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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2 회


제6장 고국의 령혼으로 될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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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봉산기슭에 림시로 꾸려놓은 의병장막사에서 김정환은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엊그제 창골에서 돌아서는 길로 곧장 미륵당고개에 달려간 김정환은 한정만이 이끌고 먼저 그곳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기다리는 의병대를 지휘하여 왜놈들의 수송대를 답새겨버렸다. 그 다음 김정환은 작은 규모로 편성된 대오들을 모두 이미 령을 내린 지역들에 나가 스무날가량 싸움을 벌리다가 바리산으로 돌아오도록 하였다.

대오들을 모두 떠나보낸 후 김정환은 이번 싸움에서 빼앗은 물자들중에서 탄약과 일부 약품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돌망골로 보내도록 하였다.

그 인편에 바리산으로 먼저 떠난 필석이와 무삼에게 의병들이 그리로 인차 기동하겠으니 막사랑 손질도 하고 땔나무도 더 많이 장만해놓으라는 령을 적은 서신도 함께 따라보냈다.

이제는 의병대가 돌망골로 이동할 준비를 비교적 갖추어놓은셈이였다.

김정환의 사색은 차후 의병대가 취해야 할 행동방향에로 이어졌다.

우선 요즘 왜놈들의 움직임과 관련하여 의병들이 물어들인 소식들을 하나하나 상기하였다.

제일 주목되는것은 의병들의 투쟁이 점점 사라져가는것이다.

한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지방에서 활동하던 의병대가 의병지휘자들의 일부가 왜놈들에게 체포학살당하자 투쟁을 완전히 포기하였다. 이것으로 하여 경기도일대에서 벌어지던 의병투쟁은 끝나버리고말았다.

경상북도 일월산지구에서 맹렬하게 활동하던 의병대는 의병장들이 왜놈들에게 체포되여 희생된 후에도 한동안 싸움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야수적인 《토벌》책동으로 많은 손실을 입고 싸움을 더이상 전개하지 못하였다.

거기다가 삼수, 갑산쪽에서 왜놈들을 본때있게 족치던 홍범도의병대도 압록강을 건너갔다고 한다.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전국도처에 타번지던 의병투쟁이 이렇게 하나, 둘 지리멸렬하고있었다.

그런 속에서도 여전히 기를 잃지 않고 싸우는 의병대는 채응언의 곡산의병대였다.

채응언의 곡산의병대가 얼마전에 이천군 광북에 있는 수비대를 소멸해버린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로부터 얼마후에는 석왕사에 도사리고있던 왜놈수비대를 기습하여 수많은 왜놈들을 소멸하였고 뒤이어 곡산에 있는 백년산의 본거지로 돌아오면서 추격하는 왜놈들에게 또다시 심대한 타격을 안기였다. 그에 이어 바로 며칠전에는 선암(황해북도 신평군 선암리)병참에 대한 습격전투를 벌려 많은 무기와 탄약, 군복들을 로획하였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지금은 강원도에 있는 강두필의 의병대와 련합하여 대오를 늘이고 왜놈들과의 더 큰 싸움을 준비한다고 한다.

채응언의병대의 활동은 평산의병대에 있어서 큰 힘이고 의지였다.

김정환은 평산의병대가 더욱 맹활약을 하여 왜놈들을 족침으로써 곡산의병대의 활동에도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내렸다.

정말이지 한번 짬이 있으면 찾아가 만나보고싶었다.

채응언! 평안도 성천사람으로서 15살에 부모를 따라 황해도 곡산에 있는 로미야골로 이사하여 화전을 일구며 살다가 의병투쟁에 참가했다고 했지…

김정환은 어느때건 한번 채응언이와 만나 싸움을 함께 해보리라 타산을 하였다.

여하튼 지금은 평산의병대가 왜놈들을 답새기는데서 많은 전과를 거두는것이 기본이였다.

그러자면…

김정환의 사색이 새로운 작전으로 이어지고있는데 누군가가 막사안으로 들어섰다. 바라보니 두남이였다. 왜서인지 그의 기색이 좋지 않았다.

김정환이 의아스런 빛을 띠였다.

《두남이, 무슨 일이 생겼나?》

두남이가 잠시 쭈밋거리다가 말했다.

《의병장님, 내 잠시 충주에 다녀와야 할것 같소이다.》

《충주엘? 거긴 왜 갑자기?…》

《한규설대신나리께서 왜놈들의 작위를 거절하시고 시골로 락향하셨다고 하오이다. 그래서 지금껏 건사해온 황제의 연적을 전하고 오겠소이다.》

갑자기 멀고먼 충주에 가겠다는 두남의 말에 잠시 의아해졌던 정환은 곧 머리를 끄덕이였다.

한규설이 왜놈들의 작위를 거절하고 시골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그도 며칠전 들어 알고있었던것이다.

그때 김정환은 한규설이 지닌 민족적지조에 대하여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생전 얼굴 한번 익히지 못한 김정환의 마음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한규설의 집에서 오래동안 생활한 두남이의 심정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더우기 한규설이 지켜낸 황제의 연적을 지니고있는 두남이로서는 그 심정이 더욱 강렬하였으리라.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김정환은 드디여 수락을 하였다.

《그럼 갔다오게. 로상에서 조심해야 하네.》

《알겠소이다.》

두남이를 돌려보낸 김정환은 의병들을 돌아볼 생각으로 밖으로 나섰다.

장수산싸움때 여러명의 의병들이 심한 부상을 입었던것이다.

그들을 빨리 약우물골의 한민의원에게 보내야 했다.

김정환이 한참 부상자들을 약우물골로 떠나보낼 여러가지 대책들을 강구하며 걷고있는데 산등성이에서 불쑥 나무짐을 진 사람이 나타났다.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니 득진이였다.

김정환은 그가 짊어진 낟가리같은 나무더미를 의아쩍게 바라보았다.

《나문 왜 해오시오? 이제 곧 이동을 해야 할텐데…》

김정환의 물음에 득진이가 낟가리같은 나무짐을 내려놓고 작대기를 받쳐놓은 다음 공손히 읍을 하고 대답했다.

《의병장님, 저… 고익재어른의 따님네 그 서방님이 나무를 팰줄 모르던데 예서 멀지 않은 곳이라 우리가 이곳을 뜨기 전에 제 제꺽 한바리 실어주고 올가 하옵니다.》

김정환은 불시에 가슴이 뭉클해져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내가 미처 그 생각을 못했구려. 정말 고맙소.》

김정환은 진심으로 인사를 하고나서 득진이에게 그 일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이왕이면 한겨울 푼푼히 지낼수 있도록 한 둬달구지 보냈으면 좋겠구만.》

《알겠소이다. 그럼 내 제꺽 아래마을에 내려가 달구지를 둬채 빌려가지고 갔다오겠소이다.》

득진이는 마을쪽으로 성큼성큼 달려갔다.

그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떠올리던 김정환은 금시 뇌리를 때리는 생각이 있어 머리를 기웃거렸다.


× ×


려은은 집앞으로 굴러오는 달구지를 의아스럽게 바라보았다.

장작을 한가득 실은 달구지였다. 소달구지는 두채였는데 끄는 사람은 한사람이였다.

달구지가 굴러와 마당가에 섰다.

달구지채를 잡은 득진을 알아본 려은은 잠시 망설이였다.

득진은 그에 개의치 않고 수걱수걱 나무단들을 부리기 시작했다.

《일전에 나무를 채 패주지 못한것이 속에 걸려 짬짬이 패두었다가 한번에 실어왔수다. 나무는 이렇게 넉넉히 가려놓고 살아야 하우다. 나무 묵어야 쌀도 묵는단 말이 있지 않소다. …》

득진은 땀을 뻘뻘 흘리며 나무단들을 보기 좋게 쌓아놓았다.

일을 다 끝낼 때까지 어쩌지 못하고 서성거리던 려은이가 얼른 들어가 물을 한종지 들고나왔다.

그가 받쳐주는 물을 황송스레 받아들고 돌아서서 벌컥벌컥 맛스럽게 들이키고난 득진이 려은이를 바라보며 뜨직하게 말했다.

《한성서 놀래운 봉창이니 다르게 생각지 마시우. 사실말이지 나도 그때 평생 처음으로 사람을 놀래우는 상스러운 말을 외워봤수다. 그러고나서 내 근 달포동안이나 가슴앓이를 했지우다.》

려은이는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

괜스레 가슴만 활랑거리였다. 민망스러웠다. 어쨌든 득진이가 자기들을 위해 알알이 일매진 참나무단들을 마련하여 먼길을 걸어오지 않았는가. 도리를 따지면 지금 려은은 득진이에게 무엇이든 사례의 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말이 나가지 않는걸 어찌하랴. …

려은이가 입술만 감빨면서 서있는데 득진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사실 우리 도련님은 아씨가 생각하는 그런 나쁜이가 아니우다. 그는 왜놈들을 미워했지요. 그리구 그가 기생방에 출입을 하여 난봉군이라고 뒤소리를 듣게 된건 그럴만한 리유가 있어서였다우. 그 리유란 하나는 일진회장 리용구놈의 처남벌 되는 사람네 딸과 혼사말이 났을 때였수다. 왜놈의 앞잡이인 역적집사람으로 될수 없노라는 도련님의 대쪽같은 마음이 부친님의 원한을 샀지요. 부친님이 아들의 의사에는 상관없이 혼사를 내밀려 하자 녀자쪽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서 그런 오그랑수를 생각해냈다우. 그때 기생집 침방에는 돈쥔 오입쟁이를 기다리는 기생이 아니라 바루 내가 화투목을 쥐고 앉아 기다렸수다. 둘이서 놀줄두 모르는 화투목을 쥐고 밤을 보내고는 다음날 아침 날이 밝으면 도련님은 우정 남들의 눈에 띄우게 기생집 대문을 나섰지요. 그 일이 잦아진 다른 리유는 우리 도련님이 나라님을 강박하는 왜놈두목놈들을 격살하기 위해 비밀리에 조직된 어떤 사람들과 련계를 맺었드랬는데 그들에게 무기와 탄약을 대주려 그런거라우. 부친님의 눈을 속이자니 돈의 출처를 감출수 있는 수법은 기생방에 자주 가는 길밖에 없었수다. 그리고 남의 규수집랑자의 방에 뛰여든것도 기막힌 사연이 있다우. 한성의 그 어디이건 안 뚜져본 곳이 없었지만 〈척화비〉를 찾아내지 못해서 속을 앓던 도련님이 그날 갑자기 무슨 부처님의 계시를 받았는지 통감부 뒤마당을 파헤쳐보겠다는게 아니겠수. 허 참, 아마도 도련님이 한성바닥에서 그 〈척화비〉를 찾아내기 위해 뚜져보지 못한 땅이 있다면 그 통감부 뒤마당밖에 없으니 그랬겠지요. 하여간 그래서 도련님과 난 그날 밤중에 그곳으로 몰래 들어갔다가 왜놈들에게 들키우고말았지요. 잡히면 재미가 없는 일이라 할수없이 통감부 뒤마당과 잇닿아있는 어느 대감네 집으로 뛰여들었수다. 그런데 그 집 방안에 몸을 숨긴다는노릇이 그만 그곳에 얼굴에 마마자국이 얼기설기 흉측스레 난 규수랑자가 속옷바람으로 앉아있을줄이야 어떻게 알았갔소.

내 살아생전에 첨 보는 못생긴 얼굴을 가진 랑자였는데 그 주제에 소리갠 어찌 그리 왝왝 높던지… 도련님이 자기를 바라고 뛰여들지 않았다는걸 뻔히 알면서도 아마 자기에게 남 못지 않은 절개가 있다고 시위하고싶었드랬겠지요. 여하튼 그통에 통감부에 몰래 침입한 죄목에서는 벗어났지만 어처구니없게두 명문가집 처녀방에 뛰여든 난봉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수다.》

득진의 말이 끝났다.

말을 끝낸 득진은 려은의 얼굴을 피끗 살펴보고나서 한마디 덧붙였다.

《자, 이런 도련님을 어떻게 난봉이라구 억측할수 있겠소이까?》

지금껏 조용히 듣고만 있던 려은이는 입가에 아련한 웃음을 띠우며 나직이 말했다.

《이제 와서 그 도련님이 어떤 사람이든 내겐 상관이 없사와요. 제가 그날 밤 일을 더 생각지 않겠으니 그때 일로 너무 속을 썩이지 마세요.》

득진은 킁킁 코소리를 내다가 무의식적으로 몸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글쎄요. 상관이 없겠는지 있겠는지는 더 봐야 알노릇이구… 하여튼 우리 도련님을 나삐 생각지는 말라는거웨다. 내가 그때 헛간에서 속에도 없는 도련님의 험담을 한건 다 뜻이 있어서라우. 그러니 그걸 곧이 믿고 속에 품지 마시우다.》

할 말을 끝낸 득진은 머리를 수굿하고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리고는 끌고 온 소들을 돌려세우고 왔던 길을 따라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뒤모습을 바라보는 려은의 머리속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면 그 도령이 과히 나쁜 사람은 아닌가봐.)

그날 저녁 려은이는 지남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려은의 말을 감동깊게 들은 지남은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듯 하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흥, 그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이요. 그 사람은 왜 당신에게 그따위 소릴 한다오? 내 저 나무단들을 아예…》

려은이가 질겁해서 그의 팔을 잡았다.

《아이, 그러지 마세요. 그래도 그 아저씨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이 정 나쁜이는 아닌것 같은데… 그리구 나무야 그 아저씨가 그날 창고안에서 나를 놀래웠다고 미안스러워 가져온것인데 무슨 죄가 있다구…》

당장 일을 칠듯싶던 지남이가 려은의 설복에 순순히 수그러들었다.

《하긴 그렇지? 그 나무 참 품들여 팼더구만. 하나같이 일매진게 쓰기도 편하겠더군. … 그럼 이번 겨울 우리 그 한성의 난봉군덕에 뜨뜻하게 호강이나 해보기요. 허허.》

그러고난 지남이는 그때까지 자기의 팔을 붙들고있는 려은이를 품에 꼭 껴안았다.

려은이는 얼굴이 활딱 붉어졌다.

《이걸 놓으세요. 그러다 누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이 적막산골에 누가 찾아오겠다구. … 그리구 내가 뭐 난봉을 부리나. 자기 안해와 정분을 나누는건데…》

사나이의 억센 두팔이 려은이를 더욱 꼭 그러안았다.

려은이는 어쩔새없이 남편의 의사에 자기를 맡겨버리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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