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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6 회


제 3 편
70일전투의 열풍속에서


제 22 장


2


이튿날 아침 공장병원 소생실복도앞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사람들이 불어났다. 한정묵초급당비서와 지배인, 정류직장의 초급지휘성원들, 다른 직장의 밤교대생들도 퇴근걸음을 병원부터 찾았다. 그들은 누가 조직해서가 아니라 지난밤 정류직장에서 있은 희생적인 주인공들한테 피면 피, 살이면 살이라도 주고싶어서였다.

의사들이 밤중부터 긴장한 구급소생전투를 벌려 질식가스경중독자들인 정류직장의 부직장장과 최승표, 책임조작공 세사람은 의식을 회복하여 다른 침실로 옮겼으나 리진이만은 혼수상태에서 깨여나지 못하고있었다. 사람들은 소생실문이 열리기만 하면 의사든 간호원이든 붙잡고 김리진의 상태를 묻기도 하고 팔을 내두르며 무엇이든 요구하라고 부르짖기도 하였다.

전준혁이와 강대철은 전투지휘부에서 밤중에 그 소식을 듣고 현장에 달려나간 때로부터 지금까지 리진의 침상을 뜨지 못하고있었다. 김리진은 전신2도화상에 심한 질식가스중독상태였다. 화상보다도 빠른 시간내에 의식을 회복 못하면 전신마비가 올수 있었다.

《지배인동무, 여기 일은 나와 강비서동무가 맡을테니 지배인동무와 기사장동문 현장에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정묵이 그들이 현장을 너무 오래 비운것을 안심치 않아하였다. 밤을 꼬박 밝힌 지배인은 피로가 실린 머리를 끄덕이였다.

《비서동무, 환자가 의식을 회복할 때까지 내 차를 병원에서 리용하게 합시다.》

지배인은 환자의 경과를 보아서 도에 나가 의료상방조나 필요한 약품들을 구입하려면 병원구급차 한대로는 긴장할것 같아 하는 소리였다. 한정묵은 그런 걱정은 말라고 이르고는 지배인과 기사장의 등을 떠밀었다. 지배인은 병원의료일군들한테 김리진의 소생을 위해 최선을 다해줄것을 다시금 당부하고는 기사장과 함께 병원을 나섰다.

전준혁은 그길로 제창 사고현장을 찾았다. 어느새 새 곡관을 교체했는지 흔적조차 찾아볼수 없었다. 3호로대보수를 시작할 때부터 말썽이던 바깥곡관이였다. 그때 로내부곡관을 전부 교체했으니 망정이지 로안에서 그런 일이 생겼더라면 어쩔번 했겠는가. 정말 바깥곡관인것이 천만다행이였다.

사실 지난밤 자기가 현장에 있었더라도 무조건 공정을 세우고 불부터 껐을것이다. 그런 경우 공정을 살리는것이 급선무였다. 조금만 어물거렸어도 70일전투생산은커녕 공장의 심장부가 통채로 하늘로 날아갈번 하였다. 그런데도 공정은 순간도 멈춤없이 생산을 계속 이어가고있으니 기적이면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어데 있겠는가. 정말 공장이 생겨 있어본적 없는 사고이자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인간의 장거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준혁은 이 사고앞에서 어지간히 기가 질리지 않을수 없었다. 어차피 이 엄연한 사실은 우에 보고되여야 할텐데 사고의 원인을 따지고들면 로대보수를 날림식, 땜때기식으로 한데 귀착될것이고 그것은 곧 로대보수를 주관한 자기의 책임에 닿을것이다.

전준혁이 종합부서에 들어서니 서종섭이하 지도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했다. 그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의기가 저락되여있었다. 그 밝지 못한 얼굴들은 자기의 책임을 더 무겁게 해주었다. 종섭이 재빨리 침울한 공기를 휘저으며 나섰다.

《기사장동지, 아침 첫 시간에 비상대책을 취해 터진 곡관을 원상복구해놓았습니다. 생산은 아무런 지장없이 정상운전을 보장하고있습니다.》

종섭은 생산공정이 정상운전을 하고있다는 뒤말에 력점을 찍었다. 전준혁은 묵묵히 듣고있으면서 그렇게 쉽게 교체할수 있는 일을 왜 지금까지 방임해두었는지,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의 이런 일본새가 주인답지 못한 자신의 사업에서의 빈틈이라면 그걸 알고있으면서도 강건너 불보듯 한 이들은 또 뭐란 말인가 하는 생각에 짙은 눈섭이 칼날처럼 곤두섰다.

《동무들은 뭐요? 눈뜬 청맹과니요? 이 공장 손님들인가, 엉? 그 곡관실태를 이미 알았으면 왜 미리 대책을 취하지 않았는가. 그래 하루에도 수십수백가지의 일들을 안고 돌아가는 이 기사장이 그것까지 일일이 생각해야 옳겠소?》

《실은… 그 곡관문제는 로대보수때부터 제기되던…》

《걷어치우오! 그땐 자재사정때문에 미처 못했다면 후에라도 다시 상정시키고 바로잡아야지, 전탕 손님격이란 말이야, 엉?》

전준혁의 서슬푸른 두눈에서는 불찌가 튀여나왔다. 종섭은 어이없는 눈길로 그를 빤히 쳐다보고있었다. 그 슴벅이는 머루알 눈자위는 《기사장동지, 뭘 그다지나 열을 냅니까. 사고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는데요.》라고 말하고있었다.

전준혁은 자기 속을 들여다보며 씨벌이는것 같은 그 눈동자가 침을 뱉고싶도록 밉살스러워 버럭 화를 냈다.

《동문 우에다 보고할 준비를 했소?》

《뭘 말입니까?》

종섭은 생벼락같은 역증에 눈알을 딱 세웠다.

《몰라서 묻소? 일을 쳤으면 70일전투중앙지휘부는 물론 화학공업부에 알려야지 않겠는가.》

《그거야 뭐 준비하고 말고가 있습니까.》

종섭이 찌뿌둥 온곱지 않게 나왔다. 제딴에는 기사장역성을 들려고 무던히 왼심썼건만 그걸 몰라준다는 어조였다. 이때 맞은켠에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있던 지도원이 참견하였다.

《기사장동지, 사고의 원인과 범위를 어떻게 밝힐가요?》

눈치가 발바닥같은 이 질문에 전준혁이와 종섭은 아연해졌다.

《이 사람, 왜 사고사고하면서 이래, 되게나 큰일난것처럼.》

역시 종섭의 생리는 기사장의 기분을 맞추게 돼먹은가싶었다. 그는 사람들속에 환기된 사고의 분위기를 경감시키고 흔히 있을수 있는 일로 무마시키는것이 지금 형편에서 기사장을 돕는 길로 생각했다. 하지만 전준혁은 자기를 너무도 빤드름하게 보이는 보자기에 감싸려는 그 수작에 울화가 뻗쳐 소리치려는데 전화종소리가 울려 그만두었다.

《기사장동지, 5직장에서 오는 전화인데 직장청년들이 리진동무의 소생을 돕겠다고 지금 병원에 달려갔다고 합니다.》

전화를 받은 지도원이 하는 말이였다.

《5직장청년들이?》

《그뿐이 아닙니다. 좀전에는 2직장과 열관리, 급수직장들에서도 같은 전화가 왔댔습니다.》

《음…》

뒤짐을 지고 방안을 무겁게 걷던 전준혁은 한자리에 멈춰섰다. 자기가 병원복도를 지날 때 소생실문밖에 사람들이 모여섰던 광경이 상기되였다. 그와 동시에 머리를 치는 하나의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사고로 하여 저락된 공장분위기를 돌변시키고 공장명예와 종업원들속에 공장애를 불러일으킬수 있는 이른바 화를 복으로 역전시킬수 있는 방책이였다.

《이것 보오, 서동무. 지난밤에 있은 일이야 엄연한 의미에서 사고이지. 하지만 사고보다 리진동무의 장거가 더 크지 않나. 공장청년들 교양에 아주 적실하거던. 우리 공장 로동계급속에 그런 무비의 희생정신이 있다는거야 자랑이 아니겠소. 어서 우에다 알리기요, 알리되 사고는… 페가스를 도입하면서 로에 열파동이 생겨 있을수 있는 돌발사고이고 리진동무의 소행을 크게 내세워야겠소.》

《네―에, 알겠습니다.》

종섭의 눈은 광채로 반짝이였다. 그렇게 되면 리진의 영웅적소행에 가리워 사고는 뿌옇게, 뒤전으로 밀려날것이였다. 역시 기사장의 속깊은 궁냥에 탄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전준혁이 절박하고 난처한 시각에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게 되여 다들 안심하고있는데 전주경이 사무실에 나타났다.

창백한 그의 살빛은 어딘가 흥분되여 불그스레한 색조가 알릴듯말듯 꿰비치였다.

《주경동무도 병원에서 오는 길이요?》

종섭이 제 짐작을 표현했다. 하지만 주경의 대답은 전혀 동문서답이였다.

《병원에는 왜요, 내가 언제 앓는다고 했던가요?》

《하, 이거 밤중이군. 간밤에 공장에 룡이 난걸 모르다니, 온 공장이 다 아는 일을.》

주경은 새삼스레 사람들을 둘러봤다. 작은아버지가 아무말없이 문을 열고 나가고 다른 사람들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으나 공기속에는 범상치 않는 말들이 떠돌고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리진동무가 지난밤 터진 휘발유관을 막고 지금 사경에 처해있소.》

《?!》

주경은 꼼짝 않고 서있었다. 둔한 철퇴가 정수리에 떨어지는 감각과 등솔기에 땀이 와짝 내돋았다. 순식간에 몸에서는 온기가 다 빠졌다. 핑 도는 머리속 한끝에서는 그가 어째서 밤에 현장에 있었을가, 당번도 아닌 그가… 방금전에 계영빈은 그가 밤에 자기를 찾아왔더라고 하잖았는가… 하는 갈피없는 토막생각들이 뒤엉켜 돌아갔다. 차츰 눈앞은 자욱한 안개가 낀듯 몽롱해지고 머리는 소음으로 가득찼고 심장은 걷잡을수없이 활랑거렸다.…

생활의 경난이란 무엇인지 모르고 자란 주경은 이즈음 처음으로 심리적고충에 부대끼고있었다. 리진의 어머니의 고백… 생활을 해맑은 아침 지저귀고 뛰노는 새처럼 명랑하게 감수하고 래일을 아름다운 무지개빛갈로 그려보던 그것은 생활그대로가 아니라 프리즘을 통하여 보아온 굴절된 세계였다.

생활이란 그렇게 복잡다단한 사랑과 증오로 가득찬 광활한 공간인줄은 다는 몰랐다.

태여나서 애무는커녕 한번 불러보지도 못한 아버지의 최후를 자상히 알게 된 주경은 한 인간의 저밖에 모른 행위를 두고 그 어떤 증오가 아닌 다른 감정 즉 연유창에 떨어진 시한탄을 함께 거들어줬더라면 아버지가 살수 있지 않았을가 하는 원망이랄가, 설음이랄가? 그 사람은 자기의 안해와 태여날 자식때문에 그랬다지만 생활의 구체적인 감정은 리해되면서도 누가 고의로 책략을 꾸민것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문득 주경은 자기가 아버지를 살릴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에 대해 작은아버지와 같은 서리찬 증오를 느낄수 없는 이 사실앞에서 당황해났다. 왜 이렇게 맵짠 분노도 격발되지 않을가.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아온 타성에서일가, 나한테 생을 주고 피를 준 아버지에 대한 사무치는 정이 없어서일가, 그 모든것을 초월하는 어떤 다른 감정이 지배하는것이 아닐가?…

주경은 리진의 어머니가 쓴 글줄들을 읽는 과정에 자기의 심장이 저도 모르게 다르게 뛰는줄을 알리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 고스란히 살아있는 사랑의 감정은 심장을 두드리며 속삭이였다.… 리진은 결코 녀자가 생겨 자기를 물리친것이 아니라는것, 그는 다만 아버지들의 관계때문에 물러서려 한다는것, 자기를 그지없이 사랑하기에 그런 용단을 내린거라는 일깨움이였다. 이 심장의 속삭임은 리진이와의 결렬이라는 치명적인 압박감으로 몰아가던 그에게 커다란 안도감과 함께 재생과 희망의 불씨를 안겨주는 새로운 고무이고 힘이였다.

그 불씨가 이제 다시 사랑의 불을 지필수 있겠는지는 장담할수 없어도 어쨌든 사랑의 공은 자기한테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만약 자기가 모든것을 타승하고 사랑의 불을 일군다면 리진의 심장이 달아오를가? 또 작은아버지는 그를 받아들일가? 그리고 이 땅을 참답게 걸군 아버지의 령혼은?… 아, 아버지, 난 어쩌면 좋아요. 난 그 동물 이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하겠군요!… 별안간 주경은 그 누구보다도 자기자신이 아버지를 배신하고있음을 깨닫게 되자 무서운 심연이 입을 벌리고있는것이 내다보였다. 그 언제나 침착과 랭정, 지혜와 예지가 하나로 융합되여있던 그의 리성은 혼란에 빠지고말았다. 그는 아무것도 결심할수 없어 무엇이든 붙잡고 그속에 빠져버리고싶었다. 항상 넘쳐나던 정신력과 탄력있던 몸가짐은 흐트러지고 기운이 나지 않았다. 이 일신상의 변화는 그에게 문득 페불전량리용의 어떤 암시를 던져주었다. 페가스속의 절대량을 차지하고있는 함수소도 기력이 빠져 쇠진해질대로 쇠진해진 자기처럼 세력을 약화시킨다면?… 페가스를 다 리용 못하는 기본요인이 함수소가 세력이 강하여 로에 폭발위험을 조성하기때문이였다.

그리하여 착상한것이 함수소분산법이였다. 수소를 중유로 하나에서만 연소하지 말고 동시에 여러개의 중유로에 분산시켜 리용할수 있지 않을가? 전주경은 며칠째 연구실에서 밤늦게까지 함수소량에 따르는 분산량계산으로 보내다가는 정양소숙소에서 쪽잠을 청하군 하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 좀처럼 먼저 걸음을 걷지 않던 계영빈이 불쑥 찾아왔었다. 그의 때아닌 걸음도 놀랍거니와 갖고온 소식은 또 얼마나 충격적이였으랴. 리진이 페가스속의 함수소의 단독리용안을 발견했던것이다. 주경은 첫 순간에 그 발견이 수소분산법에는 비할바없이 우월하다는것을 자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자기는 수소세력을 약화시켜 로의 연료로, 열에네르기로 전환하려는 시도였다면 그가 찾은것은 나라의 식량문제해결에 크게 보탬을 줄수 있는 안이였다. 물론 함수소분리와 리용문제는 방대한 투자와 첨단과학기술을 요하는 어려운 난점들을 많이 내포하고있었다.

주경은 패배와 허무감을 맛보면서도 리진의 폭넓은 탐구심과 잠재력, 나날이 커가는 성장에 기쁨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였다. 주경은 집념하고있던 수소분산법을 다 집어던지고 작은아버지한테 상정시키고싶어 그를 찾아다니던중이였다.… 하지만 주경은 리진의 생명이 경각에 이른것 같아 속이 떨려 견딜수 없었다. 그는 공장에서 초간히 떨어져있는 병원을 향해 장달음을 놓았다.

얼마후 병원에 닿은 그는 소생실앞에 몰켜선 사람들을 제지하고있는 강대철을 보았다.

강대철이도 주경이를 보자 간호원한테 하던 일을 맡기고는 사람들을 비집고 나왔다.

《아저씨, 어떻게 될것 같애요?》

《아직 깨여나지 못했다. 인공산소취입을 하고있지만 의사들은 신심을 잃지 않고있다.》

《그를 볼수 없을가요?》

《누구든 들여놓지 않아. 방금 도에서 유능한 의사들과 필요한 약품들이 왔으니 너무 걱정말아. 리진인 절대로 잘못되지 않아. 난 믿는다.》

강대철은 주경의 떠는 손을 꽉 잡았다놓았다. 주경은 그 힘찬 격려에 다소 가슴이 진정되였다.

《우리 좀 밖에 나가 걷자꾸나.》

강대철은 사람들을 제지하느라 땀깨나 뽑은 몸을 식히려 하였다. 주경은 그를 따라섰다.

《아저씨, 왜 이런 일이 생겼을가요?》

《우리가 3호로대보수를 설쳤거던. 말그대로 대보수이면 로안팎관들을 전부 교체했어야 하는건데…》

주경은 3호로대보수를 앞두고 로공들이 들고 나왔던 15일안이 생각났다. 그때 작은아버지는 속도전에 걸고 그들의 제안을 묵살하는 땜때기식방법을 내리먹이였다. 종섭이 현장에 내려와 그 방법을 강박하자 리진은 마지못해 받아물었었다. 주경은 리진의 그 태도를 공장적인 립장을 떠난 일면적인 고집으로 나무라기까지 했었다.

《옳아요. 우린 애초에 로공들의 15일대보수안을 좀더 심사숙고해야 했어요. 저도 그때는 미처 모르고 그 안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일을 친 이제 와서 지난 일을 가지고 옴니암니 하겠느냐만 크게 깨닫는바가 있구나. 군중은 언제나 선생이라고 하신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명언이 말이다.》

강대철은 심심한 뉘우침에 사로잡혀 뇌이였다. 그들은 병원을 벗어나 용수천아래목 얼음강판을 건넜다. 엷은 구름층에 가리운 부유스름한 해빛이 비치는 얼음판우에서는 아이들이 왁작 웃고떠들며 썰매를 타고있었다.

용수천아래목을 넘어서면 공장구획이 끝나는 허허등판이 나진다. 그 한기슭에는 여전히 한본새로 서있는 은백양, 지난밤 광풍에 눈들을 말끔히 털어버린 잎진 가지들이 바람질에 드설레이며 뒤채이였다. 구름층을 빠져나온 해살이 나무가지들사이로 새여들면서 거무스레한 거목의 줄기에 광택을 뿌리였다. 눈이 깔린 바닥에는 새들의 발자국이 찍혀졌었다.

《내 가끔 이 나무를 볼 때면 전후에 제대배낭을 둘러메고 여길 처음 오던 때가 생각나거던. 그때 이 고장은 다 파괴되고 이 나무만 성해있더군. 사람들은 이 나무주변 언덕들에 의지하여 토피집들을 짓지 않았겠나. 집을 지을 재목이 그렇게 귀할 땐데도 이 나무에는 손을 댈 엄두조차 못해, 전쟁을 이긴 우리 인민의 기상이라고. 하긴 우리가 철다리를 복구할 때도 이 나무아래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점심을 나누어먹기도 하고 또 밤이면 련애도 하고. 허허…》

강대철의 그 말에 은백양나무를 한참이나 쳐다보던 주경이도 추억에 잠겨 받았다.

《중학시절 여긴 우리 학교 토끼방목지였어요. 한번은 여기서 한소나기 맞고 떨고있었어요. 리진동무가 이 나무삭정이로 모닥불을 지펴줬어요. 그런데 그 모닥불을 공식집을 찢어 일구지 않았겠어요. 우리의 지식을 넓히고 키워주는 공식집을 갖고 말예요. 그는 약골인 날 걱정하여 공식집을 태웠지만 내 마음은 좋지 않더군요. 후에 난 그한테 공식집을 정리해주면서 이담에 우린 나무불이 아니라 공식집이 키워준 지식의 불을 지피자고 했어요. 철없는 시절에 있은 일이지만 그때부터 이 은백양나무는 제가 소녀시절과 작별한 곳이였고 그리운 고향사람들의 얼굴이였고 과학탐구의 불을 안겨준 나무이기도 했어요.》

《음, 그러니 동무들도 이 나무와 소시적부터 인연을 맺고있었군. 거참 신통하군, 신통해. 허허…》

강대철은 웃으며 뜻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그래요. 리진동문 그날의 약속을 지켜 끝내 지식의 불을 지폈어요.》

《그건 무슨 소린가?》

《그가 페불전량도입의 돌파구를 찾은것 같애요.》

《뭐라구?!》

《페가스의 성분들을 갈라내여 서로 다르게 리용할수 있는 방법을 탐구했어요.》

《그게 사실인가?》

《지난밤 사고가 있기 전에 그 동문 계영빈선생님과 의논했대요.》

《음, 끝내 해냈군!》

강대철의 눈이 번쩍 빛을 뿜었다. 그는 다잡을수 없는 기쁨때문인지 젊은이들처럼 땅바닥에서 돌을 뽑아들고 나무웃초리를 향해 팔매질을 하였다. 돌멩이가 잔가지들을 부러뜨리면서 멀리 날아갔다.

《주경이, 내 좀 묻자구.》

강대철은 깊은 생각에 잠겨 나무주위를 거닐다 이었다.

《기사장동무가 나한테 우리 철민이를 주경의 배필로 정하고싶어하던데 주경이 생각은 어떤가?》

은백양정수리에 눈길을 멈추고있던 주경은 머리를 아래로 떨구더니 가는 한숨을 내쉬였다.

그는 혀끝을 깨물었다.

《저도 알고있어요. 아저씨, 용서해요. 뭘 숨기겠어요. 전 리진동무를 마음에 뒀어요.… 난 사랑을 주고 또 사랑을 받는 녀자,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속에 비친 날 보고싶었어요. 그런데… 그 동무의 눈에는 내가 없었어요.》

주경은 갑자기 가슴을 치는 격앙된 느낌에 통절히 부르짖었다. 그의 속눈섭끝에는 한점 눈물방울이 맺혔다.

《그래 그 눈에 다른 녀자가 있던가?》

《아무것도 없더군요. 아무런 심장도 정열도 없는 무표정뿐이였어요.》

강대철의 얼굴근육이 죄여들고 눈빛은 서늘해졌다.

《내가 알기엔 그도 주경일 맘에 둔것 같애.… 그래 주경인 그가 사랑하면서도 그런 무표정을 짓자니 얼마나 괴로와했겠는지 그 마음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봤나? 그 사람은 제 아버지의 잘못으로 하여 주경일 더는 접근할수 없는 대상으로 모든 욕망과 감정을 다 버렸어. 그건 그가 나약해서가 아니라 너무도 깨끗하기때문이 아닐가?… 털어놓고 말해서 그런 그를 외면하고 다른데서 배우자를 찾는 동무네 가정의…》

《아이, 그만해요!》

주경은 강대철의 격한 말속에서 자기 심장의 속삭임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과 오히려 어떤 계선을 넘지 못하고있는 자신에 대한 불신과 나약성에 가슴이 터질것 같았다.

강대철은 퍼그나 가라앉은 평온한 어조로 뒤를 이었다.

《난 그저… 서로 사랑하면 모든것을 이길것 같아 그런다. 젊은 시절 나한테도 그러루한 일이 있었지.》

강대철은 느슨한 눈빛으로 은백양나무를 이윽토록 바라보다 계속하였다.

《전후에 난 전쟁때 어깨에 박힌 파편쪼각을 마저 뽑으려고 도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댔는데 거기서 한 영예군인처녀를 알게 됐지. 전쟁시기 그는 담가대원이였어. 녀성의 몸으로 포연속을 뚫고 고지에 치달아올라서는 부상병들을 구급처치도 하고 업어내리기도 하고 기진맥진하면 함께 안고 뒹굴기도 하면서 많은 전우들을 구원했더군. 또 병원에 입원한 불편한 몸이여서도 저보다도 환자를 돕는 일에 더 극성이더란 말이야. 내 마음은 저도 모르게 그한테 끌리기 시작했어. 그런데 그 처년 도무지 곁을 주지 않아, 미친듯이 따라다녀도 말야.》

《왜요?》

《내가 저를 동정한다나. 자긴 그따위 동정은 싫다는거야. 하긴 나도 동정인지 사랑인지 모르겠더란 말이야.》

《지금 부인이 아니예요?》

《그 사람이 그때는 그렇게 완고하더군. 난 부옇게 채워 다시 돌아와 철다리건설장에서 일했지. 며칠 지난 어느날 누가 그 처녀도 퇴원하여 집에 왔다더군. 그의 집인즉 저기 용수천너머 토피집동네라나. 이 은백양나무에서 딱 마주 바라보이는 가운데집이였어. 난 퇴근길이면 어느 하루도 건느지 않고 이 나무아래서 어슬렁거렸지. 그가 내 마음을 헤아려 나와주기를 바랐네. 그러기 전에는 절대로 그의 집문턱을 넘어서지 않으리라 결심했지. 하지만 그는 첫날에 유리쪼박을 댄 출입문뙤창으로 얼핏 내다본 후에는 얼씬도 하지 않아.》…

그해 가을은 가고 겨울이 왔다.

눈보라가 터진 밤이였다. 사나운 맹수마냥 울부짖는 눈보라에 어디선가 양철지붕이 벗겨져 허공에 날려가고 우지끈 은백양나무아지가 부러져 땅에 떨어졌다. 강대철은 소름이 끼쳐 나무를 붙안았다.

바람은 그의 옷자락을 사정없이 잡아뜯었다. 강대철이한테는 이 무시무시한 광풍과 추위가 마치도 그의 마음을 떠보려고 시험치는것처럼 생각되였다. 그러자 마음속에서 불쑥 객기가 머리를 쳐들었다. 좋다! 어디 너와 시합해보자!

내가 장밤 이 눈보라속에서 견디여 새벽을 맞는다면 나의 사랑은 진짜일것이고 만약 이 강추위에 이기지 못해 이 자리를 피한다면 나는 그를 한갖 동정하는것이리라. 그럴 때면 다시는 여기에 발길을 돌리지 않을테다.… 눈보라는 시간이 갈수록 더 요동쳤다. 발이 시려났다. 그는 선자리에서 뜀뛰기를 하였다. 그것도 얼마쯤 하다 맥이 진하여 그만두었다. 얼굴은 수천개의 바늘로 찌르는것 같고 점차 몸이 와들거렸다.

그는 문득 여름날의 뙤약볕, 아낌없이 내리쬐이던 불볕을 생각하였다. 그것은 그의 가슴에서 타끓는 불이였다. 얼어드는 자기의 넋을 잡아흔드는 내심에서 끓는 사나운 울부짖음이기도 하였다.

안옥심, 그 처녀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나의 눈에 비쳐온 우연이였을가? 나의 센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지나간 바람결인가? 모르겠다. 그건 내가 알바가 아니다. 난 이 눈보라를 이겨야 한다. 이기면 그 녀자가 정말로 나를 반겨 집밖으로 뛰쳐나올가? 그것도 내 알바가 아니다. 어쨌든 난 이 눈보라를 이겨야 한다.

휘몰아치는 광풍이 그의 머리를 또 때렸다. 그럴수록 그는 높뛰는 심장의 고동, 소란스러운 피의 흐름소리를 들었다. 그의 가슴에서는 눈보라보다 더 사나운 폭풍이, 고뇌의 폭풍이 일었다. 눈보라야, 괴롭힐테면 괴롭히라! 너보다 더 강한 힘이 너를 타고앉아 고통을 겪는다는것은 또 얼마나 벅찬것인가. 그는 웃었다. 소리없는 웃음은 태를 치는 눈보라속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밤이 깊어 성에가 불린 코밑으로 얼음물이 입술을 적시고 육체는 장작개비처럼 뻣뻣해났다. 이제는 숨도 쉴수 없었고 몸을 움직일수조차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뜬 그의 몸은 뜨뜻한 온돌방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동상입은 발은 콩자루속에 묻혀있고, 늙수그레한 녀인의 부드러운 눈길이 자기를 내려다보고있었다.

《어머니, 여기가 어딥니까?》

《임자, 정신이 들었군. 어디긴? 옥심이 집이지.》

《내가 어떻게 여기…》

《새벽에 문을 열고 내다보니 저 나무를 끌어안고있길래 웬 미친녀석인줄 알았는데 우리 옥심이가 아니라고 우겨서 업어들여왔지.》

《그러니 제가 새벽까지 숨이 붙어있었군요. 됐습니다, 어머니. 내가 이겼단 말입니다, 이겼어요!》

강대철은 벌떡 일어나 녀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때 방안 구석쪽 어두운 곳에서 쿨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대철이와 안옥심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주경은 강대철의 이야기에 감동되여 은백양나무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이 나무에는 자기들뿐이 아닌 전세대 인간들의 뜨거운 사랑도 새겨져있었다.

주경은 젊은 시절의 강대철이처럼 열정과 사랑으로 가슴이 끓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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