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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회


제 1 편
은백양나무에 새겨진 자취


제 3 장



1


김리진은 아침출근길을 서둘렀다. 오늘 아침 공장안의 능력있는 기술자들과 보조성원들로 무어진 70일전투기술혁신돌격대명단이 발표된다고 하였다. 리진은 그속에 자기도 들어있으리라고 믿었다. 몸은 비록 현장에 있어도 마음은 언제나 페불연구에 두고 사는 그로서는 이번 70일전투목표에 페불도 있을것 같아 기술혁신돌격대에 받아줄것을 작업반장을 통하여 직장 분초급당에 정식 제기하였었다. 게다가 기사장의 든든한 후원이 자기를 결코 배제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있었다. 그는 기사장이 화학공업부에 불리워간것을 모르고있었다.

그러한 기대와 믿음으로 간밤을 뜬눈으로 새운 리진은 아침일찍부터 출근차비를 하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침밥을 짓다말고 뭘하시는지?…

그는 부엌과 잇달려있는 세면장문을 열었다. 유선림은 빨래그릇을 앞에 놓고 손에 무엇인가 들고 보고있었다.

《어머니, 뭘해요? 늦었는데.》

《네 옷을 빨려다 지갑속에 웬 처녀사진이 나져 그런다.》

유선림은 다 큰 자식을 둔 어머니다운 호기심을 갖고 사진을 쳐들었으나 누구인지 가늠이 가지 않아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리진은 좀 메사해졌다. 몇해전 여름날 주경이 남기고간 그의 독사진이였다. 대학시절 방학때 집에 왔던 주경은 바다가해수욕을 마치고 돌아오다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때 리진은 함께 찍고싶었지만 주경은 한사코 제 혼자 찍겠다고 우겼다. 사진속의 주경은 영채도는 눈빛을 지닌 활달하고 맵짠 실물보다도 퍼그나 유순해보였다. 리진은 그것이 더 맘에 들어 손지갑안에 간수하고 다녔던것이다.

《어머니두 참, 뭘 그렇게 여겨보세요?》

《퍽 낯이 익어 그런다.》

《저… 주경이예요.》

《응?!… 준갑아주버님 따님 말이냐?》

유선림은 사뭇 놀라운 시선을 다시 사진에 옮겼다.

《원 녀석두, 주경이가 어떤 집안 처녀라구 이렇게 마구 다룬단 말이냐.》

유선림은 귀한 보물을 만지듯 미세한 물방울이 튕겨앉은 처녀의 사진을 손바닥으로 조심스레 닦으며 뒤를 이었다.

《참 귀엽고 영특하더니… 준갑아주버님 따님이 큰 학자가 돼서 요즘 공장에 왔다면서? 네가 못한걸 주경이가 한다는 소문도 돌더구나.》

《그러겠지요.》

리진은 심드렁히 뇌이였다. 아들의 그 모양을 유심히 지켜보던 유선림은 꺼지는 한숨을 내쉬였다.

《설마 네가 주경일 맘에 두랴만… 젊은 혈기에 분별을 잃을가봐 하는 말이니 오르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도 말라고 했다. 사람은 제 푼수에 맞게 처신해야 하느니라.》

리진은 아침을 대강 치르고 출근길에 나섰다. 좀전까지도 뒤설레이던 기분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어머니의 훈시가 걸음마다 감겨들었다. 그가 일을 저지른 후부터 어머니는 마음의 구김살을 펴지 못하고 잔소리가 많아졌다. 하지만 이 아침 어머니의 지청구는 흘려듣게 되지 않았다.

주경이가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건 또 뭔가, 백번 찍어 꺾이지 않는 나무가 없다고 했는데 아무렴 그가 그렇게 아름드리거목이란 말인가?

그의 자존심으로는 도무지 납득할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 주경이 남모르게 자리잡은것은 딱히 언제부터라고 찍어말할수는 없었다. 어릴적 함께 자란 무수한 자취들의 덧쌓임같기도 하고 서로 떨어져있을 때의 그리움같기도 하였다.

문득 리진에게는 기억의 토막들이 떠올랐다.

…자글거리는 해빛, 맑은 하늘의 복실복실한 하얀 구름, 해감냄새가 풍기는 일망무제한 초록빛바다, 그우에 낮추 떠날으는 흰 갈매기들…

주경이 대학시절 방학을 고향에서 보낼 때였다. 중학교동창생들과 함께 해수욕장에 갔었다.

《얘들아, 우리 저 고래섬까지 헤염치자. 1등한 우승자한테는 섭이랑 조개랑 따줘야 해.》

주경은 승부를 겨루며 누구든 자기를 따르지 못할거라고 자부했다. 리진은 늘 이기는데 습관되였던 그가 세월의 흐름을 망각하고있는것이 우스워 코웃음을 쳤다. 리진의 팔뚝과 몸에서는 약동하는 청춘의 피가 끓었다.

해면은 해빛으로 반짝이고 파도는 기슭에서 어리광치였다.

그들은 똑같이 물에 뛰여들었다. 저마끔 따스한 물결을 애무하듯 감싸안으며 넘실거리는 멀기를 타고 줄창 헤여나갔다.

리진의 팔밑에서는 흰 물결이 쩍쩍 갈라져 거품을 끓어올리고 주경은 날렵한 몸을 물고기처럼 쪽쪽 앞으로 뽑아쳤다. 주경이와 리진은 서로 앞서거니뒤서거니하며 맨 선참으로 나갔다. 주경은 두손으로 물결을 가르며 호흡할적마다 입으로 물총을 내뿜어 리진의 머리우에 들씌웠다.

고래섬을 가까이 할즈음부터는 차이가 생겼다.

《이봐, 나 누운헴 칠래!》

주경은 뒤에서 소리쳤다. 점점 떨어지는것이 속상한지 깜찍한 구실을 꾸며댔다. 리진은 어릴적 보복의 쾌감에 고소를 느끼며 고래섬아근에 먼저 닿자 이내 물밑으로 자맥질했다. 바위벽에 붙은 참섭과 홍심들을 따들고 너럭바위우로 뿌려던졌다. 자기가 이길 때의 약속은 없어도 대범한 아량으로 골탕먹이고싶었던것이다.

이윽토록 물속에 잠겨 참섭을 따든 그는 다시 물우로 솟구었다. 그러던 그는 허공에서 팔을 얼어붙였다. 떼를 지어 밀려드는 물너울이 암벽에 부딪쳐 와르르 부서져내리는 너럭바위우에서 주경이 젖은 머리카락을 털고있었던것이다. 곧고 날씬한 몸매에 유연한 어깨, 수영복밑으로 팽팽하고 봉긋한 젖가슴, 무수한 물방울들이 반짝이는 젖빛살갗…

신비한것은 빛에 휩싸인듯 한 주경의 모습이였다. 그의 머리와 어깨로 빛이 쏟아져내렸다. 바다의 짙은 비취색과 푸른 하늘사이에 생기는 무지개의 광채처럼 눈부시여 마치도 투명한 금빛옷에 가리운것 같았다.

리진은 옷을 갈아입고 고래섬솔밭에 들어갔다. 파란 이슬이 진주처럼 알알이 맺힌 풀밭은 풀벌레들이 찌르륵거리는 소리, 파도소리, 멀리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갈매기의 우짖음뿐 태고연한 정적이 깃들었다. 그때에야 다른 애들도 물속에서 나와 어죽을 쑬 차비를 하느라 벅적 떠들었다.

리진은 주경이가 무엇인가 관찰하고있는 도래굽이쪽으로 스적스적 걸어가 풀밭에 누웠다. 파아란 하늘에 피여오르는 구름송이들을 바라보며 방금 느낀 빛의 신비와 주경이와 함께 있는 꿈같은 즐거움으로 하여 심장이 아파날 지경이였다.

《이봐, 난 참 멋있는걸 발견했어.》

주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고래섬앞코숭이에 말이야, 띄우개식발전기를 설치하면 어떨가? 저 코숭인 파도가 잔잔할 때가 없잖아. 저기다 그걸 설치하면 아마 이 해안마을은 전기를 쓰고도 남을것 같애. 난 이제 앞코숭이파도의 주기와 세기를 측정할래. 도와주지 않으련?》

주경의 얼굴은 명랑하고 이야기는 거침새 없었다. 리진은 한순간 뗑해졌다. 뭐, 고래섬앞코숭이에 띄우개식발전기?!… 어쩌면 그런 생각을 다… 난 한낱 수영의 즐거움에 취해 아무것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는데… 실로 놀랍기만 했다. 하지만 그의 피는 어두운 혈관속에서 터져나올듯 맹렬히 끓어번지며 생각을 다른 곬으로 이끌어갔다.

《주경아, 너 행복이란걸 생각해봤니?》

《행복?》

주경은 왕청같은 그의 물음에 의아한 눈길을 치여들다 생긋 웃었다.

《난 말이야, 행복이란 현실보다 그 예감이 더 좋을것 같애. 그 예감은 실지의 행복보다 더 클거란 말야, 명절전날 밤의 기분처럼.》

《그럼 넌 평생 그런 예감만 안고 살래?》

《내가?… 너 벌써부터 별난 생각 다… 아이 더워, 막 숨막혀. 또 물에 뛰여들어야겠어.》

주경은 리진의 가슴속에 타번지는 애정의 불꽃을 감촉하고 그것이 들씌워질가봐 두려워 무엇인가 닫아걸려고 애썼다.

하지만 주경은 그날 얼마나 상쾌하고 동심같은 기분에 들떠있었던가. 해빛에 까부는 새끼고기처럼 요리조리 몸을 피하며 옹근 하루를 따스하고 부드러운 물결의 애무로 즐겼다. 그것은 뭔가 행복의 예감을 느꼈기때문이 아닐가? 그는 실지 행복보다도 그 예감속에 있을 때가 더 기껍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예감이란 주경의 마음속에서 움트고 자란 그 무엇이였을것이다. 리진이 역시 마음이 즐거웠으며 행복스러웠다.…

이 동일한 행복의 감정을 어찌하여 어머니는 리해 못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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