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41 회


제 3 편
70일전투의 열풍속에서


제 20 장


1


밤새 이해의 첫눈이 내렸다. 하늘이 보낸 첫 손님은 깊은 밤중에 소문도 없이 찾아와 공장구내의 탑들과 교예극장을 방불케 하는 탕크지붕들, 과일나무숲과 구내길바닥에 소복이 내려앉았다. 얼마나 호함진 함박눈이였는지 장치와 구조물들의 형태와 륜곽들이 하얀 눈솜에 감싸여 두리뭉실한가 하면 포근하고 따스한 미소를 뿌리기도 하였다. 비파봉마루에 아침해가 머리를 쳐들었다. 하얀 눈꽃세계를 펼쳐 이를데 없이 눈부시고 아름다운 과일숲에서는 새들이 지저귀며 이 나무에서 저 나무에로 넘나들었다. 그때마다 은분같은 눈가루들이 해볕에 눈부신 빛을 반짝이며 흘러내렸다. 리진은 청신하고 정갈한 눈의 정서에 한밤을 현장에서 지샌 피로가 가뭇없이 가셔져 은빛주단같은 부근부근한 숫눈을 밟고 연구소로 돌아왔다. 연구소는 아직 출근전이였다. 그의 책상우에는 이 며칠째 고심하다가 또 밀어내친 가스로스케치도면이 되는대로 널려있었다. 얼마전 기술협의회에서 일정한 파문을 던졌던 가스로를 취소해버린 그는 다른 로구조를 탐색하고있었다. 그날 회의에서 어린 학생의 그림을 놓고 비서아바이가 해준 충격은 실로 컸다. 리진은 그 그림앞에서 한갖 기술자의 사명감에 머리를 쳐들지 못했다면 페불전량도입이야말로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 기쁨을 드리는 성스러운 길이라는것을 아바이가 깨우쳐주었을 때 그는 어느모로 보나 완전무결한 최상의 목표를 세우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퍼그나 흘러갔건만 아직 신통한것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페불을 몽땅 잡을 그 결심이 흔들리거나 동요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즈음 지배인이 직접 틀어쥐고 내밀고있는 생산직장들에서는 열교환능력을 높여 기름제품생산이 2배이상의 실적을 내고있었다. 그런가하면 그사이 전주경은 공정에서 나오는 페가스를 분리하는데 성공하였고 그에 기초하여 일부 가스를 중유로의 연료로 먹이고있었다. 말하자면 기사장이 착상하고 전주경이 무르익힌 페불국부도입이 실질적인 은을 내고있었던것이다. 전주경은 페가스분리뿐아니라 로안에서 가스파동을 극복하기 위한 자동압조절장치와 합리적인 새로운 식의 가스바나까지 탐구개발하여 페불의 국부도입을 완성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다만 로공들이 중유와 함께 페가스를 연료로 쓰게 되니 그 조작법이 손에 익지 않아 기술혁신돌격대의 기사, 연구사들이 밤이면 그들을 방조하여 현장에 붙어있군 하였다.

지난밤 현장당번은 리진이 섰다. 그러나 그는 무슨 일을 하든 밤이나 낮이나 지어 회의장소에 앉아서도 머리속에는 온통 여러가지 형태의 페가스로개조안뿐이였다. 그는 새벽녘에 피끗 떠올랐던 로구조를 그리려고 제도판에 새 도면지를 끼워넣었다. 그때 아래복도와 계단을 구르는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출근하고있었다. 조금 지나 문기척소리가 울리고 뒤미처 전주경이 방안에 들어섰다. 리진은 그가 제 방을 곁에 두고 왜 자기 방부터 찾았는지 의아했다.

《밤새 안녕하세요?》

전주경은 늘 하는 버릇대로 리진의 감정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제 기분을 드러냈다. 차고 신선한 몸냄새를 풍기며 들어서는 처녀의 량볼은 추위때문인지 연한 화장덕인지 자못 싱싱했으나 이마 한옆에 드리운 한오리의 타래진 머리카락은 그가 일부러 해놓은 교태같아 단순하고 있는 그대로 소박하던 어제날의 그같지 않았다. 그리고 하얀 모직수건으로 머리와 목을 둘러감은 가뿐한 모양이라든가 도시풍의 간편하고 세련된 회색반외투들은 그가 몸치장에 어지간히 신경을 쓰고있음을 말해주었고 그것이 누구를 위한것인지 리진은 모르지 않았다.

리진은 자기에게 바쳐지는 진정어린 마음을 몸가까이 느낄수록 억제할수 없는 강렬한 사랑의 분출에 휩싸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주경이를 속이고 난처하게 하는 길이므로 항상 외면하고 무심한체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주경은 등뒤에 무엇인가 감추고 장난궂은 은근한 눈빛과 촉촉히 젖은 빨간 입술에 미묘한 미소를 떠올리고 리진의 앞으로 다가섰다.

《뭘 감추고있소?》

《알아맞춰봐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무슨 날이긴, 70일전투 20일째 되는 날이요.》

리진은 날자와 시간이 가는것을 생명이 토막쳐나가는것처럼 느끼고있어 헨둥히 알고있었다. 주경의 가로 비껴보는 눈빛이 갑자기 쏘는듯 매서워졌다. 그 따벌눈총은 한동안 까딱않더니 엷은 눈시울에 가리워지면서 긴 숨결을 내불었다.

《동문 일밖에 모르는군요. 아무리 그런들 어쩜 한분밖에 안계시는 어머니의 생일을 잊을수 있어요?》

《?!…》

리진은 금시에 흠칫 몸을 떨었다. 실로 불의에 가해지는 타격이였다. 실지 그는 어머니의 생일을 감감 잊고있었다. 지난해 이맘때는 사고를 저질러 어머니의 생일을 어찌할 경황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가. 페불에 너무 집념해서일가. 일을 치지도 못하는 주제에, 난 정말 후레자식이야.…

무엇인가 성차지 않은 즐거움에 한껏 장난치고싶어하던 주경의 기색은 사뭇 새초롬해졌다.

《동문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예요. 뭔가 온당치 못한걸 숨겨두고있는 사람처럼 늘 쫓겨 지내는것 같군요. 그래서 어머니생일을 잊은건 아니예요?》하면서도 주경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냥 뒤를 이었다.

《난 정말이지 동무가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요. 어머니를 모시고있는 그보다 큰 긍지와 행복이 어데 있겠어요. 난 어릴적에는 그 감정을 느끼지 못했지만 차차 셈이 들어서인지 엄마, 아버지품이 그지없이 그리웠어요. 이건 나처럼 량친을 잃은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일거예요. 어느 한분이라도 계셨으면 난 일생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살고파요.… 단 한번이라도 엄마나 아버지가 곁에 있다는 그런 감정을 느껴봤으면, 호호.…

자,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안을 함께 세워보자요. 소박하지만 진정을 고여서 말예요.》

전주경은 등뒤에 감추었던것부터 책상우에 내놓았다. 세송이의 생화를 엮은 다발이 투명한 포장비닐에 감싸여있었다. 그 꽃들은 요염하고 화사한 모양새보다도 한결같이 담백한 정서와 소담하고 은은한 미를 지닌 품위있는 꽃들이였다.

《엊저녁 퇴근길에 시내꽃방을 찾아가 한송이한송이 골랐어요. 동무야 밤근무생이니 함께 갈수 없고 해서 내가 대신 고르느라 했는데… 이건 눈나리꽃이예요. 어머니의 순결을 뜻하는 의미에서 선택했어요. 이건 수선화, 이 꽃은 청춘남녀들한테는 티없는 사랑의 고백이지만 자식이 부모한테 드릴 때는 〈사랑하는 어머니, 난 언제면 구실을 할가요?〉라고 효도를 맹약하는 속삭임이 깔려있다나봐요. 그리고 소담한 조선국화, 하얗고 복슬복슬한 이 꽃은 10월부터 설까지 만첩을 피워 품위나 절개뿐아니라 강인하고 억센 장수를 뜻한다고 했어요. 어때요?》

《…》

리진은 주경의 다심한 마음에 감동되여 말문을 열수 없었다. 무슨 말을 더하랴. 설사 자기가 꽃을 고른다 해도 이처럼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을것이다.

《그다음은 말예요.…》 주경은 계속하였다.

《저녁생일음식은 시내식당중에서 비교적 조용한 떡국집에다 차리자요. 내가 동무네 집 부엌에 들어서기는 멋적은 일이고 그렇다고 어머니자신이 음식을 갖출수야 없잖아요. 동무 어머니가 나무라지 않는다면 내가 어머니구미에 맞는 음식들을 다 마련하겠어요.… 식사를 마친 후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극장에 관람을 가자요. 마침 70일전투를 고무하여 도예술단에서 웃음소품들을 갖고 왔대요. 관람권도 미리 부탁해놨어요. 끝으로 집에 돌아와서는 가족오락회를 펼친다. 거기에 내가 끼울수 있다면 동무와 함께 2중창을 부를래요.〈우리 엄마 기쁘게 한번 웃으면〉호호… 어머니가 맘에 들어하실가요?》

리진은 자기에 대한 주경의 변함없는 애정이 더없이 소중해지면서 어느결에 그의 계획과 그의 즐거움이 모두 자기의것으로 되는것을 느꼈다. 한생 생일을 잊고 지낸 어머니가 받아안게 될 기쁨이 강렬한 현훈증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에 돌연 다른쪽에서 알지 못할 목소리가 날아와 뇌리를 쳤다. 그 목소리의 일깨움이 무엇인지 딱히는 알수 없으나 분명히 들뜬 기분을 식혀주는 타이름인것 같았다. 점차 그 가느다란 웨침은 그한테로 급속히 날아오면서 똑똑히 들려왔다.… 주경이, 그는 지금 자기의 친아버지, 엄마한테 하지 못한 몫까지 합쳐 정성을 기울이고있지 않느냐.… 그가 그처럼 애달피 마음속에 찾고 부르는 사랑하는 선친을 누가 배신했느냐.… 시꺼멓게 상실되는 의식, 아무 감정도 표현할수 없는 몸짓.…

리진은 방심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 심장을 비틀어짜는 괴로움과 아픔에 눈을 지그시 감고 입속말처럼 뇌이였다.

《고맙소, 주경이. 하지만 어머닌 응하지 않으실거요.》

《왜요?》

《어머닌 한뉘 생일을 모르고 지냈소. 그러니 행복도 너무 숨가삐 차례지면 아픔처럼 느끼지 않겠소?!》

주경은 놀란 눈길을 쳐들어 리진을 쳐다봤다. 리진의 눈에는 자기가 없었다. 자기의 불타는 심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무표정만 있었다. 동시에 처녀는 어지간히 품들여 세운 탑이 일시에 무너져내리는 허무감과 비애의 감정에 몸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그 어떤 억울한 반발심에 발끈했다.

《내 눈을 좀 봐요. 동문 지금 거짓말을 하지요? 뭐, 숨가쁜 행복은 아픔이라구요? 그것도 말이라고 해요? 어머닌 왜 날 싫어해요?》

《싫어하긴…》

《어머닌 내가 드린 그 뜨개옷을 한번도 입지 않으시더군요.》 하고 뇌이는 주경의 눈앞에는 얼핏 그지없이 귀여운 한 처녀, 하나의 작은 단추에도 맑은 이슬같은 순정을 담던 발랄하고 상긋한 미모가 스쳤다.

《어머니한테 혹시 다른 처녀, 며느리감이 생긴건 아니예요? 난 동무가 솔직하기를 바래요.》

《…》

리진은 대답을 피했다. 어처구니없는 물음이였지만 굳이 까밝히고싶지 않았다. 주경은 초조하고 긴장한 눈초리를 쳐들고 한걸음 리진의 앞으로 바투 다가왔다. 그의 가슴은 높뛰였으며 얼굴에는 진한 홍조가 떠오르고 알수 없는 미소로 입술이 떨었다.

《리진!》하고 주경은 갑자기 어릴적 그때처럼 온순하고 다정한 소리로 허물없이 불렀다. 그 억양에는 최후의 기대와 절절한 물음이 실려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동문 어떻게 하겠어요? 용서해요, 난 처녀의 존엄을 다 꺾고 물어요.》

리진은 별안간 최후통첩같은 그 물음이 주경의 입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둥처럼 가슴을 울렸다. 주위의 공기는 삽시에 탁하고 방안은 밀페된 속처럼 숨이 막혔다. 드디여 와야 할 시각이 온것이다. 용단을 내리기가 한걸음이 아니, 반걸음이 모자랐던 그 시각이 너무도 뒤늦게 바퀴를 굴리며 저절로 찾아왔다. 이미 주경이와의 결렬을 선언한지는 오랬건만 무슨 힘이 그 바퀴를 지금까지 돌렸는지… 물질운동의 관성처럼 정신령역에도 그와 비슷한 운동, 숫눈처럼 깨끗하고 열화같은 사랑이 남긴 여운이, 타성의 힘이 그 바퀴를 돌리지 않았던가. 이제는 그 타성의 바퀴도 종착점에 닿은듯싶다. 더는 굴릴 내부적힘도 외력도 없다. 넘지 말아야 할 계선에 와 덜컥 멈춰섰다. 그런데 가슴은 왜 이다지도 쓰리고 괴로울가. 언제인가 비오는 그밤에는 이 최후의 시각을 태연하고 편안하게 기다린것 같은데.…

리진은 창밖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얀 눈을 뒤집어쓴, 거대한 흰빵처럼 부풀어오른 탑과 탕크들, 그 웃설미에 피여오르는 젖빛물김과 은쪼각처럼 부서져 발산하는 눈부신 광채, 고르로운 탑의 동음에 어울려 과일숲에서 노니는 새들의 즐거운 우짖음… 어딜 보나 세찬 숨결이 흐르고 생이 약동하는 푸근한 이 아침… 왜 하필이면 생과 생활이 현란한 무지개처럼 반사되는 이런 맑고 투명한 날 가슴속 심장의 한 부분처럼 소중히 간직했던 모든것을 영영 죽인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주경을 위한 길이고 그의 행복과 잇닿은 길이라고 생각할 때 더는 지체할수도 주저할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리진은 난생처음 단호하고 결패있는 몸짓으로 다시 주경의 앞에 돌아섰다.

《주경이, 꼭 대답을 들어야 하겠소?》

《…》

《들어야 한다면… 방금 물은 동무의 짐작이 틀리지 않은것 같소. 그러니 난 어머니의 뜻을 따를수밖에…》

《그래요? 옳아요, 내가 바보였어요. 내가 바보였어.… 좀 나가줘요. 난 혼자 있고싶어요.… 아, 이 방은 내 방이 아니지. 가만 있어요. 내가 나가겠어요, 내가…》

주경은 목수건을 풀어쥐고 돌아섰다. 그는 겨우 몸을 가누고 문께로 한걸음한걸음 다가갔다. 그리고는 안으로 당길 문을 밖으로 내밀었다. 그 기계적인 동작을 한참 반복한 후에야 문밖으로 나갔다.

리진은 순간 심장이 멎어버리는것 같았다. 이 세상의 운동이 모두 정지되여 웅― 하는 소리만이 귀를 메웠다. 이것이 꿈이 아니고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나는 꿈을 꾸지 않는가. 왜 이리도 눈앞이 어지러울가.

이자 금방 은빛으로 눈을 시그럽히던 볕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아름답고 신비한 동화속의 나무들처럼 하얀 구내의 과일숲은 왜 저렇게 앙상하고 시꺼멓게 변했을가.…

리진은 반실신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때 벽시계가 종을 때렸다. 느닷없는 그 소리에 화닥닥 놀란 리진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문에 다가가 주경이 채 닫지 못하고 나간 출입문을 쾅 닫고 제도판에 마주섰다. 첫 순간 눈앞은 어둠속처럼 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차츰 제도판의 하얀 종이장이 보이였다. 리진은 무작정 T자를 그우에 올려놓고 도면을 그려나갔다. 될수록 빨리, 밀물처럼 쳐들어오는 괴로움에서 멀리 달아빼고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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