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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회


제1장.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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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하늘은 유리처럼 투명했다.

바람은 불지 않았으나 아침의 대기는 칼날처럼 맵짰다. 그늘진 역홈에 서있는 기술대표단성원들의 코와 입에서는 하얀 김이 담배연기마냥 물씬물씬 뿜어나왔다. 눈섭과 털모자에는 서리꽃이 하얗게 폈다.

평양-베이징행 국제렬차는 검푸른 동체를 차겁게 번뜩이며 홈에 서있다.

외국출장을 떠나는 여러 부문의 대표단성원들, 옷차림과 생김새가 다른 외국손님들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차시간을 기다린다.

이따금 유쾌한 웃음소리가 도간도간 들려온다.

역홈은 떠나는 사람, 바래주는 사람들로 흥성거렸다.

그러나 김성남은 오래전부터 발이 시려와 얼굴을 찡그리고 서있다.

오늘 아침 집을 떠날 때 안해가 사온 새 구두를 신었는데 그것이 사달이였다.

좀 신느라면 자리가 잡히겠거니 했는데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다.

날씨가 차서 오히려 줄어든것 같다. 발끝이 옥죄여들며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다.

은근히 안해가 원망스러웠다. 열성이 말썽이라더니…

려행준비는 언제나 그랬듯이 안해가 다 했다.

갈아입을 속내의며 양말, 세면도구들과 구두약은 물론 작은 손전지며 손톱칼, 지어는 바늘이 꼽힌 실토리까지 하나하나 혹시 빠진것이 없나 해서 수첩에 적어가며 려행가방에 넣었다.

양복은 새로 해입었다.

신발은 이미 있던것을 그대로 신고가겠다고 하자 안해가 펄쩍 뛰였다.

《설송이 아버지도 참, 해외로 나가는데 헌 구두를 신다니요. 남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어요. 안돼요.》 하면서 번쩍거리는 새 구두를 사왔던것이다.

작은 구두의 압박감과 랭기까지 겹쳐 얼어들기 시작한 발은 남의 발처럼 감각마저 없어졌다.

이러다간 동상을 입고 무서운 특발성괴저라도 오지 않겠는지.…

그렇다고 해외로 떠나는 점잖은 사람들앞에서 쿵쿵 발을 구를수도 없고 해서 꾹 참고 서있느라니 뒤늦게 나온 박상근이 서승민과 함께 그에게로 다가왔다.

《왜 얼굴이 그 모양이요. 혹시 이발이 쏘는게 아니요?》

김성남은 차마 발이 시리다는 말을 할수가 없었다.

《어제 밤 잠을 좀 설쳤더니…》

《이제 렬차에 올라가 한잠 푹 자라구. 참, 마르꼬라는 사람을 아오?》

《대학때 저와 한학급에서 공부한 류학생입니다!》

《며칠전 베이징에 가있는 대외협조국 부국장한테서 전화가 왔댔소. 그와 만났다고…》

《마르꼬가 어떻게 베이징에 왔답니까?》

《그는 유럽 D그룹의 베이징주재 책임자라고 하오.

대외협조국에서 전기로와 관련한 자료들을 입수하는 과정에 D회사에서 개발한 콘스틸초고전력전기로가 우리 나라의 전력조건, 원료조건에 적중한 전기로라는것을 알아냈소. 그래서 마르꼬와 교섭해보았는데 자기네 그룹은 대부로 강철공장을 판매하지 않는다고 했다오.

그와 면담하는 과정에 성남동무 이야기가 나오고 제강소지배인으로 사업한다는것을 알려주니 몹시 반가와하며 베이징역에 마중나오겠다고 했다는군!》

김성남은 귀가 번쩍 띄였다.

언제 발이 시렸던가싶다.

그 좋은 전기로만 들여올수 있다면 특발성괴저에 걸려 두발을 잘라버린다 한들 무슨 대수랴.

이때 회색정복을 단정하게 입은 렬차원이 객차문을 열고 내렸다.

《이제부터 국제렬차를 리용하시는 손님들의 승차를 시작하겠습니다. 려권과 차표를 미리 준비해주길 바랍니다.》

그들은 한칸에 올랐다. 렬차안은 훈훈했다.

려행가방을 당반우에 올려놓고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건 김성남은 좌석에 앉았다.

얼었던 발이 녹으면서 근질근질해나는것도 느끼지 못하며 그는 다시 콘스틸전기로생각에 매달렸다.

《그 전기로를 들여올 무슨 방도가 없습니까?》

보온병에서 물을 부어 훌훌 불면서 몇모금 마시고난 박상근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A그룹과의 면담시 전기로만은 D그룹의것으로 주문해달라고 들이대자는거네.》

김성남이 머리를 기웃거렸다.

《그들이 접수하겠습니까?…》

박상근은 천천히 담배를 꺼내물면서 설명해주라는듯 얼핏 서승민을 쳐다보았다.

벗어진 이마우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소중히 쓸어올리며 서승민이 입술을 뗐다.

《길고 짧은건 대봐야 알지요. 그래서 외교가 아닙니까. 지배인동문 마르꼬를 만나게 되면 콘스틸전기로를 주문하겠다고 하십시오.》

《?…》

기술면담과 관련한 일련의 문제를 론의하던 박상근과 서승민은 얼었던 몸이 녹으면서 피곤이 몰리는지 지그시 눈을 감고 흔들리는 좌석에 몸을 맡기였다.

객실에는 차바퀴의 동음이 졸음을 불러내며 단조롭게 울려왔다.

그러나 성남은 정신이 더 말똥해지기만 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마르꼬, 그가 어떻게 되여 D그룹의 지부책임자로 내앞에 나타난것인가?

… 마르꼬는 벌가리아에서 우리 나라에 왔던 류학생이다.

우리 나라의 자립적민족경제에 대한 지식과 야금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공업대학에 왔었다.

대학에서는 우리 말과 학습을 도와주기 위해 실력있는 학생들을 류학생들에게 붙여주었는데 김성남이 마르꼬를 담당했었다.

한학급, 한호실에서 생활하였다.

마르꼬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눈이 파란 미남형의 청년이였다.

그는 성격도 쾌활하고 마음도 고왔다.

대사관에서 학용품이나 식료품같은것을 타오게 되면 싫다고 손을 흔드는 성남에게 억지로 안겨주며 서툰 조선말로 롱담을 했었다.

《이거 안 받으면 나 동무하고 안 친하겠다.》

달밝은 저녁이면 그들은 대학구내의 공원을 거닐면서 서로 자기의 조국과 고향에 대한 자랑으로 밤깊어가는줄 몰랐다.

성남은 자기의 고향, 위대한 수령님께서 해방후 고향 만경대에도 들리지 않으시고 먼저 찾아준 강선에 대하여 할머니가 들려준 천리마전설을 이야기해주었다.

밤에도 질줄 모르는 쇠물빛노을에 대하여 노래까지 불러가며 자랑했었다.

마르꼬는 도이췰란드강점자들을 반대하여 용감하게 싸운 민족의 영웅 지미뜨로브에 대하여 장미꽃 만발한 고향도시 쏘피아를 사랑한다고 했다.

조선과 벌가리아는 비록 수만리 떨어져있어도 제도와 리념이 같은 친근한 나라로서 자기들도 친형제나 다름없다는 고상한 감정으로 서로 도와주고 이끌었다.

어느날 밤이였다.

마르꼬는 몸이 말째다면서 먼저 침대에 누웠고 성남은 늦게까지 공부를 하다가 밤이 퍽 이슥해서야 자리에 들었다.

눈을 감았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은 집에서 소포가 왔다.

성남은 할머니가 드문히 소포와 함께 써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다심한 할머니의 사랑을 느껴보군 했었다.

그런데 오늘의 소포는 좀 류다른데가 있었다.

부피도 컸고 내용물도 달랐다.

여느때엔 수수한 학용품이나 내의류와 함께 비닐봉지에 꽁꽁 싸넣은 콩튀우개를 넣어보냈는데 오늘은 학습장도 학용품도 좋은것들이였다.

간식도 콩튀우개가 아니라 포장한 갖가지 당과류들이다. 그런데 집소식이라든가, 무슨 훈계가 적힌 편지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런적이 없었다. 소포에 쓴 주소를 다시 확인해보기까지 했다. 분명 야금학부 김성남이라고 정확히 밝혀져있었다. 좀 이상한것은 집주소를 밝히지 않고 그저 강선이라고 쓴것이다. 아마도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혹시 고모가 보내지 않았을가… 그래도 편지는 넣었을것인데…

성남이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궁싯거리는데 맞은켠침대에 누운 마르꼬가 끙끙 이상한 소리를 내질렀다.

잠꼬대를 하는게라고 생각했는데 멈추지 않고 계속 들려온다.

신음소리처럼 애처로왔다.

문득 몸이 말째다고 먼저 누운것이 생각났다.

성남은 벌떡 일어나 전등을 켰다. 허리를 새우처럼 꼬부린 마르꼬가 무릎을 그러안고 끙끙 신음소리를 하고있다. 그에게 급히 다가간 성남은 깜짝 놀랐다.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마르꼬의 얼굴은 온통 땀투성이였다. 관자노리와 목을 거쳐 흘러내린 땀이 베개를 축축히 적셔놓았다.

성남은 와락 그를 흔들었다.

《마르꼬, 왜 그러나?》

그는 입을 실룩거리기만 할뿐 말을 못했다. 흰자위 많은 눈을 흡뜨며 가쁜숨만 몰아쉰다.

어떻게 할것인가… 성남은 잠간 망설였다. 기숙사접수에 내려가 병원구급실에 전화를 걸것인가. 그러느라면 시간이 지체되여 당장 숨이 넘어갈것만 같았다.

다짜고짜로 마르꼬를 둘쳐업은 성남은 호실문을 나섰다.

원래 체격이 큰 마르꼬는 맥을 놓아서 그런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입술을 앙다물고 한단, 두단 층계를 내렸다.

마르꼬를 업고 대학병원 구급과에 도착하였을 때는 성남이자신도 온몸이 물주머니가 되여 비칠거렸다.

누가 환자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웠다.

직일의사들이 달려왔다. 마르꼬를 진찰하고난 나이지긋한 의사가 청진기를 내리우며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학생동무, 정말 수고했소. 제때에 업고오지 않았으면 큰일날번했소. 이 류학생은 장불통증인데 조금만 지체했어도 생명이 위급했을거요!》

마르꼬는 구원되였다.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 마르꼬와 김성남은 친혈육보다 더 친근한 사이로 되였다.

대학을 졸업한 김성남은 천리마제강련합기업소에 배치받았고 마르꼬는 귀국하게 되였다.

《김성남, 훌륭한 야금기술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네. 앞으로 기술대표단으로 동유럽에 올 기회가 있다면 쏘피아의 우리 집에 꼭 들리라구.

내 생명의 은인이며 친구인 자네를 우리 부모님들은 귀빈으로 맞아줄걸세!》

이렇게 그들은 헤여졌다.

그후 서로 소식을 전하며 편지거래를 가지였다.

지난 세기 90년대초 동유럽사회주의진영이 붕괴된 후 벌가리아의 어느 야금공장에서 일하던 마르꼬는 자기 생활개척을 위해 서유럽쪽으로 떠난다는 편지를 보낸 뒤 지금까지 전혀 생사를 모르고 지냈다.

그런 마르꼬를 이제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몹시 기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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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렬차는 밤새껏 달렸다.

평양을 떠난 렬차는 이튿날 오전 8시, 드디여 베이징역에 도착하였다.

려행자들로 붐비는 역홈을 빠져 역전광장에 나섰다. 광장에는 수만명의 손님들로 하여 사람바다를 이루었다. 어찌도 복잡했던지 려행자들은 자기 단체소속을 표시한 간판을 들고 서있거나 찾아다닌다.

대표단성원들은 박상근의 뒤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다.

각양각색의 승용차들이 주런이 서있는 주차장에서 우리 공화국기발을 꽂은 승용차가 눈에 뜨이였다.

승용차곁에는 위대한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앞가슴에 모신 대사관성원들이 의젓하게 서있었다.

김성남은 그들과 함께 있는 키가 큰 마르꼬를 인차 알아보았다.

대사관성원들에게 박상근단장이 기술대표단성원들을 한사람 한사람 소개하는데 뒤쪽에 서있던 마르꼬가 성남을 알아보고 성큼 앞으로 나섰다.

《김성남! 나 마르꼬요, 마르꼬!》

류창한 조선말로 소리치며 김성남에게 다가온 마르꼬는 다시 확인해보려는듯 찬찬히 쳐다보더니 와락 끌어안았다.

열광적인 상봉의 첫 흥분이 가라앉자 마르꼬가 물기어린 파랑눈을 슴뻑거렸다.

《난 자네를 만난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네.》

《나도 그래!》

그들은 두서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갔으나 조금도 서먹서먹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진실한 우정은 시간의 흐름을 인정하지 않는 법이다.

《김성남, 오늘 자네를 만난 기념으로 내가 한턱 내겠네!》

《!…》

마르꼬는 베이징에서 가장 특색있는 수산물식당에 대표단전원을 초청했다.

식당은 3층으로 되여있었다.

아래층은 수족관, 2층과 3층은 식사하는 방으로 되여있는 규모가 큰 식당이다.

1층 수족관은 매우 이채로왔다.

은근한 조명이 비치는 수족관안에는 팔뚝만 한 왕새우가 있는가 하면 접시같은 조개가 비주름히 속살을 드러내보이고있다.

그 이름도 알수 없는 크고작은 물고기들이 입을 넙죽거리며 유유히 헤염친다.

손님들이 수족관을 돌아보다가 그 어떤것이든 요구하면 그 자리에서 건져 가공하여 봉사해주었다.

그들이 둘러앉은 식탁에는 여러가지 수산물료리와 련달아 점점 더 좋은것이 나오는 중국특색의 음식으로 하여 풍성했다.

언제나 변함없는 마르꼬의 선량한 마음처럼…

사람들은 김성남과 마르꼬의 상봉을 축하해서 잔을 들었다.

술이 몇잔 돌고 취기가 오르자 마르꼬가 한숨을 내쉬며 김성남을 쳐다보았다.

《자넨 큰 공장의 지배인이 되였으니 자기 부문에서 당당히 성공한 셈이지… 그런데 난…》

그는 쓸쓸한 표정으로 뒤말을 잇지 못했다.

《마르꼬, 그런데 어떻게 되여 D회사에 근무하고있나?》

마르꼬가 다시한번 긴 한숨을 내쉬였다.

《자네도 알겠지만 동유럽사회주의가 붕괴된 후 비록 유족하지는 못해도 화목하고 평화롭게 살던 우리 벌가리아에는 커다란 불행이 덮쳐들었네. 약육강식의 서유럽자본주의경제가 밀물처럼 쓸어들어 가뜩이나 약하던 우리의 민족산업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말았네.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떠나 낯설은 이국땅으로 떠나갔지. 나도 그중의 한사람이네.

서유럽에 가서 겨우 D회사에 취직하여 여러해동안 성실하게 근무하였다네. 한때 동양에서 류학하였다는 전적때문인지 중국에 주재하고있는 회사지부에 보내주더군.

이젠 중국에 온지도 7년이 되네. 기회가 생기면 우리 집에 초청하겠네.》

그와 회포를 나누고난 김성남은 A그룹의 전기로를 취소하고 콘스틸전기로를 주문하겠다고 말했다.

마르꼬는 쾌히 승낙하였다.

김성남은 마르꼬에게서 공장의 현대화에 필요한 많은 기술과 자료들을 제공받았다.

《마르꼬, 이 고마운 심정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구만!…》

《뭘 그러나, 성남은 내 생명의 은인이 아닌가. 난 그저 자네의 공장일이 잘되여간다면 더없이 기쁘겠네!》

그들은 다시 만날것을 약속하고 헤여졌다.

며칠후 중국에 주재하고있는 A그룹 기술집단과 기술면담이 시작되였다.

면담에 앞서 박상근이 강철공장일식설비중에서 전기로만은 D그룹의 콘스틸전기로를 주문해줄것을 제의하였다. 하지만 상대측 단장 라그라스는 다른 회사의 설비는 주문할수 없다고, 대부를 주는 조건에서 자기 회사의 전기로를 무조건 가져가야 한다고 하면서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A그룹측에서는 자기네 설비를 기어이 팔아야 한다는 절대적리해관계가 있었고 우리로서는 제강소의 전력조건, 원료조건에 적응한 콘스틸전기로가 되여야 한다는 호상견해상 차이로 하여 서로 밀거니 당기거니 하면서 근 이틀동안 말싸움을 벌리였으나 어느 일방도 자기의 립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중국주재 우리 나라 대사관의 숙소창문은 밤이 깊도록 불빛이 꺼질줄 몰랐다.

기술대표단전원이 모여앉아 대방을 눌러놓고 우리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모색에 여념이 없었다.

김성남이 최후통첩식의 대담한 제안을 내놓았다.

A그룹측이 계속 고집을 부리는 경우 기술면담을 중단하고 조국으로 귀국하겠다고 상대방을 자극하자는것이다.

서승민이 반대해나섰다.

《아니, 그 방안은 매우 조마조마한 줄타기요. 생각 좀 해보오. 대부로 주겠다는 회사는 A그룹뿐인데 우리가 먼저 최후통첩을 했다가 대방에서 그만두자고 하면 그 이상 큰 랑패가 어디 있겠소. 대외사업이 총파탄이란 말이요.》

《그럼 어떻게 하자는겁니까. 무슨 방도가 있습니까?》

쭉 벗어진 이마우에 몇오리 내려드리운 머리칼을 조심히 쓸어올리며 서승민이 피우던 담배를 비벼껐다.

그는 성에서 제기되는 기술문제들을 처리하는데서 박상근부상의 모사격이다. 하기에 박상근은 이번 기술면담에서도 그를 주면담자로 내세웠고 그의 의견을 중시했다. 서승민은 이번 작전이 성공하여 제강소의 현대화가 실현되면 성에 소환되기로 내정되여있었다.

《방도가 없다고 모험을 해서야 안되지요. 그 방안은 성공할수 있는 확률이 30%도 못됩니다. 그들이 대부로 강철공장을 주는 조건에서 우리 요구를 받아들일것 같소? 꿩대신 닭이라고 정 안되면 A그룹의 전기로를 들여오는수밖에 없지.》

김성남은 반대했다.

《그 전기로가 우리 기업소의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럽니까? 난 현대화의 주인으로서 허용 못하겠소.》

《그럼, 우린 뭐 손님격이란 말이요?》

《그렇게밖에는 생각되지 않소.》

분위기가 팽팽해지자 박상근이 제지시켰다.

《큰일을 앞에 두고 이건 뭐요? 지배인동문 성격을 죽이라구, 대외사업이란 배짱만 가지고는 통하지 않소. 그래서 외교라고 하지 않소.》

그래도 김성남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여드는 그 성미가 살아난것이다.

《전 달리 생각합니다. 외교전에서 누가 먼저 주도권을 틀어쥐는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A그룹은 자기 설비의 해외판매를 실현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있습니다. 그들이 고자세로 나오고있지만 그것은 허세입니다. 그들이 이끄는대로 따라가면 안됩니다. 그럴수록 대담하게 배짱을 내밀어야 합니다, 배짱을 …》

제강소에서 온 일군들은 지배인의 말이 옳다고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적극 지지해나서지 못하고 박상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가 단장이라고 해서만이 아니였다.

사업에서 로회한 옛 지배인이라는 전직관념이 크게 작용한것이다.

박상근의 생각은 착잡했다. 전기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초고전력전기로로서의 능력을 내지 못하고 일반전기로처럼 운영하게 될것이 뻔하다. 그럴바에는 어떻게 하나 전기에 대한 요구가 그리 높지 않고 에네르기절약형인 콘스틸전기로를 들여와야 한다, 콘스틸전기로를…

그러자면 김성남의 주장을 내밀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혹시 알겠는가, 우둔한 사람이 범을 잡는다고 그것이 성공할수도 있지 않는가.

박상근은 한발 뒤로 물러섰다. 래일 면담시 최후통첩을 들이대자고 했다. 서승민이 완강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자기는 그 말을 못하겠다는것이다.

하여 주면담자로서 지배인의 자격으로 김성남이 발언할것을 결정했다.

면담장의 분위기는 마치로 때리면 깨질듯 엄엄하고 팽팽했다.

《에, 며칠간 전기로형식문제에서 쌍방간의 립장차이가 매우 심각하고 좀처럼 해결되지 않은것과 관련하여 우리는 당신들이 D그룹의 전기로를 주문해주지 않으면 기술합의를 그만두고 돌아가려고 합니다.》

A그룹 기술성원들은 몹시 놀란듯 저들끼리 수군덕거렸다.

그들을 둘러보던 김성남은 술렁거리는 소리가 멎기를 기다렸다가 재차 반격을 들이댔다.

《우리에게는 한번 결심하면 무조건 실행하는 단호한 기질이 있다는것을 다시한번 상기시켜드립니다. 그러니 책임적인 답변을 줄것을 바랍니다.》

순간 기고만장하던 라그라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날아갔다.

《이 문제는… 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못되니 본사에 문의하여 처리해야 합니다.》 라그라스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제부터 2시간후인 12시에 다시 마주앉길 바랍니다.》

대방성원들은 다 퇴장하였으나 박상근을 비롯한 대표단성원들은 휴식홀에서 그대로 시간을 보냈다.

김성남은 얇은 얼음장우를 걸어가는 심정이였다.

남의 설비를 들여오는것이 이렇게도 자존심이 깎이우고 힘든 일인가.…

12시를 알리는 쾌종소리가 사람들의 긴장한 마음을 때리며 지나간지도 30분이 되였으나 라그라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라그라스는 1시가 훨씬 넘어서야 면담장에 나타났다.

김성남은 태연한 자세로 마주섰다.

라그라스의 좁은 얼굴은 희색으로 하여 훤하게 넓어보였다.

긍정적인 답변이 왔는가, 아니면 자기의 자존심이 승리했다는 만족감에서 오는 희열때문인가.…

라그라스는 우리 대표단성원들을 일별하고나서 얇은 입술을 뗐다.

《약속한 시간을 어겨 대단히 미안합니다. 본사에서는…》 그는 결론의 의미를 강조하려함인지 한동안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당신들의 제안을 매우 심중히 토의하였습니다. 우리의 단아크식전기로를 취소하고 콘스틸전기로를 계약에 넣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당신들도 기쁘겠지만 나도 매우 기쁩니다!》

량측에서 박수소리가 울렸다. 목적은 달랐어도 리해관계는 같았기때문이다.

김성남의 생각은 깊어졌다.

설비의 해외판매실현을 생명으로 하고있는 대방심리의 급소부를 대담하게 정통으로 찌르기만 하면 막강한 경제력이 있다고 해도 물먹은 담벽처럼 무너지게 되는것이 외교전이 아니겠는가.

그들의 거만한 코대를 꺾어놓고 우리의 요구를 기어이 관철한것이 무엇보다 통쾌했다.

대표단을 위해 온갖 성의와 친절을 다해준 친구 마르꼬의 기대에도 보답할수 있게 되였다는 안도감이 가슴흐뭇하게 차오른다.

근 한달에 걸치는 외교공방전끝에 강철공장설비들에 대한 기술적요구들을 우리 실정에 맞게 결정하였고 현대화된 공장을 들여오는 최종계약을 맺게 되였다.

대외활동을 성과적으로 결속한 대표단은 국제렬차에 올랐다. 조국땅에 들어서니 떠날 때는 눈이 강산을 덮었었는데 벌써 새싹이 움트는 봄이다.

현대적인 강철공장을 들여오기 위한 외교전을 성공에로 이끈 박상근은 유능하고 로숙한 일군으로 평가되였다.

그러나 세상만사는 자기의 의지와 뜻대로만 되지 않았다.

세계의 모든 산업그룹들은 투자환경과 조건을 엄격히 따져보며 조심스럽게 투자한다.

2002년 조선서해수역에서 남조선군부의 날조된 《북방한계선》을 놓고 충격적인 교전이 일어났다. 세계는 우려를 가지고 그 교전이 제2조선전쟁으로 이어지지 않겠는가 긴장하게 지켜보았다.

모든 경제계약에는 다음과 같은 조문이 있다.

체약 쌍방중 어느 일방에서 큰 자연피해를 당하거나 전쟁으로 하여 계약실현이 불가능하게 되는 경우 그 투자액에 관계없이 계약을 무효로 한다는 불가항력적인 항목이다.

여러차례의 기술합의와 가격면담을 거치고 A그룹의 청탁으로 권위있는 과학기술상담소(대부를 받은 나라가 그 자금을 기한내에 물어줄수 있는 경제기술적토대가 있는가를 확인해보는 기구) 성원들의 제강소현지료해 등 실무적으로 할바는 다 하였다.

그런데도 A그룹은 오래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끌어오던 설비납입을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결국 대부로 강철공장일식을 들여오는 작전은 빛을 보지 못하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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