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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적대회합 4월남북련석회의

 

1948년에 들어서면서 우리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통일적인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의 앞길에는 새로운 위험이 조성되고있었다. 조선문제를 유엔에 끌고간 미제는 저들의 거수기를 발동하여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을 내오고 그 감시하에 남조선에서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단독정부를 수립할데 대한 결정을 강압적으로 통과시킨데 이어 조선인민의 강력한 규탄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을 남조선에 끌어들이기까지 하였던것이다. 이것은 선거를 통하여 남조선에서 괴뢰단독정부의 조작을 합법화하고 조선에 대한 저들의 식민지예속화정책을 정당화하려는데 그 목적을 둔것이였다.

조선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예속화책동이 본격적으로 감행되고 국토량단과 민족분렬의 위기가 더욱 격화되고있는 엄혹한 현실은 결정적인 대책을 강구할것을 요구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부닥친 난국을 타개하는 길은 오직 민족자체의 힘으로 미제의 《단선단정》음모를 저지파탄시키고 통일적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하는 길이라고 보시였다.

이미 1947년 10월에 진행된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회의에서 북과 남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의 련석회의를 소집할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신 수령님께서는 1948년 1월 9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회의에서 조성된 현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당면한 대책으로서 남조선의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과 개별적인사들에게 북남협상을 조속히 실현할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낼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리고 3월 9일 북조선민전중앙위원회 제25차회의를 소집하시고 남조선에서 단독선거를 실시하고 우리 나라를 영원히 분렬시키려는 미제의 속심을 낱낱이 발가놓으신 후 북과 남의 모든 애국적민주력량이 들고일어나 미제와 그 주구들의 교활한 음모를 저지파탄시킬데 대하여 호소하시였다. 그러신 후 련이어 남조선의 여러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에게 4월에 북과 남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를 소집할데 대한 서한을 전달하도록 하는 주동적인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온 남녘땅은 4월남북련석회의소집제안을 열렬히 지지하고 환영하는 분위기에 휩싸이였다.

민족단합의 열기가 고조되는 속에 주체37(1948)년 4월초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조선에서 찾아온 김구, 김규식선생의 비서들인 안경근, 권태양 두 련락원을 몸소 만나주시였다.

그이께서는 그들과의 담화과정에 과거지사를 우려하는 김구, 김규식선생들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시여 우리는 지난 기간 나라와 민족앞에 어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뉘우치고 새 출발을 하려는 사람들의 과거를 묻지 않았다고, 이것은 우리가 일본놈들을 반대하여 산에서 싸울 때나 오늘에나 변함이 없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지금 국토량단과 민족분렬의 엄중한 위기를 타개하자는 이 마당에서 구태여 과거를 론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과거를 가지고 시야비야 시비를 가르는것은 큰일을 그르치게 하는 옹졸한 태도이다, 과거불문의 원칙에서 지난날의 일을 다 백지화한다고 말씀하시였다.

두 련락원을 통하여 수령님의 높으신 뜻을 전달받은 김구, 김규식선생을 비롯한 민족주의인사들은 북행결심을 굳히였다.

마침내 4월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한 대표단을 태운 승용차, 자동차행렬이 꼬리를 물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림정계민족주의자들이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할 결심을 내렸을 때 서울시가지를 비롯한 남조선 방방곡곡은 회오리바람이라도 만난듯 큰 충격이 일어났다.

민중들속에서는 박수갈채가 터져나왔고 력사의 반동들속에서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럴수밖에 달리될수 없었던것은 민중은 통일을 바라는 편이였고 력사의 반동들은 분렬을 바라는 편이였기때문이였다.

력사의 반동들은 진정한 민족주의자들의 북행길을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날뛰였다. 리승만자신이 직접 수차에 걸쳐 김구의 거처지이며 림정계민족주의자들의 본부이기도 한 경교장을 찾아 설복반, 협박반의 말투로 김구에게 평양에 가지 말라고 만류해나섰는가 하면 남조선강점 미군사령관 하지는 김규식에게 직접 협박전화를 걸어 차단봉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에서는 박헌영계의 《좌익》도 마찬가지였다. 박헌영일당은 《반공민족주의자들 평양에 가면 공산주의자들이 죄과를 따질것》이라는 류언비어를 돌렸는가 하면 각방으로 좌, 우익사이에 쐐기를 박는 모략극을 꾸며 북으로 향한 민심에 찬물을 끼얹고 련석회의에 출석하려던 각당, 각파사이에 불신을 조성하기에 급급하였다.

그러나 력사의 반동들은 결코 목적을 달성할수 없었다. 발악할수록 그것은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의 북행 결심만 한층 굳건케 만들어주었을뿐이였다.

김구는 반동들의 책동이 우심해지는 속에서 《조국이 없고 민족이 망하면 사상이요, 주의주장이요 하는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뵙고 민족통일에 이바지할수 있다면 38 선에서 쓰러져도 좋다.》는 요지부동의 결심을 표명하고 련석회의에 갈 한국독립당 대표와 당소속 사회단체 대표 및 수원 30여명을 선정발표하였다. 그리고 경교장을 철야포위하고있는 반동파무리들을 향해 《한번 한다고 내가 결심한것은 누가 말려도 쓸데없어. 백마리 황소로 끌어도 김구의 마음은 꼼짝하지 않아.》라고 호령을 치고는 4월 19일 승용차에 몸을 싣고 결연히 평양을 향한 북행길에 올랐던것이다.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민족자주련맹 주석 김규식도 《절세의 애국자로 명망높으신 김일성장군께서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숭고한 일념에서 친히 우리와 같은 사람들도 불러주셨는데 진심으로 이를 감사한 마음으로 접수하고 호응해나서는것이 지당한 일인줄로 안다.》는 말을 하지의 협박전화에 대한 답변으로 남겨놓고 평양을 향하여 서울을 떠났다. 이것은 정녕 력사의 소명에 따른 림정계민족주의자들의 정의로운 행동이였다.

한국독립당 위원장 김구와 민족자주련맹 주석 김규식과 같은 오랜 우익계인사들이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할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특별초청장을 받아안을수 있었던것은 그들이 비록 지난 기간 나라와 민족앞에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나라의 분렬을 가슴아파하고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는 애국의 마음을 지니고있었기때문이다.

그이의 존함과 인장이 찍혀져있는 특별초청장을 받아안았을 때 민족의 태양을 향하여 이미 달리고있던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림정계민족주의자들의 가슴가슴은 한껏 부풀어올랐다.

어찌 그렇지 않을수 있었겠는가.

일찌기 1937년에 보천보의 총성에 접했을 때 일어났던 림정계인사들의 반향과 일제패망이 림박한 시기인 1944년에 림정이 김일성장군님께 올리기 위하여 작성한 편지내용만 보아도 그들의 마음이 어찌해서 그토록 부풀어오르게 되였고 그들이 김일성장군님께로 달리고있었던 마음과 마음들에 어찌하여 그토록 채찍을 가하게 되였는가를 능히 알수 있을것이다.

림정이 존재한 전기간 거기에 몸담고있으면서 비서장, 외무부장 등의 요직에 있었던 조소앙선생이 전한 말에 의하면 보천보의 총성에 접했을 때 김구선생은 몹시 격동되면서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한다.

《조국땅 보천보에서 항일유격대가 왜놈들에게 된벼락을 안겼다는 소식을 듣고 대승을 이룩하신 김일성장군님이시야말로 항간에서 전해지는 소문그대로 전설적영웅이고 탁월한 군사령장이라고 경탄해마지 않았소. 나는 보천보전투승리의 격동적인 소식에 접하여 며칠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을 반성했소.

… 보천보전투소식에 접하고나서 김일성장군의 자주적인 공산주의에 대한 립장을 바로가져야겠다고 결심했소. 앞으로 언젠가 김일성장군을 만나뵙고 결심하겠지만 김일성장군의 공산주의만은 언제 어디서나 반대하지 않을 립장에서 반일민족통일전선로선을 전폭 지지하고 따라배우는 태도를 취하기로 결심했소.》

조소앙선생의 말에 의하면 림정에서 참모총장도 한바 있는 류동열도 《김일성장군께서 단행하신 보천보전투승리소식에 접하여 각별히 큰 심적충격을 받았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기의 심중을 토로하였다 한다.

《상해림시정부라는것이 망명정부로서 군무부요, 총참모부요 하는 군사직제는 있었지만 군복을 입고 총창을 멘 똑바른 군대 한명도 없는 사실상 무졸정권이였던게 사실이 아니요.

그런데 김일성청년용장이 나타나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독립군부대들과의 제휴, 일제침략군의 소멸을 위하여 만주광야를 종횡무진하면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있으니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이이상 다행스런 일은 없고 민족주의독립운동자들에게 있어서 이이상 면구스러운 일은 없을줄 아오.

보천보전투소식에 접하여 우리가 크게 각성하고 우선 림정계 인사들로부터 화해단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바이요.》

하기에 1944년 12월 중경에 있던 림정은 김일성장군님께 삼가 올리기 위하여 작성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일제의 패망이 완연해지며 조국광복의 최후결전이 림박해 오는 이 시각에 3. 1운동이래 20여성상 망명정부의 형태를 띠고 상해와 항주, 중경에 전전하며 반일독립을 기원해온 우리 림시정부는 비상국민회의 결의로서 조종의 산 백두산에 사령부를 두고계시는 김일성장군께 삼가 이 편지를 올립니다.

우리는 김일성장군께서 조선인민혁명군을 거느리시고 만주광야와 백두산일대 북부조선의 넓은 지역에서 100만 관동군과 일만군경을 상대로 혈투를 벌리시며 올린 그 혁혁한 전과에 고무되여 조국광복의 희망을 잃지 않고 림시정부법통을 고수해왔습니다.

헌데 겨우 몇십명밖에 안되는 망명집단으로서의 우리 중경림시정부는 조국광복의 최후결전에 림할 힘도 위신도 없다는것을 자인하고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김일성장군의 조국광복운동대렬에 합류해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였습니다.

단 우리는 종전과 같이 앞으로 민족도 모르고 조국도 부인하며 민족주의자들을 덮어놓고 배척하는 종파군들의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반공의 립장을 견지하겠다는것을 부언하는 바입니다.

우리의 련공합작을 위한 밀사로서 리충모를 보내오니 김일성장군께서 접견하시고 우리 중경림시정부에 대한 련계와 합작의 방도를 명시한 회신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의 반향과 편지내용은 김일성장군의 혁명근거지인 조종의 산 백두산에로 향한 림정계민족주의자들의 심정을 그대로 반영하고있었으며 한편 그들의 심중이 안고있는 번민도 반영하고있었다. 사실 그들의 번민이 커갈수록 백두산방향으로 향한 그들의 경모심도 그만큼 더 커가고있었던것이다.

그러면 림정계민족주의자들이 안고있었던 번민은 과연 무엇이였는가?

워낙 림정이란 범선은 잘못 건조되고 첫 출항도 잘못한 범선이였다.

잘못되였다는 점을 헤아려보면 그것을 크게 두가지로 갈라서 분석할수 있다고 본다.

첫째로, 관점상에서부터 잘못되였다는것이다.

대한민국림시정부가 민족주의자들에 의하여 중국의 상해에 자기의 첫 간판을 내건것은 1919년 4월 13일이였다.

당시 우리 나라의 국내정세로 보면 3. 1인민봉기가 계속되고있던 시기이며 《한일합병》을 전후한 시기에 다시 일어난 반일의병투쟁이 한단계 높은 독립운동으로 승화되고있던 시기였다. 그런것만큼 망명정부를 세우려면 어디까지나 자기 인민의 힘에 의거하는 망명정부를 세우는데로 나갔어야 할것이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나선 민족주의자들은 그렇게 하는것이 아니라 외세의존을 목적으로 하는 망명정부설립에로 나갔다.

빠리강화회의나 국제련맹설립회의와 같은 국제무대에서의 독립청원운동은 개별적독립운동단체의 명의로가 아니라 망명정부의 명의로 벌려야 적법성도 있고 효과도 크리라는데로 의견을 합치시키고 민족주의자들이 내왔던것이 바로 그 상해림정이였다.

물론 리승만 같은 몇명을 제외하고 망명정부설립에 참가한 다수의 민족주의자들이 나라를 찾자는 애국자들이였고 가슴들에 정의감도 넘쳐난 사람들이였다는것을 부인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이 먼 과거도 아닌 1907년에 있은 헤그밀사사건으로 일컫는 독립청원외교의 비화를 잊고 렬강들에게 빌붙는 독립청원외교에 매달렸다는것은 만회할수 없는 엄중착오였던것이다.

둘째로, 민족주의자들이 망명정부의 본거지를 하필이면 상해바닥가운데서도 프랑스조계지에 두었다는것도 창피스러운 일이였다고 볼수밖에 없다.

프랑스조계지라면 프랑스국가의 주권이 행사되는곳으로서 국제법상 중화민국주권이 미치지 못할뿐아니라 일제의 주권도 미칠수 없는 지역이였다. 민족주의자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창피도 모르고 시작부터 피난처를 찾아 거기에다 자기의 본거지를 정했던것이다.

민족주의자들의 정신상태가 정상이였다면 이런 곳이 아니라 당시 독립군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있던 두만강, 압록강연안에로 본거지의 위치를 접근시켰을것이라는것은 두말할것 없다. 그러나 자기 인민의 힘을 믿지 않고 외세의존으로 나가면서 피난처생활을 한데 민족주의자들의 다른 큰 엄중착오가 있었던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림시정부는 건조도 잘못되고 출항도 잘못한 범선으로 되였던것이다. 라침판도 없고 키도 없는 그 범선에 탑승한 선원들은 결국 특별히 하는 일이 없이 리합집산의 당파싸움과 일제에게 쫓기운 련속되는 피난행각속에서 세월을 보내고말았던것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림정에 남아있던 인사들은 림정의 존속기간을 해수로 쳐서 27년간(1919년-1945년)으로 정하였다.

림정이 첫 간판을 내걸었을 때 총리로 지명받았다가 그 매국배족성이 드러난 리승만이 조선에 있던 본처마저 차던져버리고 자기 나이의 절반밖에 안되는 유럽계의 젊은 녀인을 애첩으로 삼아 미국땅에서 8. 15가 도래할 때까지 내내 호의호식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다면 그 반대로 김구 같은 사람은 중국땅에서 처와 자식들까지 앓아죽게 하고 굶어죽게까지 하면서 림정을 고수하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림정에서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주석직을 력임했던 김구가 그랬으니 림정에 있었던 민족주의자들의 처지가 오죽했겠는가.

그속에서도 그들을 가장 괴롭힌 모멸감은 정치고아, 국제고아와 같은 림정의 가련한 신세였다.

문자그대로 림정은 자기가 존속한 전기간 지구상의 어느 한 나라로부터도 외교상의 공식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자기가 발을 붙이고있는 중국의 국민당정부로부터도, 로농국가라고 하는 로씨야로부터도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림정은 일제의 패망이 목전현실로 박두해오고있을 때 국제사회로부터 공식승인을 받기 위한 활약으로 낮에 밤을 이어갔다. 그런 외교적승인을 받아야 환국시 근 27년의 력사를 가진 림정의 체면을 세울수 있고 조국해방후 나라안에서 자기의 정치적지위를 확보할수 있다는 타산에서였다. 그런데 그런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중국의 장개석정부는 미국, 영국 등이 림시정부에 대하여 공식승인하는 경우에 한해서 중국도 승인하는데로 나올것이라는 립장을 취하였고 미국은 1945년 6월 림시정부는 조선반도의 어느 한 지역에서도 행정적인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하고있으며 현실적으로 림시정부는 조선인들의 실질적이고도 대표적인 성격을 가지고있지 못하고있다는 립장표명으로 림정에 대한 승인을 정식거부하였다.

그뿐이 아니였다. 장개석정부는 림정의 국기게양까지 불허하였다. 중국에 주재하고있던 많은 나라 대사관들이 저저마다 자기 청사에다 국기를 게양하고있었는데 이른바 대한민국림시정부만은 자기의 국기도 게양할수 없었으니 그것은 그가 중화민국정부로부터 보장받은 지위란 외국대사관만 한 지위에도 닿지 못하고있었다는것을 말해준것으로 된다.

국기게양말이 나온김에 이런 일화를 언급하고 넘어가는것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1959년 가을 오스트리아의 수도 윈에서 제7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벌어지고있었던 때의 일이였다. 축전개막행진이 막 시작되려 할 때였다. 그때 윈경찰당국은 돌연히 까히라에 있는 알제리망명정부는 오스트리아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으니 알제리청년학생대표단은 알제리기발을 들고 입장할수 없다고 하면서 그것을 내리우라고 강박하였다. 윈경찰당국의 이런 횡포가 자기 나라 영구중립표방에 대한 위반으로 되였다는것은 두말할것 없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자 축전에 참가한 112개 나라의 청년학생대표단이 윈경찰당국의 처사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프랑스식민주의자들을 반대하는 알제리인민들의 독립투쟁에 대한 련대성의 표시로 일제히 자기 나라 국기들을 내리우고 입장행진하였다. 그리하여 제7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청년학생대표단들이 국기들을 추켜들지 않고 개막행진을 한 류례없는 축전으로 되였다. 이런 련대성의 표시는 반프랑스항쟁을 벌리고있던 알제리인민들을 크게 고무하였다.

하지만 상해림정은 자기의 존속기간 이런 련대도 받지 못하였다.

결국 림정은 정치고아의 신세를 면치 못한채 환국도 개인자격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미국사람들이 태평양 건너 훨씬 먼곳에 있던 리승만을 한달 앞서 자기네 수송기에 실어온 반면에 조선에서 지척이라고 할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는 림정인사들을 같은 자기네 수송기에 실어 한달 늦게 서울로 오게 한것도 다 리유가 있는것이였다. 그것은 저들이 키운 번견이 먼저 와서 반역의 깃을 펴게 하기 위해서였다.

정작 서울에 당도하고보니 나라는 이미 미제에 의해 분렬된 상태에 있었고 서울은 문자그대로 복마전으로 되고있었다. 우익과 좌익사이, 우익과 우익사이, 좌익과 좌익사이의 끊임없는 란투속에서 해가 뜨고 해가 지는것이 현실로 되고있었다.

그런데 절로 그 싸움판에 말려들고있는 속에서도 림정계민족주의자들의 마음을 끌고있는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명망높은 인사들이 전개하고있던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 결성사업이였다.

그러던 참에 1945년 12월 초순 어느날에 있은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 결성발기위원회 대표 홍명희와 최일천의 경교장방문은 림정계민족주의자들을 크게 고무하는 사변으로 되였다.

홍명희, 최일천과의 담화석상에서 림정주석 김구는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를 뭇기 위한 각계 인사들의 장거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것이 바로 나의 심정이자 림정요인들의 한결같은 심정 그대로이다.》라고 격조높이 말하였다. 석상에 함께 있었던 림정부주석 김규식, 법무부장 최동오, 선전부장 엄항섭 등도 김구의 말에 전적인 동감을 표시하였다.

석상에서 김구는 또한 일찌기 보천보의 총성에 접했던 자신의 감격에 대해서도 말하면서 만약 서울에서 김일성장군을 영접하지 못한다면 평양에 찾아가서라도 경모하여마지 않는 그이를 기어이 만나뵙고야말 자신의 결심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김구와 림정계민족주의자들은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것을 력사의 소명에 따르는 자기들의 필생의 의무로 자각하고있었다. 오유와 실패와 우여곡절로 점철된 27년간의 림정생활이 그들로 하여금 마침내 이런 자각에 도달케 하였던것이다. 이런 그들이였으니 막상 그이의 존함이 모셔진 특별초청장을 받아안았을 때 그들의 마음이 한껏 부풀어오르게 되였던것이고 오랜 세월을 두고 김일성장군님께로 달리고있었던 마음들에 채찍을 가하게 되였던것이다.

그것은 통일적자주독립국가를 지향하여 도도히 굽이쳐가는 민족대단합의 거세찬 흐름이였다.

1948년 4월 19일 드디여 온 민족의 커다란 관심속에 력사적인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가 경치아름다운 평양의 모란봉극장에서 성대히 열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취하신 적극적인 조치에 따라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온갖 탄압과 방해책동을 물리치며 평양에 온 남조선의 좌, 우, 중간을 포괄하는 거의 모든 애국적인 정당, 사회단체대표들이 회의장으로 모여들었다.

련석회의에는 모두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석하였다.

해방후 처음으로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뛰여넘어 망국적인 남조선단독선거를 반대하고 나라의 통일독립을 이룩할데 대한 하나의 목표밑에 거족적인 통일대책을 토의하게 될 회의장은 숭엄한 분위기속에 휩싸였다.

오후 정각 6시,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속에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영웅이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만면에 환한 웃음을 담으시고 회의장에 나오시였다.

전체 회의참가자들은 오매에도 그리며 흠모하여마지 않던 우리 민족의 영명한 령도자 김일성장군님을 몸가까이 우러러뵙는 끝없는 영광과 감격으로 하여 눈굽을 적시며 우렁찬 박수를 터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첫날 회의를 사회하시면서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의 안건을 다음과 같이 제기하시였다.

첫째, 조선정치정세

둘째, 남조선단독선거와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할데 대한 투쟁대책

회의안건은 만장일치로 가결되였다.

회의에서는 북조선로동당대표, 남조선로동당대표, 북조선민주당대표, 근로인민당대표, 북조선천도교청우당대표, 인민공화당대표, 남조선민주녀성동맹대표들이 축하연설을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김구일행이 평양에 하루 늦어 도착하게 되는것과 관련하여 하루 휴회하도록 하시여 제2일회의는 4월 21일에 진행되였다.

회의는 첫째 의정 조선정치정세에 대한 토의에 들어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시며 연단에 나오시여 《북조선정치정세》라는 제목으로 력사적인 보고를 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보고에서 련석회의가 가지는 정치적의의에 대하여 언급하신 다음 이 력사적인 회의에서 북남정치정세를 기탄없이 토의하고 민족분렬의 위기를 타개할 근본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하시였다.

계속하여 우리 나라가 분렬되게 된 경위를 밝히고 북남조선의 판이한 현실에 대하여 언급하신 다음 그이께서는 보고의 첫째 부분에서 북조선정치정세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분석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북조선에서 인민정권이 수립되고 그것이 끊임없이 강화발전하고있는데 대하여, 인민정권에 의한 제반 민주개혁의 실시와 그 거대한 생활력에 대하여 그리고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고 거기에 모든 정당, 사회단체들이 망라된데 대하여 언급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보고의 둘째 부분에서 조선의 분렬을 꾀하는 미제국주의자들과의 투쟁정형과 보고의 셋째 부분에서 통일적민주주의정부를 세우기 위한 조선인민의 투쟁에 대하여 개괄하시고 구국투쟁방침을 제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조선단독선거를 저지파탄시키고 민주주의적원칙에서 통일적중앙정부를 세워 조국통일을 실현하는것이 당면한 최대의 과업이라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시였다.

《우리는 남북조선의 모든 애국적력량을 단합하여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기도를 반드시 파탄시켜야 하겠습니다.

지금 조국분렬의 위기에 처한 이 엄중한 때에 우리가 단결하여 투쟁하지 않으며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물리칠 일대 구국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민족과 후손들에게 천추에 씻을수 없는 죄를 짓는다는것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하여 통일적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며 민주주의적원칙에서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거족적투쟁을 벌려야 하겠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하신 력사적인 보고는 조선의 정치정세를 명철하게 분석하고 나라와 민족에게 닥쳐온 영구분렬의 위기를 막고 조국을 자주적으로 통일할수 있는 길을 밝힌 강령적문헌으로서 전체 회의참가자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찬동을 받았다.

4월 22일(제3일) 오전회의에서는 북조선청년축하단의 축하연설이 있은 다음 토론이 계속되였다.

토론자들은 전체 조선인민이 우리 민족의 영명한 령도자 김일성장군님의 두리에 튼튼히 뭉쳐 자기의 힘을 믿고 승리에 대한 신심을 굳게 한다면 어떠한 강적도 물리칠수 있으며 조성된 민족분렬위기를 타개하고 통일적자주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거족적투쟁에서 반드시 승리할것이라고 확신에 넘쳐 강조하였다.

이윽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미제국주의자들과 남조선반동들의 방해책동으로 말미암아 회의에 늦게 참가하게 된 한국독립당 위원장 김구, 부위원장 조소앙, 상무위원 조완구, 민주독립당 위원장 홍명희선생들을 소개하시고 그들을 주석단성원으로 보선할것을 제의하시였다.

전체 회의참가자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제의를 열광적인 박수로 지지찬동하였다. 일제의 식민지학정하에서나 미제강점하의 남조선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회의광경이였다.

우렁찬 박수환호를 받으며 김구, 홍명희, 조소앙, 조완구선생 등이 주석단에 올랐다.

만면에 환한 미소를 담으시고 북남조선의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의 대회합을 능숙하게 지도하고계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뵈옵는 남조선의 정당, 단체대표들은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심으로 하여 통일정부수립의 날이 멀지 않았다는 확신과 조선의 밝은 앞날에 대한 기대로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였다.

회의장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우러러받드는데는 결코 좌익이나 우익, 중간파가 따로 있을수 없다는 공통된 심정으로 충만되여있었다.

열렬한 박수속에 한국독립당 위원장 김구가 축사를 하였다.

축사에서 그는 조국분렬의 위기를 수습하기 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주, 민주의 통일독립을 전취할 대계를 상론하게 된것은 실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위대한 발전이라고 전제하고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가 존재할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현 단계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공동의 투쟁목표는 우리 조국을 분렬하고 민족을 멸망하게 하는 남조선 《단선단정》을 분쇄하는것이라고 하였다.

민주독립당 위원장 홍명희선생은 축사에서 남조선에서는 우리 민족과 강토를 분렬시키며 동족싸움의 불행을 야기할 《단선단정》음모가 꾸며지고있다고 하면서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우리가 나아갈 길은 민족자결의 길밖에 없으며 민족자결을 주장하고 요구하는것은 사상, 주의여하를 불문하고 우리 민족을 하나로 단결할수 있게 하는것이므로 여기에 이번 련석회의의 력사적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조소앙선생은 축사에서 새 사회와 새 나라를 위하여 남북의 애국동포들이 한마음한뜻으로 굳게 뭉쳐 우리 조국의 통일독립을 방해하는 외세와 남조선반동파들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워나가자고 강조하였다.

4월 23일(제4일) 회의에서는 홍명희 민주독립당 위원장이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를 읽었다.

결정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을 맺었다.

《우리 조국을 분할하여 남조선인민들을 미제국주의자들에게 예속시키는것을 허용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들은 자기의 전 력량을 총집결하여 단독선거배격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함으로써 남조선단독선거를 파탄시켜야 할것이며 조선에서 외국군대를 즉시 철거하게 하고 조선인민자신의 손으로 통일적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강력히 투쟁하여야 할것이라고 인정한다.》

결정서는 전체 대표자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전원찬성으로 채택되였다.

회의에서는 이어 의정 둘째 문제를 토의하였다.

허헌 남조선로동당대표가 남조선단독선거와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할데 대한 투쟁대책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허헌은 보고에서 남북련석회의의 최대의 임무는 조선의 정치정세를 검토하고 남조선《단선단정》을 파탄시키는데 있다고 하면서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모든 정당, 사회단체들은 강유력한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공동행동을 취하고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투쟁에 모든 력량을 조직동원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회의에서는 보고를 신중히 심의하고 회의에 참가한 북과 남의 정당, 사회단체대표들로 남조선단독선거반대투쟁 전국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회의에서는 리극로 조선건민회 위원장이 《전 조선동포에게 격함》이라는 격문을 랑독하였다.

격문은 우리 조국의 유서깊은 평양에서 남북련석회의를 열고있다고 한 다음 북과 남의 상반되는 정치정세를 개괄하면서 민족적량심이 있는 조선사람은 누구도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단독선거에 참가하지 않을것이며 단독정부를 인정하지 않을것이라고 강조하고 전민족이 단결하여 일치한 행동으로 미제국주의자들의 음흉간악한 기도를 반대하여 조직적으로 투쟁하고 결사적으로 항거하여 남조선단독정부선거를 단호히 배격할것을 호소하였다.

격문은 전체 회의참가자들의 열광적인 지지속에 만장일치로 채택되였으며 회의에 참석한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의 련명으로 발표되였다.

회의에서는 다음으로 쏘련정부와 미국정부에 보내는 쏘미 량군의 즉시철거를 요구한 남북련석회의 요청서가 채택되였다.

4일간에 걸쳐 진행된 남북련석회의는 참가자들의 구성이 매우 복잡하고 정견과 신앙이 서로 달랐으나 위대한 수령님의 공명정대한 조국통일방침과 민족대단결로선, 그이의 정력적이고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커다란 성과를 거두고 결속되였다.

이렇듯 해방후의 복잡다단한 정치정세속에서 극소수 민족반역자들을 내놓고는 남조선의 거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대표들과 완고한 반공민족주의자들까지 참가한 폭넓은 민족적대회합이 마련되고 이 회합에서 일치한 합의를 이룩하여 거족적인 애국투쟁을 벌리게 된것은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자주적인 조국통일로선과 민족대단결사상의 빛나는 결실이였으며 통일애국력량이 이룩한 력사적인 첫 승리였다.

4월남북련석회의는 비록 사상과 리념이 다르고 정견과 신앙에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각계각층이 민족공동의 위업을 위한 투쟁에서 얼마든지 단결할수 있으며 북과 남이 화합하고 온 민족이 단결하면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실현할수 있다는것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였던 남조선의 애국인사들이 그후 위대한 수령님의 품을 찾아 북에 들어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결성에서 주도적역할을 한 사실은 이를 뚜렷이 실증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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