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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 회


제 2 편
별뜨는 하늘


제 13 장


2


전주경을 바래우고 다시 팔걸이의자에 몸을 실은 계영빈은 심란해지는 마음을 걷잡을수 없었다. 그는 오늘 오래간만에 언어가 교감되는 벗을 찾게 되여 기염을 토했다. 그것은 흡족한 일이였지만 그 처녀가 남기고간 말마디들은 그냥 가슴을 세차게 흔들었다. 좀전에 그 처녀는 사색과 탐구에 한생을 바쳐가는 과학자의 훌륭한 안해의 자질을 두고 무심히 말했다. 계영빈은 그 뜻하지 않는 말속에서 예리한 비수에 흉곽이 찔리우는 아픔을 느꼈다.

그날은 4년전 봄이 움트는 계절이였다.

봄싹들이 파릇파릇 돋은 구릉진 야산에는 복숭아과원이 펼쳐지고 그 주변은 나리꽃나무들과 진달래덤불로 덮였다.

노란빛, 진분홍빛꽃잎들사이로는 등에 금줄이 간 산벌들이 윙윙거리며 싸다니였다. 은빛물김이 서린 호수쪽에서는 물새의 지저귐소리가 귀간지럽게 들려오고 이따금 물면우로는 팔뚝사리같은 잉어들이 뛰여오른다.

계영빈의 집은 바로 이 호수가에 있었다. 우리 나라 화학공업의 도시로 불리우는 도시변두리에 자리잡은 그의 집은 이른바 순수한 자연환경이 그대로 숨쉬는 이를데 없이 아름다운 곳이였다. 창밖 양지쪽에서는 아지랑이가 아물아물 피여오르고 황금빛나무의 애순들이 실바람에 조용히 흐느적이였다.

지난 밤에 내린 비에 누기진 땅냄새와 상쾌한 훈향이 방에 흘러들었다. 봄볕이 윤나는 방바닥이며 책장과 하얀 도배지를 바른 벽을 비치고있었으나 책상우에는 간밤을 새운 흔적인양 푸른 갓을 씌운 탁상등이 희미하게 켜져있었다.

계영빈은 백금촉매개발차로 승림화학공장출발을 앞둔 때여서 밤낮을 잊고 일하였다. 여러 나라 문헌들을 참고하여 우리 식의 촉매를 탐구해놓았지만 반응과정의 계산들을 검토하느라 장밤을 패운 그는 창밖에서 명랑한 봄볕이 뛰놀고 새들이 옥피리를 불어대고 봄아씨같은 진달래송이들이 상긋한 미소를 보내는줄도 모르고 서재의 쏘파에 앉아 사색에 골몰하고있었다. 그는 자기의 심혼을 한곬으로 몰아가는 촉매의 형성과정을 하나하나 음미해나갔다.

그때 정지방에서 놀이감을 갖고놀던 딸애가 서재 문턱을 넘어 그의 발치앞으로 발볌발볌 기여왔다. 딸애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짓고 앉아있는 아빠를 쳐다보며 손바닥걸음으로 다가들어 그의 한다리를 잡고 일어서려 했다. 계영빈은 사색에서 깨여났다. 이마살을 찌프린 그는 얼른 어린것을 들어 정지방 한구석, 멀찍한 곳에 가져다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서재쏘파에 앉아 자기를 황홀경에로 몰아가는 그 영원한 꿈의 신비속에 잠겨버렸다.

딸애는 아빠가 장난하는줄 알고 발쭉발쭉 웃으며 아빠한테로 앙금앙금 기여와 또 한다리를 잡고 일어났다. 그런데 계영빈은 딸애한테 잡힌 다리를 제창 옮기여 다른쪽 무릎우에 올려놓았다. 그바람에 딸애는 앞으로 손을 뻗치며 이마와 코를 땅바닥에 짓쪼았다. 아츠러운 울음소리가 터졌다.

돌미륵처럼 있던 계영빈은 자기의 발밑에 자빠져 바스라지게 우는 애한테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그 눈길은 애를 보고있었으나 생각은 다른 곳에 가있었다. 지금까지 그의 다리는 중추신경의 작용이 아니라 반사적인 움직임이였다.

이 광경을 부엌에서 지켜보고있던 안해가 창황히 달려왔다. 안해는 코를 박고 울어대는 딸애를 품에 안아 달래며 섭섭한 어조로 핀잔했다.

《원, 당신두. 오늘같은 날에야 앨 한번 안아주면 못써요?》

《응?!》

《애가 돌이 되는 날이 아니예요.》

《아, 오늘이 그렇던가!》

계영빈은 대번에 눈이 떼꾼해졌다. 그의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건너갔다.

《여보, 내가 이자 무슨 일을 저질렀소?》

《…》

안해는 말없이 긴숨만 내쉬였다. 계영빈은 그제야 한방망이 얻어맞은듯 펄쩍 놀라 울고있는 딸애를 얼릴만한 물건짝들을 찾아 수선을 떨었다.

《우리 고운 별님이, 몹쓸 아빠는 죽었다. 자, 자, 이걸 받아라.》

계영빈은 책상우의 계산자와 만년필 지어는 삼각자까지 애한테 내밀었으나 이미 울음동을 터친 딸애한테 그 투미스러운 물건짝들이 눈을 끌리 없었다. 아버지의 애무는 너무도 때늦은것이였다.

그 모양을 측은히 바라보던 안해는 인츰 딸애의 첫돌생일상을 간단히 차려놓았다. 아직 청한 손님들이 오기 전이였다. 안해는 술잔을 꺼내 한잔 붓고는 한무릎 꺾고앉아 그 술을 남편한테 정히 드렸다. 계영빈이 무심결에 잔을 받아들자 안해는 고개를 숙이더니 퍼그나 가라앉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용서하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당신의 중한 사업을 리해 못하고… 여보, 전 겁이 나요. 천상 가야 당신을 리해 못하는 안해가 될가봐서요.》

《!》

술잔을 쳐들고 멍청해있던 계영빈의 가슴밑바닥에서는 뜨거운것이 욱 치밀고 눈굽이 저려들었다. 첫돌을 맞는 애를 울린 죄를 원망할대신 오히려 제 잘못을 비는 안해였다. 그 순간 안해의 마음도 얼굴도 눈도 뜨거운 애정과 죄책으로 빛났다. 그것은 한 녀성이 가장 순결하고 사심없고 절대적인 헌신의 사랑을 바치는 모습이였다.

계영빈은 목이 꽉 메여 더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는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말았다.

그는 이튿날, 멀리 촉매개발지를 찾아 어린자식과 안해와 작별하였다.

가정의 무거운 부담을 잔약한 어깨에 홀로 감당하면서도 지청구 한번 할줄 모르는 안해, 그 아련하고 순박한 안해는 지금도 이제나저제나 백금촉매소식을 기다릴것이였다.

계영빈의 수첩갈피속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여보, 나의 연구는 여전히 이렇다할 진전이 없구려. 이제는 지칠대로 지쳤소. 밥도 씹히지 않고 잠도 들수 없고 예민해진 신경은 미칠것만 같소. 그렇지만 미치고싶어도 뒤걸음치고싶어도 그렇게는 안되는구만.

눈물에 젖은 딸애의 얼굴이, 잔을 부어주던 당신의 모습이 내가 쓰러질가봐 부축여주고 살뜰히 어루만져주고 엄하게 질책해준다오. 생일날 딸애한테 눈물만 준 이 못난 아빠가 언제면 애한테 기쁨과 웃음을 듬뿍 줄수 있을가? 그날을 위해 또다시 의지의 창끝을 벼리고 격전장에 뛰여든다오. 여보, 여름날의 달빛처럼 부드러운 당신과 딸애는 나의 힘이고 의지이고 투쟁이요.…

마음속으로 이렇듯 따뜻한 말을 다시금 뇌인 계영빈은 안해와 딸애가 사무치게 그리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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