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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 회


제5장 지휘기는 어떻게 옮겨졌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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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치른 후 필석은 덕쇠를 뒤에 달고 약우물골쪽으로 떠났다.

화승총에 쓰는 탄환을 만들 쇠붙이를 얻자면 마을돌이를 몇번은 해야 했다.

필석은 먹장구름이 가득한 얼굴로 말 한마디 없이 걷기만 했다.

무삼이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도 뻔뻔스러울수 있단 말인가? 도적이 매를 든다는 말은 바로 이래서 생겼을것이다. 참으로 인간의 심보는 천태만상이였다. 도적이 제편에서 도리여 도적이라고 그리도 낯색 하나 붉히지 않고 을러댈수 있다는것이 필석이로서는 전혀 리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놈을 김정환유격장은 신식총과 바꾸어왔다고 했다.

그들의 사이를 눈치채고 의병들이 옆에서 자꾸 캐물었으나 사실대로 말하기가 싫었다.

여하튼 이젠 그도 의병인데 자기와 벌어진 일을 가지고 공연히 딴 사람들에게까지 경계심을 품게 하고싶지는 않았던것이다.

그래서 필석은 큰아버지에게 서흥주막집에서 자기의 가락지를 빼앗았던 무삼이란 놈이 의병대에 나타났다는 소리를 하며 이렇게 오금을 박았다.

《괜히 말을 돌리지 말라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면 의병생활이 재미없어져요. …가만 놔두고 살피다가 그러루한 못된짓이 일어나면 그때 가서 폭로해도 돼요. 지금은 그가 리용구 같은 큰 역적놈에게 원한을 품고 왜놈들과 사생결단할 마음을 가진것이 적실하니 우리가 사사일로 그를 미움받게 할수는 없지 않아요. 혹시 알겠나요, 쑥대도 삼밭에 나면 곧아진다는데 의병대에서 그 버릇이 저절로 없어질지…》

처음에는 도적놈의 역성을 들겠느냐며 눈을 부라리던 전령감이 필석이의 말을 마지막까지 듣고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네가 용타. 나랄 먼저 생각하게 되였으니 말이다. 아무렴 우리가 큰걸 먼저 봐야지. 헌데 주의해라. 그놈이 또 다른 사람들의 물건도 탐할수 있으니… 도적은 쉽게 버릇을 못 고친다. 두손을 잘라버리면 입으로 물어서라도 훔쳐내고야마느니라. 그게 도적질은 손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한다는 소리야.》

마침 그 무삼이란 녀석이 어제 대한협회 고익재의 딸이 알려온 탄약행처를 찾아 떠났다고 했다. 리진룡의병장은 그 탄약을 모두 도성제로 가져가라고 했지만 김정환과 한정만을 비롯한 지휘층의 강한 반대에 부닥쳤던것이다. 지금 왜놈들의 무기를 빼앗아 의병대에 신식무장이 더러 생겼지만 총탄이 없어 몽둥이만도 못하게 된 조건에서 탄약을 전부 의병거점들에서도 멀리 떨어진 도성제에 가져다놓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제의에 리진룡은 자기의 고집을 더 세울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 탄약을 가져다가 김정환의 유군과 한정만의 중군, 최순지의 대오들에 골고루 나누어주라는 령을 내리고말았던것이다.

그래서 무삼이와 몇명의 의병들이 함께 떠났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탄약을 지고 돌아왔지만 그만은 나타나지 않았다.

함께 갔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의병장이 무삼이의 활쏘는 솜씨가 신통하여 뿔활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뿔활을 만들어주느라 잠시 떨어졌다지만 실은 그가 야장간일을 하기 싫어 한정만의 중군으로 옮겼다는 소리도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필석이에게는 앓는 이를 뽑아던지듯이 속시원한 일이였다.

이제는 밉살스런 그놈의 상판을 노상 마주보며 벙어리 랭가슴 앓듯 할 걱정거리가 사라졌던것이다.

필석이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얼마 멀지 않은 앞쪽에서 귀에 선 말소리들이 들렸던것이다.

뒤따르던 덕쇠가 웬 일인가싶어 필석을 바라보았다.

《쉿!》

잠시 귀를 기울이던 필석의 얼굴에 점점 불안이 떠돌았다.

앞쪽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는 좋지 않은 징조를 예감케 하였다.

이곳은 가끔 왜놈들이 나타나는 길목이 멀지 않은 곳이여서 그러한 불안감이 더욱 짙어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필석이는 덕쇠가 듣지 못하게 아미타여래부처님을 몇번이나 불러찾고나서 앞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덕쇠가 그의 뒤를 바투 따라섰다.

덤불을 헤치고 앞을 바라보던 필석이가 두눈을 흡떴다.

왜놈군대 셋이 어떤 처녀 하나를 사이에 놓고 뺑 둘러서서 희롱하고있었던것이다.

《요 계집이나 참 곱게 생겼다.》

《색시, 우리 말 공손히 듣지 않으면 칼로 코를 베낸다. 그 다음엔 귀쪽을 썩둑하구. 히히…》

처녀가 낯빛이 하얗게 질려 소리를 쳤다.

《비켜요. 난 약우물골의원집 딸이예요. 소리치겠어요.》

《의원집 딸이 아니라 우리 일본〈천황〉의 애첩이래두 이런데서 만나면 우리 흥을 돋구어주어야 할걸. 어디 소리쳐봐. 여긴 누구도 듣는 사람이나 없다. 듣는 사람이 있어도 널 도와주지는 못해. 그러니 맘껏 소리쳐봐라. 그게 우리에게 더 재미있다. 히히…》

놈들은 금시 처녀를 덮칠 판이였다.

참으로 위급한 정황이였다.

필석이는 안타까왔다. 자기와 덕쇠 둘이서 왜놈들을 대적한다는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였다. 하다못해 퉁포라도 있다면 몰라도 빈 손바닥을 가지고 무슨 힘으로 저 우직스럽고 무장까지 갖춘 왜놈의 새끼들을 당해낸단 말인가.

그렇다고 가만있으면 눈을 펀히 뜨고 조선녀성 하나가 릉욕당하는 끔찍한 참변을 구경할 판이였다.

필석이가 나직한 목소리로 덕쇠에게 급히 일렀다.

《넌 빨리 가서 의병들을 데려와. 어서…》

《형 혼자 일없겠수?》

필석이는 안타깝게 덕쇠를 바라보았다.

혼자든 둘이든 무슨 소용이 있으랴. 덕쇠는 너무도 어리고 자기야말로 싸움질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풀자루나 같았던것이다.

그걸 말로 하기에는 너무도 시간이 촉박했다.

《그러게 빨리 알리라잖니.》

덕쇠가 다람쥐처럼 덤불속으로 사라졌다.

그 다음 그쪽을 지켜보는 필석의 속에서는 불이 일었다.

제발 의병들이 나타날 때까지 다른 일이 없어야겠는데…

하지만 왜놈들이 필석이의 안타까운 사정을 알턱이 없었다.

한동안이나 처녀를 가운데 몰아놓고 토끼의 얼을 빼려는 승냥이무리처럼 지분거리던 세 왜놈은 처녀를 붙잡고 소름이 확 끼치는 스산한 숨소리를 내불며 달려들기 시작하였다.

《이놈들아, 날 놔라. 이놈들아… 사람 살려… 윽.》

왜놈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처녀가 땅바닥에 쓰러졌다.

왜놈들이 너털웃음을 치며 그에게 다가들었다.

벌써 누런 군복들을 훌렁훌렁 벗어던지며 반벌거숭이가 된 왜놈들의 짐승같은 모양이 금시 일을 칠 잡도리였다.

더는 지체할수 없는 순간이였다.

필석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필석이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성난 메돼지처럼 달려나갔다.

《이 왜놈의 새끼들아, 어디 내 주먹에 죽어봐라.》

필석이의 주먹에 세놈의 왜놈이 돌짝에 찍힌 개구리처럼 뻐드러지는것은 그저 상상일뿐이였다.

아직 주먹찜질로 그 누구의 코등도 쳐보지 못한 필석이가 어떻게 세놈의 왜놈을 당해낼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상상속에서나마 왜놈 셋을 단매에 때려눕힌 그 기세로 필석은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왜놈들은 성난 호랑이처럼 무섭게 달려드는 필석이를 보자 혼비백산하여 굳어졌다.

필석이는 고드름처럼 뚝 굳어진 왜놈들중 제일 앞선 놈을 향하여 주먹을 힘껏 휘둘렀다.

앞선 왜놈이 얼결에 두대씩이나 얻어맞았다.

그러나 왜놈은 뻐드러지기는커녕 눈을 퀭히 뜨고 멍청히 바라보고있지 않는가?

아마도 갑자기 달려드는 방해군이 손가락으로 목을 눌러 죽일만큼이나 무서운 힘을 가진 불가사리쯤으로 여겼던지 얼이 친 상통을 한채 굳어진듯 서있었다.

그러나 상대의 애리애리한 체구를 보고 거기에 주먹찜질맛까지 보고난 후에야 형편없이 보잘것없는 녀석에게 간담을 놀래웠다는것을 안 왜놈은 악이 오른 상판에 쭉 째진 눈깔을 말아올리며 필석이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고노야로!》

주먹이 연방 날아왔다.

갑자기 커다란 고함소리와 번개같이 달려드는 사람을 보고 분명 무슨 벼락을 맞았다고 생각하며 덴겁해서 총을 집어들었던 다른 왜놈들까지 자기들을 놀래운 분풀이로 달라붙어 정신없이 두들겨패기 시작하였다.

필석은 왜놈들의 이쪽 발길에 채워 저쪽으로 가고 저쪽 주먹에 맞아 다시 이쪽으로 오가며 사정없이 얻어맞았다.

왜놈들의 란타에 필석은 숨이 꺽 막히고 정신이 혼몽해지기 시작하였다.

처녀의 눈물젖은 애원소리가 울려왔다.

《때리지 말아요, 제발…》

필석이는 정신이 흐리마리해지는 속에 가까스로 말했다.

《빨리 뛰시오. …》

다음은 정신이 땅속으로 스르르 잦아드는듯싶었다.

무엇인가 바스러지는 소리와 괴상한 비명소리를 그는 먼 우뢰소리처럼 들었다.

얼마쯤 지났는지…

무엇이 자기를 흔드는 느낌에 그는 눈을 떴다.

뽀얗던 눈이 차츰 맑아지고 멍멍하던 귀가 열렸다.

그제야 필석이는 녀인의 흐느낌소리가 들려오는 속에 곁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있는 처녀의 얼굴을 보았다.

아, 내가 한 처녀를 끝내 지켜주지 못했구나. 그 죽일놈의 왜놈새끼들에게 곱게 생긴 조선처녀가 치욕을 당했구나.

어느 먼곳에서 어렴풋이 혀차는 소리가 들렸다.

《돼지망신은 꼬랑지가 시킨다구 의병대망신은 도맡아놓고 해대는구나. 쯧쯧, 이젠 정신이 들었으면 냉큼 일어나라구.》

툭한 그 소리는 분명 무삼이의 목소리였다.

그놈은 꿈속에서도 나를 괴롭히는구나. 나와 무슨 피맺힌 원쑤를 졌길래…

눈앞에 누군가의 얼굴이 나타났다. 무삼이의 밉살스런 얼굴이였다.

필석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조금 동안을 두었다가 다시 떴지만 무삼이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빨리 일어나란데… 그 진탕판이 뭐 무명이부자리같애서 그리두 품놓고 누워 일어날 생각을 안하는거야?》

필석이는 천근으로 무거워진 머리를 힘겹게 들었다.

그제야 자기가 진탕에 넘어져있다는것과 눈앞에 진짜 무삼이가 나타났다는것을 알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왜놈 셋이 제각기 너부러져있었다.

그러니 무삼이가 나타나 자기와 처녀를 몽땅 구원해냈던것이다.

부끄러웠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쑤시고 들어가고싶었다. 필석이는 얼굴이 시뻘개져 어디로든 내빼려고 서둘렀다.

《어딜 가? 젠장… 각시를 내버리고 가면 어쩌라는건가.》

필석은 그 무쌍한 야료를 꿀꺽소리 한번 못 내고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자기와 처녀가 무사한것이 참으로 천행스러운 일이였지만 그 구원자가 다름아닌 무삼인것을 보고는 고맙다는 말도 나오질 않았다.

리진룡의병장이 한정만이에게로 보냈다던 그가 어떻게 여기로 나타났는지는 알수 없었다.

어떤 사연을 안고 나타났든 의병들을 데리러 가던 덕쇠를 만나 여기서 벌어지는 일을 듣고 죽기를 다하여 달려왔을 그였겠지만 고맙단 말이 나가질 않았다.

더구나 무삼이때문에 구원된 처녀를 놓고봐도 생전처음 보는데 무엇때문에 자기가 고맙다고 절을 한단 말인가. 하필이면 골라골라 이런 놈을 데려온 덕쇠의 귀박죽이라도 틀어쥐고 한고패 휘젓고싶었다. 그러나 덕쇠는 무삼이의 뒤에서 장한 일이나 치른듯이 코를 잔뜩 쳐들고 자기를 바라보기만 하고있었다.

하기야 어느 중도에서 무삼이를 만났으니 그랬지 아마 의병들이 있는 곳까지 달려갔더라면 여기서 무참한 일들이 벌어지고난 뒤였을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무삼이가 나타난것이 천만다행이였다.

하지만 사내의 상한 자존심은 어찌하랴. …

필석이가 얼굴까지 홧홧 달아올라 말 한마디 못하는데 무삼이는 그냥 시까슬러댔다.

《꼴 좋다! 가운데 뭘 달구 났으면 나라를 위해 큰일은 못한다구 해도 각시건사쯤이야 제힘으로 할줄 알아야지, 그렇게 노긋노긋해가지구 어따 쓰겠어. 그러구두 뭐 의병이라구… 쯧쯧. 눈 펀히 뜨고 각시가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는걸 구경만 할셈이였어?》

(뭐, 각시라구? 허 참.)

필석이는 쓴입을 다셨다.

낯도 코도 처음 보는 녀자라고 말하고싶지도 않아 외면하고말았다.

그는 무삼이를 바라보지도 않고 발길을 돌렸다.

무삼이가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딜 가? 이 왜놈들의 시체를 여기에 둘셈이야? 그럼 여기 주변이 왜놈들의 수색을 당한단 말이야. 어서 돌아오란데. 왜놈을 잡아주었으면 시체야 같이 날라주어야지 그냥 뺑소니를 치면 내가 혼자서 이 더러운것들을 셋씩이나 둘러메고 왜놈수비대가까이까지 날라다가 팽개치란 말이야. 그게 무슨 놈의 심보냐?》

필석이는 그의 말을 못 들은듯 비칠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처녀가 따라왔다.

《저, 이보세요.》

돌아보기도 부끄러웠으나 어쩔수가 없었다.

《왜 그러오?》

《저… 이마에 피가…》

허 참, 왜놈들에게 란타를 당하던 그 꼬락서니를 이 처녀가 다 보았겠는데 이처럼 창피스러운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명색이 의병이라는게 주먹 한번 변변히 써보지도 못하고 얻어맞기만 했으니…

필석은 몸을 돌려 계속 걸었다.

뒤에서 자박자박 따라오는 발자국소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이보세요, 상처를…》

할수없이 필석이는 어느 바위에 걸터앉아 이마의 상처와 피멍진 살가죽을 손질받아야 했다.

먼발치에서 무삼이가 찌글써하게 바라보며 혀를 차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참, 그 녀인이 다심도 하구나. …곱게 생긴 녀잔데 어떻게 저런 시라소니의 색시가 됐을가?》

덕쇠가 그의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가만있으라요. 저 누인 필석형님의 색시가 아니야요. 필석형님은 배안에 있을 때 지복결혼을 했지만 그 녀자를 아직 찾지 못했어요.》

《엉? 그건 무슨 소리냐?》

덕쇠가 무삼이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모양을 곁눈질로 바라보던 필석은 쓴입을 다셨다.

아마도 서흥주막에서 바로 저 무삼이가 눈독을 들이고 빼앗으려 했던 그 가락지에 깃든 기막힌 사연을 이야기해주는것 같았다.

덕쇠의 말을 듣는 무삼이의 두눈이 점점 놀랍게 떠지는것이 헨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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