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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회


제 1 편


은백양나무에 새겨진 자취


제 1 장

 

1


승림화학공장구내와 이어진 동쪽변두리 한적한 곳에는 한그루의 은백양나무가 서있다. 거뭇하고 터실터실한 아름드리 몸통을 곧추 펴고 창공을 향해 소소리높이 솟은 그 기품도 의젓하기 이를데 없지만 이 고장이 흘러온 력사를 년륜에 새긴 손꼽히는 풍물로 한때는 사람들의 황홀한 눈빛과 찬탄속에 보냈을것만 같다.

건국의 나날 환희에 넘쳐 부르던 첫 인민주권의 노래며 침략의 무리들을 쳐물리친 전승의 축포며 전후복구건설과 천리마대진군의 힘찬 발걸음소리들이 그 싱싱한 줄기와 아지들에 휘감겨있으리라.

어찌 그뿐이랴. 무더운 여름철이면 오가는 길손들에게 짙은 향기와 푸르른 그늘은 물론 뭇새들에게도 살뜰한 보금자리를 제공했을것이며 한겨울이면 소대가리를 박살낸다는 이 고장의 성깔스러운 바람도 막아주었을것이다.

하지만 70년대 초엽 이 고장에 대원유화학기지가 새롭게 들어앉으면서부터는 너무도 한적한 곳에 자리잡게 되여 뭇생명들에게 황홀한 미와 상쾌한 향취, 안식을 주던 그 시절도 지난 일로 되였다.

해종일 고적에 잠들어있는 여기로 오늘은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주경이, 모든 일은 내가 뒤죽박죽 만들었소. 내가 말이요.…)

은백양나무아래 잔디우에 팔베개를 고이고 길게 누운 김리진은 맥락없이 중얼거렸다. 엷어져가는 저녁볕이 한쪽입귀로 가는 풀대를 짓씹고있는 그의 얼굴을 소심한 미소로 쓰다듬고있었으나 오히려 그의 눈지방에 드리운 고뇌의 그림자를 더욱 푸릿하게 할뿐이였다. 한줄기의 광선이 구름을 뚫고 나무정수리에 비수처럼 꽂히자 그는 심장이 쏘는듯 한 아픔으로 몸을 비틀었다.

그는 오늘 낮에 겪은 곤경에서 헤여나지 못하고있었다. 낮교대근무를 서던 김리진은 중유로밑창에 들어가 바나를 조절해나갔다. 땅면에서 1메터정도 들려있는 중유로밑창은 수십개나 되는 바나에서 내뿜는 중유불길과 기름타는 냄새로 하여 숨막히는 공간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로공들은 바나를 조절할 때면 자주 밖으로 뛰여나와 신선한 공기를 갈아대군 하였다.

리진은 숨을 딱 끊고 재빨리 바나조절을 해놓고는 땀과 기름으로 얼룩진 얼굴을 밖으로 내밀었다. 그때 중유로현장으로 진갈색의 생산지휘용승용차가 서서히 들어서며 멈춰섰다.

차에서는 기술과 부원인 서종섭이와 뒤따라 한 처녀가 내렸다. 무심히 그쪽에 눈길을 주던 리진은 불시에 온몸이 팽팽해졌다.

그를 등지고선 처녀의 자태가 무척 낯익어서였다. 날씬한 몸매에 파마기가 없는 단정한 머리, 매끈하고 하얀 두다리, 몸의 곳곳에 배여있는 의젓하고 세련된 기품…

과연 그가 옳을가, 참말로 전주경일가?

딱히는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처녀가 반나마 돌아섰을 때 죄여들던 그의 가슴은 후둑후둑 뛰기 시작하였다.

처녀의 선명한 옆모습과 기다란 목, 빛을 뿜는 도고한 눈동자… 심장은 어느새 환희로 부풀어오르며 온몸에 기쁨의 물결을 가득채워 그를 그 처녀앞으로 떠밀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한시도 떠날줄 모르는 전주경이였다.

하지만 돌연 뇌리를 스치는 다른 생각이 그의 흥분을 억눌렀다. 피끗 얼마전 전준혁기사장이 기술자모임에서 사회주의건설의 류례없는 대진군이 예견되는 현시점에서 기업소는 속도전을 벌려 페불을 기어이 리용해야 하며 그러자면 과학원 열공학전문가들의 방조를 받아야겠다고 확고한 결심을 표명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김리진은 웬일인지 지금까지 전주경이 열공학계통의 전문가들중 한사람임을 망각하고있었다. 그렇다면 주경이가?… 십상 그럴수 있었다.

전주경은 김책공업대학(당시) 열공학부 졸업이후 과학원 열공학연구소에서 뚜렷한 몫을 차지하고있는 연구사였다. 게다가 전준혁기사장이 애지중지 키워 공부시켜준 그의 친조카이기도 하였다. 그러니 전준혁기사장은 조카한테 얼마든지 방조를 요구할수 있었다.

일은 참으로 맹랑하기 짝이 없었다. 그 처녀에 대한 반가움에 떨던 몸은 금시에 싸늘해졌다. 그는 피기가 가셔지는 얼굴을 얼른 중유로밑창에 구겨박았다. 기름딱지작업복에 기름그을음이 발린 얼굴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주경이가 페불리용시험의 파격적인 후과를 책임지고 기업소 공업연구소 연구사로부터 중유로 로공으로 강직된 자기의 몰골을 본다면 얼마나 실망할텐가.

철계단 밟는 소리가 머리우에서 들렸다. 로밑창바닥에 쭈그리고앉은채 움직일념을 못하던 리진은 그 쇠계단 밟는 소리가 마치도 자기의 머리를 짓밟는것보다 더 괴롭게 마쳐왔다. 서종섭은 주경이를 데리고 중유로로정에 올라가 페불리용시험으로 허물어졌던 로벽상태며 휘여든 사관부위들을 일일이 보여주려는듯싶었다. 로는 이미 복구되여 운영되고있지만 리진이가 남긴 실패의 흔적은 남아있었다.

이제 전주경은 페불연구에 앞서 자기가 저지른 사고의 원인부터 밝히려 할것이다. 아, 마음속 그리움으로 가득찼던 주경이가 아물지 못한 상처에 칼질을 하듯 자기 죄상을 파헤치리라고 생각하니 머리는 빠개지고 온몸은 달아오른 불판에 지지우는것 같았다.

비로소 그는 너무도 낮은 위치, 감히 바라보기조차 할수 없는 낭떠러지아래 서있음을 의식하였다. 그는 그 괴로움에 쫓기워 일이 끝나기 바쁘게 이 한적한 곳으로 달려왔던것이다.

이태전 대학을 마친 주경이를 기다려 하루하루를 일년 맞잡이로 손꼽아 바라던 상봉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김리진은 한낮의 해빛속에서 그처럼 온화한 빛을 드러내며 향기를 뿜던 은백양나무잎새들이 어느새 희벗한 어둠속에서 서늘한 입김을 날리고있는줄도 모르고있었다. 푸르스름한 어둠과 은백양나무사이엔 재빛안개가 서리였다. 그의 상념은 짙어져가는 어둠과 함께 더욱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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