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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회


제1장. 고뇌


4


《여보, 딸따리를 좀 밀어주오!》

유진섭은 손달구지바퀴가 대문턱에 걸려 넘어서지 못하자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부엌에서 동자질을 하던 로친이 물묻은 손을 행주치마로 닦으며 급히 나왔다. 로친이 뒤에서 밀었으나 파철실은 손달구지는 꿈쩍하지 않는다.

하는수없이 파철을 더러 창고에 날라들여서야 딸따리가 대문턱을 넘어섰다. 오늘따라 파철을 적지 않게 수집했다.

《에그, 열성두 참. 그만두라는데도 고생을 사서하면서 그러시우.》

유진섭은 묵묵히 아무 대꾸도 없이 파철을 부리워놓았다.

이렇게 모아들인 파철은 자동차에 실어 파철적재장에 보낸다.

세면장에서 얼굴을 씻고난 그는 웃방으로 올라갔다. 좀 한가할 때면 일기장이며 기술문헌, 편지들을 꺼내보면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젊어서는 희망으로 살고 늙어서는 추억으로 산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하지만 년로보장을 받고 들어온 유진섭의 추억은 즐거운것이 아니였다.

돌이켜보면 제강소의 현대화를 하기 전에는 환갑상도 받지 않겠다고 자식들에게 큰소릴 쳤던 그가 아니였던가.…

유진섭의 한생에서 예순번째의 설은 류다른것이였다.

설날 아침 세간난 아들딸이 참새처럼 조잘대는 애들을 앞세우고 집에 왔었다. 애들은 솜옷을 벗기 바쁘게 경쟁적으로 세배를 한다.

《할아버지, 복 많이 받고 오래오래 사세요!》

《오냐, 아버지, 어머니말 잘 듣는 착한 애가 되거라!》

유진섭은 아이들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며 준비해놓았던 과자봉지며 학습장들을 쥐여주었다.

어느새 손녀애가 어리광을 피우며 무릎우에 올라앉는가 하면 손자녀석이 목에 매달린다. 또 어떤 녀석은 팔을 잡아당긴다. 저마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싱갱이질이다.

자식들을 시집장가보내고 세간낸 후 적적하고 휑뎅그레하던 집안이 애들의 재잘거림과 웃음으로 차고넘쳐 갑자기 좁아진듯싶다.

어머니가 밤새껏 빚은 만두라며 애들은 집에서 해온 설음식을 할아버지, 할머니앞에 내놓으며 자랑질이다.

웬간해서는 웃지 않는 유진섭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질줄 몰랐다.

고사리같은 손으로 턱이며 입술을 간지럽히고 재롱을 피우는 외손녀가 너무도 고와 그 애의 사과알같은 볼에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어주자 저저마다 입을 맞춰달라고 성화이다. 젊어서는 언제한번 자식들을 안아보지 않았던 그였으나 나이를 먹고보니 왜서인지 손자, 손녀들이 못 견디게 보고싶고 기다려지는것이였다. 그래서 두벌자식이 더 곱다는 말이 나온 모양이다.

음식상을 다 차리자 맏아들 명진이가 목이 긴 술병을 기울여 술잔에 가득 붓고나서 조심히 말을 뗐다.

《아버지, 올해엔 환갑상을 받으시고 집에 들어오셔야지요!》

술을 그리 즐겨하지 않는 진섭이였지만 아무말없이 술잔을 단숨에 쭉 비웠다. 나이가 다된 아버지를 생각해주는 자식의 도리는 고마운 일이나 어쨌든 그에게는 아들의 말이 달갑지는 않았다.

웬 까닭인지 은근히 반발심까지 났다.

《무슨 소릴 하는거냐. 아직은 어떤 일을 하나 너보다는 나을게다!》

딸애가 부어주는 두번째 잔을 다시 받아드는 그를 보며 로친이 실주름잡힌 눈을 곱게 흘겼다.

《무슨 큰소리우? 머리가 허옇게 세여가면서도 속은 아직 살아서…》

말은 그랬으나 로친의 얼굴표정에는 감기 한번 앓아 누워본적이 없는 령감에 대한 은근한 자랑이 비껴있었다. 빈속에 연거퍼 술 두잔을 마시고 기분이 뜬 진섭의 눈에 장난기어린 미소가 어려있다.

《뭐, 큰소리라구? 좋소! 내 빈소리가 아니라는걸 증명하지!》

진섭은 팔소매를 거두어올리며 아직도 근육이 불끈한 팔을 아들에게 내밀었다.

《나하고 팔씨름을 해보자. 만약 내가 지게 되면 년로보장을 받을것이고 내가 이기게 되면…》

진섭이 뒤말을 갑자르는데 부지런히 밥술을 놀리던 다섯살난 손자녀석이 소리쳤다.

《아버지가 지면 사탕을 사내라고 하자요, 예? 할아버지.》

옆에 앉았던 며느리가 입을 싸쥐고 웃었다. 손자녀석의 볼에 붙은 밥알을 떼주며 로친이 핀잔을 준다.

《에그, 점점 못하는 소리가 없구려. 아무렴, 영수 애비가 당신한테 질것 같수?》

안해의 이 말에 더욱 기가 오른 진섭은 아들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음식그릇을 한옆으로 밀어놓았다.

《자, 팔을 올려놔라!》

아버지의 말을 롱담으로 흘려넘기려던 명진은 잠시 주춤거리다가 벙긋 웃으며 팔을 내밀었다. 부자간이 정말로 손을 맞잡고 팔을 세우자 로친이 놀라서 눈이 사발만 해졌다.

하긴 집에 들어오면 늘 보풀이 인 책과 도면을 붙들고앉아 벙어리마냥 묻는 말에도 대답을 안하던 령감이다.

《어서 먼저 힘을 써라!》

《아니, 아버지가 먼저 쓰십시오.》

맏아들이 나이 서른이 넘었지만 롱말은커녕 언제한번 힘을 겨루어보자고 손을 잡아본적도 없었다. 무슨 정신에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냈는지 진섭이 스스로도 놀라왔고 웃음이 나왔다. 한편 이러다가 정말 아들에게 지게 되면 어쩌랴 하는 위구심도 없지 않았다.

아무리 아들이라고 해도 경기가 경기인것만큼 지고싶지도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진섭은 먼저 끙 하고 팔에 힘을 주었다. 한순간 명진은 기울어질듯 손목을 뒤로 제치더니 떡 버티였다.

처음에 롱으로 생각하고 웃음으로 지켜보던 딸과 며느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정색해서 힘을 겨루는것을 보자 누구를 응원했으면 좋을지 몰라 눈치만 본다. 다만 철부지 애들만이 숟가락을 놓고 손벽을 치며 떠들어댔다.

《할아버지 이겨라!》

《힘을 내라요, 할아버지! 그러단 지겠어요.》

아이들은 모두 할아버지편이다. 사탕이 생긴다는 단순한 생각도 있겠지만 언제나 저들의 부잡스러운 응석을 너그럽게 다 받아주는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의 표시인것이다.

비록 소박한 애들의 믿음이였지만 진섭에게는 큰 힘이 되였다. 그가 팔굽까지 쳐들면서 힘껏 내리눌렀으나 아들은 끄떡없이 눈웃음만 짓는다.

그러자 로친이 근심스럽게 한마디 했다.

《어이구, 힘을 더 쓰구려 …》

로친은 로친대로 령감이 이겼으면 하는 눈치이고 며느리는 제 남편이 질가봐 말은 못하고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딸은 그것이 더 재미나서 입을 싸쥐고 키득거렸다.

머루알같은 눈을 깜박거리며 량쪽을 엇갈아 바라보던 철준이녀석이 아무래도 안되겠던지 할아버지를 도와나섰다. 두손과 가슴까지 내밀어 아버지의 팔목을 내리눌렀다. 명진의 손등이 쿵- 소리를 내며 밥상에 닿았다.

《야! 할아버지 이겼다. 아버지, 사탕 사내라요, 사탕…》

손자와 손녀들이 손벽을 치며 콩당콩당 뛰였고 어른들은 수저를 든채 허리가 끊어지게 웃어댔다.

로친이 눈을 슴뻑거리며 물었다.

《당신 오늘 웬일이요? 아들과 팔씨름을 다 하고…》

딸이 덩달아 수긍한다.

《아버지가 좋아하는걸 보니 우리도 기뻐요! 아버진 한결 젊어진것 같아요! 호호.》

미더운 눈길로 자식들을 바라보는 진섭의 얼굴에 진중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럴만한 일이 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새 세기에 들어와 우리 제강소를 현대화할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지 않았니. 그래서 지금 제강소일군들과 기술자들은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현대화를 실현하겠는가를 모색하고있다. 그런데 나이가 되였다고 제강소와 함께 늙어온 내가 년로보장을 받아야 옳겠느냐?》

명진이가 어줍은듯 손으로 뒤머리를 긁적거린다.

《전… 아버지를 위해준다는것만 생각했지 아버지의 그 깊은 뜻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됐다, 됐어.… 난 좀전에 환갑말이 나오고 년로보장소리가 나오자 웬일인지 가슴이 덜컹 하고 영 기분이 없더구나. 그래서 술을 연거퍼 두잔이나 마셨지, 허허.》

막내딸 영희가 부어놓은 술을 절반쯤 비우고난 진섭은 손자녀석이 입에 넣어준 기름튀기를 씹으며 식구들을 둘러보았다.

《난 말이다… 제강소를 현대화하기 전에는 절대로 환갑상을 받지 않을 결심이다!》

영희가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꼭, 어느 영화의 주인공처럼 말씀하시네. 그러니 아버지의 환갑을 쇠드리기 위해서라도 제강소현대화를 빨리 다그쳐야겠군요. 연회상에 앉은 여러분들도 다 들으셨지요, 호호.》

《나같은걸 어떻게 영화의 주인공과 대비하는거냐. 허지만 그 주인공을 따라배우는것은 좋은 일이지! 허허.》

그때로부터 여러해가 흘러갔다. 유진섭에게는 그 류다른 설이 어쩐지 서글프게만 돌이켜진다.

추억은 꼬리를 물고 갈마든다.…

그때 유진섭은 외국설비들의 기술제안서를 토의하는 협의회에서 자기의 기술적주장을 완강하게 피력했었다. 그러나 지배인의 모욕적인 언사와 완력으로 그 주장이 론의될 여지없이 꺾이웠다. 더 참을수 없는것은 그 어떤 의견과 주장에도 관계없이 해외에서 강철공장을 들여오는 문제가 결정된것이다.

기술자로서의 자존심이 상한것은 말할것 없고 유진섭은 자기라는 존재가 더는 필요없게 되였다는것을 통절하게 느끼였다. 이제는 싫든좋든 강철공장을 들여오는것을 지켜보는 길만이 남아있었다.

이럴바엔 나이도 지났겠다, 아예 집으로 은퇴하는것이 낫지 않겠는가.…

생각은 그러해도 마음은 움직여지지 않았었다.

그럴 때 운명적인 일이 벌어졌다.

지배인 김성남이 기술대표단으로 함께 나가자고 찾은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유진섭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뜻밖이였다.

날 떠보느라고 그러는가? 그런것 같지는 않았다.

《박상근부상과도 다 토의되였소. 한번 잘해봅시다.》

문득 젊은 지배인의 대범한 마음이 느껴졌다.

공장에서는 드문히 해외출장이 제기되군 하였는데 거기에 선발되는 인원수는 극히 제한되여있었다.

그는 재능있는 기술자라는 인정을 받고 40대초부터 지금까지 여러차례 해외출장이 제기되였으나 일부 일군들의 반대로 부결당하군 하였다. 그럴 때마다 해외출장을 기대하고 바랐던 자신에 대한 경멸만이 가슴가득 고여오르군 했다. 그것은 단순히 해외출장을 가는가 못 가는가 하는 실무적인 문제에 그치는것이 아니였다. 자기에 대한 믿음과 기대라는 의미에서 그 무게가 있는것이였다. 그러나 다음순간 그러한 해외출장이 이렇게 쉽게 그것도 지배인에 의해 결정되였다는것이 유진섭으로서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고 왜서인지 그 《선의》가 께름하고 불쾌했다. 더우기 불리한 전력조건에서 해외에서의 강철공장납입은 현대화의 방도가 아니라고 주장한 유진섭이로서는 기술대표단으로 함께 가는것이 어쩐지 비굴한 일처럼 생각되였다.

해외로 나가 발전되였다고 하는 최첨단설비를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시야를 넓히고싶은 욕망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리기적인 욕망인것이고… 잠시나마 이런 생각을 했다는것이 부끄러웠다.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유진섭이 머리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아니, 전… 건강이 좋지 않아 못 가겠습니다.》

《뭐요?…》

환갑나이가 지났다고는 하지만 혈색이 불깃하고 몸이 단단해보이는 유진섭이다.

건강이 좋지 않아 못 가겠다? 그것은 구실이다.

김성남은 그것이 자기에 대한 은근한 도전이라고 단정했다. 울뚝하는 성미 같아서는 싫으면 그만두라고 소리치고싶었으나 꾹 참았다.

《난 그 심정이 리해되오. 그러나 진섭동무의 주장이 절대적이라고는 할수 없지 않소? 고집을 그만 부리고 우리 함께 갑시다. 외교전을 잘 벌려 우리의 전력조건에 맞는 전기로를 들여오면 되지 않소.》

《…》

지배인의 요구에 응하는것은 기술자의 량심을 저버리는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스스로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것을 너무도 잘 알고있는 유진섭이였다. 그렇게 되면 제강소를 위하여 한생을 값있게 바치려 한 그 소중한 념원이 저녁노을처럼 사라지고만다. 제강소의 현대화를 끝내고야 환갑상을 받겠다고 한 자신이였다.

나는 무엇을 위해 피타게 공부하였던가.… 수많은 기술혁신, 창안품들에 과연 나의 심혈이 깃들어있지 않단 말인가?

꺼지지 않는 강선의 노을을 위하여 짧은 한생을 마친 한 인간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가 바로 지배인의 아버지였다는 생각이 들며 가슴이 더 아팠다.

아무말없이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는 유진섭에게 김성남은 그루를 박듯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오? 진섭동무에겐 이것이 인생 말년에 처음이자 마지막기회가 아니요?》

인생 말년의 마지막기회? 유진섭은 단호하게 머리를 쳐들었다.

《난 두말하지 않습니다.》

김성남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상냥하던 그의 말투가 돌변했다.

《좋소, 그럼… 기술공정실에 더 있을 필요가 있겠소?》

《?…》

기술공정실은 년로보장을 받을 나이가 지난 능력있는 오랜 기술자들이나 행정일군들중에서 기업소관리운영에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들로 조직한 부서이다.

지배인과 기사장의 직속으로 있으면서 기술문제라든가 행정실무적인 문제들이 제기되면 고문격으로 참가하여 도와주는 로병실이라고도 할수 있다. 여기에는 각 부문의 기술자, 전문가들 그리고 공로있는 행정일군들까지 망라되여있다.

유진섭은 두눈을 지그시 감으며 수긍했다.

《난 이미 각오했수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는듯 했고 어찌 보면 신음에 가까왔다.

《내 마지막으로 권고하겠소. 계기를 고려할줄 알고 대담하게 결심할줄 알아야 합니다. 성공과 명예는 소심한 사람을 따르지 않소!》

유진섭이 오연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 어떤 명예도 상처입은 량심은 위로해줄수 없지요. 난 명예를 위해 량심을 저버리고싶지 않습니다.》

그후 몇차례의 현대화설비구입작전이 좌절로 끝나는것을 목격하고 가슴이 더 아팠다. 자기자신을 타매하였다.

그러나 유진섭은 사사로운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집으로 들어온 자신의 처사를 정당화할수 없었다. 무엇인가 귀중한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마음이 허전하고 불안스러웠다.

그랬다. 뚜렷한 삶의 목표가 없어진것이다.

이 마음의 공허를 무엇으로 메꾼단 말인가… 무엇으로?

그래서 시작한 일이 파철수집이다. 손달구지를 끌고 제강소의 구내와 마을을 돌아다니며 땅에 묻힌 파철을 파내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크고작은 철붙이들을 주어모아싣고는 집으로 왔다.

이렇게 모아놓았다가 일주일에 한번씩 파철적재장에 실어다준다.

그리고 저녁이면 기술서적을 탐독하였다. 그러느라면 불안하던 마음이 한결 편해지고 잠도 잘 온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위안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파철을 모아바치고 지원사업을 해도 마음의 공허는 그 무엇으로도 메꿀수 없었다. 그래도 유진섭은 그 일에 매달렸다. 그것마저 그만둔다면 아무런 삶의 목적도 없게 되는것이다.


X


유진섭은 여전히 손달구지를 끌고 파철수집에 나갔다. 직장에 출근할 때에는 어델 가나 눈에 뜨이는것이 파철같았지만 정작 눈을 도사리고 살펴보니 더 뜨이지 않는것 같다.

하긴 가두녀맹원들까지 떨쳐나 샅샅이 수집하고있으니 그에게까지 차례질리 만무했다. 그래서 제강소주변, 사람들의 눈길이 잘 미치지 않는 곳으로 다니며 파철을 주어모았다.

오늘은 우연히 땅속에 묻힌 파철을 발견했다. 이런 때를 예견하여 가지고다니던 곡괭이로 땅을 팠다. 땀을 뚝뚝 흘리며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면서 근 반나절이나 걸려서야 파냈다. 쇠녹이 벌겋게 덮인 무슨 치차토막이다.

50키로는 잘될것 같았다.

가까스로 손달구지에 파철을 실은 유진섭은 무거운것을 집으로 끌고가느니 아예 파철적재장에 실어다주기로 마음먹고 제강소후문으로 들어섰다.

길거리에서는 그래도 지나가던 고마운 사람들이 밀어주기도 하지만 인적이 드문 구내길에서는 혼자서 끌어야 했다.

바퀴에서 삐그덕삐그덕 소리가 났다. 잘 굴러가지 않는다. 집에서 나올 때 기름을 치지 못한데도 있지만 이제는 여러해 써오다나니 바퀴축이 닳아먹은것이다.

삐그덕거리는 그 소리가 마치도 떳떳치 못한 자기의 인생 말년처럼 생각되였다.

갑자기 손달구지가 가볍게 굴러간다. 누군가 밀어주는 모양이다.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려고 뒤를 돌아보던 유진섭은 흠칫했다.

감실감실한 얼굴에 실주름이 잡힌, 중년을 훨씬 넘겼을 녀인인데 무척 낯익어보였다. 유진섭은 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손달구지를 세우고 다시 돌아섰다. 녀인은 천천히 허리를 폈다.

《참 오래간만이예요.》

그는 지배인의 고모인 김소연이였다.

철의 도시에서 수십년 같이 나이를 먹어왔지만 좁고도 넓은것이 강선땅이여서인지, 보금자리가 서로 다르고 제나름의 생활속에 깊숙이 잠겨서였던지 이렇게 정면으로 만나는 기회가 드물었다.

소연을 보는 순간 유진섭은 반가움에 앞서 무엇인가 빚을 지고있는듯 한 죄스러움이 가슴 한가득 차올라 아무 말도 못하고 저도 모르게 얼굴에 그늘을 지웠다.

밝지 못한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괴로와 소연은 제먼저 허리를 굽히며 재촉했다.

《어서 끌기나 해요, 밀어줄테니…》

《그런데 어딜 가는 길이요?》

《딸에게 점심밥을… 1호전기로 조작공이예요.》

《1호전기로 조작공?…》

《강선희라고…》

《?!…》

두사람은 서로 제 생각에 잠겨 딸따리를 끌고 밀었다.

파철적재장입구에서 유진섭은 딸따리를 세웠다. 파철을 가득 실은 자동차들이 계량기를 거쳐 적재장으로 들어간다. 자동차들에서 내뿜는 배기가스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가두녀맹원들이 딸따리를 끌고밀면서 오구구 붐비였다.

싣고온 파철을 먼저 바치려고 뛰다싶이 끌고간다.

소연은 파철우에 올려놓았던 점심구럭을 집어들며 측은한 눈길로 유진섭을 바라보았다.

《년세도 있는데 쉬염쉬염 몸을 돌보면서 하세요.》

《!…》

유진섭은 강철직장쪽으로 사라져가는 소연의 뒤모습을 이윽히 바라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다심한 소연이다.

그를 알게 된지도 어언 4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다년간 군사복무를 마친 유진섭은 제대명령을 받게 되였다. 그때 유진섭의 생각은 복잡했다.

제대후 어디로 갈것인가, 어머니와 형님이 있는 고향 녕변으로 갈것인가.…

당시 천리마대진군운동으로 들끓던 사회주의건설장들에서는 어렵고 힘든 부문으로 청년들을 부르고있었다.

유진섭은 한부대에서 복무한 박상근과 함께 강선제강소(당시)로 탄원하였다. 그때 제강소에서는 전국적으로 제일먼저 진응원전기로작업반이 천리마작업반칭호를 수여받았다.

유진섭은 어렵고 힘든 용해공으로 일하면서 자기 앞길을 개척해나갈것을 결심하였다. 하지만 그의 결심대로 되지 않았다. 박상근은 용해공으로 배치받았으나 그는 보수직장에 가라는것이다.

《나는 왜 용해공이 될수 없습니까?》

사람단련에 몹시 지친듯 얼굴이 강파른 로동과장은 두툼한 안경너머로 그를 쳐다보았다.

《누구나 다 용해공이 되겠다고 하면 보장단위는 어떻게 되겠소. 동무야 제대군인인데 당에서 요구하는 부문에 가야 할게 아니요. 지금 철길보수를 제대로 하지 못해 강철생산에 지장을 받고있소.》

《…》

이렇게 되여 유진섭은 보수직장 선로반에 가게 되였다. 용해공이 된 박상근은 자주 그를 끌고 영양제식당에 갔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라도 강철직장에 와서 함께 일하자고 부추겼다.

《진섭동무, 로동과에 계속 제기하라구. 한번 안되면 두번세번, 그래도 안되면 지배인이나 당위원장을 찾아가게. 그러면 보내줄걸세.》

《아니, 로동과장의 말이 옳아. 다 용해공이 된다면 보장단위에서는 누가 일하겠나?》

《그렇게 고지식해서야 어따 쓰겠나. 자넨 용해공으로 일해야 발전문제를 해결할수 있네.》

《…》

그래도 유진섭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 어디서 일하든 성실한 땀을 흘린다면 자기 운명을 개척해나갈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는가에 의하여 평가될뿐만아니라 어떻게 하는가에 의해서도 평가되는것이 아니겠는가.

선로반이란 구내철길을 보수하고 새로운 인입선을 부설하는 작업반이다.

곡괭이와 소발통이라고 하는 무거운 지레대를 메고 다녔다. 선창자가 먹이는 노래박자에 맞추어 곡괭이질을 했고 침목을 다졌으며 8인목도로 중량레루를 운반하였다.

일은 비록 힘들었으나 유진섭은 기술을 배우겠다는 결심으로 공장대학에 입학하였다.

유진섭은 무슨 일에서나 성실하였다. 남먼저 곡괭이를 들었고 땀에 젖어 옷이 물주머니가 되여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제일 마지막에야 지레대를 놓았다. 휴식시간에는 사람들과 휩쓸리지 않고 책을 열심히 보군 했다.

어느날 유진섭은 박상근의 소개로 강철직장 현장기사 김철우네 집에 갔었다. 김책공업대학졸업생인 김철우는 전기로에 도입할 새로운 기술혁신안을 제기하고 그 실현을 위해 애쓰고있었다. 알고보니 그는 한작업반에서 일하고있는 단발머리처녀 김소연의 오빠였다.

유진섭은 그후에도 자주 김철우를 찾아가 귀중한 참고서들을 빌려보군 했으며 책을 보다가 리해되지 않는것은 묻기도 하였고 모르는것은 하나하나 배우기도 하였다. 그 나날에 성격과 취미가 비슷한 김철우를 형님처럼 따르게 되였으며 그를 도와주고있는 설계실의 리규택과도 사귀게 되였다.

전쟁때 다친 부상자리가 도져 김철우가 앓아누울 때면 병문안도 하고 힘을 주기도 하였다. 선로보수, 공장대학수업으로 시간이 없었지만 박상근과 함께 뛰여다니며 새 제강법에 필요한 부속과 자재들을 구해왔고 진심으로 도와주었다.

그때 유진섭은 새 기술안을 도입성공하고서야 가정을 이룬 김철우가 불치의 병으로 자식이 태여나는것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것을 목격하였다.

며칠이 지난 어느날 그의 동생 김소연이 큼직한 배낭을 메고 찾아왔었다. 배낭에는 기술서적들과 교과서, 필기되여있는 학습장들이 있었다.

《오빠가 보던 책들이예요.》

《그걸 이렇게 가져오면 어떻게 하니?》

《이건… 오빠가 눈을 감기 전에 남긴 부탁이예요!》

《!…》

유진섭이 받은 충격은 컸다. 김철우동지가 바라던 영원한 강선의 붉은 노을을 위하여 자기를 다 바치리라 결심하였다.

일하면서 공부한다는것이 말처럼 헐치 않았다. 모자라는것은 시간이였다. 길을 가면서도 책, 잠간 휴식하는 참에도 책, 합숙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보았다. 짬시간 자갈무지뒤에 앉아 책을 보다가 작업이 시작된것을 모르고있어 저녁총화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책은 눈비에 젖고 흙과 모래가 게발렸으며 보풀이 일어 말이 아니였다.

수업시간이 늦을가보아 저녁식사도 안하고(저녁시간에는 합숙생들이 많아 밥타는 시간이 길었다.) 강의실에 갔다. 너무 힘들어 책상에 앉으면 졸음부터 왔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것이 속눈섭이라는것을 그때야 알았다. 공부보다 졸음과의 싸움이 더 힘들었다. 밤 11시가 되여서야 합숙에 돌아와 식사를 했다. 호실에 올라가 전등불밑에서 과제를 수행하고나면 새벽 1시가 된다. 아침에는 제시간에 출근하고…

말없이 견인불발하는 그의 성실한 노력은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김소연과 작업반성원들은 일하러 나갈 때마다 책을 보라고 무거운 지레대도 빼앗아메군 하였으며 명절이나 휴식일에는 집에 데려가기도 했고 어떻게 해서나 공부하는데 도움을 주려고 마음을 썼다.

공장대학을 졸업한 유진섭은 동력과 전기기사로 일하면서 많은 기술혁신을 하였고 재능있는 전기기술자로 되였다.

소연은 이따금 길가에서 유진섭을 만나게 되면 무슨 창의고안을 하려는가고 묻기도 하였으며 그의 성과를 자기 일처럼 기뻐하였다.

그로부터 세월은 많이도 흘렀다.

이제는 소연이도 아들딸 세남매와 손자들을 거느린 할머니가 되였다.

그런데 오늘, 제강소현대화가 진통을 겪고있을 때 지배인과 좋지 못한 감정으로 년로보장을 받고 집에 들어온 처지에서 그를 만나게 되니 얼굴이 뜨거워났고 뭐라고 할말을 찾을수 없었다.

흘러간 옛시절, 세상떠난 오빠의 부탁을 지켜 한배낭 가득 책을 메고왔던 소연!

과연 김철우동지가 바라던것이 무엇이였던가.…

하루사업은 저녁에, 인생은 말년에 평가한다고 하였는데 그 인생의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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