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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제 52 회


제 3 편
70일전투의 열풍속에서


제 25 장


2


폭삭 물앉은 경비막, 찢어진채 시커멓게 타버린 연유탕크, 사처에 휘뿌려진 도람통잔해들, 넓고 깊숙이 파헤쳐진 폭탄구뎅이… 이것이 적기들의 야간공습이 즘즘해지자 마을쪽에서 허둥지둥 달려온 유선림앞에 펼쳐진 연유창의 광경이였다. 녀인은 이 어망처망한 광경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 졸도하였다.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린 그는 여기저기 살피며 남편과 준갑아주버니의 시신을 찾아헤맸다. 아무도 없었다. 숨이 나오고 차츰 다른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낮에 남편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자기들도 당장 소개지로 떠나야 한다던. 그렇게 되면 선림은 친정에 가있으라고 하였다. 소개지에는 합숙으로 쓰는 토굴집밖에 없어 아이가 생겨도 따로 거처할데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니 불의에 공습이 닥치자 미처 련락할새없이 아무 자동차나 타고 소개지로 피신한것 같았다. 반정신이 나간 녀인은 이밤 부디 그렇게 믿고싶었다.

마가을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 선림은 친정집으로 떠난다는 쪽지를 빈집에 남기고 길에 나섰다. 만삭의 몸이여서 선림은 될수록 손짐을 간편하게 하였다. 몇되박 안되는 수수와 좁쌀을 애기포단에 싸 등에 걸쳤다. 자욱한 안개발을 뚫고 내리는 비에 길은 질적하였다. 코고무신바닥은 자꾸만 진창에 미끌려 걷기가 여간 위태롭지 않았다. 자칫 몸이 자빠지기라도 하면 배안의 생명이 락태할수 있었다. 녀인은 보짐을 잔등에 올려놓고 길바닥에서 새끼오리를 찾아 코신바닥을 휘둘러감았다. 한결 미끄럽지 않아 걷기가 수월하였다. 녀인은 처지는 아래배를 두손으로 그러안고 걸었다.

밤인것이 다행이였다. 두손의 피부로는 기분좋은 감각이 마쳐왔다. 배안에서 생명체가 꼼지락이였다. 그것은 이밤의 을씨년스러운 비도 근심걱정도 모르고 노닐었다. 가슴은 순식간에 푸근하고 고자누룩해졌다. 이즈막 녀인은 자주 배안의 감촉에 남모르는 달콤한 행복을 맛보군 하였다. 녀인은 문득 만시름을 잊고 배안의 생명과 노닐고싶은 감질이 났다. 그래서 아래배를 감싸안은 한손을 좀 세게 눌렀다. 배안의것이 한동안 까딱 안했다. 어디로 숨어버린듯, 이번에는 다른 손으로 꽉 눌렀다. 그러자 반대쪽 배가 무죽해났다. 그쪽으로 자리를 피한것 같았다. 녀인은 방그레 웃었다.… 요 깜찍한것, 제아무리 숨박곡질해도 어림없어요… 라고 입속으로 뇌이던 녀인은 갑자기 《아!》하고 가는 비명을 질렀다. 배안의것이 그 나무람에 도전이라도 하듯 힘껏 걷어찼다. 뜨끔하고 급작한 아픔이 아래배로부터 우로 퍼졌다. 식은땀이 몸에 내뱄다. 그때 바람이 한옆으로 불며 목깃짬으로 차거운 비물을 쓸어넣었다. 아픔이 조금 덜어졌다. 다시 일어난 녀인은 맥이 빠져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제야 녀인은 인적없는 심야에서 홀로 헤매이는 공포에 눌리워 어둠속을 휘휘 둘러봤다. 멀지 않은 곳에 알릴듯말듯 비에 젖은 역구내철길이 번들거렸다.

녀인은 요행을 마음속으로 빌고빌며 울타리가 없는 역구내로 빠져들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유개와 무개화차방통들을 줄느런히 거느린 증기기관차가 금시 떠날듯 남쪽방향을 향해 씩씩거리고있었다. 급해맞은 녀인은 무작정 맨뒤의 차장차를 향해 뚱기적뚱기적 반달음쳤다. 철도제복을 입은 사나이가 차장실 승강대로 오르고있었다. 한손에 상호등이 들려있어 차장인듯싶었다. 녀인은 얼굴에 흘러내리는 비물과 땀물을 훔칠새없이 가쁜숨을 몰아쉬며 다급히 사정하였다.

《저… 좀 태워주세요.》

사나이는 승강대손잡이를 잡은채 뒤돌아봤다. 어딘가 깔끔하게 생긴 애젊은 청년이였다. 그는 야밤의 홍두깨처럼 불쑥 나타난 녀인을 미심쩍게 여겨보다 단마디로 잘랐다.

《안되오!》

그리고는 승강대가운데단에서 제창 뛰여오르려고 무릎을 약간 굽혔다. 녀인은 잠기는 목안의 소리로 다시금 애절히 간청했다. 홱 얼굴을 돌리는 청년의 눈빛은 날카로왔다.

《이 아주머니… 도대체 셈판을 모르는구만. 이 차가 무슨 찬지 알기나 하고 접어들란 말이요. 여기서 어물거리지 말고 썩 사라지시오. 호송군관동지가 오면 된벼락을 맞지 말고.》

청년은 차장실로 사라졌다. 선림은 흠칠 놀랐다. 제 사정이 급했던 그는 이 렬차가 무엇을 실었는지 알지 못했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녀인은 무개화차마다 비죽이 내민 포신들이 방수포에 씌워있는것을 보고서야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뛰여든 자신이 뉘우쳐졌다. 그는 눈앞에 절벽이 막아나선듯 캄캄해났다. 비물은 사정없이 그의 옷을 적시며 몸에 스며들었다. 그는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하고 이밤 넘어야 할 어둠에 잠긴 산발을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다. 속에서는 울음이 터졌다.

(여보, 난 어쩌면 좋아요.)

의지할데 없는 녀인은 남편의 다심스러운 손길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여, 차장!》

돌연 등뒤에서 둔탁한 목청이 울렸다.

《떠나잡니까?》

차장칸 창밖으로 이자 그 청년의 머리가 튀여나왔다.

《저쪽에서 련락이 왔소, 빨리 출발하자구. 가만가만, 이 아주마인 뉘기요?》

그 물음에 차장청년이 또 증을 냈다.

《아니 원, 아직도 버티고있소? 젠장, 아무나 타는 차가 아니라잖소!》

《가만가만, 이 아주마인 홀몸이 아닌것 같구만. 어디멜 갈려구?》

선림은 동정섞인 진한 북관사투리에 막연한 기대를 품고 머리를 치켜들었다. 인민군대군관복을 입은 앞가슴이 버그러진 중년이 앞으로 다가왔다. 승마바지에 가죽장화를 신은 군복만 아니라면 거뭇한 얼굴색에 깊이 패인 이마의 외주름, 후더분한 눈빛, 한뉘 볕에 끄슬리고 밭일에 치달린 농사군같았다.

《명주, 친정집에 갈려구…》

《명주? 음, 몸풀려구… 가만가만, 여 차장! 이 차가 명주역에서 급수하던가?》

《그럼요.》

《됐구만, 이 아주마일 태우기요.》

이 선선한 호의에 그때 선림은 또 얼마나 울었던가. 그러나 그 호의로 하여 그날 밤 군수렬차가 뜻하지 않는 소동을 일으키게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한밤중에 선림은 누가 배를 되게 걷어차는 바람에 눈을 떴다. 그처럼 우려했던 새 생명의 요동질이 또 시작되였다. 처음에는 내장이 쇠집게에 비틀리우는것 같더니 렬차가 와당탕… 탕탕… 들추어대자 점점 아픔이 더해졌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두손을 이쪽저쪽 옮겨짚으며 매삼쳤다. 숨이 꺽꺽 막히고 온몸이 빠작빠작 타들었다. 눈앞에서는 무수한 별찌들이 란무했다. 금시 소래기가 터질것 같았다. 녀인은 젖은 수건을 입에 틀어막고 두무릎을 꽉 끌어안았다. 우당탕, 탕탕… 또 드센 렬차진동에 좁은 의자우에서 몸부림치던 그는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맞은켠의자에 앉아 말뚝잠을 자던 군관이 눈을 번쩍 떴다. 처음 무슨 소리인지 어리뗑해있던 그의 눈길이 바닥에 미쳤다. 흔들거리는 남포등의 희미한 불빛이 달팽이처럼 몸을 오그라뜨리고 쓰러진 녀인의 자태를 얼추 비치였다. 피기없는 해쓱한 얼굴, 무수한 땀방울이 돋은 이마, 가쁘게 오르내리는 고르롭지 못한 숨결, 꺼져가는 신음소리… 군관은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등에 걸쳤던 군용외투가 미끄러져내렸다. 그는 대뜸 생명이 매우 위험한 경각에 이르렀음을 직감하였다.

그러나 무엇부터 어쨌으면 좋을지 선뜻 궁냥이 트이지 않았다. 난생처음 당하는 일이였다.

《여, 차장, 폭풍이야, 폭풍!》

《예―에?!》

차장이 선하품을 하며 허리를 폈다. 군관은 그를 불러놓고도 어쩔바를 몰라 한자리에서 서성거리다 구석쪽에 달려갔다. 그의 발부리에 빈바께쯔가 걸채여 나딩굴었다.

《가만가만, 이 바께쯔물이 어데갔어?》

《초저녁에 내가 다 썼어요. 왜 갈증나요?》

《음, 없단 말이지.…》하며 군관은 바닥에 쓰러진 녀인한테 안타까운 시선을 박았다. 차가 또 와당탕 들추어 군관은 자빠질듯 비칠하다 겨우 몸을 가누고 일어서더니 그 무슨 중대결단을 내릴 흥분된 소리로 중얼거렸다.

《가만가만, 세워야 해. 암, 세워야 하구말구. 이 차를 말이야.》

《차를요, 정신있어요?!》

《사람이 죽어가고있소, 사람이! 나가서 제동변을 당기라구. 왜 멍청해있어, 귀가 먹었어. 얼른 급정변을 틀라이… 명령이란 말이다, 명령!》

군관의 입에서는 뢰성같은 고함이 터졌다. 한방 쏴갈길듯 눈에서는 퍼런 불이 일었다. 그 험한 기상에 기절초풍한 젊은 차장은 그때에야 바닥에 쓰러진 녀인을 스쳐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윽고 올리막길로 숨가삐 달리던 렬차는 차륜이 깎이는 아츠러운 소리를 지르더니 멈춰섰다. 젊은이가 다시 차장실에 들어왔을 땐 바닥가운데 군인용백포가 깔려있었다. 군관은 실신한 녀인을 힘겹게 들어 백포우에 눕혔다.

《뭘해, 얼른 물을 길어와! 샘물을 말이야. 가만가만, 그다음은 밖에서 보초를 서라이, 누구도 여기에 얼씬 못하게 말야. 알겠지?》…

…선림은 정신이 흐리마리해졌다. 밤… 심연… 빛은 꺼졌다. 그는 물결우에서 흔들리는 배를 붙잡으려고 애썼다. 흥떡이는 물결, 흔들리는 배, 노젓는 소리, 노밑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소리… 배는 정처없이 흔들흔들 떠간다. 그는 그 배를 잡으려고 허우적인다. 배가 어데로 갔을가? 캄캄한 밤, 심연의 바다다.…

무엇인가 찢기는 아픔이, 광포하고 무자비한 힘이 몸을 꽈악 누른다. 몸이 물밑으로 한정없이 잠기였다. 다시 솟구치는 몸, 또 흔들리는 쪽배… 숨이 나간다. 눈앞이 밝아졌다. 아롱다롱한 무지개가 비낀 밤이다, 금빛밤. 황홀한 그밤… 서로 가쁘게 고동치던 박동, 하나로 녹아흐르던 체온, 눈을 감고 주고받던 속삭임, 만시름을 잊고 졸면서… 흔들리는 쪽배… 또다시 몸이 물밑으로 한정없이 가라앉는다. 숨결이 막혀 몸부림을 치며 안깐힘을 썼다. 그때 물큰한 무엇이 아래서 빠져나가는듯 몸이 물우에 불쑥 떠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고통과 나른한 육체… 그때 《아앙!》 하고 야무진 소리가 들려왔다.

녀인은 본능적으로 조그마한 살덩이를 끌어안으며 몸에 가리웠던 덮개를 끄집어 감쌌다.

《어, 그녀석 울음소리 다기차군.》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차장실문이 벌컥 열렸다.

《누가 차를 세웠어, 누가! 당신이 뭐길래 렬차를 세워, 엉? 당신도 군대가 맞긴 맞아, 녀편네를 꽁무니에 차고 이 란리통에도 제 볼 재미를 다보는 그따위도 군대야. 10분이나 지체됐어, 10분! 군법이 가만있을줄 알아!》

《야참, 기관사아바이두. 이 아주머닌 군관동지의 안해가 아니라는데…》

젊은 차장의 목소리다. 선림은 그 소리에 정신이 들어 덮개깃짬으로 내다봤다. 얼굴이 온통 수염투성이인 텁석부리령감이 침방울을 튕기면서 왝왝 고아쳤다.

《뭐야, 그럼 이 아낙은 뉘란거야?》

《피난가던 녀인이였지요.》

《…》

《아바이, 내 소견머리없는 놈이여서 달리는 할수 없었수다. 군법이 용서하지 않는줄 알면서 말이우다.》

《…》

기관사령감은 무릎을 꺾고 앉더니 담배쌈지를 꺼내 마라초를 한대 말아물었다. 옆에 서있던 기관조사가 얼른 성냥을 드윽 그어 불을 붙여주었다. 기관사령감의 더부룩한 수염이 덮인 입으로는 연기가 뿜어나왔다. 그 더부룩한 수염밑에서는 느슨한 미소가 피여났다.

《음, 그럴테지. 임잔 우리 장군님의 슬하에서 자랐겠으니… 걱정 꽝 놓소, 군관! 여 기관조사, 깔아뒀던 고열탄은 어따 쓰겠나. 증기를 부쩍 올리세. 바람나게 달려보잔 말야. 그래 뭘 낳았소?》

《꼬투리요.》

《어허, 군대감이군. 여 조사, 뛰여가서 기적변을 뽑게. 까짓것, 세상이 다 듣게 말야, 하하…》

선림은 불뭉치같은 뜨거운것이 속에서 왈칵 쏟아져나왔다.

그는 백포속에서 아기를 꼭 껴안고 어깨를 떨며 흐느끼였다.…

《하, 그의 아버지는 달아나다 잘못되고 렬차에서 아들은 태여났구만. 얼마나 좋소, 우리의 세상이.》

언젠가 유선림이 해준 이 이야기를 듣고 강대철이 하던 말이였다. 선림은 이밤 어째서 그가 그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키는지 이제야 알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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