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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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

제 2 편

별뜨는 하늘


제 18 장


2


저녁노을이 설피여가는 하늘가에는 해무리가 졌다. 리진은 저녁식사시간도 잊고 현장지휘부에서 래일 기술협의회에 내놓을 새로운 페가스로구상안을 도면에 옮기고있었다.

그는 하루종일 대보수를 한 로시운전으로 짬없이 보내다가 겨우 시간을 얻은 몸이여서 오늘 어머니가 기사장을 만난 일을 알지 못했다. 그한테는 기술과에서 받은 과제가 급했다.

낮에 로시운전때문에 현장에 왔던 종섭은 리진을 불러 래일 기술협의회중심안건의 하나가 페불리용문제라고 일렀다. 로대보수가 끝났으니 페불문제가 다시 일정에 올랐다.

70일전투중심목표의 하나인 페불전량도입과제를 순간도 잊지 않고있는 리진은 지금까지 짬짬이 구상중에 있던 안을 대중들앞에 내놓고 토의에 붙여보고싶었다. 그는 로공들과만 의논했을뿐 다른 누구와도 비쳐본적 없는 설익은 안이지만 대담하게 제기하리라 맘먹고 도면에 옮겨갔다.

그 시각에 현장지휘부로 승학이 작업반원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오복은 지휘부에 들어서자바람으로 법석 떠들어댔다.

《글쎄, 내 짐작이 틀림없었다니까.》

《동무가 여기 있는줄 모르고 수태 찾았구만. 공업연구소에도 가보고 지어는 집에 사람을 띄우지 않았겠나.》

《아니, 무슨 일이 생겼나?》

리진은 긴장하고 심각해져서 다우쳐물었다. 오복이 얇은 눈시울을 치뜨고 핀잔했다.

《이 골방샌님아, 오늘 저녁 정양소에서 축하연을 하는줄 몰랐어?》

《아참, 그랬었지.》

아침에 비서아바이가 작업반원들한테 알려주던걸 리진은 감감 잊고있었다.

《동무때문에 정양소의 그 풍성한 성찬을 다 놓쳤어. 옥류관국수를 닮은 유명한 강냉이변성국수, 동해의 명물인 문어와 낙지, 만문하고 영양가높은 토끼고기, 나비넥타이를 맨 술병친구들…》

《이거 정말 안됐구만, 나때문에.…》

리진이 사죄하자 들고온 지함을 헤치던 승학이 손을 내저었다.

《그건 롱소리고, 우린 우야 이 자릴 마련하고싶었네. 래일이면 동무가 작업반을 떠날텐데 간단한 송별연이라도 해야지.》

작업반막냉이 효남이가 책상우에 종이를 깔고 그우에다 마른낙지와 마른명태, 맥주과자를 놓고는 한옆에 입가심할 돌배도 쌓아놨다. 극히 소박한 주연상이였다.

효남은 생맥주통을 기울여 리진의 앞에 놓인 유리고뿌에부터 부었다. 오늘 좌석의 주인공은 리진이라고 승학이 미리 귀띔해주었었다. 그다음에는 차례로 부었다. 오복의 고뿌에 부을 때에는 맥주거품이 부그그 끓어올라 금시 넘쳐날것 같았다. 여느때같으면 재빨리 입술을 고뿌에 갖다대며 수선을 떨었을 오복은 그 모양을 바라보면서 의미심장히 뇌이였다.

《어허, 맥주는 부그그 끓어넘치고 가슴속 석별의 정 또한 넘치누나.… 리진, 잘 가게. 새 일터에서 부디 성공하기를 우린 부탁하네. 자, 그런 의미에서!》

모두 고뿌를 쳐들었다. 노르끼레한 맑은 액체가 불빛에 반사되여 금빛으로 부서졌다. 고뿌에 입을 갖다대려던 리진은 울컥 목구멍으로 뜨거운것이 솟구쳤다. 그는 마실수 없어 머리를 떨구었다.

《동무들, 내 좀…》 리진은 목안에 차오르는 뜨거운것을 먼저 삼키면서 격하게 일어번지는 가슴을 애써 눌러앉혔다.

《…동무들과 작업반을 위해 별로 한 일 없는 절 이렇게 해주니…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난 사실 혈붙이 없이 외톨로 자란 몸입니다. 어릴적에는 홀어머니의 사랑밖에 모르는 응석받이였습니다. 그러다나니 형제지간의 정분이나 집단과 동지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또 사람이 지녀야 할 진짜 즙과 인간미란 어떤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걸 난 여기 작업반에 와 몸으로, 페부로 느끼고 체험…》

리진은 또 말길이 막혔다. 그의 눈에는 물기가 핑 어렸다. 좌석의 분위기를 조정해가던 오복은 제창 시흥에 잠겨 읊조렸다.

《해는 저물어 꼬리를 사렸건만 상기 지지 않은 석별의 정에 애꿎은 고뿌만 식어가누나. 에라, 시큼털털한 돌배야, 너라도 한입 베여볼가.》

《고맙습니다. 반장동무, 오복이, 유현이, 효남이, 또딸아버지, 명호, 광택이, 현우… 내가 제일 어려운 정신적시련을 겪을 때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또 나를 많이 배워준 동지들을 위해 이 고뿌를 비우겠습니다.》

리진이 작업반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고뿌를 내자 오복은 신이 나서 변죽을 울렸다.

《여보소 벗님네들, 때늦은 식은 고뿌에 철철 넘치게 담아 마시세나, 따가운 우리의 우정을!》

《하하.…》

오복의 익살에 리진의 격정은 웃음으로 번져져 좌석은 화락해졌다. 그때 마른낙지와 마른명태를 부지런히 찢어놓던 효남이 돌연 상을 철썩 쳤다.

《참, 잊을번 했군요!》

효남이 지함속을 헤쳐 포장지에 싼 큼직한 게를 내놓았다.

《이크, 이건 대짜배기게로군. 어데서 생겼나?》

《승표형이 정양소주방에 들어가 취사원들과 뭐라뭐라하더니 이걸 내왔더군요.》

《승표가?!》

리진은 승표가 무엇때문에 이 좌석을 위해 마음을 썼는지 아연했다.

《참, 이 게를 보니까 생각나는군.》

지금까지 말 한마디 없던 승학은 리진의 기분과 심리를 외면하고 딴말을 꺼냈다.

《지난여름 고래섬해수욕장에 갔댔는데 한 늙은이가 도래굽이에서 게족속인 방게잡이를 하더구만. 늙은이는 쇠장대로 바위를 들출 때마다 기여나오는 방게들을 집어서는 물속에 잠근 구럭안에 넣지 않겠나. 그런데 구럭지아구리는 열려진채로 내버려뒀어. 난 게도 구럭도 다 놓칠것 같아 〈아바이, 이 아구리를 열어놓으면 이놈들이 다 빠져 달아나겠습니다.〉하고 튕겨주었네. 그러자 늙은이가 하는 말이 〈괜한 걱정일세, 이 게란 미물은 한데 엉켜있으면 서로 집게손으로 꽉 잡고있어 살길을 열어주지 않는다네. 남을 돕는 일이 제 살길인줄 알턱 있나?〉라고 하잖겠나.》

승학은 말문을 채웠다. 그러나 그 말뜻은 가볍지 않은 무게로 좌석을 눌렀다. 리진은 승학의 그 깊은 말뜻을 모르지 않았다. 승학은 리진이 현장을 뜨게 되는 이 마당에선 승표와의 관계가 풀어지기를 바라고있었다. 하지만 리진은 승학의 그 마음을 더 음미할새 없었다.

별안간 출입문이 벌컥 열리더니 서윤정이 방울이와 취사원들과 함께 나타났다.

취사원들이 들고온 바께쯔와 그릇가지들을 내려놓자 서윤정은 희고 퉁투무레한 얼굴이 딩딩하여 노여움을 터쳤다.

《흥, 잘은 놀아대는군. 정양소성의는 발바닥처럼 여기고 여기서는 주연을 펼치구, 오늘 저녁 축하연은 동무들이 다 망쳐놨어요. 알속들이 다 빠졌으니 오락회랑 하려던 계획이 다 틀어졌단 말예요. 내 가만둘줄 알아? 얘 방울아, 어서 가서 너희네 그 코대높은 비서령감과장장을 데려와!》

《아, 소장동지, 좀 고정하십소. 실은 그런게 아니라…》

오복이 막아나서자 서윤정은 불퉁그러진 소리로 더 승기를 돋구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예요. 리진이 뭐 평양에라도 소환돼요? 뛰여야 벼룩이라고 공장이겠지. 정 하겠으면 우리 정양소에서 작별하면 안돼요? 뒤에서 수박씨를 까는것들을 내 가만둘줄 알아? 뭘해, 빨리 가서 데려오잖구!》

서윤정이 재차 으르는통에 방울은 황급히 방안에서 뛰쳐나갔다. 침착하고 다정하던 서윤정이 이렇게 자제력을 잃고 성난것은 처음 봤다. 그는 온곱지 않은 눈길로 방안과 식탁을 훑더니 눈과 입에 빈정거리는 미소를 그었다.

《얘들아, 이 상우의것들을 다 치워라.》

취사원들이 달라붙어 상우를 말끔히 정돈하였다. 그다음은 책상들을 이어붙이고 자기들이 갖고온 새하얀 상보를 깔았다. 정갈하고 깨끗한 상우에는 먼저 수저와 고뿌가 오르고 맥주병들과 여러가지 료리들이 놓여졌는데 오늘 저녁 정양소에서 차린 음식가지들과 꼭같았다. 선주후면이라 알뜰히 말아 꾸미를 둔 강냉이변성국수도 올랐다. 서윤정이 저윽 온후한 소리로 설분을 쏟았다.

《이 사람들아, 그래도 우린 뭔가 성의를 다하고싶었는데… 로대보수주인공들은 다 빠져, 직장초급일군들도 빠져… 이게 례절있는 소행인가, 응?》

서윤정의 후더운 진속에 다들 머리를 숙였다. 오복이 눈짓하자 효남은 재빨리 맥주병을 따서 고뿌에 부어 서윤정이한테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소장어머니부터 먼저 들면 우리도 들겠습니다.》

맥주고뿌를 받으려던 서윤정은 《어머니?》 하고 되받았다. 정기에 넘치던 그의 눈빛은 순식간에 꺼지고 서글픈 색조가 둥싯한 얼굴을 물들였다.

《내가 벌써 그렇게 보여요? 내 나이 마흔다섯에 어머니라?》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린 소장동지가 섭섭해해도 그렇게 부를겁니다. 그건 나이로 계산되는 부름이 아니지요.》

오복은 좌석을 대표하여 진정을 표하였다. 서윤정은 종잡을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도리질을 하였다.

《그렇다면 더욱 안될 말이예요. 어머니란 그 고귀하고 성스러운 이름을 어떻게 내가 지닐수 있겠어요. 난 어머니답게 사랑과 헌신으로 충만되여있지 못해요.… 자, 함께 들자요. 나도 오늘은 마시겠어요. 이번에 리진이랑 반장동무랑 로공들이 정말 수고가 많았어요. 자, 앞으로 더 큰 성과를 위해서…》

다들 고뿌를 비웠다. 얼굴이 불깃해진 서윤정의 눈빛은 따뜻한 빛이 떠돌고 기분도 자못 유쾌해졌다. 게다가 방금전 리진이와의 석별의 여흥이 그냥 떠돌고있어 좌석은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소장어머니, 좋은 말을 해줄수 없겠어요?》

효남이 치근치근 달라붙었다.

《무슨 말?》

《교훈적인 이야기가 있지 않겠어요.》

《나한테 무슨 들을 소리가 있겠다구… 한가지 솔직한 심정을 고백한다면 나 역시 동무들의 기대처럼 어머니가 되고파요. 어머니처럼 한생을 사심도 모르고 일하고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난 아직 그런 경지에 이르자면 멀었어요. 내가 맡은 봉사사업은 사람들을 진실로 뜨겁게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저 제 낯내기나 되고마는 일이예요.》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소장어머니가 지금껏 해놓은 일이 어디 적습니까.》

《아니, 난 겸양의 소리가 아니예요.》

《야참, 그런 값높은 사랑을 지니자면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이 얼마큼 돼야 할가요?》

《하늘만큼.》 효남의 천진한 물음을 오복이 제창 유치원아이들처럼 대답하여 좌석을 웃기였다.

《세상에 그런 사랑을 재이는자가 어데 있겠어요.》

서윤정은 정채도는 눈길로 좌중을 둘러봤다. 그는 문득 강대철이 젊은 시절 한 처녀를 사랑하여 눈보라치는 긴긴밤 발을 얼구면서 지낸 사실이 떠올랐다.

《내 하나 묻자요. 동무들은 한 인간을 사랑하여 눈보라치는 혹한속에서 한밤을 새울 자신이 있어요?》

《눈보라치는 밤에요?!》

뚱딴지같은 물음에 효남의 애어린 눈동자가 휘딱 뒤집혀졌다. 곁에 앉은 오복이 그의 모자채양을 꾹 내리눌렀다.

《쪼꼬만게, 널 보고 하는 소리가 아니야.》

《왜, 효남이도 이제 처녀가 생기면 그럴지 알겠어요.》

《체, 나라구 일생 쪼꼬말가.》

《하하.…》

웃음발이 방안을 흔드는 속에 방울이 직장장을 앞세우고 들어섰다. 무슨 급한 일이 생긴줄 알고 뛰여온것 같은 직장장은 왕청같은 분위기에 접하자 어이없어 허허 웃고말았다.

《하, 내 또 동갑의 수에 걸렸군.》

사람좋은 직장장은 서윤정을 동갑이라 불렀다. 하긴 그들의 나이가 서로 어금지금하였다.

《비서어른은 안 와요?》

《용수중학교 미술교원이 찾아와 그와 담화하는중이요.》

《그렇겠지요. 그 어른은 늘 이 핑게, 저 핑게.》

서윤정은 서운해하는 기색이 완연하였다. 그러나 효남은 서윤정의 물음에 제사 더 궁금해져 직장장을 구슬렸다.

《직장장동지, 이 자리에 앉으십시오. 제 하나 물으랍니까?》

《뭘?》

《만약 말입니다, 직장장동진 누구를 사랑한다면 눈보라가 쌩쌩 부는 겨울밤 한지에서 꼬박 밝힐것 같애요?》

《왜 하필 눈보라치는 날을 고른단 말이야, 소털처럼 많은 날에. 이봐, 너 책에서 봤지? 사랑이란건 말이야.… 새들이 지저귀고 울긋불긋 봄꽃이 웃어 반기고 가벼운 미풍이 흐느적이는 공원이라든가 황금같은 달빛이 은은한 여름밤이던가…》

《아니, 그건 내가 썩 오래전부터 알고있는 사실이예요.》

서윤정은 침착히 뇌이며 입술을 옥물고 눈빛을 빛냈다. 직장장의 유쾌한 얼굴에는 능청스런 빛이 물결쳤다. 그의 입은 걸죽한것을 퍼올리는데는 능수였다.

《눈보라속에서 한밤을 밝혔다?… 사랑도 무서운 고문이군. 그래 어떻게 됐소?》

《어떻다니요?》

《그 사람이 추위속에서 잘못되지는 않았소?》

《발이 얼어 동상을 입었어요.》

《아뿔싸, 발이 얼었으면 그거라고 무사했을가. 그걸 살피지 못했소?》

《그거라니요?》

《하아, 이렇다니까. 우리 나라 명산인 칠보산 내칠보에 가면 서로 화끈하게 껴안은 부부바위가 있는데 말이요, 녀인의 한손이 사내의 아래 그쪽으로 뻗지 않았겠소. 한갖 숨이 없는 바위녀성도 그것부터 살피더란 말이요!》

와하… 방안을 들었다놓는 폭소가 터졌다. 방울이와 취사원들은 급해맞아 밖으로 뛰쳐나가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강대철이와 부딪쳤다. 강대철이 뒤로 휘청 넘어질번 하며 왝 소리를 질렀다.

《이거 왜 이래?》

《비서동무, 아, 세상에 처녀사랑때문에 한밤을 추운 밖에서 보내다 발이랑…》

《직장장동무, 됐어요. 전 먼저 실례하겠어요. 다들 즐겁게 보내세요.》

서윤정은 웬일인지 황급히 자리를 떴다. 강대철의 얼굴은 단박에 수수떡빛이 되였다.

그는 《흠흠.》 코소리를 내며 녀자들이 나간 어두운 창밖을 향해 뻗두룩한 머리카락만 손빗질해댔다.

리진은 배가죽이 늘어나게 웃으면서도 한 처녀를 사랑했을 그 사람의 열정에 탄복하였다. 오늘 서윤정이도 바로 그런 뜨거운 사랑으로 사람들을 보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것을 말해주려는것 같았다.

리진에게는 이 저녁이 참으로 인상깊었다. 집단과 동지들의 우정과 사랑으로 불타는 련인처럼 인간을 뜨겁게 안으려는 서윤정의 값높은 세계가 새로운 의미로 안겨왔다. 그것은 마치도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뭇별들처럼 여겨졌다. 이 땅을 아름답게 비쳐주려 서로 다투어 반짝이는 큰 별, 작은 별, 은별, 금별들… 리진의 마음속에서도 밝은 별이 돋는듯 심신이 상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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