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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6 회


제5장 지휘기는 어떻게 옮겨졌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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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이 리진룡의 거처지에 들어서니 침상에 걸터앉은 그가 뙤창너머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방안의 공기가 어딘가 모르게 심상치 않았다.

리진룡의 침상과 동떨어진 탁자에 둘러앉은 한정만이며 신군선, 최순지의 표정들이 침울하고 지어는 그 어떤 울분에 휩싸인듯 했다.

김정환은 그들의 표정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리진룡의 곁으로 다가갔다. 인기척에 천천히 얼굴을 돌리는 리진룡을 바라보는 김정환의 가슴은 섬찍했다.

며칠동안이나 밖에 한번 나서지 않아서인지 리진룡은 볼이 푹 꺼지고 수염이 더부룩한게 말쑥하던 유생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눈에 정기까지 없어져 촌늙은이처럼 보였다.

한동안이나 김정환을 바라보던 리진룡이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우리도 이젠 때가 됐나보이. …》

밑도 끝도 없는 그의 말에 정환은 의아해졌다.

《그건 무슨 말씀이오이까?》

리진룡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나서 말을 이었다.

《지금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더이상 이곳에서 활동할수 없게 하고있네. 한성에 도사리고있는 일본군사령부에서 우리 평산의병대를 없애기 위한 〈토벌〉계획을 세웠다고 하네. 왜놈들의 집중〈토벌〉이 진행되면 우리 의병대는 끝장이네. 여기서 무주고혼이 되느니 차라리 우리도 아라사나 만주로 들어가 힘을 키워가지고 다른 의병부대들과 합세하여 유리한 정세를 봐야 한다고 생각하네.》

김정환은 한순간 아연하여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 리진룡의 심리에서 변화가 생기고있다는것은 느꼈지만 이렇게까지 도피적인 결심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그였다.

도대체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무엇이 의병장이라는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평산의병대가 조직된 초기에 박정빈의 도피를 두고 그리도 분에 차서 규탄을 하던 그가 아닌가. 수작골에서 의병을 다시 무었을 때 기어이 왜놈들과 결산을 하고 그 길에서 의병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다고 맹약했던 그가 아닌가. …

김정환은 머리를 저었다. 꼭 몹쓸 꿈을 만난듯 했다.

한바탕 머리를 휘젓고난 정환은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것을 비로소 깨달은듯 격해서 웨쳤다.

《그건 도피입니다. 우린 죽어도 이 땅에서 왜놈 하나라도 쳐없애야 할줄로 압니다. 얼마나 많은 의병들이 일어났다가 그렇게 흩어지고말았습니까. 그 교훈을 봐서라도 우린 살아도 여기서 싸우고 죽어도 이 땅에서 왜놈들과 싸우다 죽는것이 옳다고 보오이다.》

리진룡은 김정환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손이 어디인가를 더듬었다. 방금까지 누워있던 이불속이며 목침통곁을 헤매던 손이 깔개중간에서 권총을 찾아들었다. 찾아쥔 권총을 한동안 들여다보던 리진룡이 그것을 옆구리에 찔러넣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라사로 건너간 류린석도총재님이 일전에도 또다시 우리에게 서신을 보내여왔네. 그 내용들인즉 왜놈들이 더욱 횡포해지는 조건에서 잠시 다른 나라로 들어가 힘을 키워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건의가 적힌 서신이였네.》

김정환은 리진룡의 심리적변화가 비로소 가늠이 갔다. 그가 한성걸음을 떠나기 전에도 리진룡은 류린석의 서신을 받았던것이다. 몇차례 도착한 그 서신들에 대한 내용을 김정환은 알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리진룡의 말을 통하여 그 서신들의 내용이 모두 어떤것이였는가를 짐작할수가 있었다.

리진룡의 무거운 한숨소리가 또다시 울려왔다.

《지금 일본놈들은 로일전쟁에서 이기구 그 횡포성이 극도에 달했소. 근간에 일본에서 악명높은 사무라이계렬의 군부미치광이가 조선으로 기여든다고 하오. 왜놈들은 평산과 해주일대에서 맹활약을 하는 우리 평산의병대에 초점을 박고 빠른 시일에 우리를 초토화해버리려고 하고있소. 그 일환으로 지금 우리 평산의병대를 진멸시키기 위한 작전계획을 일본군사령관놈에게 제출했다고 하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리진룡은 그 침묵을 깨뜨릴가 저어하듯 조용히 말했다.

《이러한 난국에서 헤여나기 위하여 난 이미 결심을 내렸소. 나의 결심은 우리도 잠시 만주쪽으로 나가서 힘을 키워 다시 일어나자는거요.》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김정환이 머리를 흔들었다. 너무도 격분한 나머지 곁에서 듣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말이 튀여나갔다.

《힘을 키운다구? 남의 나라 땅에서 말이요? 그래 잊었소? 우리에게는 이미 피눈물나는 쓰라린 교훈이 있지 않는가. 황제의 밀사로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러 갔던 리준이 배를 갈랐고 병신년(1896년)에 〈서행〉을 결심하고 압록강을 건너갔던 류린석도총재가 어떻게 했나?》

리진룡의 두눈에 분노의 빛이 번뜩했다. 그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후들거리는 손이 권총이 있는 허리춤에 가서 굳어지듯 멈춰섰다.

그는 한참이나 김정환을 찌를듯 바라보다가 자기를 자제하는듯 큰숨을 풀 내쉬며 날카롭게 말했다.

《도총재님을 모독하지 말게. 감히 자네가…》

그러나 김정환은 리진룡을 똑똑히 마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마디한마디 씹어뱉듯 말을 이었다.

《그는 압록강을 건느자마자 심양에 가서 그곳 지방장관을 통하여 청국정부에 원조부터 청했소. 그런데 얻은것이란 무엇이였는가? 아무것도 없소. 아무것도 없을뿐더러 구걸한 대가로 멸시만 받았단 말이요. 자기 사람들앞에서는 량반의 위세를 지키려고 자기의 가장 용맹한 부하를 눈섭 한오리 까딱하지 않고 죽여버리지 않았소? 왜 놀라는거요? 그래 십여년전 충주성전투때 가장 용감했고 싸움의 승리를 마련한 선봉장 김백선이 량반에게 응당한 욕 몇마디를 했다고 해서 처형하지 않았단 말이요? 그렇게 자기의 체면을 목숨처럼 생각하는분이 외세에게는 어떻게 그런 자존심을 생각지 않고 머리를 가볍게 수그릴수 있는지 나는 리해가 되지 않소.》

리진룡은 굳어진 자세로 정환을 바라보다가 맥없이 자리에 도로 앉았다.

1896년에 의병투쟁에 지울수 없는 흔적을 남긴 김백선처형사건이 아직도 사람들의 가슴에 상처처럼 남아있었던것이다.

김백선은 평민출신으로서 사람됨이 호방하고 날래고 용감하였으며 서당문지방에조차 앉아보지 못했지만 사리에 밝고 정의감이 강했다. 력사에 을미사변으로 기록된 일제에 의한 명성황후참살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용약 의병투쟁에 나섰다. 제천에서 400명의 포수들을 의병투쟁에 궐기시키고 류린석의병대의 선봉장이 되여 용감하게 싸웠다.

1896년 2월 중순 충주성에 대한 공격을 단행할 때에는 성벽을 넘어 성안에 들어가 단병접전을 하여 성문을 열어놓음으로써 성을 함락시키고 친일적인 충주관찰사를 처단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충주성방어전투때에도 의병들을 민활하게 이끌었으며 그후 벌어진 가흥전투때도 의병들을 능숙하게 이끌어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 가흥전투에서 그는 적들이 계속 병력을 증강하므로 지휘부에 원병을 요청했으나 증원을 받지 못하여 부득이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에 분격한 김백선은 돌아와 중군장인 안승우에게 칼을 빼들고 증원군을 보내지 않은 책임을 따졌다.

이때 제천반일의병장 류린석은 김백선이 평민으로서 량반에게 버릇없이 행동하고 군률을 문란시키였다는 리유로 그를 처형하고말았다.

이 사건은 당시 의병들의 사기를 심히 저락시키는 계기로 되였다.

그 여운은 지금까지도 지휘층과 의병들간의 간격을 조장시키고있는것이다.

리진룡은 두눈을 꾹 감았다.

김정환은 마지막까지 자기의 주장을 토설하였다.

《난 왜놈들과 십여년간 싸워온 류린석도총재님의 애국충정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는 않네. 류린석도총재님은 나라가 왜놈들에게 린치를 당하자마자 제일먼저 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의병들을 조직하였고 늙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싸움길에 나섰네. 그 애국적장거야말로 임진란때 승병들을 무은 서산대사의 애국심과 같다고 말할수 있네. 그러나 아직까지 총을 들고 왜놈들과 싸우는 사람들이 있는 이 땅을 두고 다른 나라로 가버린데 대해서는 실망을 금할수가 없단 말일세.》

김정환이 잠시 격해지는 마음을 누르려는듯 말을 끊고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그러고나서 한결 누그러진 그러나 더욱 굳은 의지가 력력히 슴배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타국에서 우리를 옳게 이끌어줄 성인이 있다면 우리가 왜 따라서지 않겠나. 허지만 지금 그곳에는 류린석도총재만이 있을뿐이네. 난 행여 자네가 우리 평산의병대만이라도 옳게 이끌기를 원했네만 역시 자네도 우리에게 실망밖에 안겨주지 않는구만.》

김정환은 또다시 말을 끊었다. 속에서 설음같은 울분이 북받쳐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던것이다.

아무 말도 없이 침통하게 앉아있는 리진룡을 이윽히 바라보다가 김정환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린 나라와 백성을 도륙하는 쪽발이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스스로 이 길에 나선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니 목숨이 붙어있는 한 왜놈들과 싸우다 죽는것이 마땅하네. 그러니 난 여기서 왜놈들과 사생결단하겠네.》

리진룡은 더이상 말이 없었다. 그는 김정환이 이렇게 나오리라는것을 미리 예감했고 그로 하여 많은 우려를 했던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렇게 타매를 받고보니 가슴속에서 분기 비슷한 울분이 솟구쳤다.

하지만 어쩔 도리는 없었다. 이제 전체 의병들앞에 내놓고 론의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 결과나 의병들의 반응을 김정환이 한사람을 통해서도 똑똑히 엿볼수 있는것이다.

지금껏 침통스런 빛이 어린 얼굴로 리진룡을 외면한채 묵묵히 앉아 김정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있던 한정만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도 남아서 싸우겠소이다.》

그 다음엔 신군선, 그 다음엔 최순지, 그 다음엔…

모두가 차례로 일어났다.

《나도 남겠소.》

《나도 남겠수다.》

한정만은 리진룡을 향하여 공손하나 고집스런 표정으로 말하였다.

《우린 지금껏 의병장님을 따라 험한 길도 서슴없이 헤쳐왔소이다. 그러나 왜놈의 칼날아래 피덩이가 튕기는 자기 고국을 두고 낯설고 산설은 타국으로 나가자는 의병장님의 뜻은 따를수가 없소이다. 방금 김정환유격장도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여긴 아직까지 왜놈들과 싸우는 의병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마 밖에 모인 의병들중에도 그 뜻을 따르자고 할 사람이 나서지는 않을것입니다.》

리진룡이 그를 바라보다가 힘겹게 말했다.

《그럼 자네가 나가서 내 뜻을 전해보게.》

한정만이 밖으로 나갔다. 그의 목소리가 숨막히는 정적만이 꽉 들어찬 천막안으로 쟁쟁히 흘러들었다.

《의병들! 내 말을 들으시오. 지금 일본은 로일전쟁에서 이기구 승승장구하여 그 횡포성이 극도에 달하였소. 일본놈들은 많은 무력을 동원하여 우리를 없애려고 날뛰고있소. 오늘에 이르러 적지 않은 의병대들이 아라사와 만주로 들어가버리고 우리는 지금 막다른 처지에 놓여있소. 의병장님께서는 지금 정세가 일본군의 횡포성이 극도에 이른 상황에서 우리도 잠시 만주로 피신하여 힘을 키워 다시 싸우자고 하시였소.》

의병들속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정만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러니 의병장님의 뜻을 따를 사람은 앞으로 나서시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 소리를 짓누르며 울려퍼졌다.

《난 그렇게는 못하겠수다. 류린석도총재도 남의 나라 땅으로 가버리구 왜놈들과 싸운다던 다른 량반들도 의병들을 끌고 이국땅으로 들어갔는데 우리까지 도망가면 이 땅에 있는 왜놈들과는 누가 싸운다는거요?》

《말을 삼가하게. 의병장님의 뜻은 도망이 아니라 힘을 키우기 위해서 잠시 동면하자는거요.》

《다 같고같은 소리올시다. 온 나라에 숱한 의병들이 들고일어났어두 신통한 방책을 못 찾고 이 지경이 되였는데 만주로 간다구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고 힘은 어떻게 생긴다는것이외까.》

《이제 우리가 도망가면 왜놈들은 더욱 살판을 만났다구 활개치며 란도질을 하겠는데 그래 왜놈에게 무참히 죽을 부모처자생각을 꼬물만큼이나 하고 그런 소릴 하는가 말이우다.》

모든 의병들이 리진룡의 제의를 반대하였다. 그럴바에는 차라리 어느 깊은 산속에 들어가 화전이나 뚜지다가 때를 만나면 다시 총을 들고 왜놈치는 싸움에 뛰여드는편이 낫겠다는 축들이 더러 있었고 태반은 혼자서라도 왜놈들과 싸우다가 죽겠다는 사람들이였다.

실신한듯 두눈을 꾹 감고 밖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듣는 리진룡의 눈에서는 진득진득한 눈물이 흘러나왔다.

리진룡의 급작스러운 결심은 자기 목숨걱정으로 흘러나온것이 아니였다.

이 길에 나설 때까지만 해도 리진룡은 나라를 짓밟은 왜놈들과 사생결단할 굳은 각오를 가지고있었다.

동북으로 들어가려는 지금에도 그 의기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한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조선군대강제해산을 계기로 떨쳐나섰던 수많은 의병대들이 더러는 자취를 감추고 더러는 의병장들이 왜놈들에게 체포학살되면서 뿔뿔이 흩어져버리였다.

왜놈들은 평산으로부터 해주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서 맹활약하는 평산의병대에 초점을 모으고 리진룡을 없애버리는것으로써 의병대를 와해시킬 계책을 꾸며 여기에 수많은 헌병들과 경찰 그리고 일진회원들을 동원하였다.

서흥군청 서기인 신표 역시 지구수비대장 오까노모의 눈에 적임자로 선정되여 평산의병장인 리진룡을 암살하기 위해 지휘처에까지 기여들어왔다가 황천길을 갔던것이다. 그때 리진룡은 두남이의 덕분으로 다행히 신표의 총구에서 벗어날수 있었지만 평산의병대는 가장 용맹한 싸움군이였던 돌격장 신모정과 적지 않은 의병들을 잃는 손실을 입었다.

평산의병대를 없애기 위한 왜놈들의 책동은 참으로 집요하였다.

김정환이 한성에서 돌아온지 며칠후에 전해들은 한성려인숙에서의 희비극도 바로 평산의병장을 기어이 없애버림으로써 일본군에 점점 드세차게 대항해나서고있는 반일기운을 말살하기 위한 집요한 계책의 일환이였다.

그날 려인숙에 평산의병장 리진룡이가 나타났다는 통보를 받은 경찰과 군대가 동시에 달려들어 란투까지 벌리며 잡아들인 사람이 그와 이름이 류사한 관계로 억울하게 붙들려가 곤욕을 당한것은 엄연한 사실이였다. 왜놈들이 얼마나 평산의병대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겼으면 그러한 추태까지 벌어지였겠는가.

왜놈들의 그러한 책동은 오직 리진룡자신이 그놈들의 총에 맞아죽든가 아니면 무장을 스스로 버리고 자취를 감출 때만이 끝을 볼수 있는것이였다. 리진룡이 살아서 의병대를 이끄는 한 왜놈들의 마수가 어디서 어떻게 그자신에게 뻗쳐오겠는지 알수 없는 노릇이였다.

그러나 리진룡은 자기를 노리는 왜놈들의 횡포성에 겁을 먹은것은 결코 아니였다. 의병에 나설 때 이미 목숨을 서슴없이 내댈것을 굳게 결심한 그로서는 왜놈들의 총에 맞아죽는것을 겁낼수가 없었다. 도리여 심장에서 피가 튀고 골이 빠개져 허연 뇌수가 쏟아져내린다고 해도 숨이 붙어있는 마지막순간까지 왜놈들을 이발로 물어뜯으면서라도 싸울 비장한 각오가 더욱 불타고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비장한 각오는 있으나 마음의 기둥은 없었던것이다.

그것은 목숨을 내대는것보다 더 두려운것이였다.

류린석이 자기의 서신에다 의병들의 불길이 점점 사멸해가는 정세하에서 평산땅의 의병들이 동북에 들어와 싸움을 준비하며 힘을 키워야 한다고 했지만 그의 제자인 리진룡으로서도 이제 와서는 그 말이 먼산의 우뢰소리만큼이나 공허하게 들리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리진룡자신에게 무슨 방책이 있는것은 아니였다.

그러한 리진룡에게 마지막지탱점마저 허물어버리는 일들이 련이어 일어났다.

고종대신에 황제자리에 올라앉은 순종이 왜놈들의 강요로 남부조선일대와 평양, 개성, 신의주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반일의병투쟁을 그만둘것을 발포하였다. 순종의 그러한 발포문으로 하여 각지에서 싸움을 잘하던 유생출신의 의병장들이 맥을 놓고 만주와 아라사로 들어가버리고 가는 곳마다에서 세차게 타오르던 의병투쟁이 서산락일의 일로에 들어가버렸다. 게다가 정세는 바야흐로 력사에 있어본적 없는 최악의 사태에 직면하고있었다.

유교관념이 자기의 뼈와 살로 되여있는 리진룡은 의병투쟁을 그만두라는 황제의 령을 거역할 힘이 없었고 의병대에 닥쳐오는 위기를 타개할 방책이 없었다.

지금까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좌왕우왕하던 리진룡은 드디여 결심했다. 혹시 동북으로 가면 무슨 희망이 생길지 어찌 알랴.

하여 리진룡은 류린석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

하지만 의병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들이 이미 류린석이 나라를 구원할 인물이 아니라는것을 깨달은것이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바에는 이 땅에서 싸우겠다는것이 이곳 백성들의 뜻이였다. 죽으면 죽었지 남의 나라 땅에서 멸시를 받으며 민족을 욕되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던것이다.

그리하여 리진룡은 두명의 경호원만을 데리고 의병대를 떠났다.

떠나기 전에 리진룡은 김정환의 손을 잡으며 갈린 목소리로 작별했다.

《이보게, 나라를 구원코저 이 길에 나섰건만 난 원체 자네들을 거느릴 재목이 아니였네. 날 원망하라구.》

김정환은 벌겋게 달아오른 눈길로 바라보기만 했다.

리진룡은 그의 손을 꽉 잡으며 여전히 갈린 목소리를 냈다.

《부디 몸조심하게.》

꾹 다물렸던 김정환의 입에서 침통한 목소리가 울렸다.

《잘 가게. 그래도 우린 죽어도 고국에 묻히겠지만 타국땅의 낯설은 처마아래서 찬눈비를 가려야 할 자네의 가긍한 정상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네.》

리진룡의 두눈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시 만나자구.》

리진룡은 김정환과 한정만을 물기어린 눈으로 바라보고나서 발길을 돌렸다.

다시 만나겠다고 하여 꼭 다시 만날수만 있다면 리별이 어찌 이다지도 슬프랴.

기약할 길 없는 길을 떠나는 리진룡의 마음은 죄스러웠다.

그후 리진룡은 만주에서 홍범도, 조맹선 등과 함께 포수단을 조직하여 장백, 무송, 림강 등지에서 독립군의 조직을 준비하였다.

그때로부터 6년후 가을에 그는 무장성원들을 이끌고 평북도 녕변군 팔원면에 진출하여 일제의 현금수송마차를 습격하고 일제놈들을 처단하였다. 그후에도 그는 여러차례나 무장성원들을 데리고 국내에 들어와 일제수비대를 습격하였다. 만주의 관전현에서 일제경찰놈들에게 체포되여 1918년 4월 평양감옥으로 이송되였으며 사형당할 때까지 그는 김정환을 비롯한 평산의병들의 기대를 저버린 자책감으로 모대기였다고 한다.

리진룡은 정의는 언제나 백성들에게 있으며 민심을 따르는 길만이 진정으로 나라를 위할수 있다는 뼈저린 진리와 김정환을 비롯한 애국심으로 불타는 백성들과 함께 자기를 깡그리 바치지 못한 후회를 안고 마지막길을 갔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후날 일이고 그가 떠나는 이 자리에서 김정환을 비롯한 의병들의 가슴속에 남은 배신감과 원망은 쓰라린 상처가 되여 아픔만 더해주었다.

리진룡일행이 멀어져가자 김정환은 참고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고야말았다. 그의 가슴속에서 비분이 용암처럼 끓어올랐던것이다.

바로 저러한 사람들을 믿고 나라를 위해보려던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뼈아프게 느끼게 되였다. 그처럼 믿었고 애국의 마음을 불태우리라 생각했던 리진룡이도 끝내는 이 땅을 떠나가버리고마는것이다.

이제 누구를 의지하여 애국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 누가 자기들을 이끌어줄것인가.

눈앞이 막막했다.

불쑥 아버지가 그리웠다. 맹영달이를 때려눕힌것때문에 가정이 불행을 당했어도 불의에 굽어들지 않도록 힘을 주고 살길을 찾아 떠밀어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언제나 그렇듯 대바르고 옳게 이끌어갔다.

아버지가 옳은것은 무엇을 하나 하더라도 자식들이 굳세고 정의롭게 살도록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기때문인것이다.

그래서 자식들은 아버지를 위하여 목숨도 바친다.

아- 아버지처럼 굳센 마음을 가지도록 이끌어줄 위인은 정녕 누구란 말이냐.

곁에 서있던 한정만이 김정환의 앞에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김정환의 뿌옇게 흐려진 눈가에 호랑이발통이 달린 지휘기가 안겨들었다.

《이건 뭔가?》

《이제부터 자네의 령에 복종하겠네.》

《뭐라구?》

김정환은 두눈을 흡떴다.

옆에서 바라보는 신군선과 최순지도 그를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이였다.

《이건 의병들의 마음을 대변한거요. 잘 받들겠으니 우리를 이끌어주시오.》

김정환은 선뜻 지휘기를 받아들수가 없었다.

어떻게 지휘기를 받을수 있단 말인가.

자기가… 그처럼 의지해오던 량반유생들도 지켜내지 못한 지휘기를 자기가 들어올릴수 있으리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그였다.

내가 어떻게…

그의 뇌리에서는 세찬 도리질이 일었다.

그러나 자기를 바라보는 의병지휘성원들의 기대어린 눈길을 외면할수가 없었다.

김정환은 무거운 바위돌을 들어올리듯 지휘기를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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