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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회


제 1 편
은백양나무에 새겨진 자취


제 5 장


2


《이봐요, 우리 잠간 중학시절로 돌아가자요. 오늘은 내가 불을 피울테니까 동무는 그때처럼 용기를 내주지 않겠어요?》

주경은 은백양나무를 정담아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리진이 무겁게 메고온 가방을 앞에 놓고 헤쳤다. 가방속에서는 화식기재며 여러가지 음식감들이 하나하나 나졌다.

《오늘 저녁은 내가 자취하겠다고 했더니 소장언니가 이렇게 잔뜩 꿍져주더군요. 혼자서는 배가 터질것 같아… 동무가 협조해줘야겠어요. 빨리 불을 피우자요.》

리진은 비로소 이 저녁 주경이가 어째서 만나려고 했는지 그리고 《저도 녀성이니까요.》 라고 동닿지 않던 말의 속내가 헤아려져 가슴이 찌르르해났다. 가슴속 응어리들이 저도 모르게 녹아내리고 심신이 따스해지기도 하였다.

그는 와이샤쯔를 벗어내치고 아름드리나무우로 바라올랐다.

《조심하세요, 마른 가지만 꺾어야 해요. 이 나문 거목이여도 푸르싱싱한걸 보면 아직 백년은 문제없이 살거예요.》

아래서는 주경의 목소리가 마치도 걱정많은 어머니의 다심스러운 음성처럼 들려왔다. 리진은 싫지 않은 그 소리에 느닷없이 몸이 홀가분해져 새처럼 이 가지 저 가지로 타고넘으며 강대들만 꺾어 내리떨구었다.

그가 땅에 내려섰을 때는 삭정이불이 재빛연기를 말아올리며 기세좋게 타번졌다. 불똥을 탁탁 튕기며 너울거리는 불빛에 두리는 장미빛으로 물들었다.

주경은 아낙네들처럼 허드레옷에 파란 머리수건을 쓰고 음식들을 짓느라 여념이 없었다. 제법 삭정이불 량옆에 짝지발을 세워 군용밥통을 걸어놓았는가 하면 한옆에는 돌부뚜막을 해놓고 지짐판을 올려놓기도 하였다. 기름에 고기볶는 야단스러운 소리와 함께 고소하고 상쾌한 냄새가 퍼졌다.

삭정이를 꺾어 불속에 집어넣는 리진은 주경의 음식솜씨에 반하여 도간도간 눈을 팔았다. 그 모양을 힐끗 보던 주경은 짐짓 눈을 흘겼다.

《비웃지 마세요. 난 음식솜씨가 락제예요. 대학때 군사야영가서도 제일 꽁지였어요. 내가 만든 료린 맛없다고 남동무들이 저가락조차 대지 않아 얼마나 속상하던지…》

그러한들 어떠랴. 음식맛에는 비길수 없는 마음의 맛과 향기가 리진의 가슴과 온몸에 가득차흘렀다. 리진은 꼭 꿈을 꾸는것 같았다. 주경이와 함께 있다는 사실보다도 주경이가 자기를 위해 무엇인가 정성을 기울이고있다는 그것이 꿈같이 여겨졌다. 하냥 부풀어오르는 가슴은 어디론가 끝없이 떠올라 아름다운 꽃들이 피여나고 고운 새들이 우짖는 선경속에 잠긴듯 벅차게 끓었다.

잠시후 불무지곁에 보자기를 펴놓은 주경은 거기다 음식을 차려놓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그렇게 많이 지지고 볶았는지 오리고기튀기와 닭알부침, 가재미자반, 이미 만들어 가지고온 낙지회와 굴회, 시원한 김치까지 갖추어놓았다.

그들은 음식을 가운데하고 서로 마주앉았다. 주경은 머리수건을 벗어 땀에 익은 얼굴을 씻었다. 빨간 홍조가 어린 얼굴엔 저밋저밋한 미소가 피였다. 자기가 품들여 만든 음식들이 리진의 입에 맞을는지 하는 걱정이 슴밴 미소였다.

《맛없어도 많이 들어야 해요.》하고는 먼저 고뿌를 꺼내놓고 맥주병뚜껑을 따서 부었다.

《무엇을 위해 들가요?》

《난 주경이를 위해 들고싶소.》

《아니예요. 동무의 성공을 위해. 자, 쭉 내야 해요. 나도 조금… 할래요.》

《고맙소, 주경이.》

리진은 울컥 뜨거운것이 솟구쳐 단숨에 들이켰다. 주경은 고뿌를 들고 잠시 주저하다 자신없어 살며시 웃으며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재빨리 낙지회를 한저가락 집어 리진의 앞에 쳐들었다.

《동무의 성공을 바라는 의미에서 첫 안주는 내가 집어줄게요. 입을… 아― 어서요.》

주경은 저부터 입을 《아》벌려 간청했다. 그 진정어린 마음에 리진은 덴겁하여 엉겁결에 두손을 쳐들어 밀막았다.

《이러지 마오. 이건… 이건… 제일 가까운 부부들끼리만 하는…》

《부부요?… 그럼 우리도 흉내를 내면 어때요. 호호…》

주경은 금시에 얼굴이 구운 가재빛이 되여 까르르 웃음을 터쳤다.

리진은 목이 꺽 메고 숨결이 가빴다. 여태 가슴속에서 분화구를 찾아 끓어번지던 뜨거운 격정이 불시에 눈과 입으로 쏟아져나왔다. 그는 고개를 꺾으며 흐드득 어깨를 떨었다.

《주경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내가 뭐라구… 이렇게…》

리진은 갈린 소리로 눈물을 짓씹었다. 주경의 눈에도 맑은것이 핑 고이였다. 주경은 한참이나 그린듯이 앉아있다가는 숨을 몰아쉬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난 잊지 않고있어요. 중학시절 동문 비에 흠뻑 젖어 오돌오돌 떨던 나한테 불을 지펴주었어요. 내가 추워한다고… 약골이던 내가 감기라도 걸릴가봐… 바로 이 자리에다 불을 피웠어요. 그 불이 왜 그리도 잊혀지지 않던지… 그 불은 단순한 불이 아니라고 생각되더군요. 그때 난 지식의 불을 피워달라고 했지요. 그건 아마 동무만이 아니라 나한테도 한 말이였을거예요. 그 불은 나의 가슴을 과학탐구와 창조의 세계로 불태운 불이기도 했으니까요.…》

주경은 문득 대학시절 일기장의 한 갈피에 적어넣었던 글줄이 떠올랐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겨울날, 서늘한 기숙사방에서 고향집 따스한 아래목을 그려보던 주경은 일기장을 펴놓고 적어나갔다.

…우― 우우― 창밖에서는 서슬찬 바람이 앙상한 길나무가지며 전차줄이며 고층건물의 웃설미를 휘여잡고 광란하고있다. 하늘의 해도 뿌연 장막속에 뻘건 알몸을 드러내고 떨고있다. 어느새 대학청사와 아빠트, 대극장의 지붕들에 겹겹이 쌓였던 눈더미들이 대동강저쪽 대안으로 날려 눈산을 이루었다.

이럴 때면 나는 마음속에 내 고향 은백양나무가 지펴주던 모닥불을 일군다. 그 불에 쪼이면 가슴은 금시에 훈훈해지고 얼어든 넋이 깨여난다. 그것은 온돌방의 따스함도, 화려한 비단이부자리도, 여름날 해빛도 줄수 없는 신비의 불이다. 볼수도 만질수도 없는 넋의 불이다.

그 불은 순식간에 온몸에 취할듯 한 풀향기와 싱싱한 토끼풀냄새, 찌물쿠는 여름날의 더운 비를 뿌려 이 몸을 한껏 덥힌다. 그러면 나의 심혼은 혹한속에 떨고있는 해도 품에 싸안고 애무하고싶고 눈속에 묻혀 꽁꽁 얼어붙은 대지도 녹여줄것 같다. 점점 타오르는 나의 넋은 아직은 알수 없으나 비상한 창조의 령감으로 가슴을 불태워 나를 새로운 과학탐구에로 이끌어간다. 그렇다. 나는 창조의 그 불로써 사랑하는 이 땅을 덥히고 가꾸고 기름지우련다. 오, 불이여, 내 고향의 은백양나무의 불이여!…

주경은 바로 그런 창조의 불을 안고 대학의 길고긴 나날을 지식으로 쌓아갔다. 그 불타는 지식욕앞에서 미지의 자연법칙들은 하나하나 문을 열었고 과학세계의 넓은 길이 펼쳐졌다. 때문에 그는 이 은백양나무를 과학탐구의 불을 지펴준 마음속의 벗으로 잊지 않고있었다.

《오늘은 내가 동무한테 그 불을 지펴주고싶었어요. 그사이 동문 무척 괴로웠지요? 외로웠지요? 내가 지핀 이 불에 동무의 그 괴로운 마음이 다소나마 덥혀진다면… 난…》

주경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리진의 떨리는 손이 그의 작은 손을 더듬어잡았다. 주경은 전류에 닿은듯 한순간 흠칫 몸을 떨었다. 가슴은 불시에 불덩이를 안은듯 달아오르고 소란스레 들뛰며 두근거렸다. 거친 숨결을 톺는 사나이의 더운 입김이 몸을 휩쌌다. 눈물에 젖은 리진의 눈에서는 열정에 타끓는 광채가 뿜어나왔다. 리진은 숨가삐 중얼거렸다.

《멋모르는 시절의 그 장난같은짓을 잊지 않고있다니… 주경이, 난 이젠 그 무엇도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을것 같소. 내가 재구를 치면 주경인 또 이렇게 불을 지펴 날 덥혀줄테니까. 자꾸자꾸 재구를 치고싶구만. 날 받아주오. 나도 페불을 잡고싶어 견딜수 없소.…》

《난 동무가 그러리라 믿었어요. 믿구말구요. 우린 그 길에서 잠시도 떨어질수 없는 몸이지요.》

《!…》

리진은 별안간 격정에 북받쳐 벌떡 일어나 은백양나무 몸통을 주먹으로 쳤다.

열매를 익히는 선들바람이 소리없이 일었다. 저 멀리 비파봉숲에서는 짝을 찾는 밤새의 울음소리가 아슴푸레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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