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25 회


제 1 편
은백양나무에 새겨진 자취


제 11 장


2


…난 취하지 않았어. 그러니 가야 해. 이밤이 열둘이라도 비파봉뒤산에 가야 해. 당장 로를 보수할텐데 고령토가 문제거던. 고령토… 로부터 제대로 돼야 생산도 페불도 할게 아닌가.…

박오복의 잔치집에서 녹초가 되여 돌아오는 리진은 두서없이 뇌까렸다. 줄금줄금 내리는 밤비에 옷이 화락하니 젖어들고 비물이 몸에 스며들어도 가슴은 여전히 불덩이를 안은듯 헐썩거렸다.

그는 지금 비파봉뒤산을 바라고 나섰다. 취중에도 며칠전 그곳에서 애써 찾은 고령토구뎅이에 비물이 찰가봐 걱정되였었다. 물곬을 다른데로 째주지 않으면 세길나마 판 구뎅이가 무너져 품들인 숱한 공력이 허사로 될수 있었다.

퉤, 이놈의 구접스러운 비, 이밤따라 내릴건 뭐람. 아니, 퍼부을테면 퍼부으라지, 내가 뭐 두려울줄 알아. 난 이보다도 더한 궂은 날에도 바깥에서 달린적이 수없이 많았어. 이른바 인생주로를 따라 주경이와 속도경기를 얼마나 자주 벌렸다고…

리진아, 네가 만약 속도없이 산다면 저 강역에서 뭉개는 이파리처럼 한자리에서 늙어버리고말거야. 저 빠른 물살을 타고 흘러가는 이파리처럼 주어진 시간에 멀리 달린 사람, 조국을 위해 많은 일을 한 사람이 되자.…

이것은 언제인가 주경이 한 말이자 우리 서로의 언약이기도 하였지. 그때부터 나의 삶의 속도경기가 시작되였어.

하루일이 끝나면 쉴짬이 없이 공장대학교정으로 달렸고 동무들이 재미나는 구경이나 흥겨운 오락을 권할 때에도 도서관문이 닫길가봐 달렸고 밤새워 책속에 묻혔다가는 밀려드는 졸음을 쫓으려 눈보라속을 달리기도 하였지.

속도를 잃으면 젊어서 늙은이가 될가봐, 속도를 잃으면 주경이한테 뒤질가봐 적게 자고 많이 읽고 많이 배우며 지식의 탑을 한층한층 쌓아갔었다. 그 나날에는 초긴장으로 뛰고 달려도 피곤한줄도 힘든줄도 몰랐다. 진할줄 모르는 힘과 퍼내고퍼내도 샘솟는 열정을 주는 희망의 별이 있었으니까.


우리 서로 비쳐주자

너 밝아지고

나 또 밝아지게


그 별은 어둠속에서도 나의 앞길을 비쳐주며 나를 아름다운 미래에로 실어갔지. 그러나 지금은 그 별이 꺼져버렸어!

아 주경이, 동문 지금 뭘하고있소? 이밤에도 페불연구에 심혼을 바칠테지. 그 페불은 나에게도 희망이고 사랑이고 넋이였소. 내 비록 페불에서 멀어진 몸이지만 나도 돕겠소. 동무가 하는 일, 당이 바라는 일인데 내 성심껏 도우려오.…

리진은 공장변두리를 따라 나진 소로길에 들어섰다. 인적드문 이 소로길 한모퉁이에는 그의 생활의 길동무인 은백양나무가 있었다. 이밤 그가 이 길을 택한것은 은백양나무를 찾고싶어서가 아니였다. 자기 집 방향과 이어진 이 길을 걷느라면 비파봉뒤산에도 오를수 있기때문이였다.

발길에 풀들이 걸채이며 푸시덕이였다. 풀잎에 맺힌 물방울들이 바지자락을 적셔놓아 발목에서 철써덕거렸다.

얼마 못미처 은백양나무가 나졌다. 희벗한 공간속에 서있는 나무의 거풋한 잎새들에서는 후둑후둑 비방울 듣는 소리가 들리더니 밤바람이 일자 한뭉테기의 비말이 쏟아져내렸다.

(아, 너는 이런 궂은 밤에도 한자리를 굳건히 지키고있구나.)

리진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던 그는 무춤 발목을 잡혔다. 이상한 예감이, 인적기 비슷한 육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뒤미처 그는 희미한 그림자가 나무밑둥에 붙어 까딱 움직이지 않는것을 가려보았다. 불시에 차디찬 소름이 등골을 누볐다. 흐리멍텅하던 눈앞이 명료해졌다.

리진은 점점 선명해지는 전주경의 자태를 얼없이 보기만 하였다. 주경은 펼쳐들고있던 우산을 접으며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머리는 젖어있었다. 가뜩이나 파마기가 없는 머리는 물기에 찰싹 붙어 애어린 소녀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난 동무가 이 길로 안 올가봐 걱정했어요. 행여나 하면서 반시간나마 기다리고있어요.》

《?!…》

《왜 놀랍지 않아요? 내가 여기 있는게 말이예요?》

리진은 긴장으로 졸아들었던 몸이 느슨해졌지만 주경이 아무 예고도 없이 나타난 의혹은 풀수 없었다. 필경 한시가 급한 긴요한 일때문이 아니면 어떤 참기 힘든 생사와 관련되는 문제일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음산한 밤, 녀성의 몸으로 이런 곳에서 기다릴수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아버지들관계를 알고 그것을 따지고싶어 이밤 모진 마음을 먹고 나선것은 아닌지…

리진은 마침내 그한테 모든것을 고백할 시각이 왔음을 직감하며 웬일인지 놀라울 정도로 태연하고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그래 무슨 일이요?》

《아이, 술냄새, 취하지 않았어요?》

《마셨소. 친구의 행복을 위해 마셨소.》

리진의 말투는 자못 비뚤어져나갔다. 그는 지금 주경이가 본문제를 꺼내기 앞서 딴전을 부린다고 짐작했다. 하여 최후의 고백을 앞둔 그의 심기는 다치면 폭발할듯 한 울분으로 끓어올랐다. 주경은 얼굴에 흘러내리는 비물을 한손으로 훔치며 침착히 말문을 열었다.

《실은 페불도입에서 우리가 서로 다른 립장을 세운다면… 이보다 더 큰 난관은 없을거라고 봐요.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은 극히 짧아요. 그래서 하루라도 미룰수 없어 저녁에 직장에 찾아갔더니 동무가 오늘 잔치집둘러릴 선다더군요.》

《빙빙 에돌지 마오. 주경이, 페불이요 뭐요 하는 숨박곡질은 그만두오. 속을 툭 터놓는것이 옳지 않겠소.》

전주경은 아연한 눈길로 굳어졌다. 이 사람이 취중에서 상기 깨여나지 못했는가, 아니면 엇먹이는 나쁜 습성이 생겼는가?…

전주경은 지난밤을 거쳐 진종일 페불도입에서 두가지 방안을 두고 다시금 곰곰히 생각을 굴렸다. 그것은 물론 페불국부도입을 마음싸하지 않는 강대철의 반신반의에서부터였다. 강대철의 태도는 더 나아가서 한갖 미련이나 고집으로 일축해버렸던 리진의 전량도입안을 재삼 끄집어내여 음미하게 되였다. 어째서 리진은 두차례의 치명적인 시험실패를 겪은 지금에 와서도 전량도입안을 버리지 못하는지. 성공을 튕겨주는 그 어떤 막연한 실마리라도 갖고있는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가 아이의 그림앞에서 머리를 치여들지 못한 까닭은 실지 무엇때문인지… 그 모든것을 자세히 알지 않고 국부도입만을 내세운다면 한 인간을 여지없이 무시하는 비도덕적인 결과를 빚어낼것이며 동시에 페불연구에서 그를 완전히 잃을수 있었다. 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를 70일전투기술혁신돌격대에서 배제한 일부 속통머리좁은 사람들과 다를바 없는 행위가 아닐수 없었다.

전주경은 비로소 발등에 떨어진 불은 무엇보다도 페불연구에서 리진이와 같은 견해, 같은 호흡을 맞추는 일임을 알게 되였다. 진실로 마음이 통하지 않고 숨결도 맥박도 하나의 리듬을 타고 흐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페불을 잡을수 있겠는가. 그와의 쌍벽은 그럴 때만이 가능하며 연구사업도 더 빠르고 큰 걸음으로 진전될수 있다.

무슨 일이나 질질 끄는것이 질색인 전주경은 이밤에라도 리진을 만나 진지한 과학기술적의견을 나누어 그한테도 불을 달아주고싶어 견딜수 없었다. 이는 페불연구에서 독단으로 견해를 세우려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면서도 리진이를 이 사업에 기둥으로 내세우려는 동지적인 방조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리진을 마중하려고 이 길에 나섰던것이다. 요전날 전주경은 은백양나무아래서 그와 함께 저녁시간을 보낼 때 그가 여기 소로길을 자주 밟는다는것을 알았었다. 그런데 이밤 그의 입에서 상상조차 못한 말이 튀여나올줄은 몰랐다.

《좋아요. 속을 터놓자요. 난 동무의 페불에 대한 립장을 구체적으로 알고파요.》

《하핫, 또 페불이군.》

선웃음을 치는 리진은 이 순간 주경의 서툰 《연극대사》가 경멸스러울 지경으로 쓰거워났다. 이러한 오판으로 하여 그의 감정은 거칠어질대로 거칠어져 마치도 굴레벗은 망아지처럼 마구 날뛰였다.

《그렇다면 알아두오. 그 페불에는 이젠 내가 할 몫이 없어졌소. 솔직한 말로 나야 페불전량도입을 주장한 놈 아니요. 거야 여지없이 실패했지. 그렇소, 내 방법으로는 안되오. 이건 포기가 아니요. 힘과 능력은 있으면서 용기와 신념이 부족하여 물러나게 되면 포기라 할테지만 애당초 비교할 씨름대상도 안될 때 나서지 않는건 포기가 아니라 그저 물러나는거요.…》

《말재간을 부리지 말아요. 요전날 동문 이 나무아래서 뭐랬어요. 이 나무 보기가 부끄럽지 않아요?》

전주경은 빈정거림같기도 하고 진심인것 같기도 한 그의 망발에 기가 막혀 더 이을수 없었다. 그러자 리진의 입에서는 《아, 은백양…》하는 되뇌임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는 리진의 가슴에서는 무엇인가 쿵 떨어져내렸다. 알지 못할 불뭉치같은것이 목구멍을 꽉 메우며 눈앞을 부옇게 흐려놓았다. 그의 마음속에 푸르러 살아있는 이 나무가 남긴 애틋한 흔적은 살아있는 한떨기의 청초한 꽃처럼 예이제 변함없이 즙과 향기를 풍기고있었다. 바로 그 향기때문에 자기의 가슴이 찢기는줄 주경은 알리 없었다.

《주경이… 이 세상에 훌륭한 일이 그렇게 많고 사랑도 행복도 많을테지만… 난 다만 동무가 당의 뜻대로 페불연구를 잘할수 있게 로를 제대로 만들어놓을테요. 난 동무가 하는 일에 기꺼이 밑거름이 될테요.》

리진의 떨리는 목소리는 꺾이운 넋이 하는 말이였다. 전주경은 놀람과 의혹이 뒤섞인 차거운 눈을 치여들었으나 리진은 감촉 못했다. 전주경의 가슴에서도 참을수 없는 격렬한것이 끓기 시작하였다.

《모르겠군요. 내가 왜 동무한테서 그런 값비싼 동정을 받아야 하는지. 난 동무한테도 남자의 자존이 있으리라고 믿고있는데요.》

《모르는체 하지 마오. 난 그렇게 살아야 하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날 용서하지 않을거란 말이요!》

《뭐라구요?!》

가련하게 이지러진 리진의 눈길은 새파랗게 질린 전주경의 눈길과 허공에서 부딪쳤다. 여태 자신을 다잡으려 안깐힘을 쓰던 전주경의 얼굴도 피기가 싹 가셔졌다. 자신처럼 믿었던 사람이 자포자기의 구렁텅이에 점점 떨어져내리면서도 그 무슨 정당성을 주장하는 그 역설은 쓰디쓴 혐오와 분노를 일으킬뿐이였다. 또한 무분별한 결기로 내달리던 리진이 역시 광적인 흥분으로 하여 상대의 감정따위는 여겨볼새 없이 제몸을 금시 파멸시킬듯 울분의 폭풍을 일으켰다.

《동문 그래 온 가족에게 불행을 들씌워놓은 사람을 용서할것 같애? 가장 가까운 혈육을 잘못되게 한 인간을 용서할것 같은가 말이야! 그한생을…》

정신없이 울부짖던 리진은 다음 말을 더 이을수 없었다. 별안간 맵짠 손이 그의 뺨을 갈기는 타격에 흠칠했다.

《얼빠진 사람!》

전주경이 불찌가 튀는 눈길로 그를 쏘아보며 내뱉았다.

그것은 극히 짧은 한순간이였다. 모든것이 정지되여버린듯 소연하게 들리던 비소리도 정적속에 잠겨버렸다.

리진은 그때에야 술기운이 말짱 사라져 한팔로 나무줄기를 짚고 머리를 떨군채 눈을 꾹 감았다. 전주경은 방금 일을 저지른 제 손바닥을 넋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 손바닥으로는 피같은 눈물방울이 점점이 떨어져내렸다. 그는 잠시 막힌 숨을 흑― 하고 들이키더니 고르롭지 못한 심장의 세찬 박동을 견딜수 없어 두손으로 가슴을 꽉 눌렀다. 그리고는 인츰 돌따서 어둠속으로 반달음쳐갔다. 은백양나무잎새에서는 그냥 비물이 흘러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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