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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7 회


제 2 편


9


《이보라구, 임자 장가갈 생각은 통 하는것 같지 않으니 어찌된건가?》

오래간만에 집에 찾아온 광우에게 고모가 물었다.

광우는 히죽이 웃었다.

《고모, 장가가는 일이 뭐 그다지 바빠요?》

《야, 네 나이 서른둘이 작아서 그래? 올해는 꼭 색시를 얻어야 해. 너는 량심이 없어.》

《하하, 아니, 총각이 장가 좀 늦게 간다고 량심없다는건 어느 사전에 있어요?》

《사전은 무슨 사전이야? 생각해봐라. 너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다나니 어머니는 너 하나를 키우면서 여직껏 외롭게 살아오시는데 손자라도 하나 안겨줘야 하지 않겠어.》

광우는 그만에야 할소리가 없어졌다. 느닷없이 가슴이 찌릇해왔다. 어언간 세월이 흘러 검고 윤기나던 어머니의 머리에도 이제는 흰서리가 앉고 눈가에는 잔주름이 실리였다.

그래도 군인사택마을을 뜨지 않고있다. 이제는 그 고장이 고향처럼 여겨진다고 한다.

거기 산기슭에는 어머니가 심어가꾸는 약초밭도 있다.

《네가 색시를 얻어 살림을 편 다음에도 이 엄마는 여기서 살다가 네 아버지곁에 묻히겠다. 네 아버지곁에는 동무해줄 내가 있어야 해. 그대신 색시와 함께 드문히 찾아오려무나. 나도 손자야 안아봐야지.》

어머니가 웃으며 하던 말이다. 군인들과 군인가족들의 건강을 돌봐주는것을 락으로 삼고 여생을 보내는 어머니이다.

《장가를 가겠어? 안 가겠어?》

고모는 소힘줄보다 더 질긴 녀자였다. 조카를 붙들고 락착을 보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을 작정을 한듯 따지고들었다.

에이, 벽창호같은 고모!

《아니, 그게 뭐 마음먹는다고 될 일이예요? 고모.》

그 말에 고모는 눈이 둥그래서 어이없어했다.

《아니 야, 너 그럼 그 나이 되도록 처녀 하나 봐둔게 없단 말이냐? 군관별을 달았다고 똑똑한줄 알았는데 어디가 부실한게 아니냐?》

《고모두! 마음드는 처녀가 하나 있기는 있었어요.》

《글쎄 그러면 그렇겠지. 그래 어떤 처녀냐? 집은 어디구? 부모들은 뭘하는 사람이냐?》

성미급한 고모가 다그어대는 숱한 물음에 광우는 한마디도 대답할수가 없었다. 무슨 대답을 한단 말인가? 처녀의 이름 석자나 겨우 알고있을뿐인데야.

사실 김광우가 고모의 묻는 말에 처녀가 하나 있다고 한것은 자기도모르게 얼결에 나간 소리였다. 오래전의 그 간호원처녀가 그 순간에 불쑥 떠올랐던것이였다.

광우는 애당초 간호원처녀와 무슨 언약을 한적이 없었다. 처녀의 부모님들이 무슨 일을 하고있으며 그의 고향이 어디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처녀에 대하여 알고있는것이란 군사복무를 마치고 제대될 때 어느 대학에 추천을 받았다는것이 전부였다. 그것은 벌써 오래전의 일이였다.

광우에게 남다른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처녀가 제대되여 가버린 다음에도 그를 잊지 못하는 그것이였다. 그때에 이르러서는 광우 역시 그 처녀야말로 부대안의 군인들모두가 말하듯이 세상에서 용모도 마음도 가장 정결하다고 생각되는것이였다.

그것이 처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라고 그는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자기가 처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면 그것이 그 훌륭한 처녀에게는 심한 모욕으로 될것이라는 생각조차 드는것이였다.

《원, 세상에!》 광우의 솔직한 고백을 다 듣고난 고모는 기가 막혀 웃었다.《군관학교 최우등생이 맞니? 그렇게 잊지 못해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했단 말이냐?》

고모는 수완도 좋고 또 안면도 넓은 녀자였다.

고모는 조카가 천사처럼 말하는 그 처녀의 행처를 어떻게 수소문해서라도 반드시 찾아내리라고 결심했다. 제대된지 몇해 잘 지나갔지만 혹시 알랴. 아직도 시집을 가지 않고 처녀로 남아있을는지?

고모는 결심대로 기어이 처녀의 행처를 알아내고야말았다.

조카를 처녀한테로 떠밀어보내려는데 이번에는 본인이 안 가겠다고 딱 버티였다. 그 녀자가 시집을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처녀로 남아있다고 하여도 가서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처녀에게 그 어떤 약속도 한적이 없는 나이든 군관총각이 나타나서 밑도 끝도 없이 생나무 꺾듯 나와 결혼합시다 하고 말한단 말인가?

《아니, 난 절대로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그건 처녀에게 모욕으로 될거란 말입니다.》

《아유, 기차다! 이 샌님아, 안되겠다. 아무래도 이 〈외교부장〉이 또 수고를 좀 해야겠구나.》

처녀는 그리 먼곳에 있는것도 아니였다. 교외의 한적한 소층주택지구에서 살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곳에서 중학교 교원을 한다고 했다.

처녀를 찾아갔던 고모는 이틀후에 돌아왔다.

《원, 일두 참!》

고모는 한마디 탄식뿐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모의 얼굴에는 쓸쓸한 기운이 어리였다.

광우는 상서롭지 않은 예감에 가슴이 철렁했다. 처녀의 신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도대체 무슨 일이? 불안했다.

왜 그러는가고 물어서야 고모는 기막힌 사연을 말했다.

《글쎄 아까운 처녀가 대학을 나오자마자 원인 모를 병으로 하반신마비가 왔댔더구나. 거기에 다른 속탈까지 있어서 병원에 반년동안 입원해있었다더라. 오래전에 랭을 만났던 후과라던지. 치료를 받고 많이 나아져서 학교에 나가지만 아직도 그 후유증은 깨끗이 가시여지지 않았더라. 조카소리를 했다. 처녀는 펄쩍 뛰더라. 자기같은 녀자는 조카의 짝이 못된다는거야. 일생 짐이 된다는거지. 알고보니 처녀는 일생 혼자 살 독한 결심을 하고있더라. 그의 늙은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그런 말을 해주어서 알았지.》

광우는 가슴이 쓰리였다. 세상일에 불공정한것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공정치 못한것이 아닌가. 그토록 사람들에 대한 깨끗한 사랑을 간직한 녀자가 그런 불행을 당하다니! 더 생각해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튿날 처녀를 찾아갔다.

이번에는 고모쪽에서 조카의 일생문제이니 생각을 깊이 해보고 결심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야 가정환경으로 봐도 그래, 앞으로 크게 발전할 사람인데 아무렴 어디서 더 좋은 처녀를 얻지 못하겠느냐고 했다.

그 말에 광우는 속이 좋지 않았다.

《고모, 내가 어쨌다는거예요? 그리고 처녀의 처지가 어쨌다는거예요? 나는 세상을 다 뒤져도 그보다 더 훌륭한 처녀는 찾지 못할거예요!》

처녀를 만났다. 《할머니의 노래》를 불러주던 그때의 천진스럽던 처녀가 아니였다. 창백한 처녀의 얼굴에는 수심의 흔적이 어려있었다. 하긴 운명적인 독한 결심을 하고난 처녀가 아닌가!

《동문 생활을 포기할 권리가 없소!》

광우는 청혼했다.

《아니, 그러지 마세요! 그래선 안돼요!》

처녀는 얼굴이 새파래서 부르짖었다.

《왜 안된다는거요?》

《난 죄많은 녀자가 되고싶지 않단 말이예요. 그리고 동진…》

광우는 격해서 처녀의 말을 중둥무이했다.

《동무가 무슨 말을 더 하자고 그러는지 알겠소. 우리 고모한테 다 말하지 않았소. 하지만 동문 잘못 생각하고있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것은 참되게 사랑할줄 아는거요. 깨끗한 마음으로… 진심을 바쳐… 그렇게 자기 조국, 자기가 태여난 고향, 자기의 동지들을 사랑하고… 그렇게 자기 수령께 충정을 다할줄 아는 그거란 말이요!

생각해보오. 그때 동문 스러져가는 내 생명을 붙들고 〈할머니의 노래〉를 불러주며 무엇을 생각했소? 나는 지금도 솜옷을 못 입고있던 그 간호원을 잊을수가 없소. 그래서 동무를 사랑했소. 실은 그때부터 말이요. 동무를 너무도 사랑하기때문에 사랑한다는 말을 못했던것이요.》

처녀는 울고있었다.…


우등불은 탁탁 불꽃을 튀였다. 너울거리는 불길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모두 생각하고있었다. 인생에 대하여, 의무에 대하여 그리고 사랑에 대하여…

광우는 집을 나설 때부터 은근히 온 심신을 압박해오던 불안이 현실로 되는구나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동통은 더는 참을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등불은 기세좋게 타오르는데 몸이 와들와들 떨리면서 속을 집게로 집어비트는듯 한 아픔이 왔다.

두려운것은 자기가 쓰러지는것자체보다도 그것때문에 소동이 일어나는것이였다.

도소재지에서 사람들이 기다리고있을것이다. 이제 거기 가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것인가!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험체계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강습을 진행해야 하고 수험생들이 도착하는 즉시로 그들이 콤퓨터시험에 나설수 있게 준비시키는 사업도 해야 한다.

중앙의 종합봉사기실과 망련결은 되여있지만 말단설비들이 어떻게 준비되였는지 알아봐야 한다.

그밖에도 예견치 못했던 일들이 제기될수 있다.

미지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가시덤불이나 벼랑이 막아나설수 있다. 그때엔 돌아가면 된다. 하지만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은 에돌거나 미룰수도 없는 일이다. 대학입학시험이라는것자체가 미룰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첫걸음을 내짚은 우리의 일이 늦어지면 조국의 진보가 그만큼 늦어진다. 늦어지면 안된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광우의 눈앞에는 군관학교시절의 그 전술교원이 떠올랐다. 소를 잃은 농부에 대하여 교훈적인 말을 해주던 그가 근엄한 표정을 하고 광우를 바라보았다.

《쓰러지지 마시오. 동무는 그럴 권리가 없소. 조국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오!》

그래… 그래… 기관차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조국은 미래를 향해 오직 앞으로… 질풍같이 앞으로… 앞으로… 그는 의식이 몽롱해지는 속에 거대한 강철바퀴들이 지구를 쾅쾅 울리며 굴러가는 소리를 듣고있었다.

광우는 끝내 배를 그러안으며 신음소리를 질렀다.

모닥불주위에 둘러앉아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왜 그러는가고 일시에 부르짖었다.

광우는 그 소리를 들으며 의식을 잃었다.

그것은 짧은 한순간이였다.

다시 깨여났을 때 광우는 누구를 나무라는 정성금의 어렴풋한 목소리를 들었다.

《동문 부국장동지가 얼굴색이 좋지 않다는걸 알고있었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요. 그랬더라면 도중에 어느 병원에라도 입원시키든가 떨어져서 치료를 받도록 할수 있지 않았어요.》

《호성동지두 참!》

그것은 유선일의 목소리이다.

그러니 두사람이 김호성을 나무람하고있다.

그다음엔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토론이다.

돌아올줄 모른다고 운전사를 걱정하는 소리, 부국장을 업고서라도 령아래 군소재지에 내려가야 한다는 소리, 지나가는 자동차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하는 막연한 소리…

그 순간에 광우는 흐리마리한 의식을 파고들어오는 귀에 설지 않은 목소리를 들었다. 이번에는 전술교원이 아니다.

《쓰러지지 말아라. 인생의 좌표를 정했으면 끝까지 가야 한다.》

그것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사람은 언제나 다그쳐 살아야 한다고, 그것은 인생은 짧은데 걸머진 짐은 무겁기때문이라고 아버지의 생이 응축된 말을 들려주던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그러지들 마오.… 기다려야… 해… 운전사를…》

그는 망각의 심연속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는 깨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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