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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 회


제 1 편
은백양나무에 새겨진 자취


제 10 장


1


며칠만에야 집에 온 전주경은 여느때없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사이 연구소에서 꼬바기 밝힌 피로를 정양소에서가 아니라 집에서 풀고싶어서였다.

그런데 잠자리에 들면 인츰 꿈나라로 실려갈것만 같던 몸이 밤이 깊어갈수록 이쪽저쪽 뒤치락이며 잠을 청할수 없었다. 하많은 상념에 정신이 새록새록해지고 그 상념은 또 가지를 치며 끝없이 이어졌다.

…전진이 아니라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것 같애.… 페불국부도입안을 마음싸하지 않던 강아저씨의 의미심장한 말이며 대지를 활보하게 된 첫 기쁨을 안고 자기부터 찾아준 부인의 걸음이며… 그 모든것은 공장의 중요과제인 페불을 안고있는 자기에 대한 기대와 믿음, 사랑이였다.

정말 페불의 익측을 점령하면 전량고지를 정복할수 있을가? 난 한점의 불꽃이 료원의 불길로 번진다고 했지. 그건 아무런 담보도 없는 가설일뿐. 그렇다면 내가 국부도입에 더 매력을 둔 까닭은? 페불의 얼마간이라도 리용한다는 그자체가 하나의 세계적파문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것은 아닐가? 거기다 리진의 참혹한 실패와 계영빈의 부정적립장이 부채질한것 같기도 하고… 작은아버지가 내놓은 탐구의 결실을 값높이 사려는 애정이 더 짙게 깔려있은지도 몰라. 그래서 리진동문 날보고 천리를 가야 할 사람이 백리길잡도리를 한것 같다고 했을가? 아이참. 전량도입이 좋은거야 누가 모르나 뭐, 그것이 불가능하기때문에 택한 길이지. 그 동문 자기가 저지른 사고를 통해 뻔히 알면서도 왜 미련을 못 버린담.…

어디선가 새벽닭이 홰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방안이 어느새 희붐해졌다.

《여보, 당신 애를 너무 부려요. 그러다 쓰러질가봐 겁나요.》

《할수 없소. 우린 이 전투기간 무조건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말씀을 관철해야 하오.》

웃방에 누운 주경은 때늦은 쪽잠이라도 청하려다 삼촌내외간의 소곤거림에 귀가 살아났다.

아버지없이 유복녀로 태여난 전주경은 전후에 친어머니마저 여읜 후 (그의 어머니는 산후탈로 돌아갔다.) 삼촌집에 눌러앉게 되였다. 삼촌네는 딸자식이 하나 있었지만 주경을 맏딸삼아 애지중지 키웠다. 주경은 량친을 잃은 고아의 설음같은것은 언제한번 겪은적 없이 자랐다. 유년시절과 중학시절의 크고작은 기쁨과 소원은 삼촌이 가꾸어주었고 마음씨 무던한 삼촌어머니의 사랑은 그를 구김살 하나없이 밝게 해주었다. 그는 어릴적부터 남들이 듣기에 이상한 생활용어를 썼는데 삼촌은 《작은아버지》라 불렀어도 삼촌어머니는 그저 《엄마》라고 하였다.

《어제 정양소장이 주경이 몸보신에 쓰라고 토종닭 두마리를 집에 보냈더군요. 정양소에서 곰을 해먹일수 있지만 제 집처럼 살뜰하겠는가고 말이예요.》

《음, 내 그럴줄 알았소.》

《그럼 당신 부탁이라도 했는가요?》

《부탁은 무슨, 그 녀자가 산다는 의미가 뭔지 아오? 사람들에 대한 헌신과 사랑이요. 그 녀잔 온 공장종업원들을 다 제 자식, 제 혈붙이처럼 대하는데 중한 일을 맡은 주경이한테야 더 말할게 있겠소.》

전주경은 가슴이 뭉클했다. 공장에 와서 처음 알게 된 서윤정은 알게모르게 자기의 생활을 성심성의로 살펴주었다. 정말 지내볼수록 정이 가고 반할만 한 녀성이였다. 녀자가 녀자한테 반한다는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전주경은 그처럼 자기 맡은 일에 머리를 쓰고 헌걸차게 투신하는 녀성일군은 처음 봤다. 하지만 서윤정이 돋보일수록 한가지 두려운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런 훌륭한 녀성을 외면한 남자들의 세계였다. 자기도 어차피 남자라는 이성과 미래의 행복을 꿈꿀텐데 그런 남자들의 세계를 어떻게 리해할수 있겠는가. 그래서 요전날 애꿎은 리진이 한테 엄포를 놓았지만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수 없었다.

전주경은 이 새벽 자기 건강을 념려해주는 삼촌내외간의 달콤한 대화에 몸이 노근해져 다시 잠을 청하려고 돌아누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왕청같은 말이 정지방에서 튀여나와 잠기가 말짱 사라졌다.

《여보, 강비서한테 애 혼사문젤 비쳐봤어요?》

《요즘 그럴 경황이 있었소? 헌데 그 어른이 우리 주경이를 바로보더군. 내가 공부깨나 한 처녀들은 시집살이를 잘하지 못할거라구 했더니 오히려 그런 녀자들이 생활을 리상적으로 꾸릴거라고 하잖겠소.》

《하긴 그 집에서야 우리 주경이 과남하지요 뭐. 말은 바른대로 우리 애야 이젠 나라에서도 한다하는 과학자인데… 그 집 총각은 고작 중학교를 마쳤다면서요?》

《앞길이 창창한 젊은인데 공부야 차차 하면 되는거구. 그 젊은이가 누군지 아오? 조국해방전쟁시기 영웅의 아들이란 말이요. 전후에 강비서가 애육원에서 찾아다 양아들로 삼았지. 함께 싸운 전우의 아들이였으니까.》

《참, 그러구보니 강아주버님과 모색이 판판 달라요. 그 총각은 체격좋고 인물 또한 얼마나 멀쑥한지 정말 름름하고 의젓해요.》

《군사복무기간 군공도 적잖게 세운것 같더구만, 앞가슴에 훈장메달이 가득찬걸 보면. 영웅의 피야 어델 가겠소. 강비서가 제대된 그를 지금 건재직장소성로에서 힘든 일을 시키지만 두고보오, 당에서 그 젊은일 어떻게 키우나. 앞날이 크게 기대되거던.》

주경은 더 듣고만 있을수 없어 미닫이문설주를 똑똑 두드렸다.

《엄마, 좀 잠들게 조용해요. 난 피곤해 죽겠는데…》

주경은 엉너리를 부렸다. 정지방에서는 잠잠해졌다.

이전 같으면 주경은 이런 말에 가슴이 활랑거렸을테지만 지금은 나이찬 처녀들이 흔히 듣는 소리여서 꿈만했다.

그렇다고 몸가까이 다가오는 그 이성의 봄을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으로 가꾸고싶진 않았다.

전주경은 이 새벽 삼촌내외가 떠올린 상대를 모르지 않았다. 어릴적 강대철아저씨를 따라 그의 집에 갔을 때 주경은 저보다 두세살은 더 먹은 사내애와 사귀게 되였다. 주경은 그를 오빠로 섬기며 따랐다. 소학교시절 그 오빠는 주경의 보호자나 다름없었다.

주경은 들까부는 성미로 하여 때로 감때사나운 학급총각애들의 공격을 받군 하였다. 그럴 때면 그 오빠는 어김없이 나타나 눈알을 부라리며 주먹을 내들었다. 학급총각애들은 기가 죽어 찍소리 못했다. 주경은 차츰 자기한테는 주먹이 센 오빠가 있다는 자부심이 생겨 뻐길수 있었고 학급에서 일인자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다질수 있었다. 그러나 중학시절 강대철아저씨의 이동으로 그 오빠는 다른 학교로 전학가게 되였으며 그 이후 인민군대입대로 하여 다시 만날수 없었다.

전주경은 그가 영웅의 아들이라는데 다소 놀랐으나 그에 대한 아무런 표상도 가지지 못했다. 어릴적인상들은 지나온 무수한 발자취처럼 잃어졌다. 그가 공장에 처음 왔던, 은백양나무아래서 리진을 만났던 그날 밤이였다. 주경은 리진의 마음을 달랠길없어 용수천기슭을 따라 우로 뻗은 자드락길로 천천히 걸음을 짚었다. 얼마 못미처 앞에서 걸어가는 두사람의 그림자가 강쪽으로 길게 누워 어른거렸다. 쌍지팽이에 몸을 의지한 녀인과 그의 허리를 감싸안은 젊은 사람이였다. 주경은 어렵잖게 그들 두사람, 강아저씨 부인과 끼끗한 몸매의 주인은 어릴적 오빠임을 직감하였다.

무슨 이야기인지 오빠의 두런거리는 말소리를 타고 가끔 부인의 웃음소리가 일었다. 주경은 다정한 모자간의 산책과 오빠의 그 다감하고 지극한 마음에 감복을 금치 못했다.…

역시 강대철아저씨의 슬하에서 자랐고 영웅의 넋을 이었다면 그 됨됨이 훌륭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미덥고 훌륭하리라는 기대가 사랑으로 가는 길일가? 몸으로, 피부로 일으키는 느낌도 없이 그 누구의 요구나 강요로 이룩되는 결합이나 제3자가 놓아준 다리를 타고 만나게 되는 그런 물리적융합이 과연 사랑일가. 그것은 넋도 감정도 없는 육체적인 결합외에 아무것도 아닐것이다. 사랑은 심장이 하는것이지 육체의 반응은 아니다. 사랑은 서로 같은 목적을 지향하는 속에서 감성이 일으키는 느낌과 동시에 서로 강렬한 삶에로 승화시키는 생의 불길이며 두 심장이 부단히 하나로 응결되는 과정이 아닐가. 때문에 어느 책에선가 사랑은 노력하는 작업행위가 아니라 느끼는것이며 그 느낌대로 따라가는 숭고하고 영원한 삶의 표현이라고 하였다. 또한 참된 사랑이야말로 삶의 원동력이며 생의 전부라고 하지 않았던가.

전주경은 그러한 값높은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아직 체험을 못했던만큼 그저 희망으로 간직하고있을뿐이였다. 만약 그런 사랑으로 심장이 타오르지 못한다면 일생을 처녀로 마쳐도 겁나지 않았다.

이따금 그의 처녀다운 공상은 자기 심장이 이제 누구를 위해 타버릴가 하는 달콤하면서도 두려운 꿈속을 날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다지고다진 화약이 터지듯 그 맹렬한 폭발에 심장이 터져버리든가 아니면 그 화염에 한줌의 재가루로 화할것 같은 우려로 가슴을 떨군 했다. 전주경은 그러한 사랑의 불씨를 리진의 가슴에도 심어주고싶었고 이 새벽에는 그에 대한 그리움이 한층 불타올라 또 한밤을 꼬바기 지샌 피로를 다 잊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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