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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제 48 회


제 3 편
70일전투의 열풍속에서


제 23 장


2


이 땅을 지키다

땅에 묻힌 울아빠


아빠는 땅입니다

땅은 아빠입니다


그리운 울아빠는

내 뛰노는 땅입니다

참된 삶의 넋을 이 땅에 묻은 사랑하는 아버지! 저는 오늘 아버지한테 저와 아버지가 지금까지 모르고있던 사연과 이 마음속에 움트고 자란 순정을 아뢰이려고 이 조용한 은백양나무를 찾아왔습니다.

세월은 저 멀리로 흘러갔어도 눈에 삼삼 그려집니다. 운명적인 그밤, 아버지는 병약한 몸으로 미국놈들이 떨어뜨린 시한탄을 안고 몸부림쳤습니다. 그 최후의 시각에 아버지는 함께 일하던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시각… 그 사람은 제 살붙이쪽에 가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그 사람의 생각과 길은 서로 달랐습니다.

하늘은 결코 무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시신을 안장한 봉분의 묘비에 그 사람의 이름도 나란히 새겨넣을줄이야…

그는 더는 이 땅에서 살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 원망했을 그 사람의 생은 그렇게 아침이슬처럼 사라졌어요. 세상에 태여나 누려보고싶었던 처자와의 애모쁜 사랑도,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의 꿈도 전쟁의 불길속에 타버리고말았어요.

그러나 그밤의 참화는 두사람의 운명으로만 끝난것이 아니였습니다. 아, 미국놈들의 폭격에 불기둥이 치솟고 하늘에는 재개비가 뒤덮여 별들조차 눈을 뜰수 없었던 그밤의 만단사연을 치욕으로 받아안은 또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향땅에서 살수 없게 된 그 사람의 안해였습니다. 남편이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를 마음속에 새긴 녀인은 수십년세월 홀로 마음을 태우기도 하고 해마다 제사날이 오면 하얀 들국화다발을 엮어 아버지의 묘소를 찾군 하였어요. 그래요, 아버지의 짧은 생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길게 살고있어요. 목숨을 건질수 있었음에도 이 땅과 한동아리가 되고싶어 조국수호의 길, 영생의 길을 간 아버지! 그런 값높은 삶을 추모하는것은 살아있는 우리들의 의리이고 의무예요.

하지만 희생에 비하면 의리를 지키기가 더 어렵다고 하였으니 아버지를 잊지 않고 긴긴세월 해마다 남모르게 성묘한 녀인의 마음속에는 남편대신 한 속죄와 자신을 아버지와 같은 삶에로 수양하려는 순결한 뜻이 있었을거예요. 하루의 따스한 날씨가 봄을 만들수 없듯이 진실로 옳고 바른 삶에 대한 지향이 없다면 있을수 없는 소행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녀인이 엮은 추모의 꽃다발이 어찌 자연의 꽃이겠습니까.

아버지, 저는 바로 그런 결백과 아름다운 삶을 지향하는 녀인의 슬하에서 자라고 아버지를 살리지 못한 그 사람의 유복자와 인연을 맺고저 해요. 우린 내놓고 언약한적은 없어도 서로의 감정은 결합을 소원하고있어요. 저는 사랑이 무엇인지 다는 몰라요. 그저 내 마음이 항시 달려가고 즐거움과 울렁임이 있고 고민과 눈물, 아름다운 희망과 래일이 있는 그런것이라고 믿을뿐이예요. 우리는 한고향에서 함께 뛰놀고 함께 공부하고 오늘은 청춘기술자, 과학자로 자라났어요. 우리는 서로 위해주고 사랑하기 위해 태여난것처럼 떨어질수 없는 하나라고 인식하려는 그무렵에 별안간 아버지들의 혼백이 끼여들어 우리들앞에 심연을 가로놓았어요. 정말 내가 그 동무를 사랑하게 되면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것일가요?…

일사천리로 내달리던 전주경의 마음속 독백은 여기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처녀의 가슴은 미여지는듯 하였다. 모든것을 진실에 담아 아뢰이였건만 아버지가 과연 리진을 받아들일는지 마음이 구깃구깃해지면서 이상한 아픔에 온몸이 저려났다.

내가 진실로 사랑과 증오가 무엇인지 몰라서일가. 나는 어째서 작은아버지와 같은 서리찬 증오대신 그 동무를 믿으려 할가? 그렇다, 나에게는 믿음이 있다! 그는 결코 자기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지 않으리라는 확신이였다.

…그래요, 아버지. 어떻게 지나간 일들을 잊어버릴수 있겠어요. 하지만 과거를 죽이고 지난 일들을 잊을수 있게 하는 유일무이한것은 현재입니다. 난 그 동무의 신념을 믿어요. 보세요. 그도 아버지처럼 나라의 연유창을 지켜 한몸 던지지 않았는가요. 그리고 당에서 관심하고있는 페불에서도 큰 몫을 담당하고있어요. 그는 지금 상처입은 몸이예요. 육체만이 아닌 마음의 상처에 울고있을지 몰라요. 난 그를 구원하려 해요. 그의 마음의 상처를 구원할 힘은 나한테 있다고 강아저씨가 일깨워줬어요. 사랑하라! 그러면 그도 일어날것이고 나도 사랑을 받을거라고 말예요. 지금까지 난 그의 눈동자에 비낀 날 보고싶었댔어요. 사랑을 받고만싶었던거예요. 아버지, 용서하시겠지요? 난 아버지가 그를 포용하리라고 믿어요.…

전주경은 억누를수 없는 사랑의 충동에 휩싸였다. 처녀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산산쪼각난듯싶던 애정이 온몸을 불태웠다. 진실한 사랑만이 온갖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리진을 위해서라면 그의 고통을 한몸에 다 안고 자신을 희생하고싶은 욕구가 솟구치면서 그가 이 자리에 있다면 두팔로 붙안고 애무해주고싶기도 하였다.

처녀는 은백양나무를 떠나 큰길에 나섰다. 날씨는 푸근하고 공기는 맑았다. 해는 서산에 기울어졌다. 그쪽에서 비치는 누런 해빛이 감색, 보라색, 연분홍색의 미묘한 대조로 뒤바뀌며 차거운 하늘에 흐르고있었다.

전주경은 공장정문과 이어진 길에서 방울이와 마주쳤다. 어딘가 먼길을 다녀오는듯 방울은 한다리를 살룩거리며 매우 지친 걸음을 옮겼다. 항상 윤채나던 목구두는 물기가 퍼져 볼품없었다. 하얀 솜옷 어깨와 잔등은 땀이 내배여 얼룩졌었다.

《아이, 마침 만났네.》

방울은 언제 지쳤던가싶게 하얀 덧이를 드러내며 방긋 웃었다.

《이걸 리진기사한테 전해줘요. 난 밤교대시간이 돼서 그래요.》

방울은 솜옷주머니에서 크지 않은 병을 꺼냈다. 주경은 얼결에 그걸 받았다. 노르끼레한 말간 액체가 차있었다.

《이건 뭐예요?》

《오소리기름이예요. 화상자리에 바르면 허물없이 아문대요. 철주덕포수할아버지한테서 좀 얻었어요.》

《철주덕에요?!》

《포수할아버지를 못 만날가봐 첫새벽에 떠났어요. 마침 점심때 닿지 않았겠어요. 할아버진 점심후에 사냥나갈 차비였어요. 한번 집을 나서면 언제 올지 세월없대요. 하마트면 헛걸음칠번 했다니까요.》

철주덕이면 예서 산길로 질러가도 50여리길이였다. 그러니 방울은 오늘 왕복 백여리 길을 걸은셈이였다. 그러면서도 처녀는 자기의 수고는 한마디도 비치지 않고 허탕칠번 한걸 더 걱정하였다. 사람들을 위하는 그 마음이 이처럼 사심없고 깨끗한 처녀, 이야말로 방울이라는 처녀의 매력이였다. 처녀의 아름다운 미모는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그 헌신으로 하여 황홀한 빛을 발산하였다. 주경은 이 순간 잠시나마 그를 두고 오인했던 자신이 부끄러워났다. 어찌보면 그 오해는 그보다 모자라는 인품에서 오는 일종의 시기로 생각되였다.

《아이, 뭘 생각해요?》

눈치빠른 방울은 주경이 조금 심란해하자 일부러 귀엽게 해롱거렸다.

《방울이 부러워서.》

《으응, 또 놀리네.》

방울은 할기죽 눈을 빤다. 주경은 그 응석스러운 표정에 홀딱 반하여 막 꼬집어놓고싶었다. 방울은 맡은 일에서도 극성이였다. 기술혁신돌격대에서 설계사도공일을 하면서도 짬짬이 정류직장에 나타나 신입공들에게 뽐프운전견습을 주군 하여 본의아니게 일군들의 속을 태우기도 하였었다.

공장직맹조직에서는 70일전투 1단계총화를 지어 모범혁신자들 사진을 영예게시판에 소개할 사업을 진행하였는데 방울의 추천문건은 정류직장과 기술혁신돌격대 두곳에서 제기되여 어느쪽인지 명백히 알수 없게 되였다. 그런가 하면 어느 한쪽도 양보하지 않아 본직장과 동원된 직장을 동시에 소개하고말았다.

주경은 방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약속하고 그와 헤여져 곧바로 행정청사로 향했다. 청사계단을 밟는 그의 눈앞에는 방울의 따뜻한 마음과 정다운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방울이만 보면 기분이 정화되고 상쾌해지는것이 참 조화였다. 그러나 이때 주경의 맑아지던 기분이 층계우에 드리운 그림자로 하여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는 머리를 들지 않아도 그 그림자가 누구라는 짐작이 마쳐오면서 몸이 죄여들었다. 2층에서 내려오던 전준혁은 주경을 보자 그를 데리고 제 방에 들어갔다. 훈훈한 방안은 땅거미가 진 저물녘처럼 재빛이 드리웠는데 창곁에 놓인 몬쓰테라화분이 밖의 겨울풍경을 비웃기라도 하듯 푸르고 풍만한 잎새를 자랑하고있었다.

《너 오후에 어디 갔댔니? 협의회를 소집해놓고 네가 없어 그만두었다.》

전준혁의 어조에는 질책이 풍겼다. 주경은 까닭모를 반감이 살아올랐다.

《오후일정에 협의회가 없었잖아요?》

《불의에 조직했댔다. 너도 계연구사한테서 들어 알테지만 페불함수소리용안을 놓고 몇사람이 좀 의논해보려고 말이다. 참 놀라운 발견이야. 그녀석 일을 치거던.》

전준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기색은 어떻다고 식별할수 없이 덤덤했다. 주경은 이상한 예감이 스쳐 자기의 립장을 명백히 해두고싶었다.

《저도 그 문젤 상정시키려던 참이였어요. 함수소에 의한 암모니아생산은 현실적가능성이 있는 매우 훌륭한 발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우린 페불전량도입을 가장 리상적으로 해결할수 있다고 봐요.》

《그러나 그걸 실현하기가 간단치 않아. 한개 생산공정을 꾸려야 하는 방대한 공사와 엄청난 투자, 탑만 해도 수소분리탑이니 암모니아합성탑이니 거기다 고압축기를 비롯해서 열교환기와 랭각기, 각종 뽐프들과 전기설비들을 꼽자면 숨가쁠 지경이야. 게다가 이 추운 겨울조건에서 토목공사를 해야 하는 난점도 있지. 그래서 말이다. 그건 래년도 국가계획에 물려 국가투자로 하기로 하고 당장은 네가 찾은 수소분산법을 좀더 심화시키면 어떨가? 페가스를 전부 리용한다는 의미에서는 피장파장이야. 그리고 그건 한푼의 투자도 없이 현공정에 그대로 적용할수 있다는 장점이 있거던. 이걸 협의회에서 의논하고싶었는데 넌 도대체… 그래 어델 갔댔니?》

주경은 작은아버지의 론거속에서 공장생산과 기술관리를 책임진 일군으로서의 실질적인 타산은 리해되였다. 때론 경제적가치가 큰 발명이나 혁신안도 현실조건이 맞지 않을 때에는 뒤로 미루는 경우가 있기마련이였다. 그러나 작은아버지가 이를 순수 기술일면에만 귀착시키는것이 찐덥지 못했고 오늘 자리를 비운것을 집요하게 알고싶어하는 그것이 또한 불쾌했다. 주경은 입을 다물고있다가 어차피 작은아버지를 납득시키려면 죄다 말하는것이 옳을것 같았다.

《산책했어요, 홀로 있고싶어서.》

《?!…》

전준혁은 예상밖의 대답이여서 이마에 주름을 세운채 어딘가 그늘진 주경의 얼굴을 한참이나 살피기만 하였다.

《네가 무슨 고민을 하는게 아니냐?》

《용서하세요. 작은아버지, 난 리진동무를 마음에서 지우지 못하고있는 이상 아버지의 넋을 욕되게 하는것 같아… 마음속으로 아버지한테 용서를 빌었어요.》

《그 사람한테는 다른 녀자가 있다고 하잖았느냐?》

《그건 저의 짐작이였어요.》

전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뚜벅뚜벅 걸음을 짚었다. 가슴에서는 노여움이 서서히 끓어올랐다. 무슨 놈의 계집애가 밸통이 저렇게 막돼먹어가는지 기가 막혔다. 그네들의 죄를 알았으면 더는 미련없이 싹 걷어치울줄 알았더니 아버지용서요 뭐요 하는 수작이 부아통이 터질 지경이였다.

《그래, 아버지가 용서해주더냐?》

《…》

주경은 더 입을 열려하지 않았다. 전준혁은 애가 저쯤되면 고집을 꺾기가 조련치 않음을 알고있었다. 어릴적에 저 애는 제 갖고싶은것을 못가지면 생떼를 쓰지 않으면서도 저렇게 한자리에서 눈을 내리깔고 요지부동이 되여 입을 꼭 다물군 하였다. 그때마다 전준혁은 사탕을 쥐여주며 얼리기도 하고 명랑하게 큰소리로 우스개소리도 하고 지어는 잔등에 올려놓고 말타기놀음도 하였다. 그래도 굽어들지 않아 종내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는것으로 그쳤다.

하지만 지금은 갖고싶다고 다 들어줄수 없었다. 전준혁은 사내애가 없는 자기 집안에서 주경이를 기둥으로, 대물림할 맏장손격으로 믿고있었다. 때문에 그를 잘 키워 출가를 시키는것은 집안의 흥망과 관계되는 중대사였다. 그런 일을 그 애자신이 결심하라고 방임해둘수 없었다.

《네가 미치지 않았냐?》

주경은 허리를 펴고 애절한 눈길을 쳐들었다. 그의 마음은 의지해야 할 기둥을 잃었을 때처럼 허청거려지고 맥살이 풀려 파리한 미소를 떠올렸다.

《작은아버지도 방금 말씀하지 않았어요, 그 동무가 일을 친다구. 난 믿어요, 난 결코 그 동무가…》

《자기 선친을 닮지 않았다는거겠지, 한몸을 던져 공정을 구원했으니까. 하지만 알아둬라, 그의 소행이 그 아무리 장거이고 설사 영웅적이라 해도 너의 아버지의 희생을 보상 못해. 너의 아버지의 희생은 말이다.…》

《아이, 가슴아파요. 아버지의 희생을 더 꺼들지 말아요. 아버진 살수 있으면서도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기때문에 마지막시각까지 그걸 놓지 못한거예요.》

전준혁의 검은 눈섭이 파르르 떨었다. 귀전에서는 맥이 툭툭 뛰고 가슴에서는 억장이 무너져내리는 우뢰가 울었다.

《똑똑히 명심해, 우리 집안의 피는 신성하다. 우린 나라의 연유창을 대를 이어가며 지키는 충신이 돼야 한다. 이건 너의 아버지가 희생으로써 우리한테 물려준 유일한 유산이다. 이 유산을 갖고있는 우리 집안에 감히 잡스러운것을 섞어? 네 아버진 그 사람, 리진의 아버지가 협력했더라면 살수 있었어. 사람이 저밖에 모를 때에는 배신의 나락에 떨어지고말아. 그런 혈통은 피로 이어져!》

주경은 주먹을 입에 가져갔다. 금시 오열이 터져나올것 같아 그 주먹을 꽉 깨물었다. 벅차게 뛰던 심장이 설분과 모진 아픔에 갈기갈기 찢어졌다. 작은아버지의 노성은 오히려 그의 가슴에 기름을 뿌린듯 사랑의 불을 활활 지펴올렸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적인 반발일뿐 자기앞에는 넘기 힘든 큰 산이 막아나선듯 캄캄해났다. 아버지의 용서는 받을지언정 작은아버지를 넘긴다는건 그를 잃어야 하는 무서운 일이였다. 다시는 아버지의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고 그리도 결백하고 아름답게 살려는 리진을 구원할 힘이 더는 없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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