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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회


제 1 편
은백양나무에 새겨진 자취


제 5 장


1


저녁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서켠하늘과 대지는 찬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갔다. 가을날의 선듯하고 뾰족한 기운이 감도는 용수천기슭, 들크무레한 냄새가 풍기고 잎새들이 성글어가는 버드나무들에서는 석양의 금가루같은 빛이 반짝이였다.

용수천버드나무숲에 이른 전주경은 한쪽어깨에 걸멨던 무거운 가방을 잔디우에 내려놓고 정문쪽을 초조히 살폈다. 리진이와 약속한 시간을 어길가봐 무던히 서둘렀던 그였다. 낮에 전화로 리진이한테 시간을 지키라고 그만큼 당부했는데도 아직 나타나지 않는걸 보면 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는지… 리진의 신상에 미친 상서롭지 못한 일로 하여 한시도 마음놓게 되지 않았다.

오늘 아침 주경은 기술참모부서를 통하여 리진이 70일전투기술혁신돌격대에서 제명된 내막을 알게 되였다. 본인자신의 포기가 아니라 참모부서의 조치로 그렇게 되였다니 더더욱 기가 찼다. 어쩌면 그럴수 있단 말인가. 누구보다 페불을 안고 몸부림친 그를, 국부도입의 희생물이 된 그를 가차없이 차버리다니, 사람들의 소행이 이를데없이 분했다. 당자인 그자신은 심리적고통이 또 얼마나 크겠는가. 남의 집안일이여서 간참할수는 없지만 전주경은 페불과 관련된 일인만큼 참을수 없어 참모부서에 의견을 비쳤다.

참모부서는 그의 돌격대인입문제는 현재 로동단련중이므로 누구도 결심할수 없노라고 하였다. 일이 그렇게 되자 주경은 리진을 위로하고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었다. 공장에 온이래 그와 아직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한 미안스러움까지 겹쳐들었다. 그래서 늦게나마 오늘 퇴근길에 여기로 불러냈던것이다.

퇴근길로 붐비는 정문을 빠져 누군가 이쪽으로 달음쳐왔다. 보통키에 다부진 체구를 가진 리진이였다. 그는 밤색와이샤쯔에 까만 바지를 가뜬히 입고있어 날파람스러워보였다. 어릴적에는 여물지 못한 몸과 키가 주경이 자기보다 작을사하여 얕잡아보았지만 지금은 어깨와 가슴이 참나무처럼 단단하고 몸가짐들에서는 싱싱한 기운이 풍겼다.

《안됐구만, 늦어서.》

리진은 동뚝아래로 성큼성큼 내려오며 말했다. 주경은 잠자코 그를 빠른 눈길로 더듬었다. 불깃한 혈조가 퍼진 둥실한 얼굴에 안성맞춤한 코와 입, 조용히 타는 사색적인 눈빛, 그 얼굴에서 별다른 기미는 찾아볼수 없어 마음이 놓이였다.

주경은 그를 살피는 짧은 순간에도 사내싸게 삐여진데 없이 그저 곱다랗게 생긴 모습이 알찌근한 불만을 일으켜 만약 덩실한 코와 번쩍번쩍한 눈빛을 지녔더라면 자기가 재미있어하는 순하면서도 울뚝하는 성미가 없어지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무래도 지금 생김새가 제격이라고 단정하고말았다.

리진의 선한 눈에는 미안한 기색이 어렸다.

《로가 말썽을 부리는통에 그만…》

《로상태가 시원치 않나요?》

《로보수주기가 지났거니와 내가 저지른 시험사고로 더 혹사된것 같소.》

주경은 전투를 앞둔 로상태가 우려되였으나 작은아버지가 오면 어련히 알아서 할터이니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더구나 오늘은 리진이한테 그가 저지른 아픈 상처를 상기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하였다. 그러니 로상태니, 페불이니 하는따위의 말들을 더는 해서는 안되였다. 주경은 이 저녁 리진의 괴로운 마음을 다소나마 풀어주고싶은 그 하나의 생각에만 옴했다.

《로때문에 더는 걱정말아요. 기사장동지가 오시면 죄다 바로 될테니까요. 좀 걷자요.》

주경은 가방을 둘러메고 먼저 자리를 일었다. 뒤따라 일어서던 리진은 주경의 가방을 빼앗아 제 어깨에 걸쳤다.

《아니, 무슨 가방이 이리도 무겁담.》

《호호… 저도 녀성이니까요.》

《?…》

리진은 동닿지 않은 그 대답이 무슨 의미인지 의아쩍어했다. 하지만 주경은 더 입을 열려고 안했다.

그들은 용수천동뚝길에 올라섰다. 잔잔한 바람은 시크무레한 풀냄새와 물비린내를 실어왔다. 페불굴뚝에서 타는 불빛이 저녁노을과 뒤바뀌여 길바닥에 어른거렸다. 그들은 자주색불빛을 등진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음을 옮겼다.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으나 서로 가슴속에서 세차게 뛰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고있었다. 주경은 풀대를 꺾어들고 손으로 뱅뱅 돌리며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속으로 고르었다. 그런데 리진이 먼저 침묵을 깨쳤다.

《불편하지 않소? 현장에서 밤을 패며 연구사업을 한다던데.》

《며칠전 숙소를 정양소에 옮겼어요. 소장이 얼마나 극성스레 돌봐주는지 막 송구스럽군요. 첫날에 인사를 나눌 때 소장이 뭐랬는지 알아요? 주경인 새파란 봄처녀, 난 누렇게 떡잎진 녀자, 그러니 날 언니라고 불러요. 호호… 참 재미있고 다감한 녀성이더군요.》

《아마 그 소장 신셀 지지 않는 종업원은 없을거요. 나도 지난번 페불시험준비로 현장에서 밤을 팰 때 생활상방조를 많이 받았더랬소.》

《그런데 그런 훌륭한 녀성의 개인생활에도 불행이 있더군요. 일찍 남편을 여의고 딸애와 함께 살더군요. 요전날 밤 소장언니가 내 침실에서 함께 잤는데 한밤중에 일어나 약을 먹지 않겠어요. 내가 왜 잠 못드는가 물으니 그가 하는 말이 처녀시절에 생긴 버릇이라나요.… 한 남자를 마음에 뒀는데 그 사랑이 튄 다음부터는 때론 약기운으로 잠든다고 해요. 후더분하게 생긴 얼굴이며, 실력가형의 사업능력이며, 성품이며 어느모로 보나 빠진데 없는 그런 훌륭한 녀성을 외면한 남자들은 도대체 어떤 녀자를 선택할가요. 정말 믿지 못할건 남자들이예요, 남자들. 알겠어요?》

주경은 눈에 고양이발톱같은 가시를 세우고 마지막마디를 힘주어 강조했다. 리진은 겉으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야릇한 쾌감을 느꼈다. 주경은 한 녀성의 불행을 통하여 남자일반을 규탄하였지만 실은 리진이, 자기한테 경고한 소리였고 그 경고야말로 바라던 행복이였던것이다.

그러나 리진은 아까부터 궁금하던 물음이 떠올라 화제를 돌렸다.

《그래 이번 전투기간에 페불을 어떻게 할것 같소?》

주경은 주춤했다. 애써 피하고싶던 말이였다.

《동무한테는 그런 말밖에 없어요? 어쩌다 만났는데.》

《하, 나한테야 무슨 다른 말이… 실은 온 공장이 관심하고있는 문제가 아니요.》

리진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는 호인다운 선한 눈이 당황함으로 떨었다. 주경은 페불을 잊지 않고있는 그의 심정이 리해되였고 감심되기도 하였다. 차라리 말이 난김에 그의 궁금증을 시원히 덜어주는것이 옳을것 같았다.

《지난밤 작은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페불을 기어이 잡겠다고 해요.》

《그렇소? 그럼 도입방향은?》

《결심했어요. 폭발성이 심한 가스는 일차적으로 배제하고 먼저 일부의 페가스만을 먹자는거예요.》

《일부만을?!》

리진의 얼굴에는 놀람과 의혹, 실망이 한데 섞인 그림자가 얼핏 스쳤다. 주경은 그냥 앞만 보며 이어갔다.

《그건 동무의 실패에서 찾은 길이예요. 동무가 세웠던 초기목적에는 어방도 없지만 작아도 〈금맥〉으로 가는 길이라고 봐요. 물론 그길도 초행길이여서 예측할수 없는 난점들이 수없이 많을거예요. 그건 동무도 함께 풀어야 할 과제라고 봐요.》

《나야 뭐, 이젠…》

《왜요. 돌격대원이 아니라는거지요? 무슨 상관이예요? 그사이 알아보니 동문 페불연구에 가장 깊고 가깝게 접근했더군요.》

《그렇게 믿어주니 다행이요. 주경이, 내 솔직한 심정을 말하라오?》

리진은 갑자기 진중한 어조로 나왔다.

《사람마다 능력의 한계가 있는건 사실이요. 단거리기록보유자가 장거리에서는 뒤지듯이 말이요. 인간개체의 희비극은 자기의 능력과 푼수를 모르고 살아가는거라고 보오. 그렇소. 내가 달릴수 있는 능력은 이자 동무가 〈깊고 가깝게 접근했다.〉는 그 계선이 아닐가?…》

《그건 인간의 본성이나 지향을 어떤 형틀에 맞추려는 숙명적인 견해예요. 창조적인간의 능력은 시대의 요구에 부단히 걸음을 맞추려할 때 끝없이 높아진다고 믿어요. 다 아는 주정은 그만하고 이젠 다른 말을 해요.》

주경은 부러 짜증기를 섞어 불퉁그러지게 되받아넘기고는 시푸녕스러운 대화를 더는 못하게 밀막아버렸다.

그들은 용수천동뚝길이 끝나는 곳에 이르렀다. 키낮은 버드나무잎새들이 그들의 몸가까이에 드리웠다. 그 잎새를 한웅큼 훑으려던 주경은 장난궂은 미소를 상긋 지었다.

《여기가 생각나잖아요?》

리진은 주위를 두릿두릿 살피며 주경이를 찬찬히 여겨봤다.

그 눈빛, 그 미소, 그 몸가짐새가 무엇을 암시하는지 잠시 더듬던 리진은 무량한 감개가 가슴을 쳤다. 어찌 잊었으랴.

이 동뚝길에 새겨진 지난날의 자취가 자오록한 정회로 떠올랐다.…

《오늘은 뭘 배웠니?》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리론.》

《벌써? 그래 리해되던?》

《속도에 따라 시공간이 변한다는건 암만해도 잘 모르겠구나.》

이것은 리진이 공장대학시절에 있은 일이였다. 그때 주경은 대학졸업배치를 앞두고 집에 와 며칠 묵고있었다. 리진이 수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주경은 이 호젓한 동뚝우에서 기다렸다가는 그날 배운 학과를 다져주었다.

이는 향학열에 불타는 리진의 부탁이자 주경의 언약이기도 하였다.

은은한 달빛이 용수천동뚝우에 나란히 앉은 그들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동뚝아래로 용수천이 주절대며 흘렀다.

주경은 머리우에 드리운 나무이파리를 손으로 훑어 용수천물결우에 뿌려던졌다. 길쭉한 이파리들이 불그레한 물면우에 고기떼처럼 떠올랐다. 강복판에 실린 이파리들은 빠른 물살을 타고 재빨리 아래로 미끄러져갔다. 그 모양을 여겨보며 주경은 입을 열었다.

《저것봐. 물살빠른 흐름에 실린 이파리들은 어느결에 멀리로 사라졌는데 이 가녁에 들어앉은 이파리들은 느렁뱅이처럼 한자리에서 꾸물거려요. 말하자면 똑같은 시간속에서 이파리들의 운동거리만 달라졌을뿐이야. 말하자면 시간은 달라지지 않고 공간만 달라졌거던. 우린 이렇게 보는데만 습관됐고 시간의 불변성만을 절대적으로 믿었거던. 그러나 특수상대성리론에 의하면 빛속도이상의 탐험선을 타고 우주려행을 마친 아버지가 몇해만에 집에 오니 젖먹던 아들애가 할아버지가 돼버렸다는거야.》

《거야 느낌이겠지.》

《아니야. 지구에는 실지 수십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 처음 나도 이 리론에 회의를 품었어. 그래서 이 리론을 야유하는 한편의 수학시를 대학신문에 발표하지 않았겠니.


나는 이른아침 려행을 떠났네

은하수 한끝 먼먼 별나라로

신비로 가득찬

미지의 세계에 취한 몸

늦저녁에야 돌아왔더니

아, 웬일인가

아침에 떠났던

나자신과 만날줄이야


빛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려행한 나한테는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것을 암시한 글쪼박이였어. 내딴에는 그 무슨 기지를 부렸다고 자부했지만 교수선생님들은 쓴외보듯 하더구나.

이튿날 한 선생님이 날 찾더니 이 원리의 과학성을 차근차근 립증하잖겠니. 공식을 유도하면서말야. 속도에 따라 시간이 변화되는 이 원린 아인슈타인의 공식으로만 설명되고 리해할수 있는거란다. 그건 다음시간에 하기로 하고… 그런데 말이야, 난 이 리론을 익히면서 한가지 걱정되잖겠니. 내가 만약 속도없이 생을 흘려보낸다면 인츰 할망구가 될거라고 말이야. 호호…》

《난 할아버지가 된다는거야?》

《그건 두고봐야 해, 누가 더 늙어버리나.》

《그러니 속도있는 삶만이 젊음을 누린다는거겠지?》

《만약 네가 속도없이 산다면 저 강역에서 뭉개는 이파리처럼 한자리에서 늙어버리고말거야. 오래 산다는 의미는 뭐겠니. 저 빠른 물살을 타고 흘러간 이파리처럼 주어진 시간에 멀리 달린 사람, 조국을 위해 많은 일을 한 사람이 아닐가?》…

잠시 즐거운 회억에 사로잡혀 걸음을 짚던 리진은 빙그레 웃으며 주경이를 곁눈질해봤다. 지루한 침묵에 짜증난 주경은 짐짓 토라진 소리를 했다.

《무슨 명상이 그리도 깊어요. 한번 빠지면 헤여나지 못한다니까.》

《난 이자 말이요, 강물에 띄운 이파리를 보면서 속도있는 삶만이 조국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수 있다던 그날의 동무의 말을 되새겨봤소.》

《그 말은 동무가 하지 않았던가요?… 아무튼 누가 했든 그건 사실이예요. 당에서 내놓은 속도전방침을 보세요. 모두가 패기와 정열에 넘쳐 뛰고 달려 내 조국을 도약시키자는것이 아니겠어요.》

그런 가위에 신선하고 상긋한 향취가 짙게 떠돌아 멈춰섰다.

눈앞에는 은백양나무가 소리없이 숨쉬며 별빛어린 잎새들을 반짝여 그들을 마중하였다.

이 저녁 주경이가 바라던 목적지가 바로 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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