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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회


제 1 편
은백양나무에 새겨진 자취


제 1 장


2


(주경이… 그 눈빛은 예전 그대로인것 같았어.…)

김리진은 낮에 얼핏 보았던 전주경의 오연한 눈빛과 날씬한 몸매는 예이제 변함없는 어릴적 모습으로 느껴졌다. 영채도는 반짝이는 눈, 당돌하고 민첩한 몸가짐, 맑고 챙챙한 웃음소리, 온몸에 배여있는 활기… 리진은 유년시절부터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주경이와 함께 자랐다.

몸은 가냘팠어도 세차고 장난궂었던 주경이, 승벽심이 센 그는 사진을 찍을 때에도 늘 가운데자리를 차지하였다. 한여름의 찌르는듯 한 해빛에도 눈시울을 깜박일줄 모르던 그 까만 눈은 또 얼마나 명쾌했던가.

나긋나긋한 몸을 들까불며 학급남자애들을 곧잘 골려주던 그의 옷자락에서는 지금도 들판의 이슬머금은 싱싱한 풀향기와 토끼풀냄새가 한데 어울려 풍길것만 같았다.

부지중 김리진의 눈앞에는 아득한 추억의 지평선너머 가없는 들판이 펼쳐지고 기름기흐르는 풀판가운데 한그루의 은백양나무가 푸른 아지를 휘저으며 설레이던 광경이 떠올랐다.

그곳은 리진이와 주경이들의 중학시절 학교토끼방목지였다.

해빛 부드러운 초여름이면 들판에는 젖풀이며 소라지, 밥조개, 동그스름한 세 이파리가 아기자기 맞붙은 사이로 외줄기 하얀 꽃술이 피는 토끼풀들이 푸른 주단처럼 쭉 깔린다. 들판가녁을 따라 흐르는 용수천의 누기와 맑은 공기가 떠돌아 갖가지 풀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그때면 학교에서는 자동차에 수백마리나 되는 토끼들을 실어와 방목시키군 하였다. 겨우내 울안에 갇혀있던 토끼들은 자유의 세상에 온듯 들판의 여기저기로 뜀박질하며 맛나는 풀들과 향기로운 즙을 빨아들인다. 배가 불룩해지면 기운이 뻗쳐 땅굴을 파기도 하고 때로는 새빨간 눈알을 부릅뜨고 서로 털을 물어뜯기도 한다.

리진이 중학교 3학년때였다.

어느날 과외시간 토끼방목지의 당번이던 그는 비물에 무너져내린 방목지담장을 보수할 과업을 받게 되였다. 학교에서는 들쥐와 족제비들의 침습을 막느라고 방목지둘레에 돌담을 한길나마 쳐놓았지만 오히려 온순하게 믿었던 토끼들이 더 성화를 먹였다. 그것들은 들판냄새를 맡자 피속의 야생적기질들이 살아나 높은 담장도 허양 뛰여넘어 소동을 일으키군 하였다.

그날 리진은 용수천물을 떠다 진흙을 이기여 무너진 돌담을 쌓아갔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비구름에 어린 풀들이 생기가 살아나 주위에서는 토끼들이 풀을 뜯는 소리만이 들릴뿐이였다.

얼마간 돌담을 쌓아가던 그는 누구인지 용수천을 건너 이쪽으로 달려오는것을 보았다. 흰 샤쯔에 파란 치마를 입은 주경이가 숨차게 뛰여왔다. 그의 머리에는 한송이의 하얀 토끼풀꽃이 꽂혀있고 한손에는 필갑소리가 달그락거리는 책가방이 들려있었다. 주경은 의아해하는 리진의 눈길과 마주치자 핼쭉 웃었다.

리진은 당번도 아닌 그가 나타난것이 이상하여 먼저 입을 열었다.

《넌 왜 왔니?》

《달리기시합하러 왔다, 앙고라토끼와. 네가 심판 서주지 않으련?》

《?…》

주경은 공부도 뛰여나게 잘했지만 달리기도 학급남자애들을 찜쪄먹었다. 그는 노상 도전자가 없는것을 두고 으시대군 했는데 오늘은 토끼요 뭐요 하는 꼴이 마치도 자기를 골려주러온듯싶었다.

《너 정 할짓도 없구나. 썩 사라지지 못하겠니?》

《호호… 요전날 내가 당번설 때 말이야, 저 앙고라가 글쎄 담장을 훌쩍 뛰여넘지 않겠니. 난 그놈을 잡으러 온 들판을 쫓았지만 종내 따라잡지 못했어. 그날은 내가 졌어.》

《안돼. 앙고란 새끼를 뱄어.》

《흥, 거짓말. 그건 수놈이야. 난 꼭 이기고야말테야.》

주경의 눈빛은 대뜸 매섭게 반뜩이며 승벽으로 끓었다.

말문이 막혀버린 리진이 더 어쩌지 못하자 주경은 토끼무리속에서 인츰 밤색앙고라토끼를 골라잡고 담장밖으로 뛰여갔다. 들판에 내놓은 앙고라는 잠시 이쪽저쪽으로 오락가락하기만 했다. 주경은 신발을 벗어 아무렇게나 팽개치고는 새된 소리를 지르며 토끼를 다몰아댔다. 그제야 앙고라는 그 무슨 위험을 느꼈는지 한곬을 잡아 내뛰기 시작했다.

량귀를 뒤로 난딱 붙이고 줄행랑을 놓는 토끼를 따라 주경의 파란 치마가 나붓기고 하얀 발바닥이 언뜩거린다.

(쳇, 제까짓게 앙고라를 따라잡아?)

리진은 들판의 바람같이 제멋대로 놀아대는 주경의 꼴에 코웃음을 치며 비구름이 칙칙히 드리운 용수천쪽에 눈길을 주었다. 누기진 바람이 일었다. 강우에 끄물거리던 안개덩이들이 흩어져 들판에 퍼졌다. 돌연 용수천기슭쪽에서 《잡았다!》하는 주경의 되알진 목청에 이어 깔깔거리는 청높은 웃음소리가 날아왔다.

그런데 잠시후 리진의 앞에 나타난 주경의 낯빛은 자못 시르죽어 울가망이였다. 주경은 근심과 애원이 섞인 표정으로 품에 안겨 숨을 할딱거리는 앙고라토끼를 측은히 내려다보며 뇌이였다.

《정말 이 토끼가 새끼를 배지 않았을가?》

《뭘? 수놈이라더니?》

《난 몰라, 아깐 그저 해본 소리였어. 네가 방해할가봐.》

《에익, 메고양이같은게.》

《토끼야, 내가 잘못했구나. 난 그저 이기고싶었어.》

그때 별안간 눈부신 섬광이 번쩍하며 우뢰가 들판을 들었다놓았다. 풀숲에서 새떼들이 후르르 날아올라 은백양나무잎속으로 숨어들었다. 용수천하늘가에 몰켜있던 검은 장막이 얼럭덜럭 째지며 소용돌이치더니 들판을 휩쓰는 돌풍이 터졌다. 뽀얀 먼지가 일고 풀잎들과 덤불들이 모재비로 쓰러져 파르르 떨었다. 은백양나무아지들이 부러질듯 태를 치면서 윤기나는 둥그스름한 이파리들이 허공에 휘뿌려졌다. 토끼들은 저마끔 흩어져 사방으로 달아뺐다.

리진은 급자기 뒤번져진 날씨에 당황하여 비꽃이 스산하게 떨어지는 들판을 멍청히 살피다 방목지둔덕에 쳐놓은 초막이 눈에 띄자 소리쳤다.

《얘, 토끼들을 초막안에 빨리!》

그제야 제정신이 든 주경은 재빨리 뿔뿔이 흩어진 토끼들을 초막쪽으로 몰아갔다. 비가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방목지바닥은 삽시에 죽탕이 되였다.

리진이와 주경은 비물에 흠뻑 젖는줄도 잊고 여기저기 숨어있는 토끼들을 찾아 비좁은 초막안에 간신히 집어넣군 하였다. 하늘에는 거대한 쇠덩어리를 굴리는듯 성난 뢰성이 으르렁거리며 기회를 엿보다가는 시퍼런 불줄기를 연방 뿜어내쳤다. 꽝― 꽈꽝― 꽈르릉― 사나운 굉음은 하늘땅을 잡아흔들고는 산발을 타고 멀리로 줄달음친다.

토끼를 안고 달음치던 주경은 그 천둥소리에 기겁하여 외마디비명을 지르며 한자리에 폴싹 주저앉았다. 모로 퍼붓는 차거운 비방울이 그의 머리와 잔등을 두드리며 말간 귀바퀴를 타고 가늘고 하얀 목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머리태가 풀어져 흩어졌다. 리진은 무작정 그의 손목을 잡아끌고 은백양나무밑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한결 비바람이 덜했다. 주경은 번개가 칠적마다 무섬증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러나 몸은 비에 젖은 참새처럼 파들파들 떨었고 입술은 새파래졌다. 리진은 제노라 하던 주경이가 자연의 횡포앞에서 겁에 떠는것이 자못 놀라우면서도 애처로왔다.

리진은 웃저고리를 벗어 그의 잔등에 씌워주었다. 자기는 조금치도 춥지도 겁나지도 않으며 오히려 이럴 땐 젖은 속옷차림이 사내다운 멋일거라는것 그리고 주경이보다 자기가 훨씬 더 강하다는 쾌감에 기분이 좋았다. 하여 리진은 스스로 주경의 보호자가 되였으며 주경은 주경이대로 고분고분해지여 그한테 의지하고싶어했다. 때문에 번개가 치고 우뢰가 울부짖게 되면 주경은 겁질린 소리를 지르며 몸을 옹송그리군 했다.

《너 무섭니?》

《응, 막 몸이 떨려.》

《날 꽉 붙잡아.》

주경은 이발을 딱딱 맞쪼으며 리진을 꼭 붙잡았다. 리진은 이 순간 무척 너그러운 어른처럼 행세하고싶었다. 그는 주경에게 덧씌운 제 저고리를 꼼꼼히 여며주며 말했다.

《조금만 참아, 이제 비가 멎으면 내 불피워줄게.》

소나기는 날이 어두울무렵에야 끊었다.

바람은 여전히 요동을 쳤다. 은백양나무는 거대한 비자루가 하늘의 오물을 쓸어가듯 아지들을 세차게 휘저으며 허공을 비질하였다. 리진의 보호자다운 자각은 그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나무아지에도 서슴없이 오르게 했으며 거기서 그는 해묵은 강대아지들을 꺾어 아래로 내리떨구군 했다. 아주 얌전한 암고양이처럼 돼버린 주경은 그저 선망과 경탄의 눈길을 쳐들고 리진의 거동을 살필뿐이였다.

하지만 잠시후에 그들사이에는 마찰이 일어났다.

리진이 삭정이들을 꺾어 모닥불고깔을 만들어놓은 다음 불쏘시개감을 찾아 부산을 떨 때 그의 바지주머니에서는 조그마한 수첩이 나졌다. 그것은 자연과목들의 공리와 정리, 공식들을 적어넣은 공식집이였다. 리진은 불살개감이 나진것이 다행스러워 주저없이 공식집을 찢으려는데 갑자기 되알진 목청이 그를 멈춰세웠다.

《너 공식집을 찢자구 그러니?》

리진은 와뜰 놀라 엉거주춤했다. 올롱해진 주경의 눈이 차겁게 그를 쏘아보고있었다. 그 눈총에 김이 빠진 리진은 입속말처럼 웅얼거렸다.

《쳇, 다 암기했는데 뭘.》

《거짓말, 요전날 수학시간에도 너 합의 두제곱공식을 몰라 나머지공부를 하지 않았니?》

리진은 말문이 막혀 눈알만 데룩해졌다. 지난날의 허물을 들추는 주경이 얄미웠고 그앞에서 어지간히 주눅이 들어가는것이 기분잡쳤다. 보호자의 위신이 납작해지는것 같았다. 리진은 때늦게야 공식집을 내흔들며 어성을 높였다.

《야, 지금이야 이것보다 우리한테 불이 더 중하지 않니.… 왜, 넌 또 몸에 탈이 생길려구 그러니?》

리진의 이 말은 주경의 가장 약한 곳을 찌른것이나 다름없었다. 약질인 주경은 삼복철에도 고뿔에 걸려 며칠씩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주경은 눈을 내리깔더니 입술사이로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였다. 더는 어쩔수 없는 모양이였다. 리진은 얼른 토끼경비막에 뛰여가 성냥을 가져왔다.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나무개비들이 젖어버려 리진은 공식집을 한장씩 찢어넣으며 입바람질을 해댔다. 그때 그들의 서로 깜짝 놀란 눈길이 허공에서 마주쳤는데 주경이가 골탕먹이던 문제의 그 《(a+b)²》공식이 낙지오가리처럼 타들고있었던것이다.

리진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허둥거렸고 그의 마음속을 빤히 들여다보고있던 주경은 잘코사니하며 해죽이 웃었다. 리진에게 무언으로 한꼴 먹이는것이 기뻤고 또 쩔쩔매는 리진의 모양이 재미있었다. 궁지에 빠진 리진은 나무개비를 쳐들고 을러멨다.

《너 정 못되게 놀겠어!》

《내가 뭐 어쨌게? 호호…》

주경은 배를 그러쥐고 깔깔거렸다. 그 바람에 리진은 너그럽고 의젓한 보호자로부터 열네살의 소년으로 되고말았다. 하지만 이 동등한 위치야말로 그들 서로를 더욱 가깝게 해주었다.

불길이 즐겁게 날름거리며 타올랐다. 비에 씻기여 싱싱해진 은백양나무잎새들에서는 신선하고 더운 물김이 퍼졌다. 주경의 얼굴은 잘 익은 복숭아빛갈처럼 발깃발깃해졌다. 리진은 상기도 웃음을 한입 물고 시까스르는것만 같은 주경이한테 제딴에 약을 올려주고싶어 도끼눈을 빨며 비튼 소리를 했다.

《에익, 또 번개가 쳤으면 좋겠다.》

《흥, 무섭지 않아!》

《아깐 부들부들 떨구선?》

《정말 혼났어. 이젠 이 불이 있거던, 또 너도 있고.》

주경의 눈에서는 아무런 걱정도 없다는듯 유쾌한 빛이 흘러나왔다. 리진은 《너도 있고》 하는 뒤말에 괜히 엇드레질한것이 부끄러워 나무개비로 불무지를 쑤셔댔다. 불찌들이 바람성화에 잠들줄 모르는 나무우듬지를 헤치며 어두운 하늘로 사라지였다. 밤하늘에는 갈라지는 구름짬으로 별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야, 별들이 돋는구나!》

《참, 서쪽하늘에 선참 뜬 저 별은 어쩜 저리 밝을가?》

《응, 그건 제일 큰 별이니까.》

《저건 내 별이야.》

《뭐, 네 별? 그럼 내 별은 어느거야?》

제일 밝은 별을 제 별이라고 우기는 바람에 리진이 어처구니없어하자 글짓기에 솜씨있는 주경은 할기죽 눈을 빨며 동요로 대답하였다.


반짝반짝 큰 별은 나의 별

슴벅슴벅 토끼별은 너의 별

우리 서로 비쳐주자

너 밝아지고

나 또 밝아지게…


《어때?》

깜찍한 주경은 큰 별을 기어이 제것으로 만들어놓고는 서로서로 비쳐주는것으로 화해를 하였다. 그의 장난궂은 눈동자는 무지개같은 광채로 반짝이였다. 주위에는 더운 공기와 함께 부드럽고 상긋한 토끼풀냄새가 풍겼다.

그로부터 이틀지난 후였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리진은 주경의 부름소리에 멈춰섰다. 주경은 생글거리며 리진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책가방에서 자그마한 수첩을 꺼냈다.

《이건 공식집이야. 내가 짬짬이 다 정리했어. 다신 이걸로 불을 피우지 마. 알겠니?》

주경의 말에 다소 얼떠름해진 리진은 주겠으면 곱게 줄것이지 제법 타이름조로 나오는것이 기분에 거슬렸다.

《알게 뭐야, 또 그런 일이 생기면야 별수 없지 뭐.》

《그것도 말이라고 하니? 난 네가… 그 뭐더라?…》

주경은 미리 준비해두었던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얇은 눈시울을 깜박거리다 다시 이었다.

《이 공식집으로 지식을 키워 이담에 나무불이 아니라… 지식의 불이라는게 있잖니. 그걸 피워줘. 자, 받아.》

(이담에… 지식의 불?)

리진은 수수께끼같은 주경의 말을 되뇌이며 얼결에 공식집을 받아들었다. 뒤늦게야 주경이가 어느 책의 한구절로 훈시질하는것 같은 생각이 들어 머리를 쳐들었다. 주경은 얄궂은 웃음을 터뜨리며 벌써 저만치 달아빼고있었다.…

그날의 모닥불자리에 지금은 잡초들이 덮였지만 활활 타오르던 불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을 남긴 은백양나무는 여전히 변함없이 한자리를 지키고있었다. 이 드팀없는 거목은 리진의 생활에서 다정한 길동무이고 벗이였다.

생활의 달고 쓴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곳을 찾으면 은백양나무는 어릴적 전주경의 모습과 함께 그의 가슴에 지식의 불, 창조의 불을 지피기도 하고 래일에는 좋은 일만 있을거라는 다정한 속삭임과 따뜻한 희망으로 마음을 덥혀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처녀를 오늘 보게 되자 그 모든 아름다움들이 한갖 스쳐지나간 전조등빛처럼 느껴지고 언제 봐도 싫지 않던 은백양나무자태도 이밤에는 한산하고 어디선가 간단없이 들려오는 밤새의 지저귐도 길잃고 헤매이는 슬픈 곡조로 마쳐왔다.

가까운 곳에서 발자국소리가 났다. 누구인지 조용히 잔디를 밟으며 이쪽으로 다가오고있었다. 어둠과 정적을 도간도간 흔들며 점점 더 크게 또렷해지던 발자국소리는 갑자기 지척에서 뚝 끊어졌다. 리진은 상념에서 깨여나 천천히 허리를 일으켜세웠다.

《?!》

희끄무레한 공간속에 웬 녀인이 서있었다. 은백색달빛이 녀인의 어깨와 머리를 뒤에서 비쳐주었다. 녀인은 약간 몸을 움직이였다. 그러자 달빛이 그 녀자의 앞에 와 떨어졌다. 양복차림인듯 한 녀인의 륜곽이 먼저 띄우고 이 편을 여겨보는 휘둥그런 눈이 달빛에 비치였다.

뒤미처 그 녀자의 입에서는 《어마나!》하는 신음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리진은 별안간 가슴을 때리는 세찬 충격에 후닥닥 자리를 차고일어나 전주경의 앞으로 몇걸음 다가섰다. 놀람과 의혹에 떨던 주경의 눈확에서는 불꽃같은것이 튕기면서 방긋이 열리는 입술새로 흰 이발이 반짝이였다.

《오래간만이군요!》

《그래, 날 알아봤구만.》

리진은 불식간에 던진 제 말이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왜 이렇게 왕청같은 말부터 나갈가? 뜨겁고 다정한 말은 없을가? 리진은 이 순간 무슨 말부터 했으면 좋을지 그처럼 갈구했던 첫 상면의 인상적인 말들이 어디론가 사라진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의 심장은 뜻밖의 반가움에 환희로 터질것 같았어도 여태 괴로움에 짓눌려있던 신경들은 표현기능이 마비되여버린듯 몸이 얼어들고 숨결만 가쁘게 하였다.

《난 동물 낮에 현장에서 봤댔소.》

(젠장, 또 이 무슨 망발이람. 하필이면 이 말부터 꺼내다니.…)

주경은 기쁨에 함뿍 젖은 눈길을 치여든채 고개를 끄덕이였다.

《저도요.》

《?!》

리진은 다시금 흠칫 놀랐다. 그가 낮에 봤다면 기름딱지몰골을, 로밑창에 숨어버린 그 꼴불견이였을것이다. 리진의 입귀로는 허거프고도 쓰거운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됐소. 달리는 될수 없었으니까.》

《호호… 그사이 굉장히 달렸더군요.》

《달려봤지. 벼랑턱이 눈앞에 있는줄도 모르고, 허허.…》

리진의 목청은 어설프게 떨었다. 모든것을 죄다 알고있을 주경의 앞에서 자신을 옹호하기보다 타매하고싶은 감정이 더 북받쳐올랐다. 주경은 아무 내색없이 정찬 눈길을 그의 얼굴에 쏟아붓고있었다.

《그게 얼마나 값있는거예요. 난 한자리에 머물러있을가봐 겁났는데.》

《철없을 때 별을 딸 꿈을 꾼다고 난 제 품값도 모르고 날친것 같소.》

리진은 엇서달아나는 제 기분을 걷잡지 못하고 사고심의때 촉매연구사가 자기를 두고 비난했던 말을 되뇌이였다. 주경은 리진의 내심에서 일어번지는 거치른 갈기를 잠재우려는듯 방긋이 웃었다.

《참, 어머닌 무고하세요?》

《음, 여전하지.》

리진은 건성 대답하였다. 그의 마음은 주경이가 공장에 온 목적부터 알고싶었다.

《주경인 페불리용때문에 왔겠지?》

《그래요.》

《공장에서 한시름 놓게 됐구만.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현지말씀을 관철하지 못하여 걱정들이 여간 아닌데…》

《그게 어디 나 혼자 힘으로 풀 문제인가요. 기술자라면 누구나 다 나서야지요. 동무부터.》

《나? 하하…》

리진은 종작없는 웃음을 웃었다. 그 웃음에는 페불때문에 쓴맛을 볼대로 본 쓸쓸함과 페불을 잊지 못해하는 심경이 한데 섞여있었다. 그 모양을 말없이 지켜보던 주경의 눈길은 은백양나무로 옮겨졌다.

《은백양은 여전히 왕성하구만요.》

밤이슬이 돋은 나무잎새들은 구슬처럼 반짝이며 조용히 흐느적이였다. 리진은 그제야 이밤 주경이 어째서 여기로 왔을가 하는 어렴풋한 의문이 갈마들었다.

그립던 고향의 향취에 젖어들고싶어 발길 뜸한 이곳을 찾은것은 아닐것이다. 그렇다면 어릴적자취를 더듬고싶어서일가? 돌연 리진은 주경의 마음속에 자기가 자리잡고있다는 생각으로 무척 감격스러워 가슴속으로 뜨거운것이 울컥 치밀었다.

자기곁에도 함께 고락을 나누어줄 동무가 있다는 사실에 몹시 격동되면서 주경이를 도와 페불에 다시 뛰여들고싶은 욕망이 세차게 끓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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