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 회
제 3 편
70일전투의 열풍속에서
제 27 장
2
석양노을빛이 병원정원숲에 퍼졌다. 푸른 소나무와 전나무들에 내려앉은 흰눈솜들이 금빛으로 반짝이고 매츨한 봇나무들이 수집음을 잘 타는 처녀의 얼굴처럼 발깃한 색조로 물들었다.
리진은 명상속에 잠겨 숲속을 거닐었다. 지난밤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 코흘리개시절에는 듣고도 별로 모르겠더니 지금은 왜 그리도 가슴벽을 세차게 흔드는지… 자기의 출생을 위해 달리는 군수렬차를 멈춰세운 그 이름모를 호송군관을 상상속에 이렇게저렇게 그려봐도 표상이 잡히지 않았다.
어머니의 기억처럼 그저 생김새며 말투며 손이며가 농사짓는 사람처럼 투박하고 텁텁하다는것뿐 그리고 왝왝 고아대던 텁석부리기관사령감도 그저 무섭게 생겼다는 인상이 전부였다. 그러나 생면부지의 그들이 다름아닌 생의
리진은 그날 정치분과사무실에서 강아바이의 노성에 쫓기다싶이 나올 때에는 머리가 뗑하고 걸음이 비척거렸다. 강아바이의 벼락치는 소리가 머리속에서 윙윙거리면서 차츰 영웅의 삶이 걸음발에 감겨들었다. 생의 최후의 시각에조차 자기를 증명할줄 몰랐던 정치부중대장, 삶이 그대로 조국애와 동지애로 결합된 사람, 그 빛나는 삶의 거울에 비낀
리진은 지금 병원정원숲을 거닐며 어머니와 자기의 생명을 구원해준 그 호송군관이 혹시 강대철아바이의 정치부중대장이 아니였을가 하는 엉터리없는 생각을 굴리고있었다.
날이 어두워 침실에 들어서던 리진은 깜짝 놀라 문을 닫는것도 잊고 한자리에 말뚝처럼 박혔다. 창밖을 향해 등지고 서있는 녀자, 회색 반외투목깃을 약간 가리우면서 타래진 머리모양, 량어깨너머로 드리운 하얀 모직수건, 단정하고 세련된 옷차림새, 원탁꽃병에 난데없이 꽂혀있는 청초한 생화송이들, 상쾌하면서도 싱싱한 냄새…
주경은 문소리에 흠칫 몸을 떨며 돌아섰다. 남을 떠보는듯 한 얄궂으면서도 총명한 두눈에는 알릴듯말듯 한 미소가 떠오르다 굳어졌다.
《문이 열려졌군요.》
재기발랄한 약동적인 몸짓이나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대신 퍽 자중하고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본래의 그가 아니였다. 말없이 돌아서 문을 닫는 리진의 마음에는 형언할수 없는 기쁨이 샘솟았다. 방안에는 그들 단둘뿐이였다.
《퍽 좋아졌군요.》
《고맙소 주경이, 여러모로 마음을 써주어.》
《뭘요, 공장과 동무들이 다 떨쳐나섰는걸요, 응당 그래야 할테지만.》
그들은 이해의 첫눈이 내려 눈을 시그럽히던 그 해맑은 아침 갈라진 이후로는 이렇게 단둘이 만나기는 처음이였다. 주경은 리진의 입원기간 몇번 찾아왔으나 그가 의식을 잃었거나 잠든 때여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적이 없었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주경의 심장은 리진에 대한 진실하고 열렬한 애정으로 변함없이 뛰였다. 그러나 하루사이에 그 심장은 불의에 경난을 겪은 난파선처럼 산산 깨져버렸다. 그 하루가 주경이한테는 수십년세월로 압축되여있었다. 어제밤 강대철아저씨의 수수한 말속에서 인생의 참된 철리를 깨달은 그 시각부터 주경은 많은 시간을 류다른 번뇌속에 모대기였다.
리진이 아버지의 파탄된 생애는 진실로 삶의 행복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여야 하는가를 실증해주었다. 자기라는것때문에 값없이 생을 마친 사람, 그렇다면 실지
사이비인생철학자들은 사람이 세상에 태여날 때 터뜨리는 《고고성》자체가 누구도 아닌 《나》라는것의 웨침이라고 주장한다. 때문에
인류가 발생한 때로부터 수천년세월 굳어진 이 정설은
어제 주경은 방송을 통하여 머나먼 인디아양의 한복판에서 사경에 처한 두 선원을 위해 온 나라와 한개 대륙이 다 떨쳐나선 소식을 알게 되였다. 좋은 사회란 인민의 복리가 사랑으로 실현되는 세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중에서 제일 큰 복은 좋은 세상에서 살게 해주는
그리고… 리진이 바로 그런
그는 지금까지 리진이와의 관계에서 적어도 자기가 우위라고 자부해왔다. 이것은 어릴적 함께 자랄 때부터 형성된 일종의 굳어진 관념이였다. 소학교와 중학교에 이르기까지 주경은 학습과 체육, 분단열성자직급에서 리진이보다 앞선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 타성은 성숙단계에 들어서서도 착하고 참한 남동생을 대하듯 리진을 살폈다. 그가 처음으로 리진이와의 승부에서 패했던 대학방학기간 고래섬해수욕장에서의 수영경기도 오래동안 바다를 떠난 몸이 몸풀이가 되지 않았거나 강심을 먹고 나서지 않고 걸써 대한데서 온 행위로 치부해버렸다. 또한 얼마전 리진이 페불전량도입의 새로운 함수소에 의한 암모니아생산을 착상했을 때에도 그의 총명과 재능에 탄복했을뿐 뒤떨어졌다고는 믿지 않았다. 주경은 나날이 놀랍게 성장하는 리진의 지식과 열정이 누구보다 앞서기를 바라면서도 자기를 뛰여넘지 못하리라고 은근히 여겨왔다. 그러던 그는 리진이와의 정신적높이에서 커다란 차이를 느꼈다. 한것은 자기는 아직도 리진을 구원할수 있는 길은 사랑이라고 믿은 사실이다. 자기의 보호자인 작은아버지는 지독스레 순수한 혈통만 주장하는 사람이였다. 집안의 가장인 작은아버지가 가족관념에 빠져있는 한 자기의 사랑과 행복의 종착점이 어떠하리라는것은 명백하였다. 주경은 별안간 눈부신 산상에 서있는 리진이와 음달진 깊은 골바닥을 헤매이는
주경은 머리를 들었다. 웃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웃음은 서글픈 미소였다. 실련의 고통과 상처입은 자존심이 섞여있는 미소는 한번도 있어본적 없는 심각한 기색이였으나 이내 밝은 표정을 지었다.
《동문 참 훌륭했어요. 자기라는 리기심을 깨끗이 털어버렸으니까요.》
어찌할바를 몰라하는 어린아이처럼 말없이 서있던 리진은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아니요, 난 바보였소. 지금 생각해보면 나자신을 더…》
《됐어요, 그 말은 더 하지 말자요.》
주경은 리진의 말을 자르고는 입술을 옥물고 머리를 다시 떨구었다. 불쑥 아무런 예고도 없이 눈물이 솟구치더니 량볼을 타고 떨어졌다. 이사람으로 하여 사랑의 기쁨을 알게 되고 또 이 사람으로 하여 사랑의 슬픔을 알게 된 그의 가슴은 페허처럼 쓸쓸하고 공허해졌다.
《한가지 알고싶군요. 동문 내가 정말 싫어요?》
주경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었다. 그는
리진은 자기의 가슴에 얼음쪼각처럼 떨어져내리는 그 눈물에 당황하여 무심결에 주경의 한손을 잡았다. 주경은 아무런 느낌도 온기도 없는 싸늘한 손을 그가 하는대로 맡기였다.
문득 주경은 아득히 흘러간 소녀시절, 우뢰가 울고 소나기가 퍼붓던 토끼방목지에서 그가 오돌오돌 떨던 이 손을 잡고 제 옷을 덧씌워주며 하던 말이 떠올랐다.
《흥, 겁쟁이, 겁쟁이같은거. 용감한체… 무서워말아, 내 불을 피워줄게.…》
정말 이 사람은 차겁게 얼어드는 이 마음에 불을 피워줄가. 뜨거운 정열의 불을 지필지도 몰라. 그 불에 얼어든 이 몸이 녹아내려 다시 불타오를수 있을가. 아니, 그렇게는 안될거야, 우린 서로 판판 다른 처지니까…
리진이도 이 시각 주경의 나른한 손을 잡고 과거와 현재를 더듬었다. 아, 추억도 청춘도 함께 나눈 주경이, 이 마음속에 그를 떠나 언제 다른 누가 있어본적이 있었던가. 그리하여 리진은
《난 동무의 행복이 무엇보다 귀중하기에 물러난거요. 우린 서로 푼수가 다르잖소.》
《그래요. 달라졌어요. 난 어제까지만 하여도 동물 구원할 힘이 나한테 있다고 믿고있었어요. 어리석었지요. 하지만 동문 스스로 자기를 타승하고 진실로 행복에로 가는 길을 찾게 됐어요. 그러나 난… 여전히 나를 버리지 못하고있어요. 그리고 우리 가정은 그 무슨 혈통이니
주경은 일순 말을 끊고 원탁우의 꽃병에 눈길을 던졌다. 이 절기에 보기드문 하얀 국화송이가 석양볕에 깨끗하면서도 점직한 미소를 짓고있었다. 주경은 잠시 리진을 송두리채 담으려는듯 잠자코 바라보기만 하였다. 애절한 그 눈에는 초물같은 눈물이 핑 어리는것 같더니 이내 목메인 소리로 《부디 행복하세요.》하고는 몸을 홱 돌려 초연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
리진은 그가 바람처럼 사라진 문쪽을 터지는 가슴을 안고 바라보며 망두석처럼 서있었다. 돌연 그는 주경이가 자기곁에서 영영 떠났음을 실감하며 망연자실했다. 여태껏 실련의 아픔은 있었으나 변함없는 그 처녀의 마음에 의지하여 어설픈 관계나마 유지해오던 그 한가닥의 실오리마저 완전히 끊어져버린 쓰라림과 인제는 그를 다시 볼수 없는 허무한 생활이 몹시 지겨우리라는 위구까지 겹쳐들었다. 리진은 돌아섰다. 하얗게 성에가 불린 창문유리에는 그가 남기고 간 글이 씌여져있었다.
…
우리 서로 비쳐주자
너 밝아지고
나 또…
주경은 어릴적 동요를 채 쓰지 않았다. 어째서 나만 밝아지기를 바라고 자기는 단념했을가?… 뭔가 밝은 빛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어서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