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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1 회


제8장 마지막의병대


8


이른아침에 도평을 떠난 강수길의 일행이 새골로 향하고있었다.

일행은 넷이였다.

김정환의병장이 길잡이로 붙여준 덕쇠와 억만이가 앞장에 서고 강수길이와 박태영이 뒤를 따랐다. 그들은 지금 려은이가 살고있는 곳을 향해 가고있었다.

의병대에 온 첫날부터 한번 짬을 내여 지남이와 한정만의 묘소도 찾아보고 려은이도 만나 가슴속에 품었던 하많은 사연을 이야기하고싶었던 그들이였다.

하지만 왜놈들과의 싸움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다나니 지금껏 짬을 낼수가 없었다.

마침 의병대가 도평에서 여러날 숨을 돌리는 기회에 강수길은 의병장에게서 말미를 얻었다.

왜놈들과 항시적인 싸움을 벌리는 의병대에서 쉽게 차례지지 않는 적절한 기회를 놓치고싶지 않았던것이다. 게다가 도평에서 새골까지는 한나절품도 채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의병장의 허락을 받고 길잡이까지 선정하였지만 무삼이네와 함께 계정방향으로 습격을 나간 리달삼이가 돌아오지 않아 하루를 더 기다렸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왜놈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거기서도 더 멀리 떨어진 잠성일대의 헌병초소 하나를 더 답새겨 왜놈들의 초점을 딴 방향으로 돌려놓고 돌아오겠다는 무삼이의 련락이 왔다.

그리하여 아쉬운대로 달삼이 없이 그들만 떠나야 했던것이다.

달삼이는 후일 기회가 다시 생기면 그때 함께 오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떠나자고 작정을 한 어제 밤에 김정환의병장에게 서신 한통이 도착했는데 그 내용인즉 왜놈들의 군수물자를 실은 말바리 다섯대가 관모봉일대로 떠났다는것이였다.

박주룡이와 함께 서흥에 내려갔던 의병이 가지고 온 그 서신의 내용을 전해들은 강수길은 려은이에게 가던 걸음을 미루려고 작정하였다.

하지만 김정환의병장은 생각이 달랐다.

한번 내친걸음인데 이번에 못 가면 언제 가보겠는가고 하였다. 그러면서 관모봉의 군수물자는 자기가 의병들을 거느리고 뺏아오겠으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그의 등을 떠밀었던것이다.

수길이와 박태영은 관모봉으로 떠나가는 의병장을 바래우고나서 곧장 예정했던대로 이른새벽에 그곳을 떠나게 되였다.

이슬이 자욱한 숲속길을 걸으면서 수길은 이제 려은이를 만나면 가슴이 미여질 일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눈굽이 후더워났다.

참으로 지남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여지는듯싶었다.

언제인가 진희와 함께 지나가는 려은이를 먼발치에서 보고 그는 이렇게 감탄했다.

《정말 아름다운 처녀로구만. 고상하면서도 아련하구… 거기다가 무척 다심하겠어. 정말이지 자네의 진희씨와 조금도 기울지 않겠네. 여보게, 안 그런가?》

지남이가 처음으로 처녀에게 관심을 가지는것을 본 강수길은 몹시 의아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가왔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애틋한 정을 모르고 살아온 지남이가 아버지의 강박으로 역적집 딸과 억지혼인이 락착되였을 때 그 누구보다 격분했던 수길이였다. 하여 지남이가 《난봉》이 될 결심을 품었을 때 적극 지지했으며 그의 등을 떠밀어주었던것이다. 그 일이 있은 다음 역적의 집안과 혼인말이 더는 오가지 않았지만 웬일인지 지남이 역시 처녀들에 대해 아예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그런 지남이에게 드디여 따뜻한 봄이 왔던것이다.

지남은 수길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수길이, 진희씨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를 내 사람으로 만들겠네. 그러면 아마 그들의 사이도 더욱 자별해지고 자네와 나도 더욱 한몸이 될것이 아닌가. 안 그래?》

지남이의 말에 수길은 반색을 했다.

《그게 진정인가?》

《장부일언 중천금일세.》

수길은 참으로 기뻤다. 그때는 이미 수길이자신이 그처럼 진정으로 위해주고싶고 한생 행복만을 주고싶은 진희에게 결별을 다짐하고있던 때였지만 지남이에게는 진정한 행복이 찾아들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지남은 정말로 려은이네 집으로 매파를 보냈다. 하지만 그가 얻은것은 랭대뿐이였다.

지남이가 려은이의 집에 직접 찾아들어갔다가 려은의 부친인 고익재에게 쫓겨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수길은 그가 몹시 실망했으리라 생각하고 그에게 달려갔었다.

그런데 문턱에 발도 들이밀지 못하고 쫓겨난 창피를 당하고 쓰디쓴 고배의 술이라도 마시고있으려니 생각했던 지남이가 뜻밖에도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고있는것을 보게 될줄이야…

수길은 가슴이 철렁했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세상에 태여나 처음으로 마음에 둔 한 처녀때문에 실성이라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매파를 보내고 제가 직접 찾아가기까지 한것이 한번 얼굴예쁜 처녀의 마음을 건드려보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아버릴 마음의 준비를 이미 갖춘 상태에서 행한것이라고밖에 달리 볼수가 없었다.

하지만 수길은 지남이가 그렇게까지 용렬한 인간이라고는 절대로 생각지 않았다.

자기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수길이에게 지남이는 이렇게 말했다.

《수길이, 내가 정말 처녀는 참 잘 골랐거던. 난 복을 받았어.》

지남의 말에 수길은 어이가 없었다.

매파가 쫓겨오고 제가 찾아갔다가 쫓겨난 주제에 처녀를 잘 골랐다는건 무슨 얼빠진 소리이며 그런 문전거절을 두고 복을 받았다는건 또 무슨 낮도깨비같은 말인가. …

지남이가 흔연히 웃으며 자기의 속생각을 말했다.

얼마나 순결한 녀성인가? 난봉군과는 추호의 타협도 하지 않으려는 그 송죽같은 마음씨… 더구나 그 부친의 마음은 또 얼마나 강의한것인가. …

수길은 의아한 얼굴로 지남이를 계속 바라보았다.

지남이는 그러는 수길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길이, 그 집에서 나를 마다하는 리유가 다른것이 아닐세. 내가 난봉군이며 도덕을 모른다는것뿐이란 말일세. 난봉군은 가정을 망치고 부친에게 효도를 모르면 나라도 위할수 없다는것이지. 알겠나? 그게 리유란 말이야.》

지남은 추연하게 먼곳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다시 웃었다.

《하지만 자네도 알다싶이 난 결코 그들이 생각하는 난봉군이 아니질 않나. 그리고 나도 나라를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칠 각오가 되여있는 사람이 아닌가. 난 그들이 나를 마다하는 리유가 더욱 마음에 들었네. 그리고 나를 마다하는 리유가 그뿐이기때문에 절대로 그를 단념하지 않으려네.》

지남의 마음을 알게 된 수길은 감동했다.

정말 좋은 친구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려은이와 그의 부친이 생각하는 그릇된 생각을 돌려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려은이의 부친인 고익재도 나라를 위해 의병들과도 련계를 맺고있는것이 적실한 사람인것만큼 자기가 모든 사실을 까밝히면 아마도 지남이를 선뜻 자기의 사람으로 받아들이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수길은 그럴수가 없었다.

려은의 집에 엄청난 불행이 급작스레 들이닥쳤던것이다.

려은이네 집에 일이 생겼을 때 당황하여 어쩔줄 모르던 지남이의 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했다.

지남이는 당장 려은이를 구원해야겠다고 나섰다. 려은이의 일로 분별을 잃은 그가 자칫하다가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일을 그르칠수가 있었다.

수길은 그러는 지남이를 가까스레 달래놓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날 저녁 수길은 리달삼, 박태영이들과 함께 려은이네 집을 둘러싸고 지키는 일진회원들을 따돌려놓았다.

그 기회에 지남이는 득진이와 함께 뒤울담을 넘어들어가 려은이를 빼내오게 되였던것이다.

려은이를 빼내온 날 밤 지남이와 수길이네는 한자리에 모여앉았다.

이제는 려은이가 일진회놈들의 시야에 들었으니 한성에서는 살수가 없는것이다. 그리고 어느 고을에 내려간다고 해도 일진회의 지회들이 있기때문에 시시각각으로 려은이는 위험속에 살아야 할것이다.

바로 그런것으로 하여 누구도 적중한 안을 내놓지 못하고있었다.

언제까지라도 말이 없을것 같던 지남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난 려은이를 데리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려네.》

그들은 다같이 놀랐다.

《그럼 세상과 담을 쌓겠다는건가?》

《그렇네.》

너무도 비장스런 지남의 결심에 그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수길은 지남의 이러한 결심이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이보게, 우리야 사생동고를 맺고 이날이때껏 위험한 이 길을 함께 걸어오지 않았나. 그런데 자네가 한 처녀때문에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겠다니…》

수길이 더 말을 잇지 못하자 그를 한동안 바라보기만 하던 지남이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이 세상과 담을 쌓으려는것이 단지 한 처녀때문만은 아니네. 난 어려서부터 자네와 함께 글을 배웠고 세상리치를 깨우쳤네. 바로 그래서 자네가 나라의 원쑤인 하세가와를 없애겠다고 나섰을 때 함께 나섰네. 그러나…》

지남은 잠시 말을 끊고 격해지는 마음을 누르느라 모지름쓰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라는 이미 망했네. 지금의 황제가 나라를 바로잡지는 못해.》

너무도 엄청난 지남이의 말에 수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만하라구. 자네가 감히 황제페하를 모독하다니… 그게 대역죄인줄 자네가 모른단 말인가?》

박태영과 달삼이 수길을 막아섰다.

수길은 그들을 뿌리치고 한걸음 다가섰다.

지남은 그러는 수길을 바라보다가 외면해버렸다.

그의 말소리가 어느 먼곳에서처럼 들려왔다.

《아관파천, 을미사변… 얼마나 많은 비극을 겪었나. 단군의 후손들이, 동방의 강국 고구려의 후손인 이 나라가 이제는 외적에게 그런 수치를 당하면서도 항변 한마디 못하다 못해 나중엔 나라가 통채로 먹히우고있네. 그런데… 자네가 일본군사령관놈따위 하나 죽여버린다고 해서 기울어져가는 나라가 바로잡힐상싶은가? 어림도 없네. 황제의 분풀이는 될지 모르나 나라를 바로잡지는 못해. 그 하나를 죽이면 또 다른 불악귀가 나타날걸세.》

지남의 말에 수길은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지남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전부터 나에게는 자네들이 믿는 황제에 대한 믿음이 허물어졌네. 나라의 근본이 무엇인가? 백성이 아니겠나. 그런데 하늘땅에 사무친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줄수 없는 황제는 해선 뭘 하겠나. 그래서 나는 이미전부터 세상과 담을 쌓고 가슴속의 울분을 혼자 묵새기며 살기로 결심을 했었네. 지금이 바로 때가 되였네. 이제는 세상에 홀로 남아 더러운 놈들의 수난을 당해야 할 한 애국지사의 딸, 순진한 조선녀성 하나만이라도 내가 지키겠네. 난 나의 보금자리나마 지켜보려네. 나라가 무너지는 처절한 소리가 더이상 들리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 한가정이나마 지켜보려네. 잘들 있으라구.》

지남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

고요한 정적을 깨치며 수길의 젖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보게…》

지남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수길이 그에게 다가갔다.

지남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있었다.

수길이 천천히 품안에 손을 넣어 권총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그 권총을 지남이의 품에 넣어주었다.

수길이가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쪼록 험한 세상에서 부디 행복하라구. 그리구 꼭 다시 만나자구. …》

달삼이와 박태영이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그들의 얼굴에도 눈물이 끓어올랐다.

그들은 와락 한덩어리가 되였다. 그리고는 눈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들을 부비며 약속했다.

《이승에서 만나지 못하면 저승에서라도 기어이 다시 만나자구.》

그날 밤.

지남이가 자기 집 헛간의 뒤벽을 뚫고 려은이를 빼내는 동안 강수길과 동료들은 마차를 준비하고 길목들을 감시하면서 그들이 일진회놈들의 눈을 피해 무사히 한성을 탈출하게 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헤여졌다.

그후 지남이가 장수산일대의 어느 산골짜기에 살림을 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앞길에 행복과 기쁨만이 깃들기를 진심으로 바라고바라던 그들이였다. 그런 그들에게 지남이의 희생은 가슴속에 영원히 아물수 없는 아픈 상처를 남겼다.

언제건 서로 만나 기이한 사연을 안고있는 그날의 모든 일들을 즐겁게 추억하자고 했던것이 오늘 이렇게 아픈 가슴을 안고 지남이가 없는 곳으로 향하고있었던것이다.

그 모든 생각을 하는 수길의 눈시울이 또다시 벌겋게 달아올랐다.

문득 한걸음 앞서 걷던 박태영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바람에 생각에서 깨여난 수길은 웬 일인가 하여 앞쪽을 바라보았다.

앞에서 길을 헤치던 덕쇠와 억만이가 풀덤불이 무성한 어느 한곳으로 총구를 내대는것이 보였다.

수길은 긴장해졌다.

어느새 그의 손에 권총이 쥐여져나왔다.

박태영이와 함께 급히 덕쇠가 있는 곳으로 다가간 수길은 나직이 속삭이듯 물었다.

《무슨 일이냐?》

《쉿!》

덕쇠가 주의를 주었다.

잠시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였다.

그들의 시선이 집중된 잡관목숲쪽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들려오고있었다.

분명 녀인의 신음소리였다.

그들은 급히 풀덤불을 헤치며 신음소리의 임자를 찾아 뛰여들었다.

몇걸음 떨어진 진대나무뒤에 온통 피자박이 된 웬 녀인이 쓰러져있었다.

수길이는 급히 그를 안아 무릎에 받치고 흔들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아가씨, 정신을 차리시오. …》

그를 흔들며 얼굴을 여겨보던 수길은 두눈을 흡떴다.

리용구를 따라 서흥에 이르렀을 때 본적이 있는 버들이라는 기생임을 알아보았던것이다.

그가 왜 이곳에 오게 되였는가? 몸에 난 상처는 무엇을 말해주고있는가?

버들이가 눈을 힘겹게 떠올렸다.

그는 수길이와 의병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차림새를 보고 의병이라는것을 알아보았던것이다.

버들은 이야기했다.

박주룡이 왜놈들에게 체포되고 돌망골과 바리산이 위험에 처했으며 관모봉의 군수물자가 의병대를 유인하기 위한 오까노모의 미끼라는데 대하여 버들은 눈물을 흘리며 모두 이야기해주었다.

버들이의 이야기를 들은 수길이와 의병들은 모두가 아연하여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그들의 눈길이 수길이에게 쏠렸다.

수길은 생각했다.

김정환의병장을 따라잡기는 이미 틀렸다. 그러니 그들이 왜놈들의 매복에서 무사히 빠져나오기만을 바랄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것이다.

하다면 돌망골은…

수길은 박태영과 덕쇠 그리고 억만이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수길의 말을 기다리고있었다.

수길은 덕쇠와 억만이를 일별하고나서 박태영에게 눈길을 박았다.

《박형, 돌망골에 우리가 가기요.》

박태영이 펄쩍 날았다.

《정신있소. 우리 둘이서 거길 가서는 어쩌자는거요?》

수길은 잠시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아직은 어찌해야 할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가야 한다는것만은 명백했다.

수길은 박태영에게 조용히 말을 이었다.

《박형, 일전에 김정환의병장이 한 말이 생각나누만. 〈우리가 사람들을 지키지 못하면 무슨 의병대겠는가? 설사 한사람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열명의 의병들이 잘못된다고 해도 우린 백성들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백성이자 곧 나라이기때문이다.〉 참 명담이라고 생각하오. 의병장이 비록 글귀는 나나 박형보다 모를는지는 몰라도 참생의 뜻만은 우릴 훨씬 릉가하오.》

박태영은 말이 없었다.

자기도 얼마전에 김정환의 그 말을 들은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저 의병장이 범상한 인물은 아니라는 정도로만 생각을 흘려보냈었는데 수길이를 통하여 다시 듣게 되니 그 의미가 새롭게 안겨들었다.

수길이의 말이 다시 울려왔다.

《우린 지금껏 나라를 위한다고 하면서 뛰여다녔지만 한번도 백성을 위해보지는 못했소. 때문에 이 길이 죽음의 길이라고 해도 내 단 한번이라도 백성을 위하고 죽고싶소.》

박태영이 수길의 손을 꼭 잡았다.

《내가 생각이 짧았구만. 우리가 재명이처럼 떳떳이 살아야 한다는걸 잠시나마 망각했으니 나를 질책해주오.》

수길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추연한 눈길로 지남산쪽을 바라보았다.

《한형과 지남이의 묘소에 올라 실컷 울자고 했댔는데… 지남의 안사람과 만나 하고싶은 말도 많았는데 이젠 어쩔수 없구려.》

수길은 자기들쪽을 실성한듯 바라보고있는 억만이에게 돌아섰다.

《이 아가씨를 데리고 돌아가게. 의병장이 저녁쯤에는 도평으로 돌아올것이요. 지금 의병대가 왜놈들이 매복한 곳으로 갔다지만 난 의병장을 믿네. 의병장은 꼭 의병대를 이끌고 돌아올거네. 의병장이 돌아오면 돌망골소식을 전하고 우리가 맡겠으니 뒤처리를 부탁하더라고 전해주게.》

억만이가 단박에 눈시울이 벌겋게 되여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놈들이 수두룩이 밀려간다던데 일없겠나요.》

버들이도 힘겹게 숨을 톺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놈들이… 두개 소대가량 떠났다고 했소이다. 그걸 두세명에서야 어떻게…》

수길은 빙그레 웃으며 버들이를 안심시켰다.

《이제 다른 방법은 없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몸이나 돌보시오.》

버들이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을 끄덕였다.

억만이에게 버들이를 부탁한 강수길은 몸을 돌렸다.

강수길이와 박태영은 돌망골로 질러가는 길을 잘 아는 덕쇠를 앞세우고 수풀속으로 사라졌다.


× ×


김정환은 대오를 다시 도평으로 이끌었다.

자칫하면 관모봉일대에서 왜놈들의 매복에 들번 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른새벽에 도평을 떠나 관모봉으로 가면서 김정환은 마음이 불안스럽기 그지없었다.

그의 머리속에서 여러가지 의문이 떠나질 않았던것이다.

오까노모란 놈이 어째서 군수품을 관모봉으로 끌어들이는것인가. 관모봉일대에는 한개 경찰관파출소밖에 없는 곳인데 말바리 다섯대분의 군수물자는 무엇에 필요하단 말인가.

김정환의 머리속에서는 구치산과 약우물골에서의 의문스러운 왜놈들과의 조우전이 다시 상기되였다.

구치산과 약우물골에서 왜놈들과의 뜻밖의 싸움으로 인한 짙은 의문은 참으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 일을 되새겨본 김정환은 이번 길을 조심히 움직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김정환은 앞으로 오리길정도에 척후를 세우고 조심스럽게 관모봉을 향하여 접근하기 시작했다.

관모봉일대에 거의 이르러서는 그곳 지형을 세세히 살펴보고나서 가장 으슥한 골짜기인 고사리골부터는 척후들이 최대로 은밀히 움직이도록 하였다.

아니나다를가 척후에서 바로 그 고사리골에 숱한 왜놈들이 완전매복진을 형성하고있다는 련락이 왔다.

김정환은 급히 대오를 퇴각시켰다.

관모봉일대에서 멀찍이 빠져나온 김정환은 혹시 자기들의 뒤를 따르는 수비대놈들이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으로 후위를 파하여 동태를 살핀 다음에야 마음놓고 귀로에 올랐던것이다.

참으로 김정환의 가슴은 착잡했다.

이거야말로 왜놈들의 계략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혹시 왜놈들이 버들이에 대하여 눈치차린게 아닐가?

김정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돌아가면 빨리 버들이를 빼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때렸다.

봉대가 그의 곁으로 다가오며 두덜거렸다.

《의병장님, 이거 뭐가 좀 이상하지 않수? 우리가 왜놈들의 계책에 말려드는것 같은게…》

김정환은 말이 없었다.

봉대라고 왜 지금 상황에서 그러루한 눈치를 차리지 못하랴. …

더우기 구치산일대와 약우물골에 불의에 들이닥친 왜놈들의 행적을 하나하나 따져놓고보면 뭔가 이상스럽더라고 자주 외우군 하는 봉대로서는 그럴만도 한 일이였다.

하지만 김정환은 자기들을 도와준 버들이가 괜히 눈먼 욕이라도 당할것 같아 입을 꾹 다물고 말을 내지 않았다.

봉대의 눈길이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김정환은 그를 바라보며 동문서답으로 물었다.

《참, 너 솔매와는 어찌되였니?》

뚱딴지같은 질문이여서 눈이 둥그래질줄 알았었는데 봉대는 마침 기다리기나 했던듯 어이없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제꺽 받았다.

《그 령감이 끝내 말썽이 아니요. 아- 왜 자꾸 날 왜놈보듯 하는지 모르겠어요. 넨장…》

봉대는 화가 나는듯 돌부리를 툭 걷어차며 잠시 말을 끊고 눈치를 살피다가 말했다.

《차라리 이번 길에 형님이 좀 나서주구려. 중이 제 머릴 못 깎는다지 않나요. 그래도 사지동고를 맺은 동생의 일인데 어찌 그리 무관할수가 있어요?》

봉대의 볼부은 소리에 김정환은 어이가 없었다.

무관해서가 아니라 억지혼사야 어떻게 이루랴. … 솔매의 부친이 봉대를 어째 마다하는지 그로서도 잘 리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즈음에 와서는 솔매 부친의 눈치도 어지간히 달라진것이 적실했다.

이번 길에 정말로 솔매 아버지를 만나 한번 속을 터놓고 말을 해봐야 할가부다.

김정환이 말이 없자 봉대는 무료한감을 덜 심산에서인지 다른 말을 화제에 떠올렸다.

《의병장님, 수길이가 지금쯤 새골에서 돌아섰을가요? 내 이제 돌아가면 그 친구에게 전번에 소갈머리없이 논 일을 단단히 봉창할테요. 그는 부자집 아들치고 쉽지 않은 사람이요. 왜놈들과 싸움은 또 얼마나 잘하는지… 이번에 탁영대에서 그가 잡은 왜놈들이 서른은 넘지 않수. …》

김정환이 그러는 봉대를 여겨보다가 말했다.

《그는 왜놈들과 이미전부터 싸워왔다.》

《예?》

봉대는 놀라운듯 김정환을 바라보았다.

김정환은 봉대에게 강수길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정환은 돌아오는 전기간 봉대에게 수길의 래력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봉대는 너무도 놀라와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말했다.

《그러니 그날 밤 골목에서 만났을 때도 우리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있었군요. 탄약을 구입하러 갔을 때도 그가 우릴 도왔구요. 그런 사람을 내가 욕되게 하다니…》

봉대는 그 다음부터 내내 말이 없었다.

아마도 강수길에 대하여 생각하는것 같았다.

김정환은 그러는 봉대를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도평에서 강수길을 만나면 봉대가 다시 그의 앞에 대두병을 꺼내놓을것이다. 수길은 술을 못하지만 봉대가 부어주는 한잔 술을 달게 마실것이고… 그리고는 둘이서 힘껏 껴안을것이다. 와락…

김정환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어느덧 대오가 도평에 들어서고있었다. 마을이 있는 곳에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그가 억만인것을 알아본 김정환은 금시 의아해났다.

수길이네가 벌써 왔는가? 그럴수 없겠는데…

억만이가 달려와 눈물을 덤벙덤벙 쏟으며 강수길과 박태영이가 새골이 아니라 돌망골로 발길을 돌린 사연을 이야기했다.

억만이의 말을 들은 김정환은 아연하였다.

수길이와 박태영이 사지판인줄 알면서도 백성들을 위하여 그 위험한 곳으로 달려갔다는 말이 귀를 윙윙하게 하였다.

억만이가 버들이가 상처를 보이고있는 어느 초가마가리를 가리켰지만 김정환은 그럴 경황이 없었다.

억만이에게 버들이를 부탁하고는 즉시 대오를 돌렸다.

김정환은 즉시 전 대오를 이끌고 돌망골로 달렸다.

돌망골에 닥쳐온 위기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뛰여든 수길이네의 장거에 대하여 알게 된 의병들은 단 한사람도 떨어지지 않고 산이고 골이고 가리지 않고 곧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들이 돌망골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저물기 직전이였다.

마을은 텅 비여있었다. 동구길에서부터 싸움을 한 흔적이 력력했다.

김정환은 급히 의병들을 풀어 마을사람들을 찾아보게 하였다.

마을에서 골짜기를 두어개 넘어서 은신해있는 사람들을 찾아냈다.

모두가 무사했다. 사람들의 맨 앞장에서 덕쇠가 눈물을 쏟으며 달려왔다.

그러나 강수길이와 박태영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덕쇠가 눈물범벅이가 되여 사연을 설명했다.

그들이 산속길을 가로지르며 돌망골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왜놈들이 마을사람들을 모두 끌어내여 한데 모아놓고 금시 살륙을 시작하려던 때였다.

잠시 형세를 판별하고나서 수길이가 말했다.

《덕쇠야, 이제 놈들이 우리쪽으로 쏠리면 넌 빨리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안전한 곳으로 피해라. 그리구 의병대와 련계를 맺기 전에는 절대로 흩어지거나 이곳으로 돌아오지 말아야 한다.》

덕쇠는 울면서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를 바라보면서 수길은 처음으로 흰 이를 가지런히 드러내보이며 웃음을 지었다.

《그리구 우리가 돌아오지 못하면 의병장님께 끝까지 같이 싸우지 못해 미안해하더라고 꼭 전해라. …》

덕쇠가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는 얼굴을 끄덕였다.

그러는 덕쇠를 수길이와 박태영이 와락 껴안았다.

잠시후 그들은 덕쇠를 뒤에 떨구어두고 왜놈들가까이로 달려나갔다.

금시 마을사람들을 향하여 총부리들을 겨누었던 왜놈들은 뒤에서 벼락같이 나타나 명중사격을 들이대는 수길이와 박태영에 의해 순식간에 얼이 빠졌다.

그들의 총탄에 왜놈들은 무리로 쓰러졌다.

왜놈들은 자기들에게 총을 란사하는 상대가 두사람밖에 안된다는것을 간파하고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강수길과 박태영은 왜놈들을 끌고 마을을 멀리 벗어나 산으로 올랐다.

왜놈들이 수길이와 박태영을 따라 몰려갔다.

총소리는 계속 멀어졌다.

덕쇠가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때까지도 멀리서 총소리는 계속 울렸다. 하지만 총소리는 끝내 멎고야말았다.

덕쇠의 말을 듣는 김정환의 두눈에 피눈물이 흘렀다.

의병들이 무너지듯 주저앉아 실성한듯 의병장을 바라보았다.

김정환은 의병들을 불러일으켜 당장 그들의 행처를 찾게 하였다.

하지만 수길이와 박태영은 시신도 찾을 길이 없었다.

싸움흔적을 추적하던 의병들이 돌망골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산등성이에 그물그물 피여오르는 연기를 보고 달려갔다.

금시 마지막불찌가 사라져가는 재무지를 보면서 의병들이 땅을 쳤다.

왜놈들이 수길이와 박태영의 시신까지 불태워버렸다는것을 알았던것이다.

의병들과 돌망골사람들의 분노에 찬 울음소리가 골안을 꽉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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