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9 회


제 1 편
은백양나무에 새겨진 자취


제 4 장


1


가을선기가 떠도는 계절이지만 한낮이면 바다쪽에서는 여전히 상쾌하고 후더운 해풍이 불어와 사람들을 유혹하였다. 직장과 부서들에서는 70일전투준비사업으로 벅적 끓는 속에서도 휴식날이면 바다가로 몰려가 해수욕으로 즐겼다.

그러나 태양의 따뜻한 입김도, 해변의 싱그러운 바람도, 이 고장의 유명한 해수욕의 흥취도 공업연구소 2층에 자리잡고있는 전주경의 연구실 창유리는 꿰뚫지 못했다. 그는 며칠째 연구실에 붙박혀 페불리용과 관련한 자료들을 검토하며 시간의 흐름을 거의 잊고있었다.

대학과정을 마친 후 과학원생활을 거쳐 2년만에 집에 온 그는 몰라보게 변모된 고향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대학시절 방학기간이면 집으로의 걸음을 통하여 그 변화를 몰랐던것은 아니였지만 근간에 달라진 면모는 실로 눈부시였다.

단발머리 중학시절까지만 하여도 불모의 땅으로 갈숲과 토끼풀만 성하던 이곳에 하늘을 찌를듯 한 은백색의 정류탑들이 수풀처럼 솟았다. 공장변두리를 끼고 흐르는 용수천은 그쯘한 제방을 쌓아 름름한 강으로 되여 공업용수를 보장하고있었다. 강안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문화주택들, 중앙난방과 가스화의 혜택을 누리는 다층살림집들, 학교와 병원, 시원스레 쭉쭉 뻗은 아스팔트도로들… 실로 고향은 아름답고 거창한 탑의 도시로 전변되였다.

그 모든 변화는 고향을 위해 한방울의 땀도 바치지 못한 주경에게 마치도 한일없이 화려한 성찬을 마주했을 때의 놀라운 기쁨과 게면쩍은 송구함 비슷한 2중적인 감정을 체험케 하였다. 배움의 최고전당에서 당이 부른 20대의 발명가, 박사의 꿈을 키우며 나라의 과학기술중진으로 자란 그였지만 줄기차고 무성하게 꽃피는 고향앞에서는 왜소감을 느꼈다. 이런 의식에 몰린 그는 고향을 가꾸는 일에 뒤늦게야 발을 잠그는 죄스러움을 안고 페불연구에 심취되였다.

확실히 작은아버지(주경은 삼촌인 전준혁을 그렇게 불렀다.)가 착상한 《중유로의 페가스국부도입》안은 충분한 가능성을 내포하고있었다. 시간당 수십톤씩 태워버리는 페가스의 전량을 중유로의 연료로 리용하려다 실패를 한 리진의 안에 비하면 훨씬 현실적이였다.

페가스속에 있는 유해가스와 폭발성이 심한 가스를 제거한 나머지가스를 현재 로의 연료인 중유와 섞어 리용할수 있다는것을 립증하였다. 말하자면 페가스속의 독성물질은 버리고 비교적 깨끗한 《음식》만 골라먹는다는것이였다. 이는 리진의 두번에 걸친 시험실패의 원인을 분석한 결과 유도된 답이였다.

주경은 온몸을 뒤흔드는 흥분에 휘말렸다. 얼핏 보아서는 단순한 리치같아도 그 단순성때문에 누구나 쉽게 찾지 못하는것이였다. 세상의 크고작은 발견도 알고보면 그 단순성에 기인되여있었다.

페불국부도입의 의의는 또 얼마나 락관적인가. 우선 많은 량의 중유를 절약할수 있다. 그 리익은 년간을 통하여 수만액을 헤아릴뿐더러 전망적으로 페불전량을 죄다 리용할 길을 열어놓을지도 모른다. 이야말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현지말씀대로 원유가공법을 우리 식으로 첨단에서 개척하는 길이 아닌가!

전자의 실패를 통하여 연구도입방향의 선택, 이는 과학기술분야에서 십분 있는 일이다. 그와 같은 실례는 얼마든지 있다. 현대물리학의 거장인 아인슈타인도 저보다 300여년전에 세상을 뒤흔든 아이쟈크 뉴톤에게 편지를 보낸적이 있지 않는가.

위대한 뉴톤이여, 우리를 둘러싸고있는 자연과 대우주의 최고의리를 밝힌 그대의 고전물리학이 있음으로 하여 나는 그와 상반되는 새로운 상대성리론을 창시할수 있었노라.…

그렇다! 작은아버지의 국부도입안은 여태 철의 장벽처럼 굳게 막혔던 페불리용의 돌파구를 열어놓은 좋은 안이였다. 아닌게아니라 도입안에는 여러 기술자와 과학자들의 긍정적인 의견들도 첨부되여있었다. 그중에서도 촉매연구사 계영빈박사의 의견은 덧글체로 두드러졌다. 어딘가 힘센 사람을 등에 업으려는 서뿌른 수같았으나 낯익은 작은아버지의 필체가 아닌걸 보면 도입안을 정서한 사람이 권위있는 과학자의 발언을 빌어 현실성을 강조하고싶어서일것이다. 어쨌든 70일전투를 앞두고 페불도입방향을 선택할수 있게 된것은 참으로 시기적절할뿐아니라 전투승리를 확고히 내다볼수 있게 하였다.

주경은 며칠째 장밤을 밝혔던 무거운 몸이 홀연 가벼워져 심신이 날을것만 같았다. 그 환희가 벅차게 안겨올수록 리진의 실패가 값높이 여겨졌다. 페불을 먹을수 있는 유일한 길을 찾도록 자신을 깡그리 태워버린 리진의 시험을 어찌 단순히 실패로 단정하겠는가. 작은아버지가 한몸 내대고 막아선것은 백번 지당한 처사였다.

기실 따져놓고보면 리진의 페불전량도입안은 비록 현실성은 잃었어도 그 학술적가치는 대단히 컸다. 페가스의 절대량을 차지하는 유해가스와 폭발가스리용시 불리한 요소들, 대기오염방지와 환경보호에 이르기까지 수자와 수식들로 밝힌 연구자료들은 상당한 수준을 요하는 계산들이였다. 더우기 로속에서 페가스의 연소과정을 취급한 열공학적대목에서는 그 분야의 전문가인 주경이로서도 탄복을 금치 못했다.

전주경은 리진의 과학기술지식이 이런 높은 경지에 이르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만큼 그 기쁨은 비길데 없이 컸다. 얼마나 고심어린 혈로를 헤쳤으랴. 일하면서 배우는 공장대학과정도 헐치 않았으련만 자습과 독학으로 수련했을 그 견인불발의 의지와 열정에 머리가 숙어졌다.

공장에 도착한 날 리진의 실패를 두고 일부 기술일군들이 미덥지 못한 실력이 낳은 무분별한 행위로 설명하여 은근히 마음속 아픔을 느꼈던 그였다. 때문에 그밤 아픔을 달래고싶어 사연깊은 은백양나무를 찾았고 우연히 그 나무아래서 리진이와 첫상봉을 했을 때에는 그가 괴로움에 방황하는것 같아 쓸쓸한 공허감을 누를길 없었다.

전주경의 가슴에서 리진은 지울수도 잊을수도 없는 동무였다.

대학을 마친 해에 주경은 어느 한 중앙기관에 다니는 미모의 상급생청년한테서 뜨겁고도 불타는 청혼편지를 받은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활랑거리는 가슴을 누를길 없어 어둠속인줄도 잊고 누가 볼가봐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누가 보고있었다. 순진하면서도 열정에 타는 눈동자, 그것은 언제나 가슴속에 살아 자기의 속마음을 살피고있는 리진의 눈길이였다. 가슴이 떨렸다. 그는 얼른 편지를 찢었다. 어두운 호수의 물결우에 편지쪼각들을 날려보내는 그의 마음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듯 후련하였다.

올해 정초에 주경은 대학동창생인 녀동무의 결혼식에 초청을 받고 참석하였다. 그날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행복의 미소를 머금고 나란히 선 신혼부부를 보며 주경은 리진을 생각하였다. 그가 아직 정열을 기울이는 처녀가 없기를 바랐다.

그런데 공장에 파견되여오게 되자 웬일인지 다른 감정이, 전혀 다른 왕청같은 생각이 갈마들었다. 리진이를 만나지 말았으면 하는 소원이랄가?… 만약 만나게 되면 여태 마음속에 다듬고다듬어 키워온 무지개같은 상상의 인격이 허물어질것 같은 우려와 소꿉시절부터 찍힌 가지가지 아름다운 자취들이 죄다 서글픈 추억으로 될가봐서였다.

하지만 그렇게 꿈속에서 키우고 가꾸어온 무지개가 마침내 현실로 될줄이야!… 주경은 그들먹한 기쁨에 가슴이 부풀어 반쯤 열려진 창문을 활 열어제꼈다.

용수천뚝 풀숲에서는 아이들이 숨박곡질하듯 뛰여다녔다. 애들의 머리우에서는 고추잠자리들이 날아옜다. 한 총각애가 잠자리가 앉은 풀대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간다. 그뒤를 따르던 조그마한 소녀애가 무엇에 걸챘는지 앞으로 자빠졌다. 소녀애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총각애가 제 손가락짬에 끼웠던 잠자리를 소녀애의 손가락짬에 끼워주었다.

애들의 놀음에 눈길을 팔고있던 주경의 뇌리에는 아득히 흘러간 어릴적 희미한 자취가 슬며시 기여들었다.

소학교시절, 그의 학급이 바다놀이를 할 때였다. 바다가 모래불에 학급전체가 원을 지어 빙 둘러앉아 수건돌리는 유희를 벌렸다. 만약 수건이 어느 한 애의 등뒤에 감쪽같이 놓인것을 수건돌리는 애가 한바퀴 돌 때까지 알아맞히지 못하면 그 애는 벌칙으로 해수욕장에 뛰여들지 못하고 학급애들의 옷가지와 점심밥꾸레미를 지키기로 하였다.

그날 주경이와 리진은 원둘레 맞은쪽에 서로 자리를 잡게 되였다. 유희가 시작되자 주경은 제 등뒤에 수건이 놓일가봐 자주 뒤손질로 더듬어댔다.

놀이가 몇순 돌아 한 소녀애가 리진의 등뒤에 수건을 살짝 놓았다. 리진은 감촉 못했다. 주경은 어째 제사 바빠맞아 옴지락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눈짓과 코살을 밉살스레 쭝긋거리며 리진이한테 연방 신호를 보냈다. 뾰족한 입술을 모아 입총질도 하고 눈살을 꼿꼿이 펴 따벌눈총질해도 리진은 눈치채지 못하고 손벽만 자락자락 쳐댔다. 으응, 저 바보, 머저리… 속이 바질바질 탔다.

수건돌리는 애가 한바퀴돌아 이제 서너발자국이면 리진이가 붙잡힐 순간이였다. 앉은자리에서 매삼치던 주경의 입에서는 어망결에 새된 아부재기가 터졌다. 그때야 리진은 수건을 쥐고 발딱 일어났다. 그러나 소녀애한테 붙잡히고야말았다. 유희가 끝나자 주경은 제사 분하여 애들의 밥보자기를 지키게 된 리진을 얼뜨기, 바보라고 얼마나 다몰아줬던가.…

주경은 철없던 시절 리진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싶지 않던 그 기분이 되살아올라 혼자 웃었다.

문기척소리가 났다. 웬 처녀가 구럭을 들고 방안에 들어섰다. 연한 하늘색샤쯔에 하얀 주름치마를 산뜻하게 입은 처녀는 눈부시게 예뻤다.

처녀의 풋풋하고 싱싱한 자태는 방안을 한결 밝고 청신하게 하였다. 처녀는 정기도는 눈을 반짝이며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연구사언니, 이걸 좀 맛보세요.》

풋낯인데도 처녀는 허물없는 친동기간처럼 들고온 구럭을 원탁우에 놓고 풀어헤쳤다. 하얀 법랑그릇안에는 노르끼레한 기름이 밴 어죽이 차있었다.

《미안해요. 오늘 우리끼리 바다놀이를 했어요.》

《알고있어요. 고마와요.》

주경은 일요일인 오늘 새로 조직된 70일전투기술혁신돌격대 전원이 바다놀이를 하는줄을 알고있었다. 아침에 서종섭이 돌격대구성이 여러 부서와 직장들에서 모인 성원들인만큼 전투를 앞두고 집단의 화목을 도모할 의도에서 조직한것이니 함께 가야 한다고 우겼다. 더구나 때늦은 절기여서 마지막기회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주경은 가고싶었다. 늘 서재와 연구실에서 헤여나지 못하는 몸을 신선한 자연의 향취에 잠그고싶었다. 게다가 고향의 그리움에 젖어있던 그는 아이적처럼 파아란 바다물에 해종일 몸을 잠그어 잠시라도 심신을 맑고 깨끗이 정제하고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하루빨리 페불도입방향을 선행시키지 않으면 70일전투의 중요과제를 제껴야 할 돌격대의 앞장이 막히게 되였다. 주경은 아쉽지만 마다할수밖에 없었다.

《동무도 돌격대원인가요?》

《전… 사실 꿈을 꾸는것 같애요, 한낱 뽐프운전공인 제가 어떻게 그런 영예로운 대오에 설수 있었는지. 중학교때 제도에 취미가 있어 얼마간 공장설계실에서 사도공을 한것밖에는…》

《이름은 어떻게 불러요?》

《김방울이예요. 절 많이 배워주세요.》

처녀는 쌍겹진 눈을 방긋 빛냈다.

《그래, 모두들 즐거웠겠군요.》

《그럼요. 우리 처녀들은 료리경기를 했지요. 남자들은 수영경기를 하구요.》

《수영경기요, 누가 이겼어요?》

주경은 얼핏 리진이가 떠올랐다. 수영에서 제노라 하던 주경은 언젠가 그한테 뒤지지 않았던가. 주경이 갑자기 호기심을 보이자 방울은 성수나했다.

《계영빈연구사였어요. 몸집좋은 그분이 헤염치는걸 보고 모두들 물개라나요. 호호… 료리솜씨는 또 얼마나 기막히던지 우리 처녀들을 찜쪄먹겠더군요. 이 어죽도 제일 맛나게 료리한 그분거예요.》

《그래요? 리진동무도 수영을 꽤나 잘하던데…》

《리진기사요?… 그 동진 없어요. 돌격대성원이 아닌가봐요.》

《?!…》

《기술도 있고… 페불연구도 많이 했다는데…》

《잘 알아요?》

《호호… 참, 뭐라고 할가요. 전 며칠전에 그 동지와 함께 로동안전책벌을 받지 않았겠어요.》

방울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함씬 웃었다. 그 웃음은 꽃피는 청춘의 봄을 갈망하는 처녀들만이 품고있는 쑥스러워하면서도 행복에 젖은 미소였다. 방울은 축축히 젖은 앵두입술을 약간 벌리고 웃었는데 그때마다 촘촘한 하얀 이발 한옆에 송곳덧이가 살짝 드러나 웃음미를 한결 눈부시게 하였다.

방울은 제 기분에 흥떠 그날 리진이와 있었던 일들을 순진한 수집음과 명랑한 어조로 자상히 주어섬기며 뒤를 이었다.

《…그날 제가 그 사람의 옷자락을 잡아채여 단추 하나가 떨어졌지요 뭐. 그런데도 그냥 그 옷을 입고 다니잖겠어요. 호호… 어쩜 그리도 텁텁한지, 그 단추때문에 난 민망스러워 죽을 지경인데두…》

《호호… 참 재미있군요, 그 단추인연 말예요.》

주경은 방울의 솔직하고 미쁜 마음이 맘에 들었다. 방울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이내 떨구더니 가는 한숨을 조용히 내쉬였다. 아마 리진의 신상이 걱정되는듯싶었다. 그의 진정은 주경이한테 이상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그럴수 없어.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혹시 그가 사고에 위축되여 돌격대를 포기한것은 아닐가?…)

무엇인가 가슴을 스치는 야릇한 불안이 엄습했다. 주경은 방울의 눈길이 자기를 지꿎게 더듬는줄도, 그가 방에서 조심스레 사라지는줄도 모르고 한자리에 망연히 서있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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