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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찰병들의 진지

 

일반적으로 보병들에게는 자기의 진지가 있다. 진지에 의거하면 자기몸을 될수록 로출시키지 않고 적들을 효과적을 소멸할수 있고 긴장한 전투정황에서 일정한 휴식조건을 마련할수도 있다. 아마도 전장에서의 진지는 보병들을 보호해주고 품어주는 따스한 품이고 방패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후방을 종횡무진하며 전투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정찰병들에게는 그런 진지가 없다. 그래서 가장 치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보병들의 제1선참호가 정찰병들에게는 가장 안전한 후방으로 되기도 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적을 정신적으로 압도하면 승리는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주체39(1950)년 6월 인민군대에 의해 서울이 해방될 때 중학교졸업을 앞두고있던 나는 그해 8월말 18살의 나이로 군대에 탄원하였다.

이것은 나의 인생에서 극적인 전환의 계기로 되였다. 이때로부터 나의 두번째 인생이 시작되였다.

한달가량 정방산부근에서 민족보위성(당시)직속 어느 한 련대에 소속되여 신병훈련을 받은 나는 련대가 제3군단 15보병사단에 편입될 때 사단직속 정찰중대의 정찰병이 되였다.

전쟁을 겪으며 받았던 충격과 구체적인 사실들이 이제는 머리속에서 완결된 하나의 기억사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쟁시기에 가졌던 생각, 우리와 맞선 적들은 왜 이렇게 비겁할가 하는 생각은 아직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것은 전쟁상대방에 대한 무조건적인 무시나 무턱대고 적을 깔보려는 그 어떤 타성에서 나왔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나는 나의 체험으로 내가 맞다든 적들이 그런 놈들이였음이 틀림없다는것만은 확신한다.

주체40(1951)년 가을 우리 사단 전연에 위치한 적들의 력량이 일부 배비변경되였는데 그 구체적인 움직임을 알아낼데 대한 임무가 우리 정찰중대에 떨어졌다.

적장교놈을 잡아오는것이 제일 빠른 방도라고 생각한 중대장은 10명 남짓한 대원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그속에는 19살난 분대장인 나도 있었다.

우리는 소양강을 따라 하류쪽으로 내려가다가 린제부근에서 혀를 잡을만 한 맞춤한 장소를 찾아냈다. 길 한쪽으로는 강이 흐르고 반대쪽으로는 우중충한 바위벼랑이 서있었다. 길량쪽에 매복한다면 적이 도주를 시도하는 경우에도 쉽게 잡을수 있을것 같았다.

우리는 곧 벼랑끝을 허물어 길을 막아놓고 두조로 나뉘여 량쪽으로 매복하였다.

얼마후 밤공기를 타고 자동차발동소리같은것이 들리더니 인차 한대의 찦차가 우리가 쌓아놓은 돌무지앞에서 멈춰섰다. 때를 놓치지 않고 우리는 일제히 찦차를 에워쌌다.

《손들엇! 반항하면 쏠테다.》

통역원격인 우리 동무가 맵짜게 영어로 말하자 놈들은 제꺽 두손을 들고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반항같은것은 애초에 생각도 못했다. 찦차에는 운전사와 한놈의 미군장교놈이 타고있었는데 키가 나보다 두뽐정도나 큰 놈들이였다.

무장해제당한 장교놈은 애절한 몰골로 웃주머니에서 보풀이 인 종이장을 꺼내들고 뭐라고 같은 말만 반복했다. 종이에는 살려만 주면 하라는대로 다 하겠다는 내용의 글이 우리 말로 적혀있었다. 아마도 자기가 인민군대에 잡히는 경우를 생각하여 늘 품고다니던것 같다. 정말 살기 위해서는 무슨짓이나 다할 놈들이라는 생각에 울컥 치미는 격분과 함께 이런 비굴한자들이 미군장교라고 우쭐렁거렸다는 생각에 조소를 금할수 없었다. 그렇게 무서우면 대양건너 제집에나 틀어박혀있을것이지 무었때문에 남의 나라 땅에까지 와서 못된짓을 한단 말인가.

우리는 놈들의 차를 척 타고 유유히 전선린접까지 왔으며 거기에서 미군포로를 끌고 전선을 넘었다.

그후에도 나는 수십번이나 혀를 잡기 위하여 적후에 들어가군 하였는데 놈들이 노는 꼴은 다 이런 식이였다. 총구를 들이대면 너무 무서워 온몸이 굳어졌는지 손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것이 적들이였고 미국놈들이였다.

주체41(1952)년 습격조활동을 활발히 벌릴데 대한 최고사령부의 명령을 받들고 우리 정찰병들은 습격활동에도 많이 참가하였다.

중대의 인원도 대폭 늘어나 우리는 정찰대대로 되였다. 하루밤에도 10여개의 습격조들이 나가 적들을 기습하고 적진을 혼란시키며 숨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적들은 더욱더 공포에 떨었으며 자기 부대의 진지가 있는 산꼭대기에서 골짜기로 내려오는것은 벌써 죽음을 각오한 놈들이래야 가능한것이였다. 오죽하면 이미 전화선이 늘여져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누군가가 끊어버리면 수시로 진지와 련계를 가질수 없을가봐 내려오는 놈마다 고지에서부터 전화기와 함께 새 전화선퉁구리를 가지고 내려오군 하였겠는가. 그래서 미국놈들의 고지에 조금만 접근하면 한아름됨직한 전화선들이 뭉테기로 나딩구는것을 흔히 볼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생각하군 한다. 미국놈들은 든든하게 꾸려놓은 자기들의 진지안에서도 왜 항상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했고 우리는 적들의 종심깊은 곳에서도 마음먹은대로 활개를 칠수 있었을가. 그것은 아마도 미국놈들이 돈에 팔린 고용병들이고 침략자들이였기때문일것이다.

우리가 딛고선 땅은 아군지역이든 적후이든 당당한 우리의 땅이였지만 미국놈들이 딛고선 땅은 아무리 자기들이 차지한 진지라도 남의 땅이였다.

이런 의미에서 적들은 진지에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지는 없었고 우리 정찰병들은 비록 진지는 없어도 어디 가나 자기들의 진지에 있는듯 마음든든하였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살점보다 더 귀한 내 조국이였고 김일성장군님의 품이였다. 그 품이 없었다면 나서자란 남조선땅을 떠나 혼자몸으로 공화국에 들어온 내가 어떻게 이름높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할수 있었으며 어떻게 여든을 넘긴 오늘까지 이름난 국가연구기관에서 교수, 박사로 여생을 떳떳이 빛내일수 있었겠는가.

전쟁로병 김 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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