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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9 회


제 3 편
70일전투의 열풍속에서


제 24 장


1


열흘 지나서부터 리진의 호흡장애는 가셔지고 화상자리도 새살이 돋기 시작하여 그에게 가벼운 산책이 허락되였다.

그는 이른아침 산책을 나가던 걸음에 먼저 승표가 입원한 병동부터 찾았다. 그가 오늘 퇴원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같은 공장병원에 입원해있으면서 아직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어제 리진은 병원정원숲에서 어쩌다 그와 마주쳤는데 승표의 시선이 딴데로 외면하고있어 말을 건네지 않았다. 리진이자신도 그한테 딱히 할말은 없었다.

공정에 뛰여들던 그밤에는 그가 그렇게도 분노로 끓게 하더니 지금은 모든것이 용서되고 리해되였다. 어찌 보면 그가 실지 자기를 걱정하여 막아나서지 않았겠는가. 리진은 자기의 가슴이 무척 비좁고 용렬한것으로 차있는듯싶어 퇴원하기 전에 그를 만나 풀기로 하였다.

마침 호실에는 승표뿐이였다. 승표는 호실바닥에 서서 씨근덕거리며 곤봉운동을 하고있었다. 량손에 든 곤봉이 쩍 벌어진 그의 가슴앞으로 빙글빙글 돌아갔다. 방안에 들어서는 리진을 힐긋 스쳐보는 승표의 눈빛은 싸늘했다. 리진이 들고온 과일구럭을 그의 사물함우에 올려놓자 승표의 두툼한 입귀가 쓰겁게 실그러졌다.

《왜, 병주고 약주러 왔나?》

《승표, 우리 사내들인데 지난 일들을 다 잊으세나.》

승표는 곤봉을 침대우에 휙 던지고는 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받았다.

《나야 뭐 사낸가? 졸장부이고 약골이지. 동문 이겼어. 진짜 날 보기 좋게 멨다꽂았어. 난 만사람앞에서 곤두박힌 꼴이 됐지. 자넨 영웅일세.…》

승표는 빈정거렸으나 억양은 억눌려있었다. 지금까지 사내다운 기질이나 용맹에서 제노라 하던 그가 그날 밤 비겁하게도 공정에 남먼저 뛰여들지 못했을뿐아니라 오히려 막아나서기까지 하였으니… 그는 갑자기 북받치는 울분을 걷잡지 못해서인지 문을 차고 밖에 나가버렸다.

리진은 빈 호실에 앉아 그를 한참 기다리다 밖에 나섰다. 병원정문을 벗어나 용수천을 건넜다. 낮에 녹은 질퍽한 덧물이 얼어붙은듯 버석버석한 강판을 지팽이를 짚고 가까스로 넘은 그는 동뚝길에 올라섰다. 밤새에 정화된 깨끗하고 신선한 공기가 페장깊이 스며들었다. 리진은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하였다. 페부에 흘러드는 청신한 대기에 가슴은 쩡해나고 막혔던것이 활 열리는것 같았다.

이 동뚝길에 나서니 걸음마다 지난 시절의 자취가 새록새록 밟히였다. 공장대학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저녁이면 주경이 마중하여 기다리다 어느 한 곳에 앉아 달빛이나 페불을 등불삼아 그날 배운 학과를 복습하던 일이며… 한여름 동뚝경사면에는 잔디뿐아니라 토끼풀과 괭이밥풀, 억새풀, 물쑥들이 성하는 속에 애기나팔꽃, 원추리, 만수국, 일일초들이 피여 향기를 풍겼다. 주경은 리진이 그날 배운 학과를 만점으로 리해하고 소화시켰으면 제일 고운 자주빛만수국이나 진분홍 애기나팔꽃을 꺾어 평해주고 4점정도이면 꺽두룩한 원추리로, 문제를 풀지 못하거나 얼빤하게 알게 되면 물쑥으로 머리를 때렸다. 주경은 조금치도 사정을 두지 않는 엄격한 교관이였다. 그런데 리진은 슴슴한 나팔꽃이나 멋없이 꺽두룩한 원추리보다는 향긋한 약내가 물씬거리는 물쑥냄새가 더 좋아 어느날 우정 아는것도 모르는체 하였다. 그걸 어떻게 눈치챘는지 주경은 뿌르르 동뚝아래 줄지어 심어놓은 가시돋친 찔광이나무가지를 꺾어들고 연방 조겨댔다. 리진은 그 불의의 공격에 동뚝길로 줄행랑을 놓았다. 찔광이가지를 쳐들고 쫓는 주경의 매를 맞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몸을 피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둘다 배를 그러쥐고 웃어대군 하였다. 그때 그들은 한여름의 향기에 취해 얼마나 천진했던가. 그 모든 지난 일들은 사춘기시절의 장난이고 흘러가버린 과거였다. 그 시절에는 아무런 고민도 근심걱정도 몰랐다.

리진은 동뚝아래 내려섰다. 눈에 다져진 소로길을 따라 얼마 못미처 은백양나무가 나졌다. 리진은 오랜지기를 만난듯 가슴이 그들먹해졌다. 이 새벽 거목도 미풍에 잔가지들을 흐느적이며 반기였다. 츠름츠름 하늘갓이 들리면서 사위가 우렷해났다. 미구에 붉은 노을에 물들었던 비파봉마루에 아침해가 머리를 쳐들었다. 상쾌하면서도 줄기찬 해살이 부채살처럼 퍼졌다. 거목의 아지들이 수선거리고 아지마다 앉아있던 참새무리들이 바람에 포시시 일어선 털들을 비다듬으며 수다스레 재깔거렸다. 가닥가닥 퍼지는 해살은 점차 고색이 짙은 터실터실한 아름드리 밑둥에 옮겨졌다. 가고오는 눈바람을 다 맞고있어 흐르는 세월이 새겨진 거목의 거죽은 유난한 광채로 빛났다. 그것은 마치도 의연히 외진기슭을 지키고있어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 세상사를 품에 안은 고명한 인간의 빛나는 모습같았다. 때를 같이하여 새들이 일시에 붉게 타는 구름아래로 후르르 날아올랐다. 새무리는 아직도 미명속에 잠긴 저멀리 비파봉아래숲, 다가올 이 아침의 황금쪼각같은 빛을 품안을 그 찬란한 시각을 기다려 푸른 정기를 뿜고있는 숲을 향해 날아갔다.

리진은 자연의 이 신비와 상쾌한 대기, 생의 음향으로 가득찬 신선한 아침을 다시 만나게 된 무상의 기쁨에 감격하였다. 늘 보아오던 이 거목과 이 땅, 저 해빛과 새무리들이 왜 이리도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지팽이에 몸을 싣고 끝없는 감동에 잠겨 점도록 바라보기만 하였다.

《어―허―어―》

어디선가 멀리에서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오복이 한손을 쳐들고 이쪽으로 달려오고있었다. 그뒤에는 오복의 안해의 자태도 보이였다. 차츰 그들이 눈가까이로 다가왔다. 부드러운 미색털수건으로 얼굴을 감싼 오복의 안해는 까만 외투에 뒤축높은 구두까지 받쳐신어 차림이 처녀들처럼 가뜬하고 경쾌하였다. 결혼초기에는 함께 다니기를 그리도 꺼려하던 오복이 이즈막에는 출근길이나 외출할 때는 노상 동부인하였다. 그들부부의 키차이는 여전히 변함없어도 금슬은 신통히도 꼭 맞는 신발이였다.

《오, 기뻐하라. 은백양아, 그대 너처럼 거연히 이 땅을 딛고 섰노라! 하하…》

오복은 례의 익살을 부려 공기를 명쾌히 흔들었다. 새벽추위에 얍슬한 입술이며 량볼과 코끝이 발깃해져 더 애티나 보였다. 오복의 안해가 따뜻한 미소로 반색을 짓고 리진을 부축하려고 다가왔다.

《정말 놀랍군요. 예까지 혼자 걷다니요.》

《이제 보십시오. 퇴원하는 날에는 집의 랑군과 씨름 한판 겨룰 작정입니다. 잘 보신시키지 않았다간 내 빗장걸이수에 코가 깨집니다.》

《뭐, 나와 씨름을 겨뤄? 흥.》

오복은 코웃음쳤다. 체통은 작아도 직장 씨름판에서 그의 강기와 꾀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리진이도 씨름수가 괜찮은 편이였다. 하지만 오복이와는 한번도 승부를 다툰적이 없었다. 리진은 오복의 씨름솜씨를 아는지라 그들부부가 찾아온것이 하냥 기뻐 희떠운 소리로 그를 자극했다.

《체, 속은 살아서. 아주머니, 솔직히 말해주시오, 집랑군이 정말 날 견딜것 같습니까. 이젠 진이 빠질대로 빠졌겠는데요?》

《아이, 그거야 제가 어떻게…》

아직 수집은 처녀티를 가시지 못한 오복의 안해는 딱한 물음이여서인지 얼굴이 확 붉어졌다. 가살을 모르는 그 눈빛과 숫저운 자태는 어쩌면 그리도 소박하고 진실한지. 오복은 가는 눈꼬리에 눈웃음을 짓고 활기롭게 받았다.

《어제 신문에 덕은탄광에서 3중심빼기발파법을 성공했다고 굉장히 소개했더군. 그럴진대 우리 가정의 전투계획은 뭔가? 삼태자! 까짓것, 탄부들이 3중심빼기를 성공하는데 우리가 삼태자를 못 만들가. 그래 벌써 진이 빠지구서야 그걸 실현할것 같애? 여보, 안 그렇소?》

《어마, 아무 말이나 탕탕.》

지순한 오복의 안해가 귀방울이 발갛게 타올라 쩔쩔매다 종주먹을 쳐들어 남편의 잔등을 때렸다. 그런 순간에도 안해의 초생달눈섭밑에서는 아름다운 눈이 정겹게 웃고있었다. 숫기좋은 오복은 그 매를 피해 잔등을 한옆으로 기울이면서도 항변은 멈추지 않았다.

《젠장, 녀자들은 이렇게 안팎이 다르다니깐. 삼태자를 부러워한건 누군데 계획을 발표하면 부끄러운체.》

《하하…》

리진은 큰소리로 웃었다. 오복의 말은 진실일수도 거짓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안해의 눈빛은 그지없는 행복에 젖어 반짝이였다. 사랑은 해빛같은것이여서 그들의 가슴에 따사로운 온기뿐아니라 생활을 보람차게 가꾸고 성장시키고있었다.

《리진이, 실은 자네한테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싶어 출근길에 들렸네.》

오복은 웃음기를 지우고 뒤를 이었다.

《요즘 공장에 웃기관의 한 일군이 와있네. 그날 밤 사고현장을 세세히 돌아보기도 하고 목격자들을 만나 자네의 소행을 자세히 묻기도 하고… 이를테면 현장료해를 하는거겠지. 아무튼 좋은 일이 있을거네. 당에서는 공정을 구원한 자네의 희생성을 높이 평가하리라고 믿네. 젠장, 시샘이 나서 죽겠어. 우리 작업반은 그날 낮교대가 될건 뭐람. 밤교대였다면 함께 영웅이 되는건데, 하하…》

오복이 또 버릇처럼 롱질을 하자 안해는 온후한 미소를 지으며 딴말을 꺼냈다.

《환자가 춥겠네. 이젠 그만 병원에 가셔야잖아요.》

《오참, 그래. 찬바람을 맞지 말고 어서 들어가게나. 우린 여기서 출근할테니까.》

안해는 남편의 빈공간을 오복이자신은 물론 다른 누구도 감촉 못하게 자연스레 메꾸어주었다. 오복은 아무 낌새도 느끼지 못하고 신이 나했다.

《이보게, 국이 식었을테니 꼭 덥혀먹으라구.》

《국이라니?》

《오, 이 사람이 몸보양에는 잉어탕이 좋다며 한남비 가져다 자네 입원실에 뒀네. 가만있자, 이거 슬그머니 결난다. 제 남편과 한판 겨뤄보겠다는 사람한테 잉어탕을?…》

《왜 겁나요?》

《오, 알만해, 알겠어. 이를테면 상대를 살지워서 자빠뜨린다, 흐흐… 당신 수가 괜찮구만.》

《어마, 정말 날 안팎이 다르게 만드네, 호호…》

오복의 안해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 웃음은 아침볕이 누비는 이 한적한 기슭에 방울소리마냥 명랑하고 또렷이 울리면서 생의 희열과 끝없는 의욕을 갖게 하였다. 리진은 형언할수 없는 즐거움속에서 오복의 내외간의 살틀한 우정에 가슴이 저릿해났다.

오복의 부부는 동뚝길로 나란히 걸어갔다. 아침해빛이 그들을 환하게 비쳤다. 리진은 그들의 앞길이 줄창 이 아침처럼 밝고 유쾌하기를 바랐고 그들한테 귀여운 옥동자가 생기기를 축복해마지 않았다.

리진은 그들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돌연히 오복이 전하던 말토막들이 다시금 뇌리에 파고들었다. 웃기관의 일군… 당에서는 공정을 구원한… 희생성을 높이 평가… 다른 때 같으면 가슴을 몹시 들뛰게 했을 이 말들이 어인 일인지 흥분보다 마음을 무겁게 하는것이 이상하였다. 사람들의 칭찬이 높아갈수록 기쁨보다도 괴로움을 맛보는 이와 같은 감정은 어디에 근원을 두었는지 꼭 짚어 말할수는 없어도 어딘가 자각된 량심과 리성의 들쑤심같았다. 그는 무거운 걸음을, 마치도 천근추를 달은것 같은 걸음을 가까스로 가누며 병원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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