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회


제1장. 고뇌


5


박영재는 자그마한 멜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설계실을 나섰다.

뜨거운 대기가 온몸에 확 풍겨왔다. 저녁 5시가 넘었으나 한여름의 해빛은 지칠줄 모르고 뜨겁게 내려쪼인다. 넓은 구내길 량안에 늘어선 가로수들과 꽃나무잎사귀마저 시들어버린듯 까딱 움직이지 않는다. 숨이 꺽꺽 막힌다.

들고있던 책으로 해빛을 가리우며 걷고있던 박영재는 얼굴의 땀을 손수건으로 훔치고는 정문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퇴근길에 오른 사람들이 그 더위속에서도 활기있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마주 걸어오고 지나쳤다. 안면있는 사람들은 어딜 가는가고 묻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영재는 싱긋이 웃는것으로 대답했다.

강철직장앞에까지 간 박영재는 구내길을 건너가 서늘한 가로수그늘밑에 들어섰다. 손에 들고있던 책으로 연신 바람을 일구며 강철직장의 커다란 철대문에 붙은 자그마한 나들문을 바라보았다. 드문히 사람들이 나들문을 열고 나오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한다.

오늘부터 선희는 낮교대이다. 지금 박영재는 퇴근해나올 강선희를 기다리고있다. 그는 낮에만 출근하고 전기로조작공인 선희는 3교대근무를 한다.

그래서 처녀가 낮교대에서 일할 때마다 서로 기다려 함께 퇴근하군 했다.

둥그런 가로수의 그늘이 점점 동쪽으로 움직여가건만 선희는 나타날줄 모른다. 작업반에서 무슨 총화가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박영재는 거기서 조금 떨어져있는 구내도서관앞 소공원의자에 가앉았다. 직장에서 나온 선희가 그가 보이지 않으면 여기로 찾아올것이다. 박영재가 선희를 처음 알게 된것은 제강소 로동과에서였다. 김책공업종합대학을 졸업할 당시 마침 제강소에서 지배인으로 사업하던 아버지가 금속공업성에 소환되였기에 평양에 떨어지려고 하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반대했다. 제강소를 현대화하는 거창한 사업이 벌어지고있으니 현장경험도 쌓고 새 지배인 김성남을 잘 도와주라는것이다.

박영재는 군소리없이 제강소에 내려왔다.

처음 기업소설계실에 배치받은 박영재는 실무적인 수속을 위해 행정청사에 갔었다. 그가 만나려는 일군은 공교롭게도 자리를 뜨고 없었다.

할수없이 마당에 있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중학교를 졸업한 애어린 처녀들이 그곁에서 이야기를 주고받고있었다. 그들도 아마 만나야 할 일군을 기다리는 모양이였다. 그들가운데는 오리무리속의 백조마냥 흰 얼굴에 눈이 까만 처녀가 있었는데 그가 무슨 우스운 이야기를 했는지 처녀들이 배를 그러안고 깔깔 웃어댄다.

성격이 온화하고 조용한것을 좋아하는 박영재는 보던 책에서 눈을 떼고 좀 조용하라고 소리쳤었다. 처녀들은 키가 늘씬하고 멀끔한 박영재를 흘끔 쳐다보고나서 웃음을 거두고 눈을 내리깔았다.

유독 그 백조같은 처녀만이 도고하게 머리를 쳐들었다. 처녀들이 웃는것이 무슨 잘못인가고, 웃음소리가 싫으면 다른데로 가시든가 하라고 했다.

박영재는 어이가 없어 그 처녀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처녀의 대담한 눈길앞에 제가 먼저 눈길을 돌리고말았다.

그러자 그들을 지켜보던 처녀들이 입을 싸쥐고 웃었다. 얼굴이 벌개진 박영재는 제 무안에 자리를 뜨고말았다, 처녀들의 웃음소리에 밀리우면서…

역시 철의 도시에서 자란 처녀들이였다.

그후 박영재는 강철직장에 나갔다가 1호전기로조작실에서 그 처녀를 다시 보았다. 노란 비닐안전모밑에 빨간 나이론수건으로 머리를 꽁진 처녀는 그를 알아보고 반가운듯 눈웃음을 지었으나 박영재는 그때 일이 되살아나 머리를 돌리고말았다.

참, 처녀가 알아보고 먼저 눈인사를 하는데 사내라는게 얼굴이 벌개서 돌아서다니… 자신이 민망스러웠다. 한동안 걸어가던 그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뒤를 돌아다보았다. 처녀는 그에게 흥미가 없는듯 용해공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유쾌하게 웃고있었다. 현장에서 또는 출퇴근길에서 드문히 그 처녀를 만나군 하였으나 그 무엇때문에서였던지 온몸이 굳어지면서 마주볼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어느날 지배인의 초청으로 집에 갔던 박영재는 거기에 그 처녀가 있는것을 보고 놀랐었다. 알고보니 지배인의 사촌동생이였다.

그때부터 그들은 친숙해졌다. 영화관이나 식당에도 함께 갔고 대동강기슭을 따라 거닐기도 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리해하였고 앞날에 대한 희망도 꿈꾸었다.

이렇게 그들의 관계는 깊어갔다.

박영재는 어떻게 되여 강선희를 사랑하게 되였는지 몰랐다. 고운 얼굴인가? 고운 처녀들은 많았다. 그러면 도고하고도 랑만적인 성격때문인가?

아니면 지배인인 오빠에게 한마디만 하면 리상적인 직업을 선택할수도 있으련만 굳이 전기로조작공으로 일하고있는 그 마음때문인가?…

무엇이라고 딱 찍어말할수 없다. 그러나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박영재는 도고하고 활달한 강선희에게 매혹되였다는것만은 부정할수 없었다. 그렇다고 서로 사랑을 고백한 일은 없었다. 애정어린 눈빛과 서로 위해주는 마음, 살뜰한 말의 억양에서 그것을 더 뜨겁게 느껴보며 가슴설레이는 그들이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한걸음 더 내짚지 못하고있는것은 자기나름의 생활신념때문이다.

박영재는 제강소현대화실현의 길에 자기의 기술과 지식을 남김없이 바치고 야금학계에서 인정받는 가치있는 학위론문까지 쓰고 가정을 이루겠다는 높은 목표를 세웠다. 선희는 처녀시절에 일을 많이 하여 어머니처럼 입당한 후에야 떳떳하게 시집을 가겠다고 결심했었다.

그 문제를 놓고선 서로 양보가 없었다. 과연 그날은 언제이겠는지…

《오래 기다렸어요?》

선희의 목소리에 박영재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왜 이렇게 늦었어?》

아무 대꾸도 없다. 웬일인지 기분이 좋지 않아보였다. 이럴 때 자꾸 따져물으면 그가 발칵할수 있다는것을 알고있는 박영재는 입에 자물쇠를 잠그었다. 그러면 선희가 참지 못하고 제편에서 열쇠를 여는것이다.

그들은 다투고난 사람들처럼 시무룩해서 걸어갔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의아한 눈길로 흘끔흘끔 쳐다본다.

강철직장앞에서부터 세그루 백양나무가 서있는 곳에 갈 때까지 말 한마디 없었다. 사적물보존실을 지나 정문을 가까이할 때까지도 선희는 침묵만 지킨다. 그의 참을성으로 보아서 너무 오랜 시간이다.

그래도 박영재는 참고 기다렸다.

정문을 통과하여 대형속보판에 이르자 선희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의자에 가서 좀 앉자요.》

《?…》

소공원의 의자에 가앉아서도 선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더 참지 못한것은 박영재였다. 자기 입에 잠근 자물쇠를 제가 열어야 할것 같았다.

《선희…무슨 일이 있었소?》

그 목소리가 어찌도 부드럽고 살뜰했던지 선희는 얼굴을 와락 싸쥐고 흐느껴울었다. 박영재는 어쩔줄 몰라 구원을 청하듯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들에게서 좀 떨어져앉아 재미있게 속삭이고있던 청춘남녀가 놀라서 이쪽을 쳐다본다. 아마도 두사람이 다투고있는줄 아는 모양이다.

다급해난 박영재가 속삭였다.

《사람들이 보고있는데 그만하오. 무슨 일인지 말해야 알게 아니요.》

한동안 아무말없이 울고난 선희가 손수건을 꺼내 눈굽을 찍었다.

《오늘… 사고심의가 있었어요.》

《사고심의라니?》

선희는 호- 한숨을 내쉬였다.

《어제 밤교대때 제가 그만… 조작을 잘못해서 전극을 부러뜨렸어요. …》

《?!》

그제서야 박영재는 그가 늦게 퇴근한것이며 흐느껴운 원인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어떻게 위로해주었으면 좋을지 도무지 말귀를 찾을수 없었다. 언제인가 퍽 오래전 전극자동조절장치를 전기로에 도입해달라고 선희가 간절히 부탁한 일이 있었다. 전극승강장치를 수동으로 조절하다보니 드문히 실수를 하여 전극이 부러지는 사고가 빈번히 일어난다. 그러면 입살이 센 용해공들에게 되게 몰리울뿐아니라 그동안 성근하게 일해온 조작공의 노력도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더우기는 강철생산에 막대한 지장을 주게 된다는것이다.

박영재는 현대적인 강철공장을 들여오겠는데 다 낡은 전기로에 구태여 전극자동조절장치를 도입할 필요가 있겠는가고 설복했었다.

그런데 모든것이 좌절로 끝나고말았으니 이제 와서 그에게 무슨 말을 해줄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처녀에게 신심이 되는 위로의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하는 처지에 이른 자신이 몹시 민망스러웠다.

한동안 울고나니 마음이 안정되였던지, 아무말없이 서있는 그가 민망스러웠던지 선희가 흘깃 영재를 쳐다보았다.

《새 전기로건설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글쎄… 고전력전기로소리도 있고 초고전력전기로를 하자는 말도 있는데… 아직 선정하지 못하고있소.》

박영재의 미적지근한 소리에 선희가 톡 내쏘았다.

《무슨 대답이 그렇게 어정쩡해요? 부리당의 하늘소라는 말을 들어봤어요?》

박영재는 얼굴을 찌프렸다. 선희가 어째서 그 말을 끄집어냈는가를 간파하였던것이다.

그것은 꼭같은 거리에 있는 두개의 건초더미사이에 하늘소가 있게 되면 그의 자유로운 의지는 두 건초더미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만 한 리유를 발견하지 못하기때문에 결국 하늘소는 선자리에서 굶어죽어야 한다는 프랑스철학자 부리당쟝의 말이다. 이로부터 《부리당의 하늘소》 라는 말은 무슨 일에서나 주견이 없는 사람을 비유하는 뜻으로 씌여왔다.

영재는 그가 자기의 속마음을 빤히 들여다보는것 같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사고심의회에서 비판받은 분풀이를 그에게 하려는듯 선희는 련달아 들이댔다.

《기술자들은 왜 그리도 우유부단해요? 난 새 전기로를 기다리다가 사고를 쳐서 비판만 받고… 그러다간 시집도 못 가보고 로파가 될것같아요, 호호.》

선희는 언제 울었던가싶게 웃기까지 한다.

《그러니 제발 절 구원해줘요. 이제라도 전기로에 전극자동조절장치를 도입하자요, 네?》

웃으면서 하는 말이였으나 거기에는 사랑하는 처녀의 고충이 스며있었다.

그가 기뻐하게 속시원한 대답을 주지 못하는 자신이 더더욱 민망스러웠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오.… 그건 내 결심으로 되는것도 아니요.》

선희가 큰 눈을 곱게 흘겼다.

《아이, 답답해라. 기다리라, 기다리라하면서 벌써 몇해가 지나갔어요?》

《이번엔 빈소리가 아니요. 기업소일군들도 조만간에 무슨 결심이 있게 될게야. 그땐 내가 전극자동조절장치를 맡아하지. 시집도 못 가보고 로파가 될가봐 근심하는 선희의 걱정을 풀어주겠어, 허허.》

이때 누구인가 길쪽에서 소리쳤다.

《영재동무, 언제까지 련애만 하고 앉아있겠나?》

《?…》

한발을 땅에 짚고 자전거안장우에 앉은 조인철이 그들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는 영재와 중학교동창이며 소꿉친구였다.

영재와 선희는 스스럼없이 웃어보였다. 그들이 서로 가깝다는것은 비밀이 아니였던것이다.

《영재, 난 벌써 유치원에 갈 딸이 있어. 자네들은 빨리 서둘러야 해.》

선희가 시까슬렀다.

《반장동진 국수생각이 나는 모양이지요.》

《왜 국수뿐이겠어. 선희동무가 부어주는 술도 마셔봐야지, 허허.》 조인철이 롱말을 던지며 지나가자 그들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늘 저녁은 기분전환도 할겸 청량음료점으로 가기요. 선희가 좋아하는 빵이랑 크림을 사줄게.》

사랑이란 얼마나 천진한것인가. 방금전까지만 해도 속상하여 눈물을 흘리고 마음을 쓰던 그들은 언제 그랬던가싶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석양이 비낀 시내로 들어갔다.

청춘이란 사랑과 희망이 있어 즐거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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