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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3 회


제6장 고국의 령혼으로 될지언정


6


무삼은 의병장의 서신을 받고 입을 쩝쩝 다셨다.

자기를 이곳으로 따돌린 의병장에 대한 고까움이 아직도 속에 맺혀서 내려가지 않았다.

더구나 장수산에서 싸움을 한 이후 자기가 여기로 온 다음에도 의병대가 미륵당고개에서 매복전을 벌려 왜놈들을 멋있게 답새겼다는 소식은 무삼이의 속을 더욱 알알하게 만들었다.

홍령감을 비롯한 돌망골사람들은 의병장이 보내준 식량이랑 옷감이랑 놓고 좋아서 입이 노상 늦가을의 밤송아리처럼 툭 벌어져 다물릴줄 몰랐지만 무삼이는 화가 치밀어 그들과 마주 있을수가 없었다.

그러는 무삼이의 속내를 알고있는 홍령감이 은근히 약을 올렸다.

《임자, 왜 그렇게 굴뚝목에 앉은 고양이상인가? 이걸 좀 보게. 자네에게두 입성을 새로 해주게 됐네.》

《쳇, 난 입은것이면 만족해요. 그건 령감님이나 실컷 해입으시구려.》

무삼은 심기가 좋지 않아 바리산에 있는 의병대의 막사로 돌아오고말았다. 야장간의 필석이에게 김정환의병장의 서신을 전해주어야겠으나 밸이 뒤틀려 그러고싶지도 않았다. 더구나 자기를 고깝게만 여기는 필석이에게 아직까지는 그냥 얼굴을 내밀고싶지 않았다.

부처님을 믿어서인지 속통이 뒤웅박씨같은 필석이였다.

그런 사람에게 마음을 쓰는 약우물골의원집 딸인 달미 또한 어이가 없다.

아마 자기를 구원해주었다고 그럴가?

말이야 바른대로 달미를 구원한것은 이 무삼이가 아닌가? 그런데 비는 하늘이 주고 절은 부처님이 받는다고 달미는 필석이가 자기를 구해준 은인인듯 잊지 못해하면서도 필석이의 마음에 아픈 상처를 남겼다는 화풀이인지 진짜은인인 자기와는 별로 말도 나누려하지 않는다.

며칠전에 달미에게 필석이가 바보처럼 있지도 않을 처녀를 찾고있노라고 한마디 귀띔을 했다가 랭대를 받은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어이가 없어 밥맛을 잃을 지경이였다.

사실 그 말은 필석이를 잊지 못해하는 달미를 생각해서 해준 말인데 글쎄 그 처녀가 대번에 눈물을 왈칵 쏟으며 의리를 중히 여기는 진짜사내의 마음을 허비지 말라고 내쏘고는 달아나버릴줄이야. … 필석이가 진짜사내면 이 무삼이는 가짜사내란 말인가. 혹시 내가 자기의 시형님벌이 될는지 어이 알고 그렇게 아무 소리나 망탕 하는지 원…

무삼은 속으로 계속 끙끙거렸다.

이제 큰 공을 세우고 의병들이 이 무삼이의 용맹과 기상을 다 알 때 필석이를 동생이라고 부르고싶었다.

그러자면 싸움을 많이 해야 하지 않는가. 여기에 배아픈 병신처럼 앉아 도끼목수질이나 하고있는 자기의 처지에 언제 큰 공을 세워 사람들앞에 떳떳할수 있겠는가.

그런 자기의 마음도 몰라주는 의병장이 야속했다.

무삼이는 입을 쩝쩝 다시더니 의병장의 서신을 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의병장의 서신을 필석이에게 전해주어야 했던것이다.

무삼이가 문밖으로 금시 나서려는데 밖에서 누군가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벌커덕 열리며 웬 사람이 무삼이를 들이받을듯 뛰여들었다.

그가 약우물골의원집 딸 달미라는것을 알아본 무삼이는 눈이 덩실해졌다.

《웬 일이우?》

항상 단아하던 달미의 온몸이 할퀴고 찢기고 말이 아니였다.

혹시 또 왜놈들과?…

무삼이는 불길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찌나 급하게 달려왔던지 숨이 막혀 한동안 입을 벌리지 못하던 달미가 가까스레 말을 했다.

《그이가… 죽게 됐어요. 빨리… 도와주세요.》

무삼이는 영문을 알수 없었다.

《대체 누가… 죽소?》

《야장간의… 그이가…》

《뭘? 그럼 필석이가?…》

무삼이가 화닥닥 놀랐다. 밖으로 벼락같이 뛰여나갔다.

허나 그는 내처 달려갈수가 없었다. 필석이가 어디에서 어떻게 죽게 되였는지도 모르고 어느쪽으로 향방을 잡는단 말인가. 급한 마음이 앞서 그것도 알아보지 않고 무턱대고 헤덤비는 자기를 질책할 사이도 없었다.

무삼이는 다시 안으로 뛰여들었다. 그는 달미의 팔을 잡고 급히 따져물었다.

《그가 왜 죽소? 엉, 빨리 말하오.》

달미가 가쁜숨을 톺아올리며 사연을 말했다.

좀전에 달미는 아버지가 병자들을 치료하는데 쓸 약초를 캐오려고 기르마재를 넘다가 필석이를 만나게 되였다.

화승총의 철알을 만드는데 쓸 쇠붙이를 얻으려고 그 주변마을들을 돈다고 하였다.

그들이 나란히 범의장골쪽으로 가는데 갑자기 일진회원이였던 맹영달이놈과 한무리의 일본군놈들이 바리산쪽으로 가는것을 보게 되였다.

그놈들이 야장간과 의병들의 거점이 있는 바리산방향으로 가는것을 본 필석은 달미에게 급히 의병대에 알리라고 하고는 어쩔새없이 왜놈들에게 무작정 총질을 하며 바리산과 반대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십여명이나 되는 왜놈들이 필석이의 뒤를 쫓아가며 총질을 해대는 소리가 골안에 자지러지게 울렸다.

달미는 필석이가 금시라도 왜놈들의 총탄에 잘못될것만 같아 속이 졸아들었지만 그의 부탁이 있는지라 죽을 기를 다해 여기로 달려왔던것이다.

달미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무삼이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한시가 급했다. 바리산에 남아있는 의병들에게 알리고 어쩌고할새도 없었다.

무삼이는 혼자서 무작정 달렸다.


× ×


왜놈들이 산판을 샅샅이 훑으며 점점 가까이 올라오고있었다.

(이젠 다로구나.)

키가 넘는 바위밑에 주저앉은 필석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총탄도 떨어지고 다리도 접질렀으니 이젠 왜놈들에게 꼼짝 못하고 붙들릴 판이였다. 왜놈들에게 붙들려 수치스럽게 죽느니 차라리…

필석이는 옆구리에 찌르고 다니던 단검을 뽑아들었다.

눈물이 나왔다. 어째서인지 방금전에 헤여진 달미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마나 다심하고 사려깊은 처녀인가? 언제인가 그가 몸보신에 좋다면서 자기 손으로 만든 보약을 들고 왔을 때 처녀를 랭대했던 일이 가슴이 얼얼하도록 후회되였다.

그런 랭대를 받고서도 달미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필석이를 대했다.

정말 이 세상에 태여나서 처음으로 받아본 이성의 다심한 관심이였다.

달미와 같은 처녀와 일생을 함께 한다면 아마 그 이상의 행복은 없을것이다.

필석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내가 무슨 황당무계하고 천벌맞을 생각을… 나야 그런 생각자체가 부당한 행실로 치부될 처지가 아닌가.

필석은 두손을 모으고 부처님이 앞에 있기라도 한듯 공경한 자세로 앉았다.

《부처님, 제 잠시나마 순진하고 고결한 달미의 얼굴에 흙칠을 하는 너절한 생각을 품었댔으니 저의 잘못을 용서하시와 너그러이 보살펴주사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버님의 원쑤도 갚지 못하고 가락지의 임자도 찾지 못했는데 죽어야 할 때가 왔사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머리꼭대기에서 난데없이 혀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체체, 잘은 놀고 앉아있다. 까투리처럼 어디에 들어가박혔나 했더니 이 구석에 엎드려 어디다 넙죽넙죽 절을 하구있는거야. … 머리에 왜놈의 총알이 박힌게 아니야?》

필석은 화들짝 놀랐다. 머리를 들고 소리나는쪽을 올려다보았다. 바위우에서 무삼이의 찌그러진 얼굴이 나타나자 더욱 놀랐다.

필석은 이젠 살았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공연한 짜증이 치밀어오르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이녀석이 여긴 어떻게 나타났을가.

뻔했다. 틀림없이 달미의 련락을 받고 달려왔을것이다.

하지만 하필 이번에도 무삼이가 나타날건 뭐란 말인가.

며칠전에 저녀석이 달미에게 지껄인 수작질을 생각하면 지금도 젖먹던 밸까지 불끈 솟구치는 필석이였다.

그때 저 무삼이가 달미에게 《필석이 말고 딴 사내 고를 생각마우. 필석이는 내 말 한마디면 다니까 거기만 마음을 용케 가지고 기다리소.》라고 지껄였다던지… 참, 싱겁기 그지없는 놈이다. 내가 왜 자기의 말 한마디에 달미에게 마음을 돌릴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어처구니없는 놈…

필석이가 쓰거운 입을 다시는데 무삼이가 바위우에서 쿵 뛰여내렸다.

그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시까슬렀다.

《민충이처럼 왜 그냥 앉아서 날 쳐다보기만 하나… 내가 무슨 나무아미타불님처럼 보이나?》

필석이는 코웃음을 쳤다.

일어날수 있으면 왜 이러고 앉아있겠는가. 달릴수 있다면 아마 이따위 놈의 얼굴과 마주치지도 않았을것이다.

무삼이가 필석이의 다리를 들여다보고는 골살을 찌프리며 곱지 않은 눈길을 던졌다.

《의병이라는게 발목을 접질러 앉은뱅이가 되다니? 정말 계집애들보다두 못한 시라소니라니까. …》

무삼이는 필석이가 눈을 희번득거리며 입을 벌리려 하자 더 말을 말라는듯이 다짜고짜 헌 넝마자루 둘러메듯 휘딱하니 그를 둘쳐업었다.

무삼이의 등에 업히게 된 필석이가 기가 막혀 버둥거렸다.

《날 내려놔.》

《무겁지 않아. 난 기운이 황소같거던. 그러니 미안해하지 말고 곱게 업혀있기나 하게.》

내가 미안해한다구?…

필석은 어이가 없었다.

자기가 무삼이의 체면을 봐주었으니 이렇게 업고 다니는게 응당하지 않은가. 무삼이가 자기의 가락지를 빼앗으려 했던 날강도심보를 가졌다는것을 의병들에게 소문만 냈더라면 제까짓게 이 하늘아래서 어떻게 낯짝을 들고 살수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 뻔뻔스러운 녀석은 그 고마움을 도무지 아는것 같지 않거던. …

필석은 입이 쓰거워났다.

무삼이는 필석이의 그러한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산우를 향해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산등성이아래에서부터 참빗질하듯 샅샅이 훑으며 올라오던 왜놈들이 먼발치에서 그들을 발견하고 총을 마구 쏘아대며 따라왔다.

필석이를 등에 업은 무삼이는 기운차게 앞으로 내달렸다.

추격이 검질기였다.

한동안 부리나케 달리던 무삼이의 걸음이 어느 한곳에서 우뚝 멎어섰다. 산중턱을 넘어서 점점 사이를 좁히며 다가오는 왜놈들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던 무삼이는 필석이를 곁에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의지하여 앉혀놓았다.

그리고는 두눈을 부릅뜨고 따졌다.

《자네 부처님을 믿나?》

필석은 골살을 찌프리며 짜증섞인 어조로 퉁명스레 되물었다.

《그건 왜 물어?》

《이제부터 부처님이 아니라 나를 믿게.》

필석이는 코방귀를 뀌였다. 그리고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흥, 절 믿으라구? 썩은 나무를 믿으면 믿었지 자길 왜 내가 믿는단 말이야. …

다시 따지고들듯 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리구… 만약 이제 내가 죽고 자네가 살면 당장 의원집 딸에게 장가들라구. 알겠어?》

별 싱거운 놈…

더 대꾸를 하려 했지만 뒤쪽에서 왜놈들이 밀려오는 소리가 들려와서 입벌릴새가 없었다.

무삼이가 필석이를 다시 둘쳐업었다. 자기의 허리띠를 풀어 필석이를 꽁꽁 동여맨 무삼이가 걸음을 옮겼다.

이게 뭐가 잘못되지 않았어? 날 왜 제 몸뚱아리에 비끄러매는거야.

무삼이의 이상스런 거동에 부아가 돋아 몸을 꿈틀거리던 필석의 두눈이 갑자기 깜짝 놀라 화등잔만 해졌다.

자기들이 아찔한 벼랑가에 서있지 않는가? 아래가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칼벼랑턱이였다.

필석이는 머리를 저었다.

날 내려놔. 차라리 사생결단하고 싸우다 총에 맞아죽으면 죽었지 저 아찔한 벼랑을 어떻게 내려간다는거야. 그러다가 자칫하면 순간에 몸이 물렁팥죽이 되겠는데…

무삼이가 버럭 소리쳤다.

《제길, 군서방질하다가 들킨 아낙네처럼 부들부들 떨지 말어. 그러다 떨어지겠다. 떨어지면 너구나구 몽땅 박살이야.》

무삼이는 자살이라도 하려는듯 주저없이 몸을 날려 벼랑턱에 달라붙었다.

필석은 너무도 혼비백산하여 제정신이 아니였다.

금시 아찔한 절벽아래로 떨어져 온몸이 쪼각쪼각 찢어질것만 같았다.

무삼이는 집게같은 손으로 벼랑가의 돌부리들을 틀어잡으며 한치한치 밑으로 내려갔다. 어찌나 돌부리들을 힘껏 틀어잡는지 손짬으로 피가 흘러내렸다. 꽉 다물린 입귀사이로 쩝쩔한 피물이 나돌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눈으로 들어가 몹시 쓰려났다. 하지만 무삼은 죽을힘을 다하여 아래로 내려갔다.

그들이 한동안 신고를 해서 땅바닥에 발을 짚었을 때는 장정 하나를 둘러업고 그 험한 벼랑을 톺아내려온 무삼이나 그의 등에 업혀 《호강》을 한 필석이나 다같이 맨바닥에 뻐드러져버렸다.

왜놈들은 그들이 아찔한 이 벼랑으로 내려갔으리라고는 생각도 할수 없는 일이라 딴 곳으로 달려갔는지 까마득히 올려다보이는 벼랑우는 조용했다.

한참이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나서 필석이가 처음으로 미안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없나?》

《괜찮아, 이젠 됐어.》

무삼이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필석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젠 다시 부처님을 믿으라구. 근데 약속은 지켜야 해.》

《약속이라니?》

무삼이가 두눈에 불을 켜달았다.

《이젠 살아났다구 모르쇠를 한다. … 의원집 딸말이야, 그만 애먹이라는데…》

필석이가 금시 소태먹은 우거지상을 지었다.

《그게 자네와 무슨 상관이야. 내가 누구와 살든말든… 내 참-》

필석이는 땅바닥에서 일어나 투닥투닥 옷을 털어버리고나서 다리를 절뚝거리며 혼자서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무삼이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지복결혼을 믿고 장가를 안 간다는게 말이나 돼? 미물같이… 싹 걷어치우라구. 정말 소갈머리두 없지.》

하지만 필석이는 들은척도 안했다.

한동안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보기만 하던 무삼이가 금시 푸들쩍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 어딜 가? 의병장님이 서신을 보냈어.》

그러나 필석이는 벌써 나무숲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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