련전련승과 《붕괴설》
애국애족의 정치가 구현된 공화국의 품에 안기여 보람찬 나날을 보내고있는 나는 온 세상에 떨치는 공화국의 기상과 위력을 남다른 감회속에서 보고있다.
내가 입북한 시기에만 해도 서방측에서는 공화국을 아직 《붕괴》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는 대상으로 보고있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붕괴설》은 자취를 감추었고 공화국은 21세기 세계의 강국으로 한층 우뚝 솟아올랐고 조선의 정치기상도에 따라 세계가 움직이고있는것이 현실이다. 세상을 놀래운 공화국의 격변을 무한한 감동속에 지켜보았다.
주체83(1994)년 7월은 조선반도에 일대의 암운이 드리웠던 시기였다.
시꺼먼 먹장구름이 반만년래의 대국상을 당한 7천만의 가슴을 뒤덮었을 때 서방의 일각에서는 북조선이 늦어서 3년이면 무너진다는 《붕괴설》이 떠돌았다.
당시 서방세계에서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나 없었다. 그만큼 공화국은 혹독한 시련을 겪고있었고 류례없는 난국에 처해있었다.
대국상을 당한데다가 몇해째 련속된 극심한 자연재해와 식량난까지 겹쳐들었으니 그 어려움을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참으로 2중3중의 난국이였다. 그래서 서방의 입빠른 언론들은
이 《붕괴설》을 제일 요란스레 떠든것은 물론 미국이였다. 자주의 기치를 고수하고있는 공화국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겨온 미국은 공화국이 빨리 무너지기를 바란것이다. 이남의 《련합뉴스》가 전한 이런 자료가 있다.
《최근 미국안의 일부 관계자들은 미국이 46억US$가 소요되는 경수로 2기제공을 북에 순순히 약속한것은… 늦어서 3년이면 북의 체제가 쓰러진다는 <조기붕괴론>을 신빙성있게 받아들였기때문이라고 뒤늦게 털어놓았다.》
여기에는 이북이 조기에 《붕괴》되면 미국으로서는 1994년 10월 21일에 타결된 제네바합의문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타산이 깔려있었던것이다.
돌이켜보면 《붕괴설》 같은것은 비단 이때에 와서 처음 생겨난것도 아니다.
지난 조선전쟁을 앞두고서도 미국은 북조선의 《붕괴설》을 들고나왔고 이전 쏘련과 동유럽사회주의가 붕괴된 《20세기 최대의 이변》이 일어났을 때에도 그들은 이제 도미노원리에 따라 북조선도 곧 《붕괴》될것이라고 생각했던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커녕 공화국은 끄떡하지도 않았다.
미국은 《북조선붕괴》를 앉아서 기다리지도 않았다. 미국으로서는 공화국을 압살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했다. 제2의 조선전쟁위협도 한두번만 몰아오지 않았으며 제재와 봉쇄에도 매달리고 《조기붕괴》전략과 《연착륙》정책도 써보았다. 그러나 그 모든것은 허사였다.
《붕괴설》이 한창 돌 때 평양을 다녀간 미국인들은 하나같이 북조선이 매일 매 시각 그처럼 엄혹한 도전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건재하고있는것은 《기적》이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분명 그것은 기적이다. 그 기적은 어디서 온것이겠는가.
남조선통신 《련합뉴스》 취재본부 차장은 《
《역경을 순경으로 바꿀수 있는 재주는 아무에게나 있는것이 아니다. 더우기 사면팔방에서 강적들이 달려들고 내부사정 또한 어렵기 그지없는 내우외환의 위기를 극복한 사례를
찾아보기도 힘들다. 조선을 위기에서 구원해낸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이 기적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대답이라고 본다.
《붕괴설》을 내돌릴 때만 해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조선에는
력사의 만난을 이겨내고 강성국가건설에로 돌진하는 공화국의 모습은 민족의
어느 누군가는 말했다. 《구름우에는
조선에 어둠을 몰아온 그 검은구름은 미구하여
공화국은 세인의 예상을 깨고 《붕괴설》을 승리론으로 만들었다.
제국주의자들과 반동들의 《붕괴설》을 련속 승리로 전환시켜온 공화국의 빛나는 행로는 인류정치사에 없는 기적과 기적의 련속인것이다.
의거입북하여 실생활체험을 통해 저는 공화국의 이 련전련승이 과연 어떻게 마련될수 있었는가에 대하여 잘 알게 되였다.
그 혁혁한 승리는
세인이 평한것처럼 미국이 도발한 조선전쟁은
이 가렬처절한 대결전에서
지난 세기 90년대에 세계는 《붕괴설》이 어떻게 맥없이 하늘로 날아나고 공화국의 승리로 결속되였는가를 더욱 똑똑히 보았다.
한 재일교포 군사평론가는
1993년 2월 미국이 국제원자력기구의 불순세력을 내세워 공화국에 강도적인 《특별사찰》을 요구했을 때 세계는 손에 땀을 쥐고 사태의 발전을 지켜보았다. 나 역시 그때 이남 민중모두가 그러했듯이 미국의 횡포에 분격하면서 동족으로서 북의 운명을 두고 우려를 금할수 없었다. 그러나 그 위구는 얼마후 충격과 기쁨의 탄성으로 바뀌여졌다. 온 나라가 준전시상태에 들어간지 며칠후 공화국이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탈퇴한다는 폭탄같은 선언이 행성을 울리며 퍼졌던것이다.
이 선언발표앞에 미국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했다.
당시 미국무성대변인이 《제1회전에서는 우리가 졌다. 제2회전에 가서 보자.》고 하였지만 2회전 역시 공화국의 승리와 미국의 참패로 끝났다. 그 2회전이란 다름아닌 조미정부급회담이였다. 이 회담에서 미국은 공화국의 자주권을 인정하고 공화국을 반대하여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뿐아니라 핵무기로 위협하지 않을데 대하여 공약하였다.
그후 미국이 또다시 국제원자력기구를 조종하여 북과의 그 무슨 《기구협조를 중단》하겠다고 하자 공화국은 그에 맞받아 기구탈퇴를 선언하여 또 한차례 미국을 강타하였다.
공화국은 포악한 미국의 끈질긴 위협공갈책동을 단호히 저지파탄시킴으로써 전쟁에로 치닫던 국면을 평화국면으로 전환시키고 력사적인 조미기본합의문(제네바합의문)을 발표하여 20세기에 기록될 승리를 이룩하였다.
보는것처럼 공화국은
승전고가 거듭 울리는속에서 공화국에서는 1998년 8월
31일 인공지구위성
일본 혹가이도와 혼슈사이의 쯔루가해협상공을 비상하면서 불멸의 혁명송가의 선률과 함께 《주체조선》이라는 모르스전신부호가 27MHz로 지구상에 전송되였다.
남조선의 《뉴스 풀러스》지는
그리고 당시 《련합통신》은
이남출판물들이 한 몇개의 이 평가를 가지고도
21세기의
지난 1998년 1월 자강도를 현지지도하시는 길에서
《이제부터 남과 북에는 엄청난 변화가 올것이다. 어떻게 단 3일만에 이런 변화의 기틀이 마련된것일가.》
《2박3일은 55년의 만남치고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였다. 그러나 그 2박3일동안에 <평양대특급>이라고 할만 한 세기적작품을 성공리에 완성시켜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
《
《
온 겨레와 전세계는 력사적인 평양상봉을 통하여
실로
바로 거기에 10년을 하루로 뛰는 비약의 속도가 있고 불가능도 가능으로 만드는 기적이 있으며 다 이기는 백승의 기상이 있는것이다.
공화국에서의 학습과 생활체험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