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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7 회


제 2 편
별뜨는 하늘


제 17 장


2


석양녘의 역구내는 사람그림자 하나 없었다. 좀전에 평양발 급행렬차가 떠난 뒤였다. 늦어진줄 알면서도 행여나 하여 공장에서부터 십여리길을 부리나케 달려온 리진은 맥살이 풀려 역구내의 층계에 앉아 숨을 돌렸다.

잔등에서는 땀줄기가 비오듯 흘러내렸다.

로대보수마감자재접수차로 오후무렵 항에 화물자동차를 끌고갔다가 자재를 싣고오는 수송배가 늦게 도착하는바람에 주경을 마중하려던 계획이 다 틀어지고말았다.

지금쯤 주경은 식구들과 저녁상에 마주앉아 그간 과학원에서 보낸 나날들과 려행도중에 있은 이야기들을 재미나게 들려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지도 몰랐다. 또 어찌 알랴. 그쪽의 마음을 둔 총각과 밀회의 밤길을 거닐며 래일의 꿈을 설계한 그 은밀한 사연도 허물없이 털어놓고있을는지. 아무튼 주경은 어느 모로 보나 자기와는 다른 세계, 높은 리상속에서 살아야 할 인간이였다.

리진은 그의 생활밖에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존재이면서도 불구하고 왜 그를 마중하려고 오늘 그리도 안달복달했는지 저로서도 이상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어제 방울이와 주고받던 롱말도 떠올라 허거프게 웃었다. 자기야말로 짝짝이신발을 끌고다니는 반편이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공장을 향해 걸음을 짚었다. 운동화를 신은 발밑에서는 먼지가 풀썩풀썩 일었다. 이제 현장에 들어가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오늘 하루실적도 지휘부에 보고해야 하고 또 며칠전부터 구상하고있는 페불가스로구조도 여러 측면에서 탐구해야 하였다.

푸름한 하늘공간에는 아직은 희미한 애기별들이 수없이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점점 여물어가는 그 별들은 용수천물속에 잠겨 미역을 감으면서 물이랑을 지을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여 마치도 의좋게 노닐고있는것 같았다.

현장지휘부에 돌아온 리진은 제창 송수화기를 들고 보수과를 찾았다. 오늘 대보수실적보고를 마친 그는 지휘부옆방에 붙은 세면장에 들어가 얼굴과 몸을 씻었다. 땀투성이되여 분주히 보낸 몸을 찬물에라도 씻고나니 한결 거뿐하였다.

웃저고리를 대충 걸치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고있는데 문기척소리가 났다. 리진이 대답하기 전에 출입문이 열렸다. 리진은 대바람에 수건을 허공에 쳐든채 흠칫 놀라 못박혔다.

얇게 압착한 하얀 모직수건으로 머리를 꼭 감싼 전주경이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들어섰다. 그의 한손에는 크지 않은 마분지포장곽이 든 비닐그물구럭이 들려있었다.

《그새 잘 지냈어요?》

주경은 먼 려행의 피로한 기색도 없이 밝은 표정과 탄력있는 몸가짐, 산뜻한 차림새였다. 그는 직방 들이댔다.

《동무가 역에 마중나오지 않은 사정을 두가지로 생각해봤어요. 하나는 일에 다몰렸을수 있었고 다른 하나는 날 기다리지 않았다는것, 어느쪽인가요?》

역시 그는 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리진은 대답하지 않으려다 찌르는듯 한 그 눈길을 피할수 없어 좀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둘 다 틀렸소.》

《그럼 마중나왔다는거예요?》

《한발 늦었댔소.》

《정말?!》

주경은 놀라면서도 눈동자에는 무지개같은 광채가 튀였다. 하지만 이내 입언저리에 비웃음을 그었다.

《어느 외국소설의 세부가 생각나는군요. 한 귀족이 말이예요. 가난뱅이농민들의 생활을 동정하여 자선을 베풀 계획을 농민들한테 말했더니 농민들은 한사코 반대했어요. 늘 속히워 산 그들이 그 말을 믿을수 있었겠어요? 그래서 귀족은 자기의 선의를 실현할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의 마음은 평온하고 기분은 상쾌하기 이를데 없었어요. 그는 좋은 일을 하려고 시도한 자기의 량심에 만족했던거예요. 동무도 혹시 뒤늦은 걸음을 두고 그런 기분이 아닌가요?》

《허허… 동문 그새 과학원에서 까다롭스끼를 배운게 아니요?》

《내가 까다로운게 아니라… 마음이 좋잖더군요. 렬차에서 내리면서 동무부터 찾았는데… 어느날에는 꿈에 동물 보지 않았겠어요. 아마 그날 낮에 동무생각을 했던가봐요. 동문 안 그랬어요?》하고 물으면서도 주경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출입문쪽을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

《이제 누가 들어오지 않아요?》

《이 시간이면 다들 구내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오.》

《동무도 식전이겠지요. 시장하잖아요?》

《난 마지막시간에 하오.》

주경은 재빨리 꽁꽁 둘러친 하얀 모직머리수건을 풀었다. 그의 눈빛은 점직해하고 눈언저리는 발그무레한 홍조로 물들어갔다. 어딘가 면구하고 쑥스러워하는 기색이였다.

리진은 그 거동이 그답지 않아 벽거울쪽으로 돌아서 젖은 머리를 빗으로 빗어넘겼다.

조금 지나 등뒤에서 주경의 속삭이는듯 한 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내가 달라진것 같잖아요?》

거울속에는 정말 몰라보게 달라진 주경의 모습이 비꼈다. 리진은 돌아설념을 못하고 그냥 거울속만 주시했다.

《난 파마했어요.》

늘 머리가운데를 가리마하여 반반하게 빗어넘기고 뒤를 꽁져 긴 머리카락이 잔등에서 춤추어 탄력있고 틈없이 방정하던 머리모양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살짝살짝 파도쳐 부풀어오른 함치르르한 까만 머리, 멋부린감을 은근히 감추며 한옆으로 갈라빗어 귀를 반나마 가리우면서 하얀 목뒤에서 타래친 모양새, 거기에 세련된 까만 양복이 받쳐져 퍼그나 숙성하고 우아한 지성미로 빛났다. 이전에는 생신한 자연미 그대로였다면 지금은 본바탕은 그대로 두면서도 잘 다듬어놓아 한결 말쑥하고 원숙해진것 같았다.

《어때요? 곱잖아요? 정 보기가 싫으면… 원래대로… 하고 말테예요.》

주경은 말더듬이처럼 뇌이면서도 한손으로 머리를 비다듬었다. 그의 입에서는 숨가쁘면서도 달작지근한 숨결이 흘러나오고 머리에서는 연한 향내가 풍겼다.

리진은 처음 맞다든 그런 질문에 별안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중얼거리였다.

《나야 뭐… 동무가 좋으면 좋은거지…》

《아이유― 어쩌나, 이 동지가 언제면 남자님이 되실가? 호호…》

주경은 총명한 눈을 반짝이며 사뭇 명쾌히 깔깔 웃었다.

리진은 주경이가 제 미모를 그한테 보이고싶어하는 그 야릇한 감정을 포착하는 순간 이름할수 없는 뻐근한것이 내부에서 솟구치였다. 젊은 육체에 있던 뜨거운 피가 소리치며 흐르기 시작하였다. 짓눌렸던 온갖 욕망이 그 어떤 생명의 활력을 갖고 세차게 약동하였다. 가슴속 깊은 곳에 파묻었던 순결한 애정의 봄싹은 무덤을 헤치고 다시금 머리를 치여들었다. 그의 가슴은 상쾌하고 북받치는 희열로 뒤설레이였다. 소생하는 사랑의 환희였다.

사랑은 어제 일을 죄다 망각하였다. 눈이 멀어서가 아니라 사랑의 힘이 모든것을 타승하고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 인츰 환희를 억누르는 격렬한 다툼이 내부에서 일어 번졌다. 리진은 가슴이 옥죄여들고 얼굴이 꺼멓게 죽어갔다.

주경은 아무것도 모르고 책상우에 놓았던 비닐그물구럭안에서 포장곽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포장비닐에 싼 연회색의 녀자용봄가을뜨개덧옷이 나졌다.

《평양편직물공장에서 짠 시제품이 우리 과학원상점에 먼저 들어왔더군요. 이 옷을 어머니한테 드려요.》

《?!…》

《어머닌 노상 물날은 갈색덧옷을 입고 다니시더군요. 그건 내가 대학 3학년때부터 보던거예요. 요즘 절기에는 이 옷이 더 어울릴거예요. 젊어뵈기두 하시구.》

가련한 리진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그는 몸을 떨며 경련이 이는 목구멍으로 다급히 말을 꺼냈다.

《아니, 이러지 마오. 이 옷은 동무어머니한테 더 맞을거요.》

《저의 엄마요? 걱정말아요. 좀 밝은 색으로 가져왔지요 뭐.》

《주경이, 난… 난 싫소. 우리 어머닌 받지 않을거요.》

《왜, 이 별찮은 성의마저도 무시하겠어요?》

《아니, 그런건 아니구… 정말이요. 우리 어머닌 절대로…》

《됐어요, 내가 주고싶어 주는거예요. 못나게 굴지 말아요. 동무한텐 책들을 갖고왔으니 공장과학기술보급실에 가면 신간도서들이 다 있어요. 첨단기술서적들이 수두룩하여 한번 쭉 훑어만 봐도 눈이 번쩍 트일거예요.》

리진은 심장이 당장 터져나갈듯 방망이질했고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옥죄여들었다. 그 고통은 지금까지 체험한것중에서 제일 큰 고통이였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제는 결속을 지어야 하며 종지부를 즉 주경이와의 결렬을 선언해야 한다는 결기가 불쑥 치솟았다. 그러나 입만 벌리면 고백이 아니라 오열이 터져나올것 같았다. 돌연 눈앞이 캄캄해지며 목구멍이 꽉 메였다. 한편으로는 만약 이제 터뜨린다면 자기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한 이 녀자는 등을 돌려대고 영영 가버릴것이며 제 손으로 들고온 이 물건들을 집어서 내던질것이였다. 리진의 용기는 한걸음이 아니라 반걸음이 모자랐다.

《이제는 무슨 말이든 좀 하세요.》하며 주경은 하얀 모직수건을 다시 머리에 휘감았다.

리진은 섬찍하면서도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런 색갈도 감정도 없는 지치고 맥빠진 미소였다.

《모르겠소.》

리진은 이마에 내밴 땀을 젖은 수건으로 씻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내가 동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것은 이제 잘 알게 될 때가 올거요.》

리진은 의심쩍어하는 주경의 동그란 눈, 행복의 빛이 뿜어나오는 눈을 외면하며 얼버무렸다.

《동문 언제봐야 아리숭한 소리뿐인걸요. 전 가겠어요. 엄마가 기다려요. 배고파죽겠네. 동무도 어서 가서 식사하세요.》

리진은 주경을 용수천뚝까지 바래주었다. 어둠속에서 주경은 하얀 손바닥을 펴 흔들어보이고는 사라졌다.

《주경이!》

리진은 그가 사라진쪽으로 몇걸음 옮기며 마음속으로 불렀다. 그는 용수천뚝우에서 화끈 달기도 하고 죄여들기도 했던 얼굴을 바람에 쏘이면서 방금전에 있은 일들을 생각하였다. 언제면 이 숨박곡질을 끝장내려는지, 여전히 갑속에 틀고앉아 서슴거리기만 하는 자신의 소심성에 또 한번 침을 뱉았다. 어차피 그런 날은 있으련만 그것이 언제일지 질정하지 못한채 리진은 한참이나 강뚝에서 서성거리다 현장지휘부에 돌아왔다.

지휘부방안에는 뜻밖에도 어머니가 와있었다. 걸상에 앉아 기다리고있던 유선림은 반색하며 일어났으나 리진의 눈길은 어머니의 어깨너머 책상우에 먼저 갔다. 거기에는 주경이 놓고간 뜨개옷포장곽이 있었다.

《네 몰골이 말이 아니구나. 저녁전이겠지?》

《네.》

《마침이구나. 토끼곰을 해왔다. 식기 전에 어서 먹어라. 속내의도 갈아입고.》

유선림은 보자기를 풀어 원탁우에 곰단지를 내놓았다.

수저를 꺼내놓던 유선림은 좋다 나쁘다 아무런 내색없이 말뚝처럼 서있기만 하는 리진을 얼핏 쳐다봤다.

아들의 신상을 노상 감각으로 포착하는데 버릇된 유선림은 귀밑머리를 쓸어올리며 구름처럼 밀려드는 수심어린 어조로 물었다.

《왜, 무슨 일이 있었냐?》

《…》

리진은 그제야 굳어진 몸을 풀면서 벌씬 웃었다. 하지만 유선림의 눈에는 그 웃음이 때가 늦었다.

《그래, 또 재구를 쳤냐?》

《참 어머니두, 재구밖에 몰라. 저 포장곽을 좀 열어보세요. 뭐가 있나.》

리진은 사뭇 쾌활한 몸짓으로 포장곽을 가리켰다. 의아해하며 곽을 헤친 유선림은 눈이 화등잔이 되였다.

《이건 웬 옷이냐?》

《려행떠난 동무한테 부탁했더니 가져왔더군요. 어서 입어보세요.》

《원, 녀석두 별걸 다…》

유선림은 말끝을 흐렸다. 난생처음 받는 아들의 지성에 목이 메였다. 리진은 뜨개옷을 꺼내 어머니가 걸치도록 거들어주었다. 유선림은 갑자기 희한해진 제모습에 기겁하여 몸둘바를 몰라 쩔쩔 매기만 하였다.

《사람들이 웃지 않겠니? 옛날 마나님같다고 말이다.》

《뭐래요? 세월이 좋아 어머니도 마나님이 돼봅시다요. 정말 보기 좋아요. 젊어뵈기두 하고 어울릴것 같다더니 그 말이 맞긴 맞아요.》

《누가 그러더냐?》

《누군 누구…그건 묻지 마세요.》

《…》

유선림은 처음부터 이상한 생각이 떠나지 않고있던차라 리진의 말꼬리를 붙잡지 않을수 없었다.

녀인은 인자한 눈길에 물음을 실었다. 표정이 풍부한 녀인의 눈은 눈가에 잔주름을 지어놓았는데 그 주름들은 그의 마음의 부드러움과 너그러움을 말해주었다. 녀인은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아들앞으로 다가섰다.

리진은 어머니의 작은 손을 다정히 잡았다. 여태 주경의 성의를 무시할수 없어 몸에 맞지 않은 연극을 놀아대던 그는 어머니의 사려깊은 눈길앞에서 더는 숨길수 없었다. 그는 어머니의 인자한 눈길앞에서는 언제나 착한 어린애였다.

《어머니, 좀전에 주경이 왔다 갔어요. 그가 평양쪽에 며칠 다녀왔는데 어머니한테 이걸 사왔더군요.》

《준갑아주버님 따님 말이냐?!》

유선림의 놀람은 실로 컸다. 그는 무너지듯 걸상에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은 서서히 놀라운 빛이 가셔지더니 그것은 급속히 감격의 빛으로 번져져 가슴은 터질듯이 재게 뛰였다. 긴 속눈섭끄트머리에 눈물방울이 한점 맺혔다. 언제인가 사고심의때 기사장앞에 저도 모르게 너푼 엎드려 절한 그런 격정에 잠겨버렸다.

《어쩌문…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담.》

《어머니, 진정하세요.》

《얘야, 그네들의 그런 마음을 네 어쩜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훌쩍 받을수 있었니. 넌 또 재구를 쳤지, 큰 재구를 말이다. 아, 정말이지… 더는 못 참겠구나.…》

유선림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씻을념을 않고 두서없이 뇌이기만 하였다. 그 눈물속에는 그 어떤 강잉한 빛이 어른거렸다. 리진은 알지 못할 불안이 연기처럼 그물그물 서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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