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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제 47 회


제 3 편
70일전투의 열풍속에서


제 23 장



1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모래, 염열에 타끓는 바다가 불모래우에서 그의 몸은 지지우고있었다. 구름 한점없는 색바랜 하늘에서 불소나기가 퍼붓자 모래는 더더욱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피부에 닿는 모래알들은 마치도 수천개의 바늘끝처럼 온몸을 찌르고 태우고 야금야금 뼈속까지 스며들었다. 역한 고린내가 코를 찔렀다. 저쯤 가까운 곳에서 푸른 파도가 넘실넘실 모래불로 달려오고있었다. 물결은 어느 한 곳에 와 멈춰서더니 불모래 가까이로 올 엄두도 내지 못하고 출렁출렁 손짓만 하였다. 구원의 손짓이였다.

그는 물을 향해 모지름을 썼다. 그런데 쇠집게같은 팔이 그를 꽉 붙잡고 옴짝 못하게 하였다. 마디들이 철컥철컥 쇠소리나는 팔이였다. 불모래는 먼지바람과 화염을 뿜어대며 몸뚱이를 더 무섭게 지져댔다. 그는 또 안깐힘을 썼다. 아, 날 붙잡지 말아, 놓으라는데!…

손가락조차 움직일수 없다. 정말 난 벌써 죽었는가? 나는 없어졌다. 실체가 아닌 허상인게다. 헌데 살고싶은 이 욕망, 살을 지지는 이 아픔은 어데서 오는것인가. 어떻게 나는 이렇게 불모래에 몸이 잠겼는가. 그는 혼신의 힘을 다 짜내여 고함을 질렀다. 말은 입안에서 맴돌뿐 나가지 않았다. 그때 무엇인가 절컥 하는 소리와 함께 집게팔이 아래로 떨어졌다.…

리진은 눈을 떴다. 이것은 혼수상태가 지속되여 사흘째 되는 날이였다. 그러나 그의 의식은 비몽사몽간에서 다음날까지 오락가락하였다. 나흘째 되는 아침에 그가 처음 본것은 뿌연 안개속에서 아물아물거리는 형체들이였다. 말소리도 발걸음소리도 들렸으나 분명치 않았다. 또다시 머리는 뻐개지는것 같고 온몸은 불로 지지고 짓이기는 아픔에 의식이 몽롱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어머니얼굴이 어슴푸레 멀리에서 안겨왔다. 어머니는 왜 저렇게 먼곳에서 얼없이 바라보기만 할가?

《…애가 눈을 떴어요!》

어머니의 떨리는 음성이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뿌옇고 조그맣던 어머니의 얼굴이 차츰 다가오는지 커졌다.

《왜 인제야… 와요. 난 아까부터 자꾸… 불렀는데…》

리진은 이렇게 말하고있었으나 소리는 입안에서 흘러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 엎드려 귀를 대고있던 유선림은 그 소리를 들었다. 귀로서가 아니라 미약한 입놀림을 분간하였다.

《엄마가 듣고있다. 어서 말해라, 얘야.…》

공포에 지지리 눌려있던 유선림은 가슴미여질것 같은 기쁨을 다잡지 못하고 눈물이 섞인 떨리는 소리로 다급히 속삭이였다. 아들의 박동이 커지고 눈을 뜬것이 생시같지 않은지 혼겁한 눈길로 주위사람들과 리진을 번갈아보며 어찌할바를 몰라했다.

그제야 리진은 사람들의 숨죽은 속삭임과 흐느낌, 누군가 무뚝뚝하나 낮게 지시하는 소리, 황망히 발끝걸음으로 살금살금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들이 가려졌다.

여기가 어디인가, 나는 어데로 왔을가? 나를 붙잡고있던 그 쇠집게 팔은 어디로 가고, 죽음의 불모래는? 그것은 악몽이였는가? 지금 나를 보고있는 이 많은 눈길들은 누구들인가?…

《이 사람, 리진이!》

이 목소리는 강대철아바이의 쇠소리같다. 이 많은 눈들중에 그 칼칼한 눈빛은 어느것일가. 아, 여기 눈앞에 있군.…

《아바이.…》

이것은 리진의 입에서 흘러나온 첫 음성이였다. 사람들의 눈빛이 일시에 경탄으로 빛났다.

《옳네. 나야, 나!》

제 가슴팍을 성급히 두드리는 강대철의 환성에 질겁한 의사가 그를 끌어안고 문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두시간이 지나서부터 리진의 의식은 비교적 또렷해졌다. 방안에는 어머니와 간호원밖에 없었다.

리진은 여기가 병원이며 자기가 어째서 침상에 누워있는지 기억의 쪽문이 빠금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먼저 떠오르는것이 자기가 터진 관을 막겠다고 공정에 뛰여들던 광경이며 발브를 채 막지 못하고 까무라친 일이였다.

《어머니… 공정이 어떻게 됐어요?》

《아무 일도 없다. 그냥 돌아가고있다.》

《내가 다 막지 못한것 같은데…》

《사람들이 뒤따라 들어가 마저 막았다는구나.》

《…》

리진은 심신이 편안해졌다. 해빛이 흘러드는 창밖 병원정원숲에서는 새들이 우짖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엉성한 숲사이로 햇솜같은 구름이 떠있는 쪽빛하늘이 비껴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야, 내가 살아있다는게. 공정도 무사하고… 내가 뛰여든 다음 나를 따라 또 누가 뛰여들었을가? 아무튼 난 죽음앞에서 망설이지 않았거던.…)

《얘야, 너는 무슨 말을 하느냐?》

시종 리진이한테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있던 유선림은 조심스레 물었다. 리진은 감고있던 눈을 들어 어머니를 마주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숙부드러운 눈귀주름이 깊어지고 귀밑머리가 더 희여진것 같았다.

《어머니, 내가 어떻게 공정에 뛰여들었을가요?》

《그래, 용쿠나, 얘야!…》

유선림의 눈귀로는 참아오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순하고 소심하고 연약하던 애가 그 무슨 강심을 먹었기에 제 아버지와 달리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한몸을 던졌는지, 그런 강하고 큰 담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한 그였다. 아들은 자기가 바라던 착순이가 아니라 크고 단 열매를 무르익힌 억순이처럼 안겨왔다.

리진의 의식회복은 병원과 공장의 경사였다. 의사들은 아침이면 그의 차도와 건강회복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누었고 공장종업원들속에서는 그가 사경에 처했을 때처럼 또 소생을 축복하여 물밀듯 찾아왔다. 병원측에서는 입원실밖에 보초를 세우고 환자와 밀접한 관계자들만 면회를 허락하는 전례없는 조치까지 취하였다.

의식을 회복한 뒤 처음 맞은 일요일이였다. 그런데 리진은 화상부위 진통을 누르려고 진정제를 쓴통에 오전내껏 잠들어있어 아쉽게도 병문안온 사람들을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

《얘야, 네가 잠든 사이 너희네 연구소에서 다들 왔댔다.》

《현장친구들은요?》

리진은 갖가지 과일들과 당과류들, 통졸임통들이 수북이 쌓인 입원실원탁에 눈길을 멈추며 현장친구들을 잊지 못해하였다.

《그 사람들이야 첫날부터 퇴근걸음을 여기다 정했었지. 승학이와 오복이네들은 저 병원복도에서 밤을 샌적이 얼마였다구. 피가 요구되면 저희들부터 뽑겠다구 말이다. 아까도 오복이 잠든 너를 보며 한참이나 우스개소리를 했었다. 이제 네 얼굴 덴 허물이 벗겨지면 더 말쑥하고 고와져 처녀들이 줄을 서서 따라다닐거라나. 원 녀석두, 호호…》

유선림은 아들의 소생이 꿈같은데다 장난으로 하는 소리지만 하냥 들어도 싫지 않아 시름놓고 웃었다.

《아뿔싸, 이 정신봐.》 유선림은 갑자기 웃음을 지으며 제 무르팍을 쳤다.

《전날… 네가 의식이 없던 날 밤 준갑아주버님 따님이 찾아온걸 그만…》

유선림은 전주경을 언제나와 같이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준갑아주버님 따님》이라고 높이 사서 불렀다. 거기에는 전준갑이와 그의 자식에 대한 한없는 존대와 애정, 속죄의 감정이 어려있었다.

《주경이요?!》

《네 침상앞에 한식경이나 앉아있었다. 돌아갈 때는 내 손을 잡고 〈어머니, 리진동문 꼭 회복될거예요.〉라고 위로하잖겠니. 그런 말은 수없이 들었지만 그 따님의 말은 어인일인지 정말로 믿게 되더구나. 난 너무 고마와 그의 손을 잡고 주책머리없이 울기만 했다.》

주경이 찾아왔다는 사실은 새로운 힘을 가지고 리진의 가슴에 생명의 활력을 북돋아주었다. 그가 나의 회복을 바란것은 어머니한테 주는 하나의 위안치레가 아닐것이다. 진심이거나 부끄럽지 않은 나의 행위에 대한 어떤 공감에서였는지 모른다. 그앞에서는 항상 모자라는 인격과 떳떳치 못한 처지, 빈곤한 두뇌와 박약한 지식, 소심한 성미로 하여 작아보이던 내가 이제는 새로운 인간으로 그의 눈에 찍히지 않았을가.

리진이 지금까지 바란것은 바로 이것이였다. 주경이와 갈라지더라도 어제날의 인상이 아니라 오늘의 새모습을 보여주고싶었다. 그의 심장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도 잊고 가벼운 박동으로 뛰였다. 무엇보다 다시 그를 볼수 있으며 그의 눈에 작게는 새겨지지 않았으리라는 기꺼움이였다.

(그래, 난 비겁하지 않았어. 난 겁쟁이가 아니야. 난 벌써 오래전에 주경이한테 그걸 보여줬지. 중학시절 토끼방목지에서 번개치고 우뢰가 울 때 그 앤 오돌오돌 떨면서 겁을 먹었지만 난 오히려 그의 보호자가 됐거던. 이젠 내가 겁쟁이가 아니라는걸 그도 사람들도 알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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