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42 회


제 3 편

70일전투의 열풍속에서


제 20 장


2


강대철이 리진의 연구실을 찾은것은 겨울의 짧은 해가 기울무렵이였다. 방에 들어서던 그는 첫눈에 띄운 꽃송이에 눈이 둥그래졌다.

《허, 이 방은 벌써 봄이 왔는가? 동무가 전량도입의 실마리를 찾은게 아니요? 누가 축하해주려고 갖고온 꽃송이같구만.》

《…》

리진은 제도판에서 눈을 뗐다. 피기없는 얼굴에는 한가닥 쓰거운 웃음이 지나갔다. 강대철은 여러 형태의 가스로스케치도면종이들이 널려있는 책상우에서 한장을 집어들었다. 복잡한 열공학계산수식에 따라 로구조를 그렸다가는 《X》로 부정해버린 종이장에는 탐구의 몸부림이 력력했다.

《힘이 드나?》

《녜.》

《전주 문답식학습때는 토론을 잘하더니만.》

《녜?》

리진은 무거운 머리를 쳐들었다. 아바이가 뭘 념두에 둔 소린지 인츰 생각나지 않았다.

지난주 청년조직에서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혁명하는 사람은 심장이 커야 한다.》고 하신 말씀을 가지고 문답식학습을 진행하였는데 그날 리진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지적하신 큰 심장이란 담대한 배짱과 완강한 의지이며 이런 심장을 지닐 때만이 부닥치는 난관과 시련을 헤쳐나갈수 있다고 토론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평가되였다.

《이보게, 일전에 기술협의회날 계연구사가 하던 말이 생각나나? 동무의 가스로안을 놓고 그럴바에는 페불이 나오지 않게 공장을 통짜로 개조하라고 했었지?》

《거야 그 사람이 비꼬는 소리였지요.》

《물론. 헌데 그 말을 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가?》

《아니, 그럼 공장을 통채로?!》

리진은 펄쩍 뛰였다. 강대철은 리진의 가슴을 툭 쳤다.

《놀라긴, 물론 그럴수는 없겠지만… 전량도입은 동무가 문답식학습에서 토론한것처럼 그런 배짱과 담이 있어야 할것 같단 말이야.》

강대철은 지난밤 공장당비서한테서 페불전량도입을 맡은 리진을 잘 도와줄데 대한 과업을 또 받았다. 하지만 그는 리진을 도울 좋은 궁냥이 떠올라서가 아니라 한곬에서 헤여나지 못하고있는 그의 사색을 다른 방향으로, 학습과 실천을 결부하도록 이끌어주고싶었다.

강대철은 그때에야 열병을 앓고난 사람처럼 해쓱한 리진의 얼굴과 눈밑에 드리운 우울한 그림자에 주의가 갔다.

《그래 이 꽃은 뭔가?》

《그 꽃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려고 피여났다가 버림받은 꽃입니다. 오늘 아침 주경동무가 가져왔더군요, 어머니생일이라구.》

《아, 오늘이 그런가!》

《하지만 난 받을수 없었습니다. 더는 그한테 숨박곡질을 할수 없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죄다 실토했나?》

《전 지금에 와선 그가 아버지들 관계를 알든모르든 개의치 않습니다. 다만 그가 일생의 길동무로 나를 선택해서는 안된다는겁니다. 우린 서로 짝짝이신발입니다. 그한테 맞는 훌륭한 배우자가 나타날겁니다.》

《사랑하면 다지 거기에 무슨 복잡한 사설인가, 젠장! 난 주경이가 결코 옹졸한 처녀라고 생각잖아. 전준혁기사장도 동무 어머니의 고백을 대범하게 받아들이고 용서하더라고 했어. 무엇때문에 동무자신이 스스로 포기하는가 말이야!》

《주경이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더는 그 문제를 권고하지 말아주십시오. 다시는 녀자니, 련정이니 하는따위의 잡스러운 감정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나한테 고민이 있다면 페불입니다. 어떻게 하면 페불을 몽땅 잡을가 하는 생각뿐입니다. 정말 하루하루 가는것이 안타깝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이제나저제나 페불소식을 기다리실것만 같아…》

리진은 목소리가 점점 젖어들어 더 잇지 못했다. 강대철은 가슴을 파고드는 저릿한 아픔을 느꼈다. 실련의 번민도 괴로움도 묵새기며 오직 페불에만 전심하려는 그 결곡한 심정이 눈물겹게 마쳐와 그를 발벗고 도와나서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더는 그와 주경의 관계를 미룰수 없었다. 언제부터 벼르면서도 전투기간이여서 끌어오던 문제를 오늘 기사장을 만나 아퀴를 짓고싶었다.

잠시후 강대철이 기사장실에 들어서니 전준혁은 송수화기를 바른쪽어깨와 목사이에 끼우고 누구와 전화대화를 진지하게 나누고있었다. 그는 강대철이한테 벽면쏘파를 가리키면서 전화를 계속하였다.

《뭐? 외교부(당시)에서 일한다.… 수재형? 물론 그렇겠지. 그 사람 아버지되는 어른도 우리 화학공업부적으로 두번째라면 섭섭할 정도로 일류급두뇌요. 아무렴 그 혈통이야 어딜 가겠소.… 난 말이요, 생각을 좀 달리하오. 우리 앤 그런 요란한 집안엔 어울리지 않아. 촌에서 자란데다 기름내가 푹 밴 제고장이 더 몸에 맞을것 같애.… 아무튼 관심해줘서 고맙소, 하하… 자, 안녕히!》

전준혁은 송수화기를 제자리에 놓기 바쁘게 강대철의 곁자리에 와앉았다.

《비서동무.…》

이렇게 부르는 전준혁의 시꺼먼 눈섭아래 가늘게 좁혀진 눈귀에는 형언할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강대철의 무르팍에 한손을 올려놓았다.

《내 지금까지 전투기간이여서 말을 꺼내지 못했는데… 우리 주경이를 더는 내쳐둘수 없구만요. 익은 딸기는 눈에 띠우기마련이라더니 사처에서 그 앨 달라고 집적이누만. 이자도 나와 외국에 가 함께 공부하던 친구인데… 우리 화학공업부 생산담당부부장의 둘째아들을 권고하지 않겠습니까. 전도가 쟁쟁한 외교일군이라나요. 쉽지 않은 대상이지만 옛적부터 까치는 까치끼리 살아야 무탈하다고 했지요. 하하…》

《기사장동무가 립장이 그렇다니 일은 바라던대로 될것 같구만. 실은 나도 그 문제를 의논하려고 왔소.》

《그―래요? 거참, 이런걸 두고〈생각도 하나 마음도 하나〉라던가요? 하하… 자, 그럼 우리 까치끼리 사돈을 맺읍시다. 난 지난해부터 아니, 그전부터였던지… 그 집 제대군인총각한테 눈독을 들이고있습니다.》

《?!》

앞차대에 놓인 담배를 집으려고 내밀던 강대철의 바른손이 얼어붙고 벙글써 열렸던 입도 굳어졌다. 그들 두사람의 눈길은 한순간 마주쳤다. 전준혁의 눈빛은 능구렝이같은 기쁨으로 밝아졌다면 강대철은 미처 깨도가 되지 않아 제 귀를 의심하는 눈빛이였다.

짧은 시각 강대철의 심경은 참으로 착잡하게 엉켜들었다. 그럼 이 사람이 지금까지 리진을 감싸안고 보호해준건 어떻게 봐야 하는가? 사고를 함께 책임져준 그 인정, 책벌을 받고도 믿음을 준 도량, 주경이와 쌍벽을 이루게 한 의도, 그의 아버지의 잘못에 대한 대범한 관용… 그 모든것이 자그마한 사심도 없는 순수한 마음에서부터였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얼마나 청렴결백한가. 아, 이를 어쩌면 좋을고. 빗맞힌 과녁, 얼빠진 오판… 지금껏 한 젊은이를 위해 마음써온 복이 나한테 굴러오다니… 그럼 내가 그 복을 갖고싶어 남몰래 안달복달했을가?…

강대철은 알지 못할 가책과 허무감이 치밀어 앉은자리가 편안치 않아 견딜수 없었다.

《그게 주경이 의향이우?》

《그 앤 그 문제에서는 철부지지요. 돌아가신 형님을 대신하여 내가 애비구실을 해야겠기에 집사람과 의논하고 결심한걸요.》

《…》

문기척소리가 나더니 서종섭이 방안에 들어왔다. 그는 전준혁에게 저녁렬차편에 화학공업부 손님들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앉은자리가 편안치 않던 강대철은 움쭉 일어났다. 무심결에 출입문쪽으로 한걸음 내짚던 그는 뒤늦게야 대답을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몇마디 웅얼거렸다.

《그건… 좀 생각해봐야겠소다.》

《물론이지요.》

전준혁은 쾌히 짧게 동의했다. 그 어조는 확신에 넘쳐있었고 기름기도는 너부죽한 얼굴에는 그 무슨 중대사를 성사시킨듯 한 흐뭇한 미소가 물결쳤다.

기사장방을 나선 강대철의 걸음은 자못 허청거렸다. 어떻게 이런 왕청같은 일이 불거진단 말인가. 곰곰히 따져보면 여기에는 주경의 보호자인 전준혁의 잘못은 없었다. 다만 자기가 리진이와 주경이가 한쌍이 되기를 바랐고 그렇게 될수 있다고 믿은것이 잘못이였다.…

전준혁의 희망대로 주경이 자기 집문턱을 넘어서 한식솔로 된다면 그 이상 더 복할 일이 또 어데 있겠는가. 강대철은 이 순간 자기는 또 한사람, 희생된 전우의 아들의 행복과 장래를 책임져야 한다는 량심상 의무의 새삼스러운 충격을 느꼈다. 생사를 판가리하던 불타는 고지에서 최후의 눈짓으로 지휘관의 무분별을 깨우쳐주고 생명을 구원해준 정치부중대장… 만약 그가 아들한테 청혼한 이 혼사를 알게 되면 기꺼이 승낙할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삶을 위해 한몸을 주저없이 바쳤던 그가, 그 처녀를 사랑하는 한 젊은이의 고통을 외면하며 아들의 행복만을 축복할수 있을가. 돌연 피빛으로 불타던 그 최후의 눈빛이 강대철을 엄하게 다질러댔다. 자기한테 차례진 복이 그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이 다른 사람의 고통우에 서있다면 그보다 큰 죄악이 없음을 그리고 제가 바라던걸 남에게 베풀줄 알라고 준절히 깨우쳐주는듯싶었다.

(정치부중대장동무… 난 어쩌면 좋수? 당일군이라는 사람이 사람들의 진속을 볼줄 모르고있으니… 이제 어떡하면 그 젊은이, 리진일 일궈세울수 있겠소?…)

강대철은 로동자들의 퇴근길에 승학을 불러 조용히 일렀다.

오늘이 리진의 어머니생일이니 몇사람 데리고 그의 집에 들려보라고. 다른 때라면 몰라도 리진이 어머니생일날에 주경이와 갈라진것이 상서롭지 않았다. 가뜩이나 단출한 집안에 그가 행여나 울적한 기분이라도 터뜨린다면 생일날이 초상난 집처럼 될수 있었다. 하지만 강대철의 우려는 괜한 걱정이였다.

하루전투총화까지 짓고 뒤늦게야 리진의 집을 찾은 강대철은 흥성들썽한 생일축하연에 눈이 휘딱 뒤집혔다. 손풍금반주에 맞추어 효남이와 방울의 2중창, 오복의 곱새춤, 승학의 접시장단, 유현의 코바이올린소리… 거기다 방바닥을 구르며 돌아가는 리진의 춤가락은 그 어떤 무대인기종목도 무색할 지경이였다. 정지방아래목 음식상앞에는 여느때없이 신색이 환한 유선림이 젊은이들의 놀음새에 넋을 팔고있었다.

강대철이 방안에 성큼 들어서자 유선림은 반가와 어쩔줄을 몰라했다. 녀인은 얼른 음식을 차리려고 서둘러댔다.

강대철은 녀인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힌 다음 뒤꽁무니에 차고온 병을 내놓았다.

《젊은이들을 방해하지 말고 우리끼리 한잔 나누기요.》

《난 한뉘 그 맛을 몰라요.》

《이건 포도주라는거요. 아낙네들이 좋아하는 도수 낮은거요.》

《아까 젊은이들이 권해서 좀 맛봤어요. 내가 소주를 부어드릴테니 아주버님이 한잔 드세요.》

《그럼 아주머니의 건강과 집안의 복을 위해 들겠소.》

《고마와요.》

강대철이 큰 잔에 부은 소주를 단숨에 내자 유선림은 부엌에 내려가 김이 문문 나는 뜨근한 고기국을 들여왔다.

《추웠겠는데 속을 좀 덥혀요.》

《난 그런건 싫소. 시원한 김치면 되오.》

《원, 술안주에 김치라니?》

강대철이 굳이 우겨 김치와 깍두기를 상우에 올려놓았다. 그러는 가운데도 웃방에서는 춤판이 더 기세를 돋구었다. 그 즐거운 광경에 시종 따뜻한 눈길을 보내던 유선림은 강대철의 곁으로 한무릎 다가앉으며 귀속말로 소곤거렸다.

《비서아주버님, 우리 애한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어요?》

《무슨 일이라니?!》

《애가 왜 저렇게 정신나간 사람처럼 다잡지 못할가요?》

강대철은 녀인의 예민한 감각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상고머리를 쳐들고 능청을 부렸다.

《허, 모르는 소리. 엄지소 우웡소리에 갓난 송아지도 좋아 날뛴다고… 하물며 제 엄마 생일인데야…》

유선림의 감촉은 틀리지 않았다. 평소에는 순진하고 가식을 모르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이 일단 끓어오르면 흥분을 걷잡지 못해하는 그런 열기가 리진이한테 작용하는듯싶었다. 노래박자에 맞춰 방바닥을 구르고 몸통과 팔을 정력적으로 흔들어대는, 땀에 젖은 그의 얼굴은 광적인 열기로 휩싸였고 약간 열린 입술은 아이들처럼 천진한 미소를 담고있었다. 선하고 무한히 어질어빠진 눈은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비통한 애수를 감추지 못했다. 마음은 꺾이운 넋에 울고 겉은 락천적인 쾌활로 부조화를 이룬 그 모습은 마치나 그리도 소중했던 사랑을 제 손으로 가슴에 파묻고나서 피눈물을 짓씹으며 일어나려는 의기를 말해주어 강대철은 더 볼수 없었다.

(참, 주경인 지금 뭘하는지. 리진의 가슴속 저 소리를 듣기나 할가? 아침에 이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무던히 마음을 쓴것 같은데… 정말 저들을 구원할 방책은 없단 말인가?)

《아주머니, 내 먼저 조용히 사라지겠소. 떠들지 마오. 젊은이들을 방해하겠소. 오늘 저녁은 맘껏 놀아대게 내버려두오.》

강대철은 정지방문을 열고 퇴마루에 나섰다. 그를 바래주려고 뒤따라나오던 유선림은 퇴마루에 정히 놓인 낯선 물건에 눈길이 미쳤다.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투명한 포장비닐에 곱게 감싼 세송이의 꽃을 비치였다. 강대철은 놀라는척 하면서도 내심과는 달리 활기롭게 탄성을 질렀다.

《허, 주경이 왔다갔군.》

《주경이라니요?!》

《이 꽃은 아주머니의 생일을 축하해서 아침에 주경이가 리진이한테 갖고온거요. 리진이 받지 않아 그 방에 그냥 있었는데…》

《원, 어쩌문…》

꽃송이를 눈가까이 쳐들었던 유선림은 저고리고름을 눈굽에 가져갔다. 하지만 그 꽃을 강대철이 가져온줄은 알리 없었다.

이전페지   다음페지

←되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