 성남동무.》
김성남은 얼굴이 뜨거워났다. 부상의 말이 옳다.
그렇다면 무슨 방도라도 있단 말인가?
뚜벅뚜벅 방안을 거닐던 박상근이 쏘파에 가앉으며 누구에게라 없이 말했다.
《우리가 하자는 제강소현대화는 그 누가 와보아도 손색이 없는 최첨단기술로 장비된 현대화이지 결코 땜때기식이 아니란 말이요. 그런데… 제강소실정에서 초고전력전기로건설은 말그대로 시기상조인거고.》
《?…》
박상근은 자기 말이 던진 여운을 가늠해보는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김성남을 바라보았다.
김성남은 부상의 의도를 가늠할수가 없었다. 초고전력전기로를 건설해야 한다면서도 그것이 시기상조라고 하니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건가?… 그의 마음을 들여다본듯 박상근은 의미있는 눈길을 성남에게 주더니 시선을 떼지 않은채로 무게있게 입을 열었다.
《이러한 형편을 고려하여 초고전력전기로 한기만이라도 다시 들여오자는거요!》
《예?…》
김성남은 그제서야 부상의 진의도를 명백히 느낄수 있었다. 그러나 공감이 가지 않았다. 얼굴이 저도 모르게 찌프러졌다.
《짐승도 한번 빠졌던 함정에 두번다시 빠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의 말속에는 실현도 시키지 못하면서 여러해동안 외교전을 벌려온데 대한 후회와 불만이 짙게 깔려있었다.
눈섭을 쭝깃거리며 담배를 붙여문 박상근이 그의 말을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옳소. 우리가 외교전에서 실패의 쓴맛을 본것은 사실이요, 헌데 그것이 다 무엇때문인지 알기나 하오?》
김성남은 긴장한 눈길로 부상의 격해진 얼굴을 주시했다.
《최근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건 미국것들과 불순세력들의 비렬한 음모책동때문이였소!》
《예?…》
김성남과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서승민도 다같이 눈이 둥그래졌다.
《미국것들은 북조선에 현대화된 강철공장을 주게 되면 강선이 일떠서고 그러면 조선이 일어나고 강성국가가 될수 있다고 하면서 우리와 거래하던 회사들은 물론 그 나라 국회에까지 로골적인 압력을 가했던거요.》
《?》
지금까지 흑막속에 파묻혀있던 실패의 원인을 알게 된 김성남은 쥐고있던 원주필이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압력을 가하는 미국것들이나 그에 머리를 숙이고 동조하는것들이나 다같이 우리가 잘되고 강성국가건설의 실현을 바라지 않는 불순세력들이 아닌가.… 어제날에도 그랬고 오늘도 앞으로도 그것들의 흉심은 변하지 않을것이다. 그런줄도 모르고 외국설비에 큰 기대를 걸고있었으니 얼마나 눈이 멀고 어리석었는가.… 가슴이 저미는것과 함께 그것들에 대한 격분과 반발심이 굴뚝처럼 치밀어오른다. 김성남은 저도 모르게 책상을 쾅 내리쳤다. 쥐고있던 원주필이 뚝 부러져나갔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김성남은 저력있게 말했다.
《미국것들이 그런다고 우리가 주저앉겠습니까. 우리 힘으로 기어이 초고전력전기로를 건설하겠습니다.》
《?…》
놀라는 박상근을 바라보며 김성남은 자기가 한 말을 음미해보았다. 무슨 배심으로 초고전력전기로건설을 자체로 하겠다고 말했는가.
그 순간 그의 온몸을 지배한 그 격렬한 내적충동이 어디서 생겨난것인지는 알수 없었으나 그렇게 하고나니 마음이 다 후련해졌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심장이 터져 일이 났을지도 모른다.
박상근과 서승민은 김성남의 이 뜻밖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 마주보기만 하였다. 아직 방도가 서지 않아 결심을 하지 못하고있던 그가 초고전력전기로를 자체로 만들겠다고 선뜻 용단을 내리니…
김성남이 너무도 분격하여 격동된김에 리성을 잃은것이라고 판단한 박상근은 리해된다는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옳소. 그 정신과 배짱이 중요한거요. 미국것들과는 끝까지 맞서야 하오. 그래서 이번에는 미국것들의 압력이 통하지 않는 나라와 교섭하자는거요. 그리 알고 기업소에서도 거기에 맞게 준비사업을 잘해야겠소.》
좀전의 격동이 채 가라앉지 않은 성남이로서는 그 자리에서 단호히 부정하고싶었지만 참았다. 박상근은 부상이기 전에
《그건… 저 혼자 결심할 문제가 아닙니다. 련합당위원회와 토론해보겠습니다.… 구태여 저의 결심을 말한다면 전기로의 현대화는 우리힘으로 하겠다는것입니다.》
박상근은 미간을 찌프렸다. 그가 련합당위원회에 미는걸 보면 의견이 있다는 소리다. 그러니 단단히 그루를 박아야 한다.
《내 이미 말했지만… 제강소실정에서 초고전력전기로건설은 시기상조요! 그것은 즉흥적으로 결심할 문제가 아니지.》
《…》
펼쳐놓은 사업수첩에 초고전력전기로건설이라는 글자만 빼곡이 반복해쓸뿐 김성남은 아무 대꾸도 없다.
일언반구도 없이 두사람의 얼굴만 번갈아보고있던 서승민이 부상의 의도를 제꺽 포착하고 자기 견해를 피력했다.
《이미 벌렸던 외교전의 좌절원인을 알았으니 거기에 대처하여 어떤 방법으로든 현대적전기로를 들여오는 길만이 가장 실리있고 빠른 길이라고 봅니다. 제힘으로 초고전력전기로를 건설한다고 하면서 시간만 끌다가는 이것도 저것도 다 놓치게 되고 씻을수 없는 과오를 다시 범하게 될것입니다.》
김성남은 벌컥했다.
《내가 과오를 범하든말든 상관하지 마시오.》
《?…》
그 말이 서승민에게만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걸 박상근은 모를리 없었다. 어릴 때부터 일단 자기가 하려고 결심했던것은 머리가 깨져도 기어이 해보고야 마는 김성남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있는 그였던것이다.
《지배인동무, 그 욱하는 성미를 좀 고치라구. 사업에서 즉흥은 실패의 전제요. 욕망 하나만 가지고는 안되지. 누울 자릴 보고 발을 펴야 한다고…
내 다시한번 강조하는데 전기로를 들여오는가 마는가 하는것은 단순한 경제실무적인 문제인것이 아니라 미국것들과 불순세력들의 악랄한 봉쇄책동과 싸워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심각한 정치적대결이라는것이요!
하지도 못할걸 시작했다가 실패하는 날에는 더 큰 정치적손실을 가져온다는걸 명심해야 하오.》
《…》
그들이 돌아간 후에도 김성남은 애꿎은 담배만 피우며 말뚝처럼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