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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5 회


제 3 편
70일전투의 열풍속에서


제 27 장


1


오늘 아침 서종섭의 불의의 타격에 잠시 얼떨떨해졌던 강대철은 지나온 나날을 더듬어보았다. 내가 서윤정을 유혹하고 차버렸다?… 혹시 피와 열정으로 끓던 젊은 시절 그 녀자한테 그 무슨 추파라도 던진적이 없었을가? 이 마음속에 서윤정이라는 녀성이 훌륭하게 찍힌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의 일솜씨나 품성때문이였지 색다른 감정때문은 아니였었다. 실로 종섭의 절규는 허망하기 이를데 없었다.

문득 강대철은 전후인 20여년전 도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 있은 일들이 삼삼히 떠올랐다.

록음이 짙어가는 여름 어깨박죽에 박힌 파편을 뽑고 건강을 회복해가던 대철은 병원에서 알게 된 영예군인처녀한테 반하여 그날도 정원숲에 그를 불러내왔다.

정원숲의자에 처녀와 나란히 앉은 대철은 그한테 자기의 마음을 고백하였다. 처녀는 랭랭히 거절하였다.

몸이 달대로 달아오른 대철은 목청을 높여 불타는 제 심정을 마구 쏟아부었다. 그 시각에 담당간호원이 불쑥 나타났다.

《실례해요. 대철동지, 웬 총각애가 찾아오지 않았어요?》

《총각애라니?!》

대철은 때아닌 때에 찾아온 간호원이 몹시 거슬린데다가 왕청같은 물음이여서 시답지 않게 반문했다.

《열대여섯살 됨직한 총각애였는데… 아까 대철동지한테 면회를 왔다고 하여 이리로 가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좀전에 이 숲에서 나오던 애가 글쎄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지 않겠어요. 난 이상하여 너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대답은 않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 씩씩거리더니 이 보짐을 땅에 내동댕이치더란 말이예요.》

대철은 그제야 간호원이 들고있는 보짐을 알아보았다. 그는 무슨 영문인지 알수 없어 우선 보짐부터 풀어헤쳤다. 한꺼풀 벗기니 편지봉투가 나졌다. 자기앞으로 보낸 편지였다.

보낸 사람의 이름은 겉봉에 밝히지 않아 대철은 봉투를 찢어 속지를 뽑아 펼치였다.

요즘 차도가 어떠세요? 전전날 꿈에 어쩌다 동지를 보았어요. 퍽 수척해뵈더군요. 아마 저의 마음속 근심이 그렇게 비친가봐요. 치료에 전심하세요.… 가보려고 몇번이나 맘먹었어도 이즈음은 철다리건설이 마감단계여서… 참말 속상해요. 마침 사촌남동생이 방학이군요.

변변찮은 속옷가지들을 보내니 자주 갈아입으세요. 그리고 상처가 아무는데는 찰떡이 좋다고들 해요. 건강한 몸으로 돌아오세요. 상봉의 그날을 손꼽아 그리며…

서윤정 올림.

보짐속에는 베천에 싼 묵직한 찰떡과 속옷이 몇벌 있었다.

《총각애가 어디로 갑디까?》

《철도역쪽으로요.》

강대철은 그 걸음으로 역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나 북행렬차가 이미 떠난 뒤여서 역구내는 반반했다.

(그녀석 울면서 보짐을 뿌려던졌다?… 왜 날 만나지 않고 그냥 가버렸을가?…)

강대철은 아무리 생각해봐야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 피끗 마쳐오는것이 종섭이의 허황한 오해와 판단이 그때부터 시작된것 같았다.

20여년전 누이의 심부름으로 자기를 찾아왔다가 눈물을 훔치며 돌아섰던 애어린 종섭이… 그렇다면 그 시절 서윤정의 마음속에 나에 대한 남다른 감정이 있었단 말인가? 어린 종섭이였지만 그걸 알고있었기에 그날 병원정원에서 누이아닌 다른 녀자한테 한 나의 불같은 말들을 죄다 엿듣고는 보짐을 뿌려던지며 밸풀이를 한것이 아닐가? 가만있자. 하긴 그래서 요전날 서윤정은 자기가 왼심을 써준 광폭항생제를 두고 우리 집사람이 오해할가봐 가만히 그랬노라고 했었다. 만약 그한테 딴마음이 없었더라면 내놓고 뻐젓이 할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순간 강대철은 예리하게 찌르는 아픔이 가슴복판을 꿰지르며 퍼져갔다. 여태껏 한 녀성의 마음을 모르고있었다는 사실은 인간으로서 죄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또 설사 알았다 해도 다르게는 될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그의 가슴에 아픈 상처를 남기지 않았겠는가.

비로소 강대철은 서종섭의 질타며 그의 집안사람들이 길가에서 만나도 소 닭보듯 하는 까닭이 리해되였다. 필경 그들은 서윤정의 기구한 운명을 두고 자기와 결부시키는것 같았다. 이것이 죄아닌 죄라는것인가. 정말 어처구니없으면서도 가슴아픈 일이였다.…

《아저씨!》

저물녘의 구내길을 걷고있던 강대철은 갑자기 등뒤의 부름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희미한 불빛을 안고 주경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저쯤에서부터 불렀는데두 못 들으세요? 무슨 생각에 그렇게 골똘해요?》

《음, 어데서 오는 길인가?》

《계선생님한테서요. 수소분리문제를 의논할려구 갔댔어요.》

강대철은 가슴속에 곤혹스럽게 일어번지던 괴로움을 어지간히 잠재운 뒤여서 마음이 한결 누그러져있었다.

《그래 해결방도를 찾았는가?》

《의논 못했어요. 계선생님한테 다른 일이 생겨 오늘은 푹 쉬라고 했어요. 그래서 병원에 가는 길이예요.》

《리진이한테?》

《그가 찾아낸 실마리를 빨리 무르익혀야 할게 아니겠어요. 이젠 산책도 한다니 그 동무의 정신력도 퍽 좋아졌을거라고 봐요.》

《그래, 우린 페불을 잡는 일을 한시각도 지체해서는 안되지.》

《그런데…》 말꼭지를 떼다마는 주경의 기색은 흐려졌다. 그는 무엇인가 좀자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잖아도 페불때문에 지난밤 작은아버지와 좋잖은 말들이 오갔어요.》

《왜?》

강대철이 모난 눈길에 물음을 싣자 주경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리진동무의 착상은 당장은 불가능하다는거지요. 그러니 페불국부도입실현과 제가 찾은 수소분산연료리용을 갖고 학위론문집필에 짬짬이 달라붙으라는거예요. 아마 과학원에서도 70일전투성과의 하나로 인정하고 독촉한가봐요. 하지만 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한사코 우겼어요. 페불에 그 아무리 세상을 놀래우는 박사론문감이 있다고 해도 말예요.》

《음, 그렇다?…》

강대철은 마음저린 눈길로 새삼스레 어두워가는 하늘을 붉게 태우는 페불에 시선을 옮겼다. 주경이도 거기에 시선을 주며 뒤를 이었다.

《저의 착상에 비해 훨씬 훌륭한 리진동무의 안이 있는데야 어떻게 제것을 갖고 학위론문을 쓸수 있겠어요.》

《그러니 기사장동무나 주경인 저놈의 페불에서 큼직한 학위를 꿈꾸고있었댔군.》 하고 뇌이던 강대철은 아슴푸레한 꿈속을 헤매이다 홀연 눈을 뜬듯 타번지는 눈길을 다시 주경이한테 돌렸다.

《주경이, 누가 어떻게 생각했든 페불에서 명예부터 봐야 할가? 당과 조국이, 친애하는 그이께서 바라시는 일을 두고 말이야.》

《…》

주경은 아무 말도 못했다. 순간 강대철의 머리속에는 번개불같은것이 번쩍 틔였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잠시 놀라움에 차서 숨을 죽였다. 지금까지 암중모색하던 하나의 귀중한 진리를 발견한듯 눈앞이 불시에 환해졌다.

아, 이 단순하면서도 바른 리치가 인제야 떠오르다니?… 어제 리진이도 바로 이와 같은 개인적인 리해관계에 빠져있었다. 주경이 역시 자기의 착상을 부정하면서도 《자기의것》이라고 표현하고있었다. 만약 리진의 안이 없었더라면 주경은 자기의 착상을 갖고 박사의 꿈을 실현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각자들이 다 자기라는 리기의 울안에 갇혀있다나니 조국애와 결합된 과학자의 자세, 탐구자의 립장을 잃고있다. 세상만사는 다 이때문에 망쳐지게 되는것이 아닌가. 사람에게 있어서 생활과 투쟁의 밑바탕으로 되는 애국심, 즉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바라심을 사업과 생활의 1차적인 과제로 두지 않는다면 연구사업은 뿔뿔이 흩어져 아무것도 성취할수 없거니와 그들 사랑의 결합도 불가능할것이다.

《주경이, 동문 리진이 공정에 뛰여든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것이 만약 공정을 구원하기 위한 소행보다도 자기가 어떤 인간인가를 보여주려 했다면 말이야.》

《누가 그런 험담을 해요? 어쩌면 쉽지 않는 그 위훈을 그렇게 야비하게 헐뜯을수 있어요?》

《이건 다른 누가 그런건 아니야.》

《전 그 동무를 믿어요. 옳게 살려는 깨끗한 량심을 말예요. 다만 아버지가 남긴 어지러운 자취때문에 나와 멀리 하려는것 같애요. 전 결심했어요. 그한테 더 큰 힘을 주려면 이 마음을 깡그리 주는거라고 말예요. 아저씨도 나한테서 그걸 바라셨지요?》

나직하나 열정적인 주경의 어조와 모습은 사랑의 열정으로 한껏 타올랐다. 사랑에 끓는 그 감정은 그의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강인하고 흔들림없는 의지이기도 하였다. 강대철은 주경의 심정을 뜨겁게 느끼며 그들을 위해 할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옳다. 리진이 그 사람은 옳게 살려고 몸부림치지. 그런데 어떻게 사는 길이 옳은 길인지 잘 몰라. 그저 아버지와 다른 길이, 아버지를 부정하는 길이 옳은 길이라고 믿고있지. 헌데 그한테는 여전히 아버지의 넋이 살아있거던.》

《아버지를 부정하는데 아버지의 넋이 있다니요?!》

《그도 제 아버지처럼 자기자신을 구원하려 했으니까.》

《누가 그래요?》

《엊저녁 리진이 찾아와 고백했다. 제 입으로 말이다.》

《?!》

주경의 두눈은 불시에 커다랗게 흡떠졌다. 리진의 그 고백은 너무도 청천벽력같은것이여서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강대철은 새롭게 눈을 뜨기 시작한 자기의 견해를 말해주고싶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리진이나 주경이나 자기라는 갑속에 그냥 살고있는 한 동무들의 결합은 굳건치 못할것 같구만.》

주경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는 상태에 빠져들었다.

《모르겠군요. 아저씬 전날에는 저한테 뭐랬어요. 사랑하라! 그러면 그 동무도 구원되고 모든것을 이길거라고 하잖았어요. 그래서 난 아버지한테 용서를 빌고… 나로서는 넘기 힘든 계선을 넘어왔어요.》

《그러리라 믿었다. 나도 그때까지만 해도 주경이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모든것이 다 풀릴줄로 알았지. 까놓고 말해서 서로 위해주는 일심이면 다지 뭐가 복잡할게 있겠나. 그러나 우린 가장 중요한걸 몰랐거던. 생활의 철리랄가, 리치랄가.… 우리 저 과일숲에 가 좀 앉자구, 날씨도 좋은데.》

강대철이 과일숲의 찬 돌의자에 앉으려 하자 주경은 제 장갑을 벗어 자리에 깔아주었다. 주경은 무릎을 꿇고 그의 앞에 마주앉았다.

《이건 나라가 해방된 이듬해 리진의 부모들의 잔치날에 있은 이야긴데 말이다.…》

강대철이 어딘가 어둠속을 응시하며 이어갔다.

《그네들이 살던 고장풍속에 의하면 잔치날 새각시가 상을 받을쯤이면 신랑을 짜내는 놀음이 벌어지는데 무지스러운 놀음군들이 사정없이 신랑을 대들보에 꺼꾸로 매달아놓고는 닥달질을 한다지 않겠나. 그러면 바빠맞은 신랑측에서는 떡이면 떡, 술이면 술, 큰상에 놓인 갈비면 갈비… 행패군들의 요구대로 다 내놓는것이 잔치법도로 돼있었다는군. 리진의 아버지란 사람도 잔치날 례외로 될수 없었지. 헌데 어리무던하기 짝없는 그 사람은 대들보에 꺼꾸로 매달려 장작개비에 종아리를 얻어맞아 다리가 팅팅 붓고 피멍이 퍼렇게 들면서도 새각시상을 허물어바치라는 령을 기어이 물리치고 지켜냈다질 않겠나. 그 뭇매질에 인사불성이 돼가지고서도 그날 밤 제 색시보고 하는 소리가… 임자를 맞아들이는데 그만한 매가 다 뭐라고, 장밤이라도 맞고싶소라고 했다는구만. 그리고는 각시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워주며 우리 이 가락지처럼 끝을 모르고 살자고 언약까지 하구. 그뿐이겠나. 전시에는 안해가 로상에서 잘못될가봐 피난지에도 보내지 않고 후퇴의 마지막날까지 만삭이 된 안해를 돌봐주기도 했지. 그렇게 끔찍이 위해주던 사람이 고향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고 또 행방없이 떠돌아다니다 값없이 죽었거던. 그는 고향을 뜨고싶어 뜬것도 아니고 누가 가라고 쫓은것도 아니였어. 부부금슬로 말하면 어느 가정보다도 깨가 쏟아졌지. 헌데 어째서 함께 살수 없었을가? 내 생각에는 사랑이니, 금슬이니 하는것들이 그 아무리 깊어도 자기자신, 자기 가정, 자기라는 세속적인 울타리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기필코 갈라지기마련이 아닐가? 바로 그런 위험한 싹이 너희들한테, 너희네 가정들에 있는것 같애.》

주경은 머리를 수그리고 듣고있었지만 가슴에서는 세찬 파도가 일었다. 강대철의 평이한 말속에는 새롭게 안겨오는 인생의 철리, 신비할 정도로 높은 정신세계를 암시하며 가슴을 치는 삶의 수수께끼가 있었다.

사랑하면서도 영영 갈라진 부부, 사랑하면서도 이 땅에서 잃은 삶의 권리, 사랑하면서도 살수 없는 그 길… 만물은 해빛이 없으면 살수 없듯이 인간은 사랑이 없으면 행복할수 없다. 사랑은 매 개체들이 느끼는 구체적인 감정임과 동시에 생의 환희로운 불길이다. 때문에 인간행복의 해빛은 사랑이라 일러왔다. 그러나 사랑은 그자체에 머물러있어서는 안된다. 사랑은 결합의 기초일뿐 행복의 전부는 아니였다.

주경은 지금까지 사랑이라는 성스러운 감정에는 그 무엇도 섞을수 없는것으로 리해하고있었다. 진실로 사랑이란 무엇이며 분렬없는 행복에로 가는 길은 어데란 말인가? 사랑은 자기의 리익만을 추구할 때 리진의 부모들처럼 분렬을 초래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가슴에서 자기라는 속물을 없애는 길? 자기자신을 가슴에서 비우는 길? 그 빈자리에 무엇이 차있어야 하는가?…

주경은 자기를 버티고있던 사랑의 기둥이, 큰산처럼 막아선 작은아버지도 두렵지 않던 의지의 힘이 불시에 허물어져내리는 아찔한 절망과 자기의 몸이 천길나락속에 허궁 떨어져내리는 환각에 몸서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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