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63 회


제 4 편

나무는 세월을 새긴다


제 31 장


1


환희로운 계절, 태동하는 새 기적들을 속삭이며 흰눈이 사락사락 내리고있었다. 비단결같이 부드럽고 따스한 솜눈이였다. 하얀 솜눈은 들판의 한그루의 나무, 사슴뿔같은 아지들에 춤추듯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들 두청춘은 깨끗한 숫눈을 즐거이 맞으며 눈을 함뿍 뒤집어쓴 그 나무가로 달음쳐갔다. 아, 오래전에 사귀였던 은백양… 어릴적 그들의 머리우에 몰방으로 쏟아지던 소나기를 막아주고 따뜻한 불을 주기도 하고 상쾌한 저녁의 야식도 차려놓던 나무… 그들은 그 나무아래서 하늘이 미여지게 내리는 눈발을 쳐다보며 누가 손바닥에 더 많은 눈을 받나 내기를 하였다. 하지만 손바닥을 펴들고 아무리 눈을 모아도 덩이가 되지 않았다. 주경은 슬그머니 등뒤의 나무가지에 쌓인 눈을 한웅큼 빚어 리진이한테 던졌다. 하얀 고무공같은 눈덩이가 날아왔다. 리진은 날쌔게 그 눈덩이를 받아쥐고 다시 주경을 겨누어 던지려 하자 그의 얼굴이 은빛같은 미소로 밝아졌다. 얇은 눈시울아래 반짝이는 지혜로운 눈과 맑은 살갗, 상큼한 코와 붉은 입술이며가 예나 다름없이 정겨웠다. 주경은 얼굴에 방긋한 웃음을 짓고는 나무뒤로 몸을 숨겼다. 리진은 그리로 달려갔다. 그런데 주경이 숨어있던 자리에는 나무가 아니라 탑이 솟아있었다.

《동무가 세운 탑나무예요. 창조의 불로 세운 이 나무에는 사철 풍성한 열매가 주렁질거예요.》

주경은 보이지 않고 말소리만 들렸다. 리진은 사방을 두릿두릿 살폈다. 사위는 짙은 안개속에 잠겨있었다.

《주경이… 주경이…》

리진은 안개장막을 헤치며 목청껏 불렀다.

《얘야, 무슨 헛소리냐?》 누군가 그의 몸을 조심히 흔들었다. 리진은 꿈에서 채 깨여나지 못한 몽롱한 눈길로 어머니를 쳐다봤다.

《얘야, 이제 곧 새벽 3시가 된다.》

《아, 그래요!》

리진은 그제야 정신이 펄쩍 들어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가 잠들기 전에 어머니한테 곡진히 부탁했던 그 시간이였다. 유선림은 방안에서 보자기에 싼것을 들고나와 헤치였다. 진곤색의 새 작업복이 나졌고 그 우에 하얀 가락장갑이 놓여있었다.

《옛적에 우리 조상들은 전장에 나가는 자식한테 갑옷을 해입혔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 작업복을 입어라.》

유선림의 목소리는 잔잔했으나 비장하고 엄숙하였다.

리진은 사뭇 놀라움에 차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지난밤 잠들기 전에 그는 어머니가 아무 낌새도 채지 않게 그저 새벽일찍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러니 깨워달라고 부탁했을뿐인데 어머니는 모든것을 다 알고있었다.

새날이 잡히여 오전 9시가 되면 새 공정 첫 시운전이 시작된다. 수소분리공정과 정제공정, 수소탕크들의 첫 시동은 결코 수나롭게 진행될 일이 아니였다. 수소는 공기와 접촉하면 폭명기체로 전환된다. 대기중에 폭발한계가 제일 넓은 폭을 차지하는것이 수소이다. 때문에 어제까지 수소분리공정에 대한 불연소가스인 질소불어내기작업을 여러번 하였었다. 그러나 그 복잡한 탑이나 배관, 장치물들의 어느 한 구석에 한점의 공기라도 차있게 되면 그 후과는 실로 참혹할것이였다. 하여 리진은 시운전의 안전성을 담보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공정안에 수소를 쏴넣어 불어내기를 할 대담한 결심을 세웠다. 이 위험천만한 일은 오복이와 단둘이 새벽에 하기로 약속했었다.

유선림의 얼굴과 숙부드러운 눈에는 생사를 기약할수 없는 길을 떠나보내는 불안과 그 불안을 애써 털어버리려는 의지가 한데 엉켜 자못 애처로우면서도 근엄해보였다. 어머니는 아들을 삽짝문밖에까지 나와 바래주었다. 새 작업복을 입은 름름한 아들을 말없이 더듬던 어머니는 불쑥 리진의 머리를 가슴에 꼭 그러안았다.

《얘야, 난 네가 어떤 길을 가는지 안다. 너한테 하고싶은 말은 많다만 부디 잊지 말것은… 너의 아버지는 가버렸지만 군용렬차는 멈춰섰다.… 꼭 살아서 이 엄마품에 와야 한다.…》

종내 유선림은 돌아서 눈물을 훔쳤다. 리진은 어머니를 위로하고싶어 피줄이 두드러지고 마디진 손을 꽉 잡았다. 어머니의 작은 손에서는 오히려 사랑과 믿음, 뜨거운 힘이 리진의 몸으로 흘러드는것 같았다. 리진은 어머니의 자애와 강인함을 동시에 느꼈다. 이밤 어머니와 아들은 그렇게 손으로 채 하지 못한 말을 주고받으며 헤여졌다. 밤하늘의 여무진 별들이 눈빛을 깜박이며 그 말들을 엿들었을뿐.

어둠짙은 길은 훈훈한 기운이 떠돌았다. 끈끈한 안개가 발목에 휘휘 감겨든다. 새 생명을 움틔우는 어머니대지의 입김같은 훈풍이 이는듯 봄날같았다. 아닌게아니라 눈바람 울부짖는 사나운 계절을 앞당겨 공장에는 새봄이 왔다. 언땅을 파헤치고 말뚝을 박을 때 같아서는 아득해보이던 수소에 의한 암모니아생산공정의 첫단계공사가 이해의 마감과 더불어 시운전의 날을 맞게 되였다.

리진은 이 새벽 기다리고기다리던 시각을 맞이했건만 생사를 판가리하는 결전장에 나선 병사처럼 가슴은 하냥 두근거려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어머니와 갈라질 때까지만 하여도 별반 모르겠더니 홀로 길에 나서자 누가 곁에 있었으면싶었다. 문득 땀에 젖은 눈섭밑으로는 오래동안 잊은 낯익은 얼굴이 떠올랐다. 한생 누구한테 주먹 한번 휘두르지 못한 어리무던한 아버지의 모습이였다. 리진은 아버지와 마음속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하였다.

《아버지, 나는 갑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리별과 우리 가정의 분렬이 시작된 그 죽음의 길과는 다른 삶의 길로 갑니다. 아버지도 행복한 삶을 바라셨지요? 그래서 어머니를 안해로 맞아들이던 날 백년해로의 행복을 기약하여 어머니손에 가락지를 끼워주시고요. 그리고 나의 출생을 또 얼마나 소원했습니까. 내가 앓지 말고 무럭무럭 자라서 집안의 효자동이 되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어질어빠진 아버지얼굴에는 잊지 못할 그날을 그려보는듯 느슨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사람마다 제나름의 행복이 있을게고 또 목표와 기준도 서로 다를테지만 내가 바랬던 행복이란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거였다. 난 다만 네 엄마와 갈라지지 않고 울바자 두른 아담한 집에서 우리 세식구가 오붓하고 단란하게 살고싶었을뿐이다. 아, 그 작은 소원마저도 무자비한 전쟁이 앗아갔구나.…》

리진은 불쑥 격한것이 치밀었다. 지금까지 아버지를 파멸시키고 그의 가정을 분렬에로 이끈 그 원인을 찾아 갈팡질팡했던 그는 비로소 눈앞이 환해졌다.

《물론 전쟁이 파탄시켰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야 또 무슨 힘이 우릴 훼방했겠니.》

《아버지, 대체 누가 아버지의 행동을 좌우지하는가요? 무자비한 전쟁일가요? 어떤 불가항력적인 외부적힘일가요? 아닙니다. 아니예요. 아버지를 움직이게 하는 그것은 아버지자신의 의지이고 신념이고 인생관입니다. 전쟁은 다만 매 인간이 드러내지 않고있던 본색을 속속들이 헤쳐보였을뿐입니다. 우리 가정의 분렬은 아버지가 우리의 새 제도에 살면서도 자기자신과 한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때문입니다.》

리진의 가슴은 터질듯 달아올랐다. 새벽이슬을 머금은 잔바람이 일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감촉 못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에 자기의 넋과 골수에 배여있는 말들을 다 털어놓고싶었다.

《…그래요. 나는 갑니다. 생사를 알수 없는 길이지만 내 한생이 해빛처럼 빛날 길입니다. 나는 이 길에서 여러 그리운 사람들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강대철아바이며 그의 정치부중대장이며 나의 출생을 위해 달리던 군수렬차를 멈춰세운 이름모를 호송군관이며 텁석부리 기관사며 벗들이며 아, 그리운 주경이며…》

리진은 부지불식간에 튀여나온 주경이란 이름에 가슴이 뭉클했다. 영영 잊은줄 알았던 그 이름이 왜 이다지도 뜨거운 눈물을 자아내며 떠오른것인지… 가슴에 묻어버린 사랑의 작은 무덤, 눈물에 젖고 비탄에 젖은 그 무덤속에 아직도 미련이라는 불씨가 타고있었단 말인가. 결렬이니, 작별이니 하는 그 모든것은 한갖 가식이고 거짓이였단 말인가. 아니였다. 그것은 진실이였다. 누구보다도 그를 열렬히 사랑하였기에 걸맞지 않는 나의 푼수로 하여 내린 용단이였다. 푼수!… 그것은 이 마음속을 지배한 역시 자기라는 요물이였다. 그것이 이 몸에서 요동치여 나는 나자신을 증명이나 하려고 공정에 뛰여들었고 그리도 불타던 사랑도 단념하였다.

하지만… 나는 지금 생명을 위협하는 곳을 향해 주저없이 걸음을 짚고있다. 나를 증명하고싶어서가 아니라 나를 바치고싶어 가는 길이다. 준엄한 날 조국은 나의 출생을 기다려주었다. 나는 이 땅이 낳은 아들이다. 그 아들이 자기를 낳은 어머니조국을 위해, 먹여주고 키워주고 보살펴주고 빛내여주는 한없이 따사로운 사랑의 품을 위해 인생을 통채로 바치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진실로 나를 바쳐 당과 조국의 품에 삶의 뿌리를 내린 《내》가 되는 길이 진실로 나를 찾고 사랑을 찾는 길이다.

아, 나를 이렇듯 기꺼운 삶에로 고무해준 주경이… 헤여지면서도 나의 앞길 축복해주던 그 진정 이 심장에 흘러들어 나를 크게 만들어주고있다. 그렇다! 이 몸에 《내》가 없는 나는 이제야 그대를 사랑할 권리를 찾았다! 그대의 운명이 어찌되든 내가 이 세상에 있는 한 쾌활하고 민첩하고 열렬했던 그대의 모습, 높은 과학적신념과 지향, 그 모든것을 나는 잊지 않을것이며 영원히 사랑하리라!

새벽의 청신한 대기속에서 리진은 다시 찾은 사랑의 희열에 온몸이 황황 불타올랐다. 이밤에도 저 별많은 하늘아래서 과학연구에 매진할 주경을 그리며 걸음을 재우쳤다. 공업연구소앞을 지나가면서도 주경이 있던 연구실창문을 넋없이 바라보기도 하였다. 그 방은 불이 꺼져있었다. 그런데 유독 하나의 창문에서 불빛이 흘러나왔다. 아래층 촉매연구실이였다. 계영빈이 실험탁에 마주서 실험에 열중하고있었다. 얼굴은 헐끔했으나 눈빛은 여전히 광채를 띠고 불길같은것이 번쩍이였다. 리진은 매일 밤을 과학연구의 고심어린 투쟁으로 지새우며 새날을 맞는 그의 정상적인 생활을 알고있으면서도 막상 이 새벽에 목격하게 되니 그 견인불발의 의지가 걸음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계영빈은 백금촉매를 실패한 후 한동안 검은 양복을 입고 랭랭하고 굳어진 표정으로 공장도서실에만 붙박혀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백금촉매와 함께 죽은 자신을 장사지낸다고 하였다. 과학자는 자기의 심혼을 바친 연구과제가 쓸모없이 종말을 고할 때에는 함께 죽어야 한다는것이였다. 얼마후 그는 그 시체에 다시 재생의 불길을 지폈다. 제2세대 백금―레니움촉매를 뛰여넘는 제3세대촉매 즉 백금을 전혀 쓰지 않는 값눅은 다금속촉매개발을 연구과제로 내세웠다. 이것은 세계원유화학공업이 다음세기의 목표로 내세우고있는 첨단중의 최첨단과제였다.

사람들은 그의 대담한 목표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때마다 그는 쓰겁게 웃으며 빈정거리였다.

《난 애인이였던 백금촉매한테 배반당했소. 남자는 녀자한테 배반당해봐야 남자가 되나 보오.》

계영빈은 며칠전에 있은 과학자, 기술자모임에서 전준혁기사장을 향해 매우 날카롭고 신랄한 말을 던져 만장을 공감시켰다.

…기사장동무는 나라의 흥망은 에네르기생산과 보유, 개발에 있다고 했소. 아니요! 백금촉매는 나의 사랑이였소. 그러나 나는 그것을 첨단적인 시점에서 개발하지 못하여 종내 우리의 사랑은 결합될수 없었소. 그렇소. 우린 어버이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말씀을 최첨단에서 관철하지 않을 때에는 사랑도 삶의 권리도 잃게 되오. 나라의 흥망은 위대한령님과 지도자동지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집행하는가 하는데 있소. 이 거창한 70일전투는 나에게 이 진리를 깨우쳐주었소!…

티끌만 한 허세도 과장도 없이 과학기술사업의 진실을 그대로 표현한 그의 발언은 자신의 피타는 체험속에서 찾은 심오한 진리였으며 우리 과학기술을 세계적인 수준에 올려세워주시려고 모든것을 다 바치고계시는 위대한 수령님과 지도자동지의 그 높으신 뜻을 체현한 인간에게서만 볼수 있는 고귀한 넋의 발현이였다.

리진은 잠시후 눈에 다져진 용수천의 동뚝길을 지나 새 공정을 세운 현장에 들어섰다. 어디선가 밤새 한마리가 푸드득 깃을 치며 날아올랐다. 어둠에 잠긴 대지는 아직 깨여나지 않았다. 눈앞에는 새 공정이 불을 환히 켜놓고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별바다가 펼쳐진 하늘에서는 불현듯 별찌 하나가 눈부신 포물선을 그으며 사라지였다. 일순 리진의 가슴에서도 결사관철의 각오가 불길마냥 타번지였다.

리진은 공정정문앞으로 발끝에 힘을 주어 걸음을 짚었다.

이전페지   다음페지

←되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