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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제17회


제 1 편
은백양나무에 새겨진 자취


제 8 장


1


《착순이라…》

유선림이 두고간 동화의 마지막장을 덮은 강대철은 깊은 생각에 잠겨 창밖을 내다봤다. 멀리 희벗한 서쪽하늘에는 별 하나가 돋아 반짝이였다.

《착순이라…》 다시 입속말로 뇌이던 그는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독후감이 맘에 들지 않았다. 크고 단 열매를 위해 한줌의 거름으로 희생한 주인공의 삶은 리해되였다. 그러나 주인공을 너무 각박한 환경에 얽어매놓아 순수 생물적인 삶으로 그린듯 한 인상이 없지 않았다. 만약 착순이가 앉아서 죽지 않고 공격정신을 안고 맞받아 일어나 싸웠더라면 그자신도 크고 단 열매가 되지 않았겠는가. 죽음을 각오한자앞에는 이기지 못할 난국이 없다.

하다면 유선림은 어째서 이와 같은 맹목적인 착순의 희생을 리진이 한테 요구하는가? 자기의 희생을 두려워한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라서인가? 어쩐지 가정의 허물을 가시려는 녀인의 눈물겨운 속죄가 다분한것 같다.

전후의 어느해 추석날, 인민군렬사묘앞에서 류다른 인연으로 알게 된 때로부터 기쁜 일이 생겨도 찾아오고 아픈 일도 허물없이 하소연하여 생활의 오랜지기가 된 녀인이 이 저녁 안고온 사연은 참으로 뜻밖이였다.

《비서동지,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우리 애가 글쎄…》

유선림은 말꼭지를 떼놓고는 눈에 수심을 가득 담고 머밋거리기만 하였다. 언제봐야 몸가짐이 정숙한 녀인이 이렇듯 헝클어져있는걸 보면 필경 충격적인 일이 생긴것 같았다.

강대철은 주전자의 물을 한모금 따라주며 녀인을 자리에 앉혔다. 물한모금 마신 유선림은 얼마간 진정한 다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이즈음 리진이한테는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침울하던 눈빛이 양기로 밝아지고 거칠하던 얼굴색도 멀쑥해졌다. 텁텁하던 옷에 주름발을 세운다, 머리에 기름을 바른다, 자주 거울앞에서 옷매무시를 바로잡기도 했다.

유선림은 어머니다운 감각으로 아들한테 이성의 봄이 움트고있음을 감촉하였다. 아직은 찍어말할수 없어도 그 모든 변화들은 알지 못할 기쁨의 조짐으로 가슴을 들레이게 하였다.

세월의 물결은 어느새 그를 떠싣고 예까지 왔는지… 엊그제 같기도 하고 풍운에 가리워진 하늘끝처럼 아득하게만 여겨지던 풍파사나운 지나온 일들이 자꾸 떠오르기도 했다. 사나운 전쟁의 난파도에 밀려 하루밤사이에 부평초신세가 되였던 몸이며 아버지없이 자랄 애의 앞날과 남편의 잘못으로 몇번이나 모진 마음을 먹었다가도 애처로운 애의 울음소리에 깨여나던 일이며… 그리고 어린것의 손을 잡고 유치원이며, 소학교며, 원족이며 때로는 훌륭한 아빠를 심어주고싶어 인민군렬사묘를 찾아가던 그 모든 생활들이 화면처럼 눈앞에 흘러가기도 하였다.

아들은 험난한 생활의 파도를 헤칠수 있게 한 가정의 노대였고 힘이였고 희망이였다. 그 아들이 이제는 성년이 되여 장가들 나이가 되였다. 녀인은 미구에 맞이하게 될 며늘애와 손자손녀를 그려보며 자기가 벌써 시어머니로, 할머니로 불리울 끔찍한 생각에 소스라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행복의 선률은 그의 마음속에서 그칠줄 모르고 울리여 깊은 밤에도 잠을 설치군 하였다.

바로 그무렵에 녀인은 아들의 손지갑에서 낯익은 처녀의 사진을 보게 되였고 또 전날에는 아들의 밀회도 목격했던것이다.…

《그러니까 리진이가 주경이를 맘에 뒀다는거겠소?… 난 또 되게나 큰일이 생긴줄 알았구만. 하하하…》

저윽 긴장해있던 강대철은 한참이나 배포유하니 껄껄 웃었다. 눈굽에 눈물까지 질끔 내뱄다. 그러나 녀인은 입을 다문채 머리를 외로 틀며 절망적인 몸짓을 했다. 강대철은 그냥 웃음소리를 내뿜었다.

《난 반대없소, 절대찬성이요! 애들이 어릴적부터 함께 자랐으니 서로 성격도 취미도 잘 알게구 지식으로 보나 됨됨으로 보나 나무랄데 없는 배필로 될수 있소. 그런 일은 그들 두 심장이 알아서 할테니까 부모가 곁에서 관여할바가 아니요. 난 굿이나 보다 떡이나 먹겠소. 내버려두기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소.》

강대철은 리진이 못지 않게 전주경이와 깊은 인연을 갖고있었다. 군당에 있을 때에는 애국렬사가족인 전주경이네 집을 자주 찾아 생활상애로를 풀어주기도 하였으며 남달리 총명한 주경의 성장에도 각별한 관심을 돌리군 하였다. 오죽했으면 전주경이 대학기간 보호자인 삼촌보다도 강대철이와 더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겠는가.

유선림은 자못 흡족해하는 강대철을 망연한 눈길로 쳐다보다 금시 기겁할듯 광택없는 머리와 좁은 어깨를 떨었다.

《원 롱담두, 시퍼런 하늘이 내려다보는데… 주경이가 뉘집 자식이라구 감히… 비서동지도 잘 알지 않아요, 주경의 아버지가 누구때문에 잘못됐다는거야. 주경이나 그의 삼촌이 알게 되면… 안됩니다. 안되구말구요.》

《왜 오늘은 주정질하러 왔소? 리치를 따져놓고봐도 제 아버지 잘못을 자식이 어떻게 책임진단 말이요? 더구나 리진이 태여나기 전에 벌어진 일인데야. 그때문에 언제 당에서 차별을 둡디까? 왜 자꾸 자기를 속박하지 못해 안달이요, 엉?》

강대철은 왝 소리를 질렀다. 노여움이 터진 그의 관자노리에는 불깃불깃한 얼룩이 돋았다. 그런데 가슴 한켠에서 무엇인가 깨물었다. 전주경당자가 아니라 그의 삼촌인 전준혁이 떠오르자 눈앞이 암울해졌다. 전준혁의 성품이 그 아무리 너그럽기로서니 리진의 아버지가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저지른 일을 알게 되면 과연 리진을 제 집안사람으로 받아들일수 있을가?…

오늘날 당의 폭넓은 군중로선으로 하여 지난 시기 일부 사람들속에 생긴 호상 반목과 질시, 오해와 불신들이 해소되여 하나의 대가정을 이루었다고 볼수 있겠지만 이들처럼 서로 상치된 두 가정의 융합은?…

강대철은 경험있는 당일군이지만 이러한 인간문제에 맞다들어보기는 처음이였다. 할말을 잃어버린 강대철은 유선림의 낮고 떨리는 말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저라고 눈이 없고 몸에 피가 없어 당의 고마움을 잊고 살겠나요. 이번 일을 봐도… 우리 애가 큰 재구를 쳤지만 다 무탈하게 해주지 않았나요. 그 은공을 잊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실수없이 일에 더 채심해야 할 녀석이… 허파에 바람이 들어 오르지 말아야 할 나무만 쳐다보고있으니… 내 참다못해 제 애비가 저지른짓을 다 말해줬어요. 제 몸값을 똑똑히 알구 처신하라구 말이예요.》

《뭐요?!》

강대철은 와뜰 놀랐다. 그는 대뜸 리진이한테 닥친 심리적타격이 헤아려졌다.

《왜, 지나간 아버지의 허물을 시시콜콜 알아서 어쩐다는거요?》

《이젠 그만큼 뼈다구가 굵어졌으면 죄다 알구 이겨내야지요. 모질어도 맞아야 할 매는 맞고 일어서야 제구실을 할게 아니겠어요. 그래… 내 혹시 도움이 될가 해서 이 책을…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살라고 읽혔어요.》

《?…》

강대철은 녀인이 가방에서 꺼내는 책을 얼결에 받아쥐였다.

무슨 내용인지 호기심도 없지 않아 두고가라고 일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야 착순의 희생은 결코 억센 삶이 아니였다. 어느 한 계선에 주저앉은 삶이였다. 삶은 투쟁이며 새로운것에 대한 부단한 개척으로 되여야 한다.

그러니 유선림의 생활리념에는 얼마나 큰 착오가 생겼는가. 리진의 어릴 때에는 렬사묘앞에 세워 나라를 위해 훌륭한 인간이 되기를 바랐으면서도 오늘은 그의 앞길에 넘어서는 안될 계선을 그어놓고있었다. 녀인이 바라는 희생이란 조국의 부강을 위해서라기보다 자기의 집안허물을 사죄하고 가정을 구원하려는데 있었다. 때문에 리진을 가정만 생각하는 나약한 인간으로 만들려 하고있다. 이는 다른 의미에서 그한테 죽음을 강요한것이나 다름없었다. 사회를 위해 부단히 뛰고 달려야 할 능력을 갖춘 인간이 현실에 피동적으로 참가할 때는 그것은 곧 죽음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당장 그를 구원할 방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최소한 그의 마음속 소원을 풀어줘야 했다. 그러자면 먼저 그를 70일전투기술혁신돌격대에 인입하도록 기사장을 납득시켜야 했다. 강대철은 오늘 낮 렬차편으로 기사장이 공장에 돌아왔다는것을 알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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