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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회


제4장 아동단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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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촌에서 병기창까지 가는 15리 산길은 키높은 나무들로 빼곡이 들어찼다. 100살이 지났는지 200살을 넘겼는지도 모를 갖가지 나무들이 어깨를 바투 비비며 하늘을 찔렀다. 그 가지와 이파리들이 빽빽이 뒤엉켜 나무밑은 어둑했다.

훨씬 나이든 나무들은 진대로 쓰러져 엇비듬히 다른 나무에 몸을 기댔다. 죽어서도 편안히 누울 자리 없어 《자손》나무들의 허리에 몸을 맡긴듯이.

그 진대나무들이 오랜 세월의 눈비속에 부실부실한 썩박나무로 변해 무릎을 치게 깊은 락엽무지에 흩어졌다.

그 《자손》나무들이 나이가 차는대로 차례로 쓰러져 수림속의 여기저기에 진대무지를 그득 널어놓았다.

이런 깊은 수림속에 병기창이 숨어있었다. 휑뎅하니 높고 큰 동굴이다.

이 동굴의 첫머리에 야장간이 차려져있었다. 열기와 연기가 동굴밖으로 곧추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야장간에서 하촌에 집을 두었던 렴국찬이 벼림질을 하고있었다.

한뉘 뜨거운 열앞에서 일하다나니 기름하고 흰 얼굴에 기름기가 마르고 땀구멍이 숭숭하니 두드러져보였다.

렴국찬은 한 청년과 함께 모루우에 놓은 뻘건 쇠덩이를 두드려대고있었다.

요즘 야장간에서는 일이 더미로 밀렸다. 유격근거지가 새로 일어서다보니 집짓기에 쓸 망치, 도끼, 곡괭이, 끌, 꺾쇠… 지어 길고 짧은 못까지 만들어 내려보내라고 하는것이다.

밤에도 홰불을 켜놓고 뚝딱뚝딱 벼림질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숯불이 펄펄 피여오르는 불덕옆의 풍구앞에 렴죽심이 앉아있었다. 알맞춤히 자른 통나무를 깔고앉아 쉬임없이 풍구손잡이를 당겼다밀었다 한다.

얇게 입은 베적삼이 땀에 푹 젖었다. 얼굴에서 땀이 줄줄이 흘러 목덜미를 적셨다. 뜨거운 불덕옆에서 풍구질을 하려니 숨도 컥컥 막혀왔다. 그러나 자기가 아버지를 도와 근거지를 세우는 일에 보탬준다는 생각에 잠시도 풍구손잡이를 놓으려 하지 않았다.

죽심은 이따금 하촌에서 자라던 일을 돌이켰다.

야학방, 아동단생활이 달달한 사탕같았다.

여기 병기창식구들속에는 제또래 아이가 없었다. 아버지를 내놓은 병기창사람들은 나이가 젊어 갓난애기들을 키우고있었다.

그런데다 적들의 기습을 피해 따로따로 수림속에 집을 짓다보니 서로 왕래도 적어 늘 적적했다.

렴죽심은 기송동지랑 아동단에서 생활하던 동무들이 장재촌근거지에 들어왔다는걸 알았다. 여기는 장재촌에서 15리나 떨어져있지만 만든 쟁기를 가져가려고 여러 사람이 드나드니 근거지소식을 그시그시 알수 있었다.

죽심은 기송동지랑 만나고싶어 몸이 달았다.

근거지에 아동단병실이며 아동단학교랑 선다는데 나도 거기 갔으면…

그러나 어머니를 잃고 자기가 아버지를 모시고있는 처지에서 그 생각을 싹부터 잘라버려야 했다.

죽심은 어머니가 잘못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없이 불바다로 변한 하촌으로 달려갔다. 합장묘를 꾸렸으니 어디에 어머니가 끼워누웠는지 알수조차 없었다.

그것이 더욱 가슴을 찢어 죽심은 합장묘에 거퍼 절을 하면서 눈물로 흙바닥을 흠뻑 적셨다.

그는 입을 사려물었다.

(이제부터 내가 아버지를 잘 모실테야.)

그래서 아버지가 책임자인 병기창 일이라면 제힘이 닿는대로 힘껏 돕고있는것이다.

《죽심아, 장재촌에 가야겠다.》

점심 먹으러 집에 왔던 아버지가 입가심그릇을 내려놓으며 누긋한 어조로 말했다.

죽심은 자기보고 장재촌에 심부름 가라는 소리로 알고 심상히 들었다.

《거기에 아동단병실이 다 지어졌다더라. 처녀애들 방도 따로 꾸린게야. 벌써 처녀애가 하나 들어왔다더라.》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듯 죽심은 아버지를 건너다보았다. 호기심은 끌리지만 자기는 거기에 갈 처지가 못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버지는 잎초를 피워물었다. 푸지게 뿜는 담배연기에 생각도 싣는것 같았다.

목소리는 더욱 갈앉았다.

《나라찾은 다음에야 제집 일이 있느니라.》

귀담아듣는 죽심의 눈앞에 곽찬수선생이 비껴왔다. 더없이 좋게 여기며 따르던 그 선생은 야학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귀에 길이 나게 곱씹었었다.

《장재촌에 아동단도 생기고 아동단학교도 선다더라.》

(야, 거기에 기송오빠는 선참으로 들겠구나. 하촌에서 살아난 동무들도…

아버지가 래일 장재촌에 갔다오라니 꼭 만나야지. 정말 보고싶은 동무들이야.)

아버지는 꽁초가 그득찬 나무재털이에 담배를 비벼끄며 얼굴에 엄한 빛을 담았다. 이런 표정으로 말할 때면 맞서보려던 어머니도 단박 뒤걸음쳤다.

아버지는 맺고끊듯 말했다.

《래일 아침 당장 장재촌에 내려가거라. 엄마의 원쑤를 갚아야 할게 아니냐? 아동단학교에서 잘 배워 리관린이 같은 녀걸이 되거라.》

죽심은 아버지한테서 리관린의 얘기를 여러번 들었다. 허리에 싸창 두자루를 차고 왜놈들을 삼대베듯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녀자를 잘 안다고 했다.

그러니 아버지는 나보고 나라찾는 일에 한몸바쳐 나서라는게 아닌가.

렴죽심은 아버지의 높은 뜻에 가슴이 후더워왔다. 그러나 아버지걱정이 절벽처럼 앞을 막았다. 내가 없으면 누가 아버지한테 때식을 끓여줄가? 이 집에서 홀로 외롭게 지내야 할것이 아닌가.

죽심은 자기의 속마음을 아버지한테 비치고싶었다. 그러나 얼굴을 엄하게 가다듬은 아버지의 비위를 거슬렸다가는 오히려 불호령을 들쓸수 있었다.

죽심은 애달픈 마음을 눈에 그득 담았다.

아버지는 다시 잎담배를 피워물었다. 한참만에야 목소리에 깊은 정을 함뿍 실었다.

《죽심아, 네 마음을 안다. 아버지는 딸이 하나지만 나라찾는 싸움에 내세우고싶다. 지금 유격대에 녀대원들이 들어온다더라. 너도 그 앞장에 서라고 리관린의 말도 한게다. 아버지걱정은 말아. 네가 잘 배우고 잘 싸운다면 나는 외롭지 않아. 독립군에서 실컷 밥을 지어봤으니 내 하나 끼니야 못넘기겠니?》

뜨거운것이 가슴에 왈칵 치민 죽심은 《아버지!》 하고 목메여 웨치며 아버지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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