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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제 14 회


제 1 편
은백양나무에 새겨진 자취


제 6 장


2


《님자, 왜 이리 늦었나. 녀편네치마폭에서 떨어지기 무던히 가쁜가보지?》 준갑은 쿨룩쿨룩 기침질을 하며 연유창경비막으로 들어서는 영도한테 눈을 흘겼다. 하면서도 영도가 누비솜옷앞섶에 안고있는 버치에 미심쩍은 눈길을 던졌다. 영도는 버치를 방바닥에 무겁게 놓고는 땀발이 즐펀한 얼굴을 소매자락으로 훔쳤다.

《집사람이 당장 일을 칠것 같아서…》

영도가 텁수룩한 코밑수염을 움쩍거리며 면구스레 말끝을 얼버무리자 준갑의 강마른 얼굴이 느슨해졌다.

《님자, 또 앞치마를 두른가보군. 그래 집사람 몸풀 때가 언제게?》

《오늘만 래일만 하우다. 이따금 하던 요동질이 잦은걸 보면… 오늘장에 미역사러 갔댔는데 장이 텅 볐더군요.》

《미역 말인가? 우리 집에 있네. 우리 집 아낙도 제 몸 조짐이 별나다며 미역을 사들이는걸 봤네. 참, 녀편네들이란 이 란리통에도 제할짓은 다한다니까. 허허…》

롱질을 즐기는 준갑은 우스개소리로 너스레를 떨다말고 갑자기 제무릎을 탁 쳤다.

《아뿔싸! 우리 집사람이 피난짐에 다 걷어싣고 갔을거네. 이를 어쩐다?》

《일없수다.》

영도는 되우 랑패스러워하는 준갑의 진정에 감심되여 무릎을 꺾고앉아 버치우에 씌운 베보자기를 벗기였다. 더운 김이 물씬 피여오르며 구수한 낟알익은 냄새를 풍겼다.

《아니, 이건 팥죽이 아닌가?》

《팥죽을 쑤어 동네방네 돌리면 태여날 아이의 구복도 좋아지고 별탈없이 자란대요. 그래 오늘 한가마 쑤어놓고 이웃들을 돌아쳤수다. 다들 피난가고 마을이 텅 비지 않았겠수. 형님이나 실컷 자시우.》

《자네 첫 애를 재귀열에 잃더니 무던히 로망스러워졌군. 인주게. 내가 배껏 퍼먹고 애한테 복을 주세나.》

준갑은 병색이 짙은 몸이였어도 락천가였다. 그는 얼른 숟가락을 들고 버치에 마주앉았으나 몇술 뜨지 못했다. 그의 우무러든 가슴속에서 발작적인 기침이 터져나왔다. 페와 기관지가 약한 그는 환절기면 천식증에 시달렸다. 그는 영도가 뒤잔등을 한참 두들겨줘서야 진정하였다.

용수천하류에는 크지 않은 연유창이 있었다. 지상구조물은 이미 폭격에 엿가락이 돼버렸지만 지하탕크들에는 얼마간의 연유가 남아있었다. 한달전까지만 해도 남진하는 수송기재들에 연유를 공급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벅적 끓어대던 곳이였다. 차들의 발동소리, 웨침소리, 웃음소리… 저마끔 기름전표들을 내흔들며 먼저 받으려고 고함치기도 하고 으르기도 하고 빌붙기도 하고 약바른 축들은 《승리》담배곽을 연유공급원들의 주머니에 찔러넣을 기회를 엿보며 끓던 연유창뜨락에 지금은 음산한 마가을바람에 마른 나무잎들만이 굴러다니였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시작되자 다들 소개지로 떠나고 두사람만 남아 뒤거두매질과 후퇴하는 수송차들에 남은 연유를 마저 공급해주고있었다. 잔기침질을 하던 준갑은 몸에 후렁한 개털등거리를 걸치고는 남포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사람 영도, 오늘 낮에 기별이 왔네. 학송기계공장화물차들에 나머지 기름 전량을 공급해주라고 말일세. 당장 군수품생산을 해야 할설비들과 물자들을 소개할 차들이라는구만. 오늘 밤에 들이댈수 있으니 자리를 뜨지 말아야겠네. 우리도 그 기름만 보장하고는 떠날 차비를 하세나.》

《해야지요.》

영도는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해산진통에 시달리고있는 안해때문에 근심이 하늘같았다. 후퇴초기에 멀리 촌에 있는 친정집에 보냈어야 했는데 폭격이 심한 로상이 안심치 않아 단념했던 일이 이다지도 손발을 얽어매고 마음에 어두운 그늘을 던져줄줄은 몰랐다. 나이들어 장가든 영도는 안해에 대한 잔정이 극진한데다 이즈막엔 첫 애를 잃고 다시 몸풀 때라 연유공급원일보다도 집안일에 더 왼심을 썼다.

준갑은 가정에 다심스러운 영도의 심정을 헤아려 연유창일들은 제가 도맡아하군 하였다.

《님자, 오늘 녀편네 시중드느라 고역을 치렀을텐데 먼저 눈을 좀 붙이게, 내가 순회할테니까.》

《아니 원, 내가 하리다. 형님의 신색이 썩 좋지 않수다.》

가뜩이나 늦어온 영도가 펄쩍 뛰자 준갑은 손을 홰홰 저으며 또 너스레질이다.

《아따, 나야 초밤잠이 없는 놈 아닌가. 밤에 차들이 닥치면 깨울테니까 맘놓게. 그새 꼬투리달린 애녀석 꿈이나 꾸게. 허허…》

준갑은 껄껄 웃으며 남포등을 앞세우고 밖으로 사라졌다.

경비막안은 먹물같은 어둠에 잠겼다. 홀로 남은 영도는 밀물처럼 겹쳐드는 가지가지 잡념에 쫓기기 시작하였다.

지금쯤 안해는 또 진통을 겪지 않는지. 그 몸을 갖고 친정에 무사히 가내겠는지… 딸애를 낳으면 잃어버린 애를 다시 찾은셈인데… 정말 준갑형 말처럼 꼬투리달린 녀석이면 좀 좋을가.…

비좁은 경비막바닥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이며 궁싯거리던 영도는 어느결에 솔곳이 잠들었다. 그는 잠결에 꿈속을 헤맸다.

갖가지 꽃들이 울긋불긋한 숲속이였다. 해빛이 누비는 나무숲에는 이름모를 새들이 겨끔내기로 지저귀고 유난히 배가 흰 까치 한마리가 높다란 나무가지우에서 꼬리를 촉삭거리며 우짖었다. 그 나무아래에는 해말쑥한 아기를 품안은 안해가 숫접게 웃고있었다. 아기는 해죽거리며 나무가지를 가리켰다. 영도는 그 손짓을 따라 나무우듬지를 쳐다보았다. 까치는 온데간데 없고 그 자리에 빨간 능금 한알이 달려있었다. 영도는 나무에 오르기 시작했다. 한가지한가지 이어잡으며 올라도 능금알은 더 멀어져만 갔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조그맣고 납작해뵈는 안해와 아기는 그 능금알을 따라고 그냥 손짓한다. 영도는 딛고선 아지가 휘청거려 잽싸게 웃가지를 잡았다. 애써 잡은 아지가 휘여들며 꺾어지는 소리가 났다. 영도는 몸이 허양 무너져내리는 바람에 악소리를 지르며 깨여났다.

그때 별안간 대기를 찢어발기는 아츠러운 소음이 귀청을 때려 악몽속에 가위눌렸던 영도는 눈을 뚜부럭이였다. 뒤미처 하늘땅이 뒤집히는 폭풍이 경비막을 들었다놓자 천정에서 흙먼지가 와스스 흩어져내렸다. 영도는 벌떡 일어나며 문을 냅다 찼다. 붉고 푸른 조명이 엇가로 누비는 밤하늘에는 적기들이 날치고있었다. 적기들의 야간공습에 연유창주변과 마을쪽은 화광이 충천했다. 사처에서 폭발의 예리한 섬광이 번뜩이고 불기둥이 치솟았다. 덩실한 학교지붕이 통채로 날아갔고 언덕받이 철도역사는 온데간데 없어져 끊어진 레루장들이 포신마냥 하늘을 겨냥하고있었다.

영도는 마른 가슴만 쥐여뜯으며 안해가 무사하기를 마음속으로 빌고빌었다. 그는 허방지방 몇걸음 앞으로 내짚었다. 그러다 한자리에 말뚝처럼 박혔다. 집쪽에서 펑긋 눈부신 섬광이 일고 허공으로 물씬 불퉁구리가 퍼져올랐다.

(아, 끝장이야, 끝장…)

영도는 허파로 쓸어드는 매연에 헉헉거리며 눈물을 씹어삼켰다. 그러면서도 어떤 요행이 그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가 바이 구원하기 힘든 안해를 짐승같은 소리로 부르며 다시 자리를 차고 내달리려 할 때 어디선가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영도, 영도― 영도―오―》

영도는 어망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불빛이 희미한 연유창어름에 누구인지 한무릎 꺾고앉아 힘겨운 물체를 부둥켜안고 모지름을 쓰고있었다.

영도는 그때에야 여태 망각하고있던 준갑을 알아보았다. 개털등거리를 입은 준갑의 겨드랑짬으로 차거운 강철빛이 언뜩거렸다. 그 날카로운 쇠빛은 비수처럼 영도의 눈뿌리를 콱 찔렀다. 순간 죽음의 검은 손이 그의 목덜미를 덮치듯 온몸은 소름끼치는 전률로 으스스 떨었다.

(시한탄?!)

병약한 몸에 시한탄을 안고 안깐힘을 쓰는 준갑의 부름소리는 퍼그나 약했으나 영도는 푸들쩍 놀라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런데 온몸이 불식간에 얼어붙은듯 다리는 뻣뻣해지고 발길은 떨어지지 않았다.

무엇인가 알수 없는 힘이 후들거리는 그의 발목을 반대방향으로 잡아끌고있었다. 어지러워지는 눈앞에 얼핏 자기 발목을 붙잡고있는 안해와 꿈속에서 보았던 아기의 작은 손이 스쳤다.

(가지 마.… 가지 마.… 아빠가 가면 우린 다야.…) 하는 눈물에 젖은 애절한 속삭임이 가슴을 허비여 그는 입술을 피지게 깨물었다.

(난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

《여엉도오―》

점점 쇠잔해지는 잔약한 소리는 뒤걸음치는 그를 다쫓아왔다. 그 소리는 귀가 멍멍할 정도로 크게 공명되여 울렸다. 그는 량손에 귀를 싸쥐고 몸부림쳤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난 안해를… 아이를 구원해야 해.…)

돌연 강렬한 빛줄기가 번쩍 하더니 세찬 폭음과 열풍이 그의 잔등과 뒤통수를 냅다 떠박질렀다. 폭풍에 몸이 허공뜬 그는 한쪽어깨를 땅에 박고 뒤로 벌렁 나딩굴었다. 허공에 치솟은 흙사태가 그의 몸뚱이를 덮어버렸다. 영도는 가물거리는 의식속에서 연유창우로 불끈 솟아오르는 불뭉치와 찢어져 날리는 허연 넝마쪼각같은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끝장이야.… 죄다…》

영도는 흙속에 묻힌채 까무라치고말았다.…

유선림은 잠시 말을 끊었다. 망연자실한 리진의 휘둥그런 눈자위가 한자리에 굳어져있었다. 연유창을 구원하고 주경의 아버지를 살릴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잃은것이 아버지때문인줄은 실로 천만뜻밖이였다. 섬찍한 소름에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아니, 이는 진실일수 없다. 사실이라면 왜 지금까지 주경이와 그의 가족들은 가만있을수 있겠는가.

《어머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설마한들…》

《그 모든 사실은 네 아버지가 보낸 편지에 적혀있었다. 난 그 편지를 친정에 가있을 때 받았다.》

《편지요?!》

《전시에 친정집이 폭격맞아 편진 없어졌지만…》

유선림은 다시금 강심을 먹고 계속하였다.

《이튿날 흙속에 묻혀있던 네 아버진 정신이 들자 준갑아주버님의 흩어진 시신이라도 모아 묻어주려고 하였다. 그런데 연유창에서 얼마큼 떨어진 둔덕에 자그마한 봉분이 생겼다지 않겠니. 누군가 고마운 손길이 준갑형님의 시신을 살펴준거라고 생각하며 지척지척 봉분앞에 다가갔다는구나. 그런데 이 웬일이겠니. 봉분앞에 세운 송진내풍기는 패말에는 네 아버지이름도 씌여있을줄이야.

〈고 전준갑, 김영도동지들이여, 고이 잠들라.〉

아, 하늘이 네 아버지한테 천벌을 내렸구나. 네 아버진 봉분앞에 엎드려 통곡했다는구나. 〈준갑형님, 어서 일어나 이 개만도 못한 놈을 쳐죽여주오. 내 이제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대한단 말이요.…〉아버진 패말을 뽑아던지고 더는 고향땅에서 살수 없음을 알게 됐다.》

리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아버진 연유창폭격당시 제 살길을 찾아 피난가다 잘못되였을뿐이예요. 어째서 어머닌 아버지한테 그런 모진 허물을 들씌우지 못해 그래요?》

유선림은 아들의 울부짖음에 눈물을 훔쳤다.

《그만해라. 그밤에 있은 일은 나밖에 모른다. 난 차마 준갑아주버님 가족한테는 말할수 없어 지금까지 내 혼자만 알고있는 비밀로 붙이고있다. 그러니 얘야… 네가 주경이를 맘에 뒀다면 그건 죄되는 일이다. 우린 그 애가 잘되게 뒤바라지도 하고… 착순이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니.》

유선림의 눈물에 젖은 음성은 서글프고 조용하였다. 하지만 리진이한테는 그 소리가 천둥이고 벼락이였다. 선림은 계속 이어갔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밤에 사람도 연유창도 잘못되다나니 화물자동차에 싣고 가야 할 학송기계공장 설비들이 굼뜬 소달구지를 리용하다 폭격에 재가루가 됐다는구나.》

《아 어머니, 다시는… 그런 말을 잊어주세요. 그리고 진실이 아니라고 해줘요. 어릴적 나한테 대주던 아버지묘처럼 거짓말이라고 말입니다. 어머니!…》

리진의 가슴에서는 쓰디쓴 오열이 터져나왔다.

그리도 이 가슴을 설레이게 하던 주경이, 그는 이 마음에 간직할수도, 만질수도, 애무할수도 없는 꿈의 환영이란 말인가. 우리는 서로 손잡을수도 없는 분렬의 존재들인가. 아, 이것이 진정 나의 삶이고 푼수였던가!

리진은 이밤 주경이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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