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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회


제 1 편
은백양나무에 새겨진 자취


제 4 장



2


만약 리진이자신이 스스로 단념(다른 원인이 있을상싶지 않았다.)했다면 실로 비겁한 행위가 아닐수 없었다. 분명 사고의 후과가 빚어낸 피해의식으로 자기보신의 울타리를 치려는것 같았다. 그렇다면 페불리용의 기둥을 잃는다. 지금까지 페불을 안고 모대긴 그의 지식은 국부도입을 실현시키는데서도 귀중한 밑천이였다.

주경은 더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연구실을 나섰다. 어느새 밖은 어둠에 잠겼다. 연구실 아래층계단을 내려서던 주경은 복도끝쪽에서 웅글은 기계소음이 들려와 걸음을 멈췄다. 계영빈의 촉매실험실이였다.

계영빈은 오늘 야유회로 하여 잃은 시간을 봉창하려는지 또 시험에 달라붙은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밥을 먹으며 언제 잠자리에 드는지 알지 못한다고들 했다. 과학원 함흥분원 연구사인 계영빈은 촉매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지닌 30대의 전도유망한 과학자일뿐아니라 다방면적인 지식을 겸비한 실력자라고 하였다.

전주경은 분야는 서로 달라도 같은 과학일군으로서 젊은 나이에 벌써 학계의 이목과 존엄을 지니고있다는 사실에 존경이 갔다. 지식인인 경우 인격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실력이 우위를 차지한다. 때문에 작은 아버지가 그가 좀 성미가 괴벽하고 주장이 완고한 점을 거들 때에도 심상히 여겼다. 지식인들의 약점이 대체로 그러루했는데 그건 알고보면 평자의 리해상착오가 더 많았다. 흔히 높은 지성세계를 따라서지 못하거나 깊이 투시하지 못할 때에는 완강한 주장을 고집이나 괴벽으로 치부하기 일쑤이다.

계영빈은 생김새가 남성적이였다. 몸집도 거쿨지고 눈도 입도 큼직큼직했다. 칼로 깎아낸듯 한 이마아래 약간 눈귀가 우로 째진 눈빛은 자못 날카롭게 번뜩이였다. 세상을 눈아래로 굽어보는듯 한 득의양양한 거만과 비웃는듯 한 조롱이 엇섞인 그런 눈빛이였다. 그는 주경이와 첫인사를 나눌 때 작고 연약한 녀성의 손인줄도 잊고 솥뚜껑같은 손으로 집게같이 꽉 잡았다놓았다. 주경은 다소 아픔을 느끼면서도 자질구레한 례절을 갖출줄 모르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있는 그대로 내뿜는, 이를테면 부딪치고 과격하면서도 진실하고 솔직한것이 특징일거라고 생각했다.

전주경은 문득 그가 페불국부도입을 적극 지지한 까닭을 상세히 알고싶었다.

촉매연구실출입문앞에 이른 주경은 손기척소리를 냈다. 안에서는 세찬 기계소음때문인지 응대 없었다. 그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섰다. 촉매실험장치들이 반나마 차지한 방안은 매캐한 시약내로 차있었다. 실험용활성탑정수리로 피여오르는 뽀얀 물김을 배풍기가 돌아가며 빨아들이고있었다. 창문을 마주하여 갖가지 형의 유리기구들이 놓여있는 실험대 한옆 팔걸이의자에 이 방의 주인인 계영빈이 머리를 짓숙이고 무슨 책에 정신을 팔고있었다.

주경은 그의 독서를 방해할것 같아 실험대우에 세워놓은 작은 사진액자에 눈길을 던졌다. 대여섯살 됨직한 소녀가 입을 꼭 다물고 눈웃음을 짓고있었다. 소녀의 량볼에는 복스러운 볼우물이 살짝 패였으나 계영빈을 닮은 크고 검은 두눈은 울다가 억지로 웃은듯 물기가 츠렁히 고였었다.

계영빈은 한참 지나서 머리를 치여들었다. 검은 정기가 도는 눈자위엔 사색의 그늘이 비꼈다. 주경은 인사를 건네며 사진액자를 가리켰다.

《복성스런 이 앤 누구예요?》

《딸애지.》

《그런데 웃음속에 눈물이 있군요.》

《…》

계영빈은 대답을 피했다. 그는 주경의 난데없는 출현에 더 관심하는 표정이였다. 주경은 서먹한 분위기를 휘젓고싶었다.

《참 계선생님, 어죽솜씨가 이만저만 아니라더군요. 저한테도 가져왔던데 이제 맛보겠어요. 저의 혀가 녹아버리면 찾아주어야 해요.》

《뭘 그다지나… 몇년간 실험실을 뜨지 못하다나니 늘어난건 음식짓는 솜씨뿐이요. 저 애 돌잡히던 해에 집을 나섰댔는데… 아직 갈수가 없구만.》

《왜요?》

《촉매를 성공 못했으니까.》

주경은 가슴이 찌르르해났다. 촉매에 한생을 바쳐갈 강심을 먹고 수년세월을 홀로 지내는 그가 더없이 돋보이였다.

주경은 인간적인 동정이 스며들었다. 그와 이밤 허물없는 말을 주고받을것 같았다. 계영빈은 보던 책을 덮으며 실험대우에 던졌다. 반사적으로 그 책에 머리를 돌리던 주경은 《마야국의 패망사》라는 표제가 눈에 띄워 물었다.

《계선생님은 력사에도 흥미를 갖고있어요?》

《난 연구사업이 막힐 때면 력사나 소설, 지어는 다른 학문에 깊이 빠졌다가 다시 달라붙게 될 때가 제일 효률적이랄가.… 막혔던 물목이 터지듯 걸린 고리들이 종종 풀리는 경우가 있소. 헝클어졌던 머리가 정돈되면서 사색과 탐구가 새롭게 진행되거던. 하지만 내가 이 책에 흥미를 두는 까닭은 다른 의미요. 우리는 고대인류문화의 발상지를 에짚트나 그리스로 알고있소. 그러나 아메리카중부지역에 마야인들이 세운 마야국에 대해서는 아직 크게 소개하지 않았소. 독자적인 대문화를 창조한 마야인들은 8세기에 들어와선 에짚트나 그리스보다 훨씬 더 번성했던거요. 찬란한 문화를 떨치던 그 나라가 민족과 함께 무엇때문에 파멸되였는지?… 흥미있거던. 아직은 다 읽지 못했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마야국이 남긴 유적과 유물들을 오랜 세월 탐방하며 많은 사료들을 수집했구만. 그는 마야인들의 세태와 풍속, 그들의 전설까지 섞어가며 책을 썼는데 마치도 력사물을 취급한 문학작품처럼 읽을 맛이 있소.》

주경은 계영빈의 다방면적인 지식에 공감되였다. 자기도 과학서적과는 거리가 먼 소설이나 시작품들을 즐겨보군 했다. 그만큼 인식범위나 지능이 풍부해지는것은 사실이지만 계영빈처럼 연구사업의 한 공정으로 선택하거나 또 어떤 력사적사실에 주의를 집중한적은 없었다.

《저도 기회가 생기면 이 책을 보고싶군요.》

《그런 기회란 없소. 기회는 만들어야 하오.… 난 이자 말이요, 이 책의 사랑전설을 읽고있었소. 태양신만을 믿는 마야의 한 청년이 호수가에서 자기 애인을 애끓게 기다리는 대목이였소.…》

계영빈은 이미 덮어놓은 력사책의 전설들이 되살아난듯 구레나룻이 돋은 볼과 눈언저리가 불그레해졌다.

《헌데 동무가 불쑥 나타났거던. 난 어지간히 놀랐댔소.》

《왜요. 제가 그 애인같아서요?》

《처음엔 그런 착각이 들었지.… 다시 보니 아, 이 처녀는 애인을 찾아온것이 아니라 불을 잡으러온 처녀…》

《호호… 누군가 사랑은 불이라던데요.》

《그래 무슨 일로 왔소?》

갑자기 계영빈은 웃음기를 싹 거두며 정색했다. 제 기분에 취해있던 주경은 대뜸 몰풍스레 나오는 그 싸늘한 물음으로 하여 무색해졌다. 정말 듣던바대로 그는 누구와도 어울리기 힘든 성미를 지닌것 같았다. 주경은 기분이 잡쳐 거의 실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계선생님은 페불국부도입안을 지지했더군요. 그 론거를 알고싶어요.》

계영빈은 얼마간 잠자코 있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 페불속에는 독성가스가 절대량이요. 그놈의 독성은 모든 〈장기〉들을 파괴하고 짓부셔버리오. 그러니 한입두입 야금야금 먹어야 하오. 말하자면 독성이 덜한 가스부터 골라먹으면서 점차 파악되고 소화기관인 로가 차츰 단련되면 나중에 다 먹어치워야 하오. 이것이 인식과 실천의 점진적이고 합법칙적과정이 아니겠소. 국부도입은 그런 의미에서 락관적이요. 그런데… 그 도깨비같은 사람은 그 페불을 통채로 단꺼번에 먹으려 했소.…》

리진이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계영빈의 숨결은 차츰 거칠어지더니 광대뼈어름에 울기같은것이 뻗쳐오르면서 낯빛이 검붉은 색조로 변했다. 가늘게 치째진 눈꼬리에는 비웃음이 스쳤다.

《그건 엉터리없는짓이요. 가령 페가스속의 수소 하나만 놓고봐도 폭발성이 심한 그것으로 로의 안전을 담보할것 같소?》

《그도 바로 그 점을 우려했기때문에 수소를 제거시키려 했어요. 그의 빈틈없는 열공학적계산들을 보면 그걸 잘 알수 있어요.》

《천만에! 미끈한 계산이나 흠할데 없는 그따위 수식들이 가장 근본적인것을 무시한단 말이요. 난점은 수소뿐이 아니요! 훨씬 더 있을수 있소. 흔히 과학기술을 모를 때 성공의 신기루부터 꿈꾸며 마구 달려든단 말이요. 그래 동문 종이장우에 그려놓은 미끈한 계산식들이 성공의 열쇠라고 믿소? 그렇다면 나도 썩 전에 백금촉매를 얻어냈을거요.…》

흥분으로 떠는 계영빈의 말끝에 백금촉매가 묻어나오자 그는 급소를 찔린듯 미간을 고통스레 일그러뜨렸다. 그가 수년세월 연구과제로 내세운 백금촉매는 아직 이렇다할 결실을 보지 못하고있었다.

원유가공행정에서 생명이나 다름없는 백금촉매는 공업이 발전된 몇개 나라들밖에 만들지 못했다. 때문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공장을 조업할 당시 백금촉매를 외국에 의존하면 안된다고 하시였다.

《…난 수령님의 교시를 접하고 백금촉매를 자체로 만들 목표를 세웠더랬소. 촉매와 관련한 세계적인 문헌들을 죄다 뒤졌소. 하지만 문헌들마다 알속을 뽑은 허울이였소. 몇해째 내 식으로 필사의 탐구를 벌렸소. 마침내 단계별 촉매반응식을 찾았소. 바로 이 종이장에서 말이요. 그 종이장의 환희가 지금도 이렇게 질질 끌고있소. 그렇단 말이요!

종이장과 현실사이에는 언제나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오. 그 사람은 이걸 알려고도 하지 않았소. 때문에 그는 어리석게도 세계적인 수수께끼 앞에 당돌하게 접어들었소.》

계영빈의 열기로 번뜩이는 어글어글한 눈에는 로골적인 조소가 끓어오르고 꺼리낌없이 퍼붓는 야유의 방망이는 사정을 두지 않았다.

주경은 조폭한 그의 언행에 서리찬 오한을 느끼며 아무런 항변도 못했다. 그한테는 김리진이를 옹호할 론거도 없거니와 설사 그럴듯한 주장을 갖고 반박한다 해도 이미 리진의 시험결과를 통하여 굳어진 그의 부정적립장을 넘어뜨리기는 어려울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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