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21 회


제 1 편
은백양나무에 새겨진 자취


제 9 장


2


강대철은 날이 어두워지는줄도 잊고 직장속보판앞에 쇠말뚝처럼 버티고 서있었다. 최근 70일전투준비로 끓는 직장안의 성과와 각종 경쟁도표들, 투쟁구호들로 일색된 길다란 속보판 한칸에는 유독 한장의 수채화가 붙어있었는데 강대철은 거기에 눈뿌리를 뽑히고있었다. 얼마전에 직장종업원들을 고무하여 여러가지 예술종목을 갖고왔던 용수중학교의 한 학생의 그림이였다. 멀리 원경에 아스라니 솟은 페불굴뚝, 타래치는 불길, 거기서 빗살처럼 퍼지는 불노을… 그 감빛노을은 구름우에 솟은 탑들의 정수리를 금빛으로 채색하며 연보라빛어둠속에 잠긴 수평선을 향해 흘러갔다. 그 수평선너머로는 미구에 장쾌한 해돋이가 시작되려는듯…

미술에 조예가 없는 강대철이지만 그림이 말해주려는 의도가 환히 알려 경탄을 금치 못했다. 많은 종업원들이 이 그림앞을 그냥 지나지 않았다. 이 그림을 보면 누구라없이 공장을 아름답게 그린 어린 미술가의 장래를 촉망하게 된다.

그런데 리진이가 이 그림앞에서 머리를 쳐들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예민한 감각으로 다른 사람들이 미처 포착하지 못한것을, 강대철자신도 모르고있는 사실을 밝혀냈고 기술자로서의 자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헌데 그는 왜 페불에 뛰여들기를 단념했는가? 국부도입때문일가?…

날저무는 하늘에는 길잃고 헤매이는듯 한 외로운 날새 한마리가 넓은 공간을 오락가락 날아옜다. 강대철은 어딘가 구석진 곳에서 외롭게 지낼 한 인간이 떠오르자 심신이 저려들었다.

그때 등뒤에서 난데없이 안해의 부름소리가 들려 그는 뒤돌아섰다. 한손에 무슨 꾸레미를 든 안해가 외지팽이를 짚으며 이편으로 다가왔다. 안해의 이 뜻밖의 출현은 강대철을 심히 놀라게 했다. 한뉘 부상처로 집울안에서만 맴돌아치던 안해가 이렇게 공장까지 찾아오리라고는 실로 꿈도 꾸지 못할 일이였다. 일이 바빠 며칠째 집에 들어가지 않았더니 그사이 이다지도 몰라보게 회복되였단 말인가.

《당신 예까지 혼자서 왔소?》

강대철은 못내 미덥지 않아 안해의 피기없는 얼굴과 지팽이에 의지한 연약한 몸을 훑었다. 안해는 대답은 않고 한자리에 멈춰서더니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돋은 땀방울을 찍어내며 소리없이 웃었다. 그 파리하고 연한 미소는 봄날의 새순처럼 가냘팠어도 소생하는 자기 힘에 대한 긍지와 샘처럼 솟구치는 기운에 뿌리를 둔 미소였다. 그리고 미소로 가늘게 쪼프려진 안해의 눈은 《당신은 믿지 않아도 나는 이렇게 걷거던요.》라고 말하듯 밝은 빛을 발산했다.

《마을에서만 보던 공장이 와보니 정말 굉장하군요.》

안해는 어쩌다 나들이를 하게 된 소감을 이렇게 피력했다. 그가 고작 바깥출입을 했다면 저 멀리 사택마을과 잇닿은 용수천상류의 제방뚝아래 자드락길이였다. 날씨가 좋고 달빛이 유정한 밤이면 쌍지팽이를 짚고 아들 철민이의 도움을 받으며 용수천물소리가 주절대는 자드락길을 따라 산책하군 하였다.

강대철은 미꾸라지가 룡으로 둔갑한것 같은 미심쩍음과 희한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당신 공장이 되게 보고싶었던게지?》

《당신의 모습인걸요. 왔던김에 주경이한테 들려보고싶어 그 애가 좋아하는 송편도 빚어왔어요.》

안해는 자못 신이 나서 말했다. 저로서도 첫걸음이나 다름없는 이 산책길에 무슨 목적을 담고싶었던 모양, 어느해 설에 집에 찾아온 주경이가 안해가 빚은 송편을 맛스레 먹던 그것이 생각났던 모양이다.

강대철은 지금 주경인 정양소에서 영양제식사를 보장받고있다고 말해주려다 안해의 성의가 무색해질가봐 그만두었다.

《그거 마침이요. 갑시다. 나도 그 앨 만나려던 참이요.》

강대철은 집에서 하던 습관대로 안해를 부축하려고 한손을 내밀었다. 안해는 그 손을 가볍게 밀치더니 지팽이로 중심을 잡으며 아주 자신만만히 한걸음한걸음 또박또박 옮겼다.

《당신 정말 룡이 됐구려.》

강대철은 쌍지팽이로도 겨우 걷던 안해가 외지팽이로 힘있게 걷는것이 신기하고 대견스럽기만 했다. 안해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자 화기가 도는 눈빛을 쳐들더니 쑥스러움과 살가움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여보, 내가 요즘 무슨 생각을 다하는지 알아요?》하고 묻고는 저도 우스운지 처녀애들처럼 한참이나 깔깔 웃었다. 강대철은 여태 있어본적 없는 안해의 수다와 즐거움에 의아한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나도 남들처럼 애를 낳고싶군요.》

봄바람같은 살풋한 안해의 말이였다. 강대철은 가던 걸음을 세우고 실성한것 같은 안해를 얼없이 쳐다보며 토막웃음을 쳤다.

《허헛, 못하는 소리가 없군. 우리 나이가 이젠 몇인데…》

《호호… 내 그저 해본 소리예요. 상처가 아물고 몸에 기운이 생기니 당신 애를 낳아주지 못한 빚을 갚고싶은 생각이 다 들잖겠어요.》

《또또 괜한 소리, 꼭 제가 낳은 자식만 자식이겠소. 우리 철민이를 잘 키웠는데 이제부턴 그 애 뒤바라질 착실히 해주면 되잖소.》

《그래두…》

말끝을 흐리는 안해의 그 마음은 이미 짓눌려버렸던 강대철의 가슴속에서 알찌근한것을 후벼냈다.

골반골수염탈로 몸이 쇠약할대로 쇠약해져 젊은 시절에 임신중절을 해버린 후 더는 안해의 건강을 해칠 자식낳이를 아예 단념해버린 그였지만 이 저녁 다시 떠올리니 철늦은 절기를 탓해야 할지 맺지 못한 열매를 탓해야 할지… 그저 속이 싱숭생숭할뿐이였다.

날씨도 푸근하고 바람도 잔잔하고 거세찬 동음마저도 가락맞게 들려오고… 평생 처음 남편과 함께 대지를 활보하게 된 그 감격이 오죽 컸으면 안해는 자기한테 진 빚이자 제 소원이였을 속마음까지 비쳤겠는가.

강대철은 잠시나마 안해의 애잔한 감정에 휘말려든것을 후회하며 공업연구소뜨락에 들어섰다.

《저 2층에 주경이가 있소. 층계를 오르자면 나한테 업혀야겠소.》

안해는 잠시 생각을 굴리다 아무래도 자신없는듯 강대철의 한팔을 다정하게 잡고 속삭이였다.

《좋아요, 또 신세를 지자요. 다음번엔 이 지팽이없이 나혼자 오르겠어요. 그다음엔 두고보라요. 내가 당신을 업지 않나.》

《저런! 나한테 진 빚을 그런 식으로 갚을셈이요?》

《빚갚음이요?》

《핫하하…》

《호호호…》

이 허물없는 내외간의 롱질과 웃음소리는 아뿔싸! 고요속에 잠겼던 공업연구소의 대기를 뒤흔들어 아래웃층 창문들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내다보기도 하였다. 급해맞은 강대철은 안해를 끌고 현관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때 층계를 구르는 재빠른 구두발소리와 함께 주경이가 현관쪽으로 총알처럼 튀여왔다. 그는 강대철의 안해앞에 와 멈춰섰다. 놀라움과 기쁨의 불꽃이 그의 눈동자에서 연방 튀였다.

《어마나!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주경은 강대철의 안해를 목메여 부르며 부둥켜안았다. 그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돌아갔다.

《주경인 그새 더 이뻐졌네.》

《하아, 이 가을바람이 낟알만 익힌줄 알았소? 처녀도 익히거던.》

강대철이 능글능글 껴들자 주경이 한술 더 떴다.

《난 아저씨가 동부인하는줄도 모르고 저 녀성은 누굴가?… 아저씨 늦바람났나부다 했지요 뭐, 호호.…》

《하아, 나라고 못할가. 머리카락 셌다구 다 쇤줄 알아? 아직 뭐나 다 쌩해!》

강대철의 희떠운 소리에 또 연구소를 들었다놓을 폭소가 터질번 했다. 강대철이 얼른 입에 손가락을 대여 그 웃음들을 억지로 삼켰다. 주경은 그들부부를 아래층 손님면담실로 안내하였다. 그는 강대철의 안해를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히며 살뜰히 물었다.

《정말 꼭 꿈을 꾸는것 같애요. 무슨 약을 썼어요?》

《지난 여름부터 새로 나온 광폭항생제를 강타했더니 말을 듣지 않겠나.》

《그 약은 어데서 났게요?》

《오, 전후에 내가 치료받던 도인민병원약국에서 소포로 보냈더구만.》

《어쩜 잊지 않고… 참 고마운분들이군요.》

《그래서 내 글재간은 없지만 진정을 담아 그곳 의료일군들앞으로 감사편지를 썼어.》

안해는 품에서 두터운 편지봉투를 꺼냈다. 그 감사의 인사는 강대철자신이 마음속에 품고있던 생각이기도 하였다.

《참, 잘 생각했소. 그 편질 인주오. 내가 부칠게.》

《아니, 절 주세요. 래일 아침 제가 체신소에 갈일이 있어요. 과학원과 전화로 토론할 일이 있으니까요.》하며 주경은 편지를 제가 간수하였다. 정말 체신소에 갈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주경은 그렇게라도 강대철의 가정사를 돕고싶어했다.

《그건 그렇고… 내 주경이한테 알고싶은것이 하나 생겼다.》

강대철의 기색은 갑자기 웃음기가 가셔지고 그대신 진중해졌다.

《페불 말이다. 그걸 잡을 방도는 바로 섰는지?》

《네. 국부도입안을 심화시키려고 해요.》

주경은 아무런 표정도 색갈도 없이 흔연히 대답하였다. 강대철은 순간 가슴에 차있던것이 훌 빠져 달아나버린듯 허전해났다.

《음, 그랬댔군.》

승학반장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바다를 이룬 창밖, 공장구내를 묵묵히 내다봤다.

《국부도입이라… 군대식으로 말하면 고지익측만 먹자는건데… 그래 그 익측을 먹으면 고지를 타고앉을것 같은가?》

《저… 한점의 불꽃이 료원의 불길로 된다고 하잖아요.》

《한점의 불꽃이? 그럴수도 있지. 헌데 어쩐지 내 짧은 소견같아선 페불전량을 한꺼번에 잡는 대담한 안에 비하면… 전진이 아니라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것 같거던.》

《호호… 물러서는게 아니라 오히려 전진이예요. 먹지 못하는걸 한점이라도 먹거던요.》하고는 주경은 재빨리 국부도입의 타당성이며 그 경제적의의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나갔다. 강대철의 귀에는 그 말들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기술을 잘 모르는 사람의 말이니 곡해하진 말어라. 어련하랴만… 우리의 목표는 당의 높은 뜻을 실현하는 길이라는것을 명심해다오. 네가 그새 밤낮없이 연구실에서 고심하는줄 알면서도 돕지 못해 안됐다.》

어느새 강대철의 안해가 앞탁우에 들고온 보자기를 풀어 송편이 무드기 담긴 그릇과 간소한 반찬가지들을 차려놓았다.

《주경이, 변변찮아. 맛있게 들렴.》

《아이, 송편!》

주경은 눈빛을 빛내며 두손을 딱 마주쳤다. 그의 높은 지성속에는 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동심같이 천진한데가 있었다. 주경은 마다하는 기색없이 제사 떡그릇의 주인이 되여 저가락에 꿰여 강대철이와 그의 안해한테 먼저 권했다.

잠시 강대철내외간은 주경이와 함께 단란한 가족분위기에 잠겨 음식을 나눈 후 밖에 나섰다.

(국부도입이라… 리진의 실패가 한꺼번에 페불을 먹으려 했기때문에 로가 목이 메여 터졌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국부도입은… 어쩐지 다 잡을수 없어 부리는 요령처럼 생각되는것은 무엇때문일가?…)

강대철의 발걸음은 자못 무거웠다. 비로소 알게 된 페불리용의 두가지 안이 그의 뇌리에 쇠덩이처럼 매달려 떨어질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국부도입안을 덮어놓고 기술신비주의에서 오는 패배주의로 몰아붙일수는 없었다.

새로운 과학기술적문제는 반론과 부정, 첨예한 과학기술론쟁속에서 태여나야 더 실속있다. 이 문제도 그렇게 봐야 할가? 이것은 다른 문제, 이를테면 새로운 과학기술에 림하는 관점문제가 아닐가? 그렇다면 내가 리진이를 타매한것은? 그는 국부도입안을 반대했기에 페불에서 제가 할 몫이 없다고 손을 뗐을수도 있었다. 얼핏 부르르 떨던 그 입술, 물기로 번쩍이던 눈과 고개를 떨구던 모습이 눈을 찔렀다. 그러자 가슴은 무엇엔가 뜨끔하니 깨물린것 같았다.

《여보, 뭘 그렇게 아까부터 심각히 생각해요?》

잠자코 있던 안해가 지루한 침묵에 증을 냈다. 처음으로 남편과 함께 걸어보는 이 밤길, 꿈속에서도 몇번이나 그려봤을 이 길, 행복에 젖어 그윽히 빛나는 얼굴… 강대철은 안해의 심정이 헤아려져 눈굽이 저릿해났다.

《여보,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우리 당일군들이 늘 군중속에 들어갈데 대해 가르치고계시오. 난 그 말씀을 접할 때마다 나야말로 군중속에 있는 일군이라고 자부했소. 로동자들과 함께 일도 하고 밥도 먹고 때론 같이 자기도 하니 말이요. 하지만 오늘 보니 아니였소. 몸은 군중속에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들어가지 못했으니 말이요.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내가 무슨 당일군이겠소.…》

《여보, 무슨 일이 있었어요?》

《…》

《또 그 휘발유성미가 살아난게군요.》

강대철은 후유 하고 긴숨을 내뿜었다. 그는 가던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리고는 안해를 미안스레 바라봤다. 안해는 남편이 말 못하는, 괴로와하는 눈빛에서 모든것을 다 읽은듯.

《걱정말아요. 내 혼자 조심조심 살펴갈게요. 어서 가보세요. 누구인지… 이밤… 잠들지 못할수도 있어요.…》

《고맙소.》

강대철은 오던 길로 되돌아섰다. 리진의 집은 그의 집과 방향이 다른 주택지구에 있었다. 강대철은 한식경이 실히 걸려서야 비파봉산탁에 자리잡은 리진의 단층집앞에 이르렀다. 고즈넉한 정적이 깃든 방은 불빛으로 환했다.

(그녀석, 상기 잠들지 못하는가보군.)

강대철은 제창 삽짝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가려다 먼저 한숨 돌리며 땀을 들이고싶었다. 그는 담장밖에 쌓인 나무단우에 걸터앉아 한대 붙여물었다. 뿌연 담배연기가 시름겹게 날리였다.

그때 갑자기 집안에서 환성비슷한 소리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러니 이게 고령토가 옳다는거지요? 됐어요, 됐단 말입니다. 어머니! 하하…》

리진의 웃음소리였다.

《이게 독을 굽는 흙이 분명하다. 이 흙이 어데쯤에 있더냐?》

유선림의 목소리도 기쁨에 떨었다.

《비파봉뒤산 쌍바위골에요. 그곳 토배기로인이 대주는데를 여기저기 뚜졌더니 오늘에야 나지지 않겠어요.》

《네 이 며칠째 역사질한 보람이 있구나. 그래 이 흙이 그렇게 절실하냐?》

《로보수에 꼭 있어야 해요. 로가 제대로 돼야 70일전투과제도 수행할수 있잖아요.》

《?!》

강대철은 얼핏 낮에 직장장이 로대보수에 걸린 자재들을 하나하나 꼽을 때 고령토라는 품목을 들은것 같았다.

(그럼, 이밤 리진이가?!…) 강대철은 가슴이 쿵 뛰였다.

《어머니, 배고파요.》

《아서라, 네 주제를 봐라. 온통 흙투성이야. 어서 몸을 씻어라.》

《야 참, 밥부터 먹자는데…》

《원 녀석두, 급하기란, 호호.…》어머니와 아들의 웃음소리가 밤의 정적을 그냥 흔들었다.

강대철은 뜨거운것이 치밀어 눈굽이 확 달아올랐다. 주눅이 든것 같아 이밤 마음을 썼더니… 답답하던 가슴이 활 열리였다. 강대철은 나무단에서 일어나 엉뎅이를 툭툭 털고는 다시 공장을 향해 씨엉씨엉 걸음을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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