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에 들어서면서 우리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통일적인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의 앞길에는 새로운 위험이 조성되고있었다. 조선문제를 유엔에 끌고간 미제는 저들의 거수기를 발동하여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을 내오고 그 감시하에 남조선에서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단독정부를 수립할데 대한 결정을 강압적으로 통과시킨데 이어 조선인민의 강력한 규탄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을 남조선에 끌어들이기까지 하였던것이다. 이것은 선거를 통하여 남조선에서 괴뢰단독정부의 조작을 합법화하고 조선에 대한 저들의 식민지예속화정책을 정당화하려는데 그 목적을 둔것이였다.
조선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예속화책동이 본격적으로 감행되고 국토량단과 민족분렬의 위기가 더욱 격화되고있는 엄혹한 현실은 결정적인 대책을 강구할것을 요구하고있었다.
이미 1947년 10월에 진행된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회의에서 북과 남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의 련석회의를 소집할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신
온 남녘땅은 4월남북련석회의소집제안을 열렬히 지지하고 환영하는 분위기에 휩싸이였다.
민족단합의 열기가 고조되는 속에 주체37(1948)년 4월초 어느날
두 련락원을 통하여
마침내 4월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한 대표단을 태운 승용차, 자동차행렬이 꼬리를 물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림정계민족주의자들이
민중들속에서는 박수갈채가 터져나왔고 력사의 반동들속에서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럴수밖에 달리될수 없었던것은 민중은 통일을 바라는 편이였고 력사의 반동들은 분렬을 바라는 편이였기때문이였다.
력사의 반동들은 진정한 민족주의자들의 북행길을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날뛰였다. 리승만자신이 직접 수차에 걸쳐 김구의 거처지이며 림정계민족주의자들의 본부이기도 한 경교장을 찾아 설복반, 협박반의 말투로 김구에게 평양에 가지 말라고 만류해나섰는가 하면 남조선강점 미군사령관 하지는 김규식에게 직접 협박전화를 걸어 차단봉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에서는 박헌영계의 《좌익》도 마찬가지였다. 박헌영일당은 《반공민족주의자들 평양에 가면 공산주의자들이 죄과를 따질것》이라는 류언비어를 돌렸는가 하면 각방으로 좌, 우익사이에 쐐기를 박는 모략극을 꾸며 북으로 향한 민심에 찬물을 끼얹고 련석회의에 출석하려던 각당, 각파사이에 불신을 조성하기에 급급하였다.
그러나 력사의 반동들은 결코 목적을 달성할수 없었다. 발악할수록 그것은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의 북행 결심만 한층 굳건케 만들어주었을뿐이였다.
김구는 반동들의 책동이 우심해지는 속에서 《조국이 없고 민족이 망하면 사상이요, 주의주장이요 하는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민족자주련맹
한국독립당
어찌 그렇지 않을수 있었겠는가.
일찌기 1937년에 보천보의 총성에 접했을 때 일어났던 림정계인사들의 반향과 일제패망이 림박한 시기인 1944년에 림정이
림정이 존재한 전기간 거기에 몸담고있으면서
《조국땅 보천보에서
… 보천보전투소식에 접하고나서
조소앙선생의 말에 의하면 림정에서 참모총장도 한바 있는
류동열도 《
《상해림시정부라는것이 망명정부로서 군무부요, 총참모부요 하는 군사직제는 있었지만 군복을 입고 총창을 멘 똑바른 군대 한명도 없는 사실상 무졸정권이였던게 사실이 아니요.
그런데
보천보전투소식에 접하여 우리가 크게 각성하고 우선 림정계 인사들로부터 화해단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바이요.》
하기에 1944년 12월 중경에 있던 림정은
《일제의 패망이 완연해지며 조국광복의 최후결전이 림박해
오는 이 시각에 3. 1운동이래 20여성상 망명정부의 형태를 띠고
상해와 항주, 중경에 전전하며 반일독립을 기원해온 우리 림시정부는 비상국민회의 결의로서 조종의 산
우리는
헌데 겨우 몇십명밖에 안되는 망명집단으로서의 우리 중경림시정부는 조국광복의 최후결전에 림할 힘도 위신도 없다는것을 자인하고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단 우리는 종전과 같이 앞으로 민족도 모르고 조국도 부인하며 민족주의자들을 덮어놓고 배척하는 종파군들의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반공의 립장을 견지하겠다는것을 부언하는 바입니다.
우리의 련공합작을 위한 밀사로서 리충모를 보내오니
이상의 반향과 편지내용은
그러면 림정계민족주의자들이 안고있었던 번민은 과연 무엇이였는가?
워낙 림정이란 범선은 잘못 건조되고 첫 출항도 잘못한 범선이였다.
잘못되였다는 점을 헤아려보면 그것을 크게 두가지로 갈라서 분석할수 있다고 본다.
첫째로, 관점상에서부터 잘못되였다는것이다.
대한민국림시정부가 민족주의자들에 의하여 중국의 상해에 자기의 첫 간판을 내건것은 1919년 4월 13일이였다.
당시 우리 나라의 국내정세로 보면 3. 1인민봉기가 계속되고있던 시기이며 《한일합병》을 전후한 시기에 다시 일어난 반일의병투쟁이 한단계 높은 독립운동으로 승화되고있던 시기였다. 그런것만큼 망명정부를 세우려면 어디까지나 자기 인민의 힘에 의거하는 망명정부를 세우는데로 나갔어야 할것이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나선 민족주의자들은 그렇게 하는것이 아니라 외세의존을 목적으로 하는 망명정부설립에로 나갔다.
빠리강화회의나 국제련맹설립회의와 같은 국제무대에서의 독립청원운동은 개별적독립운동단체의 명의로가 아니라 망명정부의 명의로 벌려야 적법성도 있고 효과도 크리라는데로 의견을 합치시키고 민족주의자들이 내왔던것이 바로 그 상해림정이였다.
물론 리승만 같은 몇명을 제외하고 망명정부설립에 참가한 다수의 민족주의자들이 나라를 찾자는 애국자들이였고 가슴들에 정의감도 넘쳐난 사람들이였다는것을 부인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이 먼 과거도 아닌 1907년에 있은 헤그밀사사건으로 일컫는 독립청원외교의 비화를 잊고 렬강들에게 빌붙는 독립청원외교에 매달렸다는것은 만회할수 없는 엄중착오였던것이다.
둘째로, 민족주의자들이 망명정부의 본거지를 하필이면 상해바닥가운데서도 프랑스조계지에 두었다는것도 창피스러운 일이였다고 볼수밖에 없다.
프랑스조계지라면 프랑스국가의 주권이 행사되는곳으로서
국제법상 중화민국주권이 미치지 못할뿐아니라 일제의 주권도
미칠수 없는 지역이였다.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의 정신상태가 정상이였다면 이런 곳이 아니라 당시 독립군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있던 두만강, 압록강연안에로 본거지의 위치를 접근시켰을것이라는것은 두말할것 없다. 그러나 자기 인민의 힘을 믿지 않고 외세의존으로 나가면서 피난처생활을 한데 민족주의자들의 다른 큰 엄중착오가 있었던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림시정부는 건조도 잘못되고 출항도 잘못한 범선으로 되였던것이다. 라침판도 없고 키도 없는 그 범선에 탑승한 선원들은 결국 특별히 하는 일이 없이 리합집산의 당파싸움과 일제에게 쫓기운 련속되는 피난행각속에서 세월을 보내고말았던것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림정에 남아있던 인사들은 림정의 존속기간을 해수로 쳐서 27년간(1919년-1945년)으로 정하였다.
림정이 첫 간판을 내걸었을 때 총리로 지명받았다가 그 매국배족성이 드러난 리승만이 조선에 있던 본처마저 차던져버리고 자기 나이의 절반밖에 안되는 유럽계의 젊은 녀인을 애첩으로 삼아 미국땅에서 8. 15가 도래할 때까지 내내 호의호식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다면 그 반대로 김구 같은 사람은 중국땅에서 처와 자식들까지 앓아죽게 하고 굶어죽게까지 하면서 림정을 고수하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림정에서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그속에서도 그들을 가장 괴롭힌 모멸감은 정치고아, 국제고아와 같은 림정의 가련한 신세였다.
문자그대로 림정은 자기가 존속한 전기간 지구상의 어느 한 나라로부터도 외교상의 공식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자기가 발을 붙이고있는 중국의 국민당정부로부터도, 로농국가라고 하는 로씨야로부터도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림정은 일제의 패망이 목전현실로 박두해오고있을 때 국제사회로부터 공식승인을 받기 위한 활약으로 낮에 밤을 이어갔다. 그런 외교적승인을 받아야 환국시 근 27년의 력사를 가진 림정의 체면을 세울수 있고 조국해방후 나라안에서 자기의 정치적지위를 확보할수 있다는 타산에서였다. 그런데 그런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중국의 장개석정부는 미국, 영국 등이 림시정부에 대하여 공식승인하는 경우에 한해서 중국도 승인하는데로 나올것이라는 립장을 취하였고 미국은 1945년 6월 림시정부는 조선반도의 어느 한 지역에서도 행정적인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하고있으며 현실적으로 림시정부는 조선인들의 실질적이고도 대표적인 성격을 가지고있지 못하고있다는 립장표명으로 림정에 대한 승인을 정식거부하였다.
그뿐이 아니였다. 장개석정부는 림정의 국기게양까지 불허하였다. 중국에 주재하고있던 많은 나라 대사관들이 저저마다 자기 청사에다 국기를 게양하고있었는데 이른바 대한민국림시정부만은 자기의 국기도 게양할수 없었으니 그것은 그가 중화민국정부로부터 보장받은 지위란 외국대사관만 한 지위에도 닿지 못하고있었다는것을 말해준것으로 된다.
국기게양말이 나온김에 이런 일화를 언급하고 넘어가는것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1959년 가을 오스트리아의 수도 윈에서 제7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벌어지고있었던 때의 일이였다. 축전개막행진이 막 시작되려 할 때였다. 그때 윈경찰당국은 돌연히 까히라에 있는 알제리망명정부는 오스트리아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으니 알제리청년학생대표단은 알제리기발을 들고 입장할수 없다고 하면서 그것을 내리우라고 강박하였다. 윈경찰당국의 이런 횡포가 자기 나라 영구중립표방에 대한 위반으로 되였다는것은 두말할것 없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자 축전에 참가한 112개 나라의 청년학생대표단이 윈경찰당국의 처사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프랑스식민주의자들을 반대하는 알제리인민들의 독립투쟁에 대한 련대성의 표시로 일제히 자기 나라 국기들을 내리우고 입장행진하였다. 그리하여 제7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청년학생대표단들이 국기들을 추켜들지 않고 개막행진을 한 류례없는 축전으로 되였다. 이런 련대성의 표시는 반프랑스항쟁을 벌리고있던 알제리인민들을 크게 고무하였다.
하지만 상해림정은 자기의 존속기간 이런 련대도 받지 못하였다.
결국 림정은 정치고아의 신세를 면치 못한채 환국도 개인자격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미국사람들이 태평양 건너 훨씬 먼곳에 있던 리승만을 한달 앞서 자기네 수송기에 실어온 반면에 조선에서 지척이라고 할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는 림정인사들을 같은 자기네 수송기에 실어 한달 늦게 서울로 오게 한것도 다 리유가 있는것이였다. 그것은 저들이 키운 번견이 먼저 와서 반역의 깃을 펴게 하기 위해서였다.
정작 서울에 당도하고보니 나라는 이미 미제에 의해 분렬된 상태에 있었고 서울은 문자그대로 복마전으로 되고있었다. 우익과 좌익사이, 우익과 우익사이, 좌익과 좌익사이의 끊임없는 란투속에서 해가 뜨고 해가 지는것이 현실로 되고있었다.
그런데 절로 그 싸움판에 말려들고있는 속에서도 림정계민족주의자들의 마음을 끌고있는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명망높은 인사들이 전개하고있던
그러던 참에 1945년 12월 초순 어느날에 있은
홍명희, 최일천과의 담화석상에서 림정주석 김구는
석상에서 김구는 또한 일찌기 보천보의 총성에 접했던
김구와 림정계민족주의자들은
그것은 통일적자주독립국가를 지향하여 도도히 굽이쳐가는 민족대단합의 거세찬 흐름이였다.
1948년 4월 19일 드디여 온 민족의 커다란 관심속에 력사적인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가 경치아름다운 평양의 모란봉극장에서 성대히 열리였다.
련석회의에는 모두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석하였다.
해방후 처음으로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뛰여넘어 망국적인 남조선단독선거를 반대하고 나라의 통일독립을 이룩할데 대한 하나의 목표밑에 거족적인 통일대책을 토의하게 될 회의장은 숭엄한 분위기속에 휩싸였다.
오후 정각 6시,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속에 민족의
전체 회의참가자들은 오매에도 그리며 흠모하여마지 않던 우리 민족의 영명한
첫째, 조선정치정세
둘째, 남조선단독선거와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할데 대한 투쟁대책
회의안건은 만장일치로 가결되였다.
회의에서는 북조선로동당대표, 남조선로동당대표, 북조선민주당대표, 근로인민당대표, 북조선천도교청우당대표, 인민공화당대표, 남조선민주녀성동맹대표들이 축하연설을 하였다.
회의는 첫째 의정 조선정치정세에 대한 토의에 들어갔다.
계속하여 우리 나라가 분렬되게 된 경위를 밝히고 북남조선의 판이한 현실에 대하여 언급하신 다음
《우리는 남북조선의 모든 애국적력량을 단합하여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기도를 반드시 파탄시켜야 하겠습니다.
지금 조국분렬의 위기에 처한 이 엄중한 때에 우리가 단결하여 투쟁하지 않으며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물리칠 일대 구국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민족과 후손들에게 천추에 씻을수 없는 죄를 짓는다는것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하여 통일적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며 민주주의적원칙에서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거족적투쟁을 벌려야 하겠습니다.》
4월 22일(제3일) 오전회의에서는 북조선청년축하단의 축하연설이 있은 다음 토론이 계속되였다.
토론자들은 전체 조선인민이 우리 민족의 영명한
이윽고
전체 회의참가자들은
우렁찬 박수환호를 받으며 김구, 홍명희, 조소앙, 조완구선생 등이
만면에 환한 미소를 담으시고 북남조선의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의 대회합을 능숙하게 지도하고계시는
회의장은 민족의
열렬한 박수속에 한국독립당
축사에서 그는 조국분렬의 위기를 수습하기 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주, 민주의 통일독립을 전취할 대계를 상론하게 된것은 실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민주독립당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조소앙선생은 축사에서 새 사회와 새 나라를 위하여 남북의 애국동포들이 한마음한뜻으로 굳게 뭉쳐 우리 조국의 통일독립을 방해하는 외세와 남조선반동파들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워나가자고 강조하였다.
4월 23일(제4일) 회의에서는 홍명희 민주독립당
결정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을 맺었다.
《우리 조국을 분할하여 남조선인민들을 미제국주의자들에게 예속시키는것을 허용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들은 자기의 전 력량을 총집결하여 단독선거배격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함으로써 남조선단독선거를 파탄시켜야 할것이며 조선에서 외국군대를 즉시 철거하게 하고 조선인민자신의 손으로 통일적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강력히 투쟁하여야 할것이라고 인정한다.》
결정서는 전체 대표자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전원찬성으로 채택되였다.
회의에서는 이어 의정 둘째 문제를 토의하였다.
허헌 남조선로동당대표가 남조선단독선거와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할데 대한 투쟁대책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허헌은 보고에서 남북련석회의의 최대의 임무는 조선의 정치정세를 검토하고 남조선《단선단정》을 파탄시키는데 있다고 하면서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모든 정당, 사회단체들은 강유력한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공동행동을 취하고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투쟁에 모든 력량을 조직동원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회의에서는 보고를 신중히 심의하고 회의에 참가한 북과 남의 정당, 사회단체대표들로 남조선단독선거반대투쟁 전국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회의에서는 리극로 조선건민회
격문은 우리 조국의 유서깊은 평양에서 남북련석회의를 열고있다고 한 다음 북과 남의 상반되는 정치정세를 개괄하면서
격문은 전체 회의참가자들의 열광적인 지지속에 만장일치로 채택되였으며 회의에 참석한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의 련명으로 발표되였다.
회의에서는 다음으로 쏘련정부와 미국정부에 보내는 쏘미 량군의 즉시철거를 요구한 남북련석회의 요청서가 채택되였다.
4일간에 걸쳐 진행된 남북련석회의는 참가자들의 구성이 매우 복잡하고 정견과 신앙이 서로 달랐으나
이렇듯 해방후의 복잡다단한 정치정세속에서 극소수 민족반역자들을 내놓고는 남조선의 거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대표들과 완고한 반공민족주의자들까지 참가한 폭넓은
4월남북련석회의는 비록 사상과 리념이 다르고 정견과 신앙에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각계각층이 민족공동의 위업을 위한 투쟁에서 얼마든지 단결할수 있으며 북과 남이 화합하고 온 민족이 단결하면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실현할수 있다는것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였던 남조선의 애국인사들이 그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