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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회


제 1 편
은백양나무에 새겨진 자취


제 2 장



3


전후의 어느해 추석날 제대되여 처음 맞은 그날 오전 한겻을 직일근무로 무료히 보낸 강대철은 해가 기울녘에야 인민군렬사묘를 향해 떠났다. 그한테는 성묘할만 한 혈붙이도, 가까운 친지들도 없었다.

그가 일하는 군당청사 뒤산너머에는 전쟁시기 희생된 무명전사들의 합장묘가 있었다. 전화의 나날 포연탄우를 함께 헤친 전우들은 아니였어도 조국땅에 이름없이 묻힌 그들을 찾아 추모하는것이 도리일것 같아 그는 가던 걸음에 들꽃을 한아름 꺾어들었다.

렬사묘초입에 들어서던 그는 한 녀인이 제물을 정성스레 차려놓고있는것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녀인의 곁에는 예닐곱살 됨직한 총각애가 눈빛을 반짝이며 서있었다.

제물을 다 갖춘 녀인은 총각애의 손을 잡아 상돌앞에 세우며 말했다.

《얘야, 어서 절을 드려라. 세번은 해야 한다.》

잠시 주춤거리던 총각애는 다소곳이 허리를 굽혀 엎드리는 녀인을 따라 너푼거리며 제법 절을 잘했다. 그들의 뒤전에 서있던 대철은 치성이 끝나기 바쁘게 다가갔다.

《나도 고인들의 명복을 빌겠으니 술 한잔 따라주시오.》

녀인은 눈이 휘둥그래서 돌아섰다. 30대의 젊은 미모를 지닌 녀인은 몸매는 작았어도 이목구비가 단아하고 도리암직하여 조화로왔다.

《저도 전우들을 추모하러 왔습니다.》

대철은 녀인의 의혹을 눅잦히고싶어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난데없는 불청객에게 아니꼬운 눈총을 쏘고있던 총각녀석이 발딱 나섰다.

《이 묘에는 우리 아빠도 있어요!》

《그래, 알고있다.》

《참, 애두… 어서요.》

녀인은 아들애를 나무라며 그늘이 드리웠던 속눈섭을 폈다. 그다음 술병을 두손에 정히 받쳐들고 대철이한테 내밀었다. 대철은 제주를 부어 상돌우에 놓고 잠시 묵례를 하였다.

《고마와요.》

《뭘요, 이렇게 전사한 동지들을 뵙게 되면 살아있는 몸이 죄스럽기만 합니다.》

《무슨 말씀을… 얘야, 너도 아저씨처럼 저 숲에 가 들꽃을 꺾어오렴.》

《아저씨, 나 그렇게 할래.》

《오냐.》

대철이 쾌히 응하자 총각애는 철늦은 꽃들이 다문다문 핀 숲으로 뛰여갔다. 대철은 총각애가 사라진쪽에 정겨운 눈길을 멈춘채 녀인한테 말을 건넸다.

《아들애가 참 귀엽군요. 그래 애아버진 어느 전선에서 전사했습니까?》

《전사요?》

어망결에 짧게 받아뇌이는 녀인의 목소리는 웬일인지 신음같이 들렸다. 이어 녀인의 입귀가 파르르 떨며 얼굴은 순식간에 핼쑥해졌다. 녀인은 입을 싸쥐고 돌아앉았다. 무엇인가 비트는 아픔을 강다물고 씹어삼키려는것 같았다. 대철은 다치지 말아야 할 녀인의 상처를 들쑤셔놓은것 같아 어쨌으면 좋을지 당혹하여 쩔쩔매기만 하였다.

《아주머니, 내가 그만… 실언을 했군요.》

《아니예요, 안예요.… 애아버진… 전사한게 아니예요.…》

《?!…》

대철은 한대 얻어맞은것처럼 뗑했다. 그럼 이 녀인이 좀전에 아들애를 보고 절을 하라고 한 소리는 무엇이고 또 총각애 역시 제 아빠가 이 묘에 있다고 자랑한것은 뭐란 말인가? 대철은 녀인이 성묘하는 이 합장묘에 애아버지의 시신이 있는줄로 믿고있었다.

《아주머니, 진정하시오. 내 군당에 있는 사람이니… 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수 없겠습니까?》

《군당에요?!》

녀인은 사뭇 놀란 눈길을 치여들었다. 미더움과 존경, 의지하고싶어하는 눈빛이였다. 그러나 이내 눈을 내려깔더니 더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녀인이 며칠후에 군당에 찾아올줄이야. 강대철은 반갑게 맞이하였다. 뭔가 깊은 사연을 품고 온듯 한 녀인은 입술만 한참 깨물고있더니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우리 집 애아버지때문에 왔습니다. 애아버진 전시에… 떳떳치 못한 행동을 하고… 그 죄의식으로 고향을 떠나 방황하다가 잘못되였습니다.》

녀인의 눈에서는 짙은 속눈섭을 적시며 구슬픈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철은 이 가엾는 녀인의 돌연한 설음에 까닭없이 마음이 젖어들었다.

《아주머니, 기쁜 일은 함께 나누면 더 커지고 슬픈 일은 나눌수록 가벼워진다고 했소. 마음을 푹 놓고 나한테도 나누어주시구려.》

강대철은 짐짓 롱말을 섞어 녀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녀인은 반쯤 돌아앉아 붉어진 눈언저리와 흘러내린 귀밑머리를 조용히 비다듬더니 흘러간 세월의 상서롭지 못한 사연을 더듬어 나직이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강대철은 한 가정이 깨여진 참혹한 경난을 내내 무거운 침묵속에 들으며 생활의 외진 기슭에 떨어진 의지가지없는 작은 인간들을 생각하였다.

전쟁의 날카로운 성격은 보통날에는 알수 없었던 인간들의 운명을 명백히 갈라놓았다.

《그러니까 애아버지때문에 주경이라는 애의 아버지가 잘못되였단 말이지요?》

《그래요.》

녀인의 긴 속눈섭에는 눈물방울이 맺혔다.

《전시에 난 친정을 찾아가는 로상에서 아들애를 낳았어요. 이듬해 초봄에 희생된분의 댁에서도 주경이란 처녀애를 봤지요. 그 애들이 지금 한동네에서 함께 놀면서 자라고있어요.

해마다 추석날이면 동리사람들과 학생들이 주경이 아버지묘소를 찾아 추모한답니다. 지난해에는 우리 철없는것이 주경이를 따라 그분의 묘소에 갔던가봐요. 그런데 애가 울면서 집에 왔더군요. 영문을 알아봤더니 전쟁기간 외국류학을 마치고 돌아온 주경의 삼촌되는이가 우리 애를 쫓았더군요.…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애가 자꾸 제 아버지묘를 찾는 바람에 난 얼마나 당황하던지, 차차 크면 어련히 알테지만… 지금은 허물많은 애비보다 주경이처럼 훌륭한 아버지를 주고싶어… 렬사묘에 아빠도 있다고… 거짓말을… 용서하세요. 제가 그만… 망녕이 들었나봅니다.…》

녀인은 흐느낌이 북받쳐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련민의 정에 축축히 젖어있던 대철은 불행한 이 녀인이 남모르게 간직한 애끓는 소원과 값높은 삶을 지향하는 그 순결에 뜨거움을 금치 못했다.

《아주머니, 참된것을 목적했는데 거짓말이라니?… 그보다 더 진실하고 훌륭한 일이 또 어데 있겠소. 아들애를 지금처럼 키워주시오.》…

강대철은 오래전에 유선림녀인을 통하여 알게 되였던 만단사연들이 다시금 떠올라 옳고 참된것을 품고 자란 그들이 결코 헛살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 그리고 그날에 어린 리진이를 쫓았던 전준혁이 오늘은 한몸 내대고 구원해주었으니 변천하는 시대와 함께 인간들은 또 얼마나 커졌는가 하는 생각에 답답하던 가슴이 한결 열리였다.

기사장이 돌아오면 김리진의 일도 순조롭게 될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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