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 회
제 3 편
70일전투의 열풍속에서
제 30 장
2
(…나는 왜 오늘 시험조립을 막지 못했던가. 바람이 터진다는것을 미리 알았고 또 미타한 생각도 없지 않으면서도 어째서 단호하고 결단성있는 립장을 취하지 않았을가. 꼭 누구의 장단에 놀아난것 같거던.…)
공장병원에서 늦도록 강대철의 위중한 상태를 지켜보다 도병원에 후송하고 돌아오는 전준혁의 입에서 흘러나온 탄식이였다. 미친 바람은 언제 그랬던가싶게 잠들었다. 해짧은 겨울하늘에는 화려한 저녁노을이 나래를 펼쳤으나 슬프고 괴로운 피빛처럼 대지를 덮고있었다.
피동적인 행동, 위축된 결심, 고립무원한 좌절감… 전준혁은 이즈음
곰곰히 따져보면 자기가 이런 처지에 빠지게 된 동기는 페불로부터 시작되여 그것을 놓고 열띤 론조를 벌렸던 공장당위원회확대회의에서 대중과 동떨어진 불협화음을 연주했기때문인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불협화음의 근원은 무엇이였던가.
…작은아버진 저더러 페불에서 열공학박사의 꿈을 키우라고 하셨지요. 어째서 나의 명예부터 생각하고 나부터 가꾸는것이 이 땅을 아름답게 건설하는것인가요?…
만약 주경의 론리대로 나의 파탄이 거기에 뿌리를 두었다면 진정 박사학위가 내 나라를 가꾸는데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건가. 매 사람들이 값높은 삶을 누린다면 그것이 곧 조국이 부흥해지는 길이 아니란 말인가. 이거야말로 닭이 선차냐 닭알이 선차냐 하는 피장파장의 물음같아 강하게 부정하고싶었다. 그러나 부정하면 할수록 그만큼 반발하는 철의 론리가 있었으니 거기에는 서로 넘을수도, 타협할수도 없는 날카로운 계선이 있는것 같기도 하였다.
전준혁은 골치아픈 이 문제를 놓고 더 생각하고싶잖았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인 오늘 시험조립을 막지 못한 책임과 가책이 더 괴로움을 자아냈다. 믿자니 속이 떨리고 믿지 않으려니 너무도 엄연한 현실이여서 이 저녁 홀로 있기보다 가까운 친지라도 있었으면 이 아픔과 고통을 나누고싶었다.
행정청사의 자기 방을 향하던 그는 생산과에 먼저 들렸다. 마침 종섭이 혼자 책상앞에 머리를 싸쥐고 앉아있었다. 종섭은 타번지는 목을 추길만 한 흉허물없는 친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눈치역은 그는 한종발의 물쯤은 될듯싶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동문 퇴근하지 않고 뭘하고있소?》
《아, 기사장동지!》
종섭은 의자를 차고 일어났다. 그 무슨 진통을 겪고있었는지 제편에서 되려 반색하며 두서없는 말부터 꺼냈다.
《기사장동지, 내가 어떻게 살아날수 있었을가요?》
《그건 무슨 소리요?》
《한창 정신없이 땅을 파는데 말입니다. 땅이 쩍 갈라지는 지진같은 폭음에 와들짝 놀라 뒤돌아봤지요. 헌데 말입니다. 굵다란 강철기둥이 머리우로 곧추 떨어져내리지 않겠습니까. 눈앞이 아찔하고 하늘과 땅이 맞붙어 빙글거리더군요. 아, 이젠 다구나 하는데 말입니다. 거밋한 형체가 먼지폭풍속을 꿰질러 달음쳐오더니 그 강철기둥을 끌어안더란말입니다. 그다음 무슨 힘으로 그 깊은 함정에서 빠져나왔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강대철, 오늘 자빠지는 강철기둥을 3초 지연시켜 수많은 사람들이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구원되였다. 구사일생 살아난 사람들속에는 종섭이도 있었군. 그런데 흰 빛이 언뜩이는 저 동자를 봐선 상기 제정신이 아닌것 같군.)
《그래 병원에는 가봤소?》
《가려다 환자가 도병원으로 후송되였다고 하여…》
그때 조용히 문기척소리가 났다. 서윤정이 얼굴을 감쌌던 밤색머리수건을 풀며 방에 들어섰다. 그의 때아닌 출현도 이상스럽거니와 표정이 풍부하고 기품이 의젓한 녀인의 얼굴은 별스레 해쓱하니 질려있었다.
《기사장동지도 계시누만요. 제 우리 종섭일 만나려고 왔습니다.》
윤정은 준혁이한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찾아온 용건을 나직하나 또박또박 말했다. 준혁은 그들 혈육끼리의 장소를 방해할것 같아 자리를 피하려 하였다.
《실례이지만 기사장동지도 함께 있었으면 해요.》
윤정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그 어조에는 거절할수 없는 요구가 짙었다. 방안공기는 대번에 흐려졌다. 윤정은 떨리는 입술을 감빨고는 탁해진 공기를 숨가삐 빨아들였다.
《기사장동지는 우리 종섭이가 강대철비서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린걸 아실테지요? 난… 오늘에야 모든걸 알게 됐군요.》
《…》
《난 우리 종섭이가 말끝마다 우리 기사장, 우리 기사장 하여 그가 훌륭하게 돼가는줄로 알았어요. 어쩌면 기사장동진 우리 종섭일 그런 너절하고 야비한
《아니, 누님 무슨 말을 그렇게…》
종섭이 억눌린 소리를 지르며 힐긋 준혁을 쳐다봤다. 당혹한 그 눈길에는 언제인가 자기 방을 뛰쳐나가는 그한테서 보았던 섬찍한 그런 빛이 얼씬하였다.
《넌 입다물어!》
윤정의 고뇌가 끓는 눈에서는 펑긋 불꽃이 튀였다. 분노에 휩싸인 녀인은 헐썩이는 가슴을 움켜쥐고 벽쪽에 돌아섰는데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여 비틀거리다 한손으로 벽을 짚었다. 녀인은
《뭘 숨기겠어요. 난 한때 그 사람을 마음에 둔적이 있었어요. 그인 처녀시절 빈사지경에 처한 나한테 피만 준게 아니였어요.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날 일궈세우려고 밤이면 고기잡이에 나섰어요. 초겨울의 차거운 물속에 몸을 적시기도 하고 때로는 얼음을 까기도 하며 매일같이 물고기를 잡아 병원에 보내주었어요. 그 어죽으로 입맛을 돌린 난… 목이 메여 눈물과 함께 넘기군 하였어요. 그 흐르고흐른 눈물이 내 마음속에 남다른 정을 싹틔웠다면… 그래 이것이 죄는 아니겠지요? 하지만… 하지만 그가 도병원에서 알게 된 한 처녀를 안해로 맞아들일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바로 그무렵에 난 멀리 타곳으로 시집가게 된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였어요. 생활은 날 외면하지 않았더군요. 아무런 감정도 파악도 없이 만난 남편이였지만 그의 사랑은 얼마나 뜨겁고 극성스러웠던지. 얼마후 우리한테는 딸애까지 생겨 실로 부러움 없었어요. 하지만 생활의 그 단즙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5년만에 남편을 불치의 병으로 잃은 난 딸애를 데리고 다시 고향에 돌아왔어요.》
잠시 녀인은 입을 다물고 숨을 돌렸다. 부옇게 흐려진 눈에는 가슴을 저미는듯 한 눈물이 고이였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과 희망을 버리고 가버린
《고향에 돌아온 어느날, 오늘처럼 바람이 모질던 겨울밤이였어요. 그날 우연히 병원앞을 지나는데 웬 사람이 잔등에 누구인가 업고 힘들게 앞에서 걷고있었어요. 난 업고가는 사람의 목소리가 귀에 익어 본의는 아니였지만 무슨 충동에선가 그들의 등뒤로 바싹 다가가 걷게 되더군요.
〈여보, 이 다리를 자르자요. 의사선생님들도 더는 가망이 없어하는데 어서 결심하세요.〉등에 업힌 녀인의 애절한 말이였어요.
〈젠장, 또 그 소리요. 절대로 못 잘라. 우리 세상에는 기적이란게 있단 말이요.〉
〈꿈같은 소리, 난 더는 못 참겠어요. 한해도 아니고 수년세월 당신을 이렇게 고생시킬줄 알았으면… 애당초 당신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하는건데. 당신은 뭣때문에 이런 병신짝을 얻어 고생을 사서 하냐 말이예요?…〉
〈됐소.… 이까짓 업고다니는게 뭐라고 그러오. 당신이야 전우들을 구원하려다 부상당했으니 업고다닐만 한 위훈을 세웠지. 우리 정치부중대장처럼 말이요. 그 사람은 나를 겨눈 원쑤의 총탄을 제 몸으로 막아줬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도 같고같은 내 생명의
그때에야 난 그가 혼자서는 걸을수도 없고 살수도 없는 영예군인안해를 맞은줄 알게 됐어요. 또 그 안해를 업고 수년세월 바람이 부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병원으로, 집으로 다닌줄도 말예요. 갑자기 나의 눈앞에서는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어지러움증이 일면서 온몸이 바닥없는 허궁에 떨어져내리는것 같았어요. 내가 만약 고향에 다시 오지 않았더라면 난 그처럼 값있고 희생적인 삶이 세상에 있는줄을 알수도 없었을거예요. 그래요. 그라고 어찌 성한 녀자와 살고싶지 않았겠어요. 그라고 어찌 편안한 생활을 모르겠어요. 그리고 왜 제 자식을 갖고싶지 않았겠어요.… 난 아직 그런 남자…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어요. 그때부터 나도 일생 그처럼
시대와
뜨거운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리는 윤정의 얼굴은 그윽한 환희로 빛났다. 녀인은 이 한순간에
《종섭아, 내 한마디만 더 하고싶다.》
윤정은 손수건으로 눈굽을 찍었다.
《너는 그 사람한테 별의별 험구를 다 들씌웠지만 그 사람은 널 살려주었다. 너야말로 이 시대의 오물로 썩고있는줄 알아야 한다.》
얼굴이 지지벌겋게 되여 책상앞에 꼼짝 않고있던 종섭은 중풍을 만난 사람처럼 온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때늦은 후회와 한탄,
준혁은 전신에 모닥불을 뒤집어쓴것 같아 더 앉아있을수 없어 밖에 나섰다. 윤정은 내놓고 말하지 않아도 종섭을 타락시킨 장본인이 기사장임을 절규했다. 하긴 그 역시 종섭의 뒤소리를 막지 못하였고 강대철을 오지랖넓은
모든 영웅적행위는 육체에 비한 정신의 승리이다. 바다처럼 넓고 깊은
그는 발이 가는대로 허방지방 걸음을 짚었다. 투광등빛에 대낮처럼 환하던 공사장은 불빛 한점 없이 고요하였다. 휴계실만이 가물가물 불이 켜져있었으나 아무도 없었다. 난로아궁이에서 장작개비가 불똥을 탁탁 튕기고있어 누군가 잠시 자리를 뜬것 같았다. 방안을 둘러보던 준혁은 강대철의 책상우에 한장의 종이가 놓여있어 무심결에 그것을 집어들었고 뒤이어 흠칫 눈부리에 힘이 모아졌다. 강대철이 주경이한테 쓰려다 맺지 못한 편지였다.
…난 지금도 그날 당회의에서 한 주경의 말을 잊지 않고있네. 주경인 한 학생의 페불그림앞에서 깨닫는바가 컸다고 했었지. 옳네.
편지는 여기서 끝났다. 준혁은 가슴을 치는 충격과 함께 새삼스레 주경의 말이 뇌리를 때렸다.
…작은아버진 저더러 페불에서 열공학박사의 꿈을 키우라고 하셨지요.…
하지만 강대철은
《왜 추운데 여기 있소?》
리진은 고개를 떨구고 머밋거렸다.
《아바이의 생각이 나서…》
《동무가 그 편지를 책상우에 놓았소?》
《네, 아바이사품을 정리하다 보았습니다.》
준혁은 오늘 일을 두고 리진을 추궁하려 했으나 그의 정상이 하도 측은하여 그만두었다. 그는 돌아섰다. 불쑥 리진의 음성이 그를 멈춰세웠다.
《기사장동지, 한가지 제기할수 있습니까?》
준혁의 수북한 눈섭이 의혹에 꿈틀하였다. 그는 다시 리진이한테로 몸을 돌렸다. 리진은 자기의 생각을 명백하고 설득력있게 표현할 말을 고르는듯 좀자르다 입을 열었다.
《래일부터 탑을 땅에서 죄다 이어붙여 통채로 들려고 합니다.》
《?!…》
준혁은 흠칫 굳어졌다. 불시에 심장이 툭 튀여나올 정도로 놀랐다. 그는 잘못 듣지 않았나 하여 진한 눈섭을 구핏거려 리진을 노려봤다. 리진은 평소와 같은 침착한 자세와 표정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 무슨 반성과 뉘우침에 갈린 음성으로 뒤를 이었다.
《제가 참, 소심했습니다. 얼마든지 통채로 조립할수 있는것을 그랬습니다. 첫째로 중량이 많을수록 바람영향을 덜 받을수 있습니다. 둘째로는 보조권양기를 량쪽에 하나씩 더 보강하고 운전공들이 한마음으로 합심하면 문제없습니다.》
준혁은 얼떠름해났다. 가슴이 어지럽게 뛰였다.… 이 사람은 지금 뭐라고 하는가. 통채로 들겠다?… 준혁은 차고 랭혹한 눈길을 그한테서 떼지 못했다. 그 눈길이 후두둑 떨었다. 진중하면서도 확신에 넘친 주장, 사색적인 눈초리, 담벽같은 단단한 가슴… 리진의 얼굴과 몸에서는 하늘이 무너져도 버틸것 같은
그것은 오직 하나의 과녁만을 겨냥하고 날아가는 화살같은 곧은 지향을 지닌 불굴의
실패에 주저와 위축을 모르고 오히려 백배로 더 굳세지고 강해진 이
준혁은 또 한차례 자기의 가슴을 어이고 날아드는 아픔과 함께 자기 존재가 무시당하는 모욕감과 반발이 몸에서 무섭게 태질하였다. 오늘 시험조립을 묵인한것으로 하여 절망과 좌절감에 빠져있던 그의 입에서는 전에 없이 랭정하고 근엄한 소리가 튀여나갔다.
《동문 내가 반대하리라는것을 생각해봤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리진의 터갈라진 입술에는 파리한 미소가 그려졌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본적이 없습니다.》
《어째서?》
《기사장동진 우리 다 같이 70일전투에서 승리자가 되자고 하잖았습니까.》
순간 뜨거운것이 준혁의 울대밑을 건드리며 솟구쳤다. 목안이 얼얼하고 코안이 쩡하니 매워났다. 그리고 눈앞이 핑 돌았다.
…그래, 이 사람은 언제나 날 그렇게 믿었지. 아, 저 가식없는 순진한 눈, 한점 때묻지 않은 깨끗하고 솔직한 저 눈, 승리를 믿는 저 불타는 눈… 우리 주경이 저 눈에 반했을가? 그런데 난 왜 저 눈에서 불신과 적의, 배신자의 검은 빛을 애써 찾으려 했을가. 내 눈이 검기에 그렇게 볼수밖에…
준혁은 가슴에 납덩이를 녹여 부어넣은것보다 더 뼈저린 진통에 몸을 떨다 다시 돌아섰다. 위선과 허위에 찬 모든 지난 생활들이 물거품처럼 산산 흩어지면서 갑자기 자기의 거쿨진 육체가 빈허울로 돼버려 걸음이 자못 허청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