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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 회


제4장 한성에서


5


밤이 이슥해서야 김정환은 고익재의 집주변에 이를수 있었다.

김정환은 혹시 일진회놈들이 주변일대를 샅샅이 훑을수 있다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골목들을 지났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고익재의 집 대문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김정환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의 집 대문으로 웬 장정들이 들락날락하고 마당가에서는 무엇을 박살내는 소리들이 연방 울려왔던것이다.

대문앞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길가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고있었다.

김정환은 매우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것을 대번에 느꼈다.

김정환은 사람들의 맨 뒤쪽에서 눈굽을 연신 찍어가며 흐느끼고있는 녀인을 보고 그리로 다가갔다.

빨래함지가 곁에 놓여있는것으로 보아 그 녀인이 주변에 사는것이 틀림없는것 같았다.

녀인의 곁으로 다가간 정환은 나직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저 집에 무슨 일이 생겼는가요?》

녀인이 눈굽을 연방 찍어가며 울음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집주인이 무슨 의병대와 내통했다며 일진회것들이 들이닥쳐 저짓이지요.》

김정환은 다급히 다시 물었다.

《의병대와 내통했다구요? 그래 집주인은 어찌되였답니까?》

녀인은 눈굽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무던한 어른이였는데 저 악귀같은 놈들이 생때같은 그를 죽였지요. …글쎄 그 어른에게 의병들과 내통하여 통감부를 없앨 준비를 주동했다는 죄명을 붙여 어제 밤에 죽였다우다. 그리구는 그 일족을 잡아 일진회의 노비로 만들라는 리용구의 령이 내렸대요. 그런데 그의 딸이 좀전에 귀신도 모르게 없어졌다구 저 지랄들이 아니요?》

김정환은 아연해졌다.

고익재선생이 죽다니? 그가 어떻게 죽는단 말인가? 거기에다 그의 딸 려은이까지 없어지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허나 눈앞의 현실은 엄연한 사실이였다.

김정환은 급히 그 녀인에게 다시 물었다.

《이 댁의 따님이 어떻게 없어졌는지 모르십니까?》

녀인이 눈물을 계속 흘리며 말했다.

《어떤 놈들이 마대에 넣고 덮쳐갔다우. 세상에 끔찍스러운 변두 다 있지.》

《그게… 그게 대체 어떤 놈들입니까, 예?》

《모르지요. 혹시 저놈들이 그짓을 하고 민심이 무서워 저렇게 모르쇠를 하는지 뉘가 알갔수?》

《그런데 그를 덮쳐가는걸 본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내가 봤어요. 아까 어슬녘에… 에그, 생각만 해두 끔찍스럽지. … 글쎄… 집에 딸린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아씨가 무슨 독한 마음을 먹을것 같아 날이 어둑해서 이리루 오드랬는데 글쎄 대갈통에 헝겊을 둘러감고 눈구멍만 내놓은 어떤 괴한 둘이가 큰 마대를 둘러메고 그 집 담장을 넘어 뛰여내리는게 아니겠수. 그런데 그 마대에서 가느다랗게 울려오는 신음소리를 듣자니 분명 그 집 아씨의 목소리였어요. 난 너무 놀라서 금시 멎어버릴듯 한 가슴을 쥐구있다가 정신이 들어 경찰에게 알리러 뛰여갔댔지요. 근데…》

《그런데요?》

《그 백정같은 경찰놈이 뭐라는줄 알아요?》

그때의 감정이 살아났는지 잠시 숨을 죽이고 무심결에 주위를 둘러보던 아낙네가 갑자기 두눈을 흡떴다.

《저놈이예요, … 저놈…》

아낙네가 다급하게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대문가곁에서 서성거리는 경찰관이 눈에 뜨이였다. 그놈이였다. 자기와 두번이나 마주쳤던 그 경찰관 강수길이였다.

김정환의 두눈에서 불꽃이 튕기는듯 했다.

《저놈이 뭐랬소?》

아낙네는 무슨 일을 칠듯 한 김정환의 얼굴을 보고 잠시 쭈밋거리다가 말했다.

《글쎄 뭐, 그까짓 일본사람들의 눈밖에 난 집사람인데 아무렇게 됐으면 뭬라느냐면서… 그따위 시시한 일에 참녜할새가 없다는거예요. 계집을 훔친 놈이 어디에 들어가 배겼는지 이 넓은 한성바닥에서 어떻게 찾겠느냐며 도리여 나를 보고 괜히 남의 일에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화를 당하지 말구 곱게 집안에 박혀있으라질 않수. … 저게 어디 사람이겠수, 글쎄…》

김정환은 너무도 분격하여 말이 나가지 않았다.

속으로 무서운 불덩어리가 끓어올랐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강수길이라는 그 경찰관의 숨통을 끊어버리고싶었다.

하지만 그는 끓어오르는 격분을 참고 견디여야만 했다.

그 경찰관의 주위에 일진회놈들이 득실거리고 더우기는 그보다 의병장 리진룡으로부터 받은 령이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고익재가 일진회놈들에게 잘못된 지금에 와서 그 령을 집행할 일이 막막하였다.

분명 그의 딸이 탄약의 행방을 알고있겠으나 어떤 놈들인지도 모를 괴한들이 감쪽같이 덮쳐갔으니 그를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참으로 김정환으로서는 더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대체 어디로 갔을가? 그를 덮쳐간 괴한들은 대체 누구들인가?)


× ×


불빛이 눈을 찔렀다. 려은은 한동안 눈을 떠보려고 애를 써야 했다.

가까스로 눈을 뜨고보니 앞에서 초불이 타고있었다.

(여기는 어딜가? 그런데 내 몸은 무엇이 이리도 옥죄인담.)

그때에야 려은은 자기의 온몸이 무슨 노끈에 꽁꽁 묶이워있다는것을 느꼈다. 려은은 자기를 결박한 끈에서 벗어나보려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괜한 수고를 하지 마시우. …그게 진짜 록비끈이여서 질기기가 소심줄맞잡이라우.》

초불너머에서 울리는 웅글은 말소리에 려은은 기절초풍하였다.

려은은 자기가 지금 지옥이라는델 와있는것이 아니라 어떤 상스럽지 못한 일을 예감하는 무서운 곳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의 머리속에서는 얼굴을 가리운 괴한들에게 덮치우던 일이 떠올랐다.

엊저녁에 집일을 거들어주는 장쇠아저씨와 함께 왕십리 우차군에게 다녀온 려은은 아버지를 밤새껏 기다렸다.

일진회가 무슨 일을 저지를것 같다면서 나간 아버지가 한밤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새벽에 왕십리 우차군에게서 짐을 실어다놓은 위치를 알려주는 련락은 왔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왕십리 우차군의 련락을 가지고 왔던 사람이 돌아간지 얼마 안되여 아버지가 지난밤에 어느 놈의 칼에 맞아 잘못되였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왔다.

새벽에 한강기슭을 지나던 어떤 사람이 강가에 있는 시신을 보고 한성에서 인망있는 고명한 학자인 고익재임을 알아보고 알려주었던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려은은 그만 선자리에서 기절하고말았다.

하늘처럼 믿고 살아오던 아버지를 너무도 갑자기 잃으니 하늘땅이 통채로 뒤집혀지는것 같았다.

잠시후 눈을 떠서도 려은은 아버지를 잃은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혼미해지는 의식을 가까스로 다잡으며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나서던 려은이에게 또다시 무서운 타격이 가해졌다.

일진회원들이 집에 들이닥쳤던것이다.

《네년의 애비가 우리 일진회를 헐뜯다가 죽었다. 그래서 시신은 우리가 가져다가 불태워버렸다. 애비의 죄가 그것으로 없어진것이 아니니 네년을 끌어다 일진회의 종으로 만들라는 회장님의 분부이시다. 그러니 우리와 함께 갈 준비를 갖추어야겠다. 날이 저물 때까지 대문밖으로는 한발자국도 못 나간다.》

려은은 눈물도 싹 말라버렸다.

이제는 몸을 피할수도 없거니와 그러고싶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없는 생이란 생각할수도 없었던것이다. 아버지를 잃고 이제 일점혈육 하나 없는 자기가 누구를 의지해서 산단 말인가?

더우기 아버지를 죽인 원쑤놈들에게 끌려가 치욕스러운 생을 부지한다는것은 아버지를 두번 죽이는것이나 같았다.

려은은 모진 마음을 먹었다.

차라리 죽자.

어머니를 잃고 홀로 살아온 려은은 가사를 돌봐주던 어멈과 장쇠아저씨라고 부르는 집지기로인에게 집에 건사해두었던 돈과 귀중품을 전부 나누어주고 억지로 떠나보냈다.

그리고나서 아버지가 애용하던 물건들과 옷가지들을 눈물속에 모두 정리한 려은은 부엌에 내려가 서슬그릇을 찾아들었다.

서슬그릇을 앞에 놓고보니 한가지가 속에 걸리는것이 있었다.

문득 어제 저녁 아버지가 떠나면서 왕십리 우차군에게 갔다온 소식을 평산의병대에서 온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던 부탁이 떠올랐던것이다.

아버지가 마지막길을 예감한것은 아닐가.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자기에게 저녁에 그 평산사람이 오면 왕십리 우차군이 알려준 장소를 꼭 알려주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을가. …

려은은 서슬그릇을 앞에 놓은채로 기다렸다.

하지만 평산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저녁까지 기다렸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지만 그때까지도 평산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절망은 려은의 온몸을 휘감았다. 세상이 자기를 버린듯 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더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대문을 지키고있는 일진회의 힘군들이 사람들의 눈길이 덜 미치는 저녁인 지금에 달려들어 끌어갈 잡도리를 할것이였다.

려은은 쏟아지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서슬그릇을 앞에 둔 이 순간에 려은의 눈앞에는 진희를 비롯한 다정한 사람들의 모습들이 떠올라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려은은 그리운 모습들을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하며 서슬사발에 손을 가져갔다.

바로 그때였다.

우당탕 문짝이 바스러지면서 어떤 괴한들이 불쑥 들이닥쳤다.

악- 소리를 지를 사이도 없었다.

손에 든 서슬사발이 괴한들의 발길질에 박살이 나고 려은은 어쩔사이도 없이 자루속에 들고말았다.

려은은 너무도 놀라 기절하고말았다. 그 다음은 지금껏 정신을 잃고있었던것이다.

자기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있었는지 알수도 없었으며 그것을 느낄 생각도 나지 않았다.

려은의 정신은 온통 자기가 묶여있는 이곳이 어디인가 하는데로 쏠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찬 헛간이 분명했다.

그런데 저 초불뒤의 사나이는 대체 어떤 놈일가?

초불이 흔들거리며 커다란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거기에 앉아있었는지 사람의 형체가 초불앞으로 불쑥 솟구쳤다. 나이가 그닥 많지는 않아도 얼굴에 잔주름이 재글재글한 사람의 얼굴이 자기를 빤히 쳐다보았다. 소름이 오싹 끼쳤다. 공포감이 온몸을 휩쌌다.

《어쩌자는거예요? 날 풀어줘요.》

그 사람이 허거프게 웃었다.

《내가 일진회것들 몰래 아가씨를 이곳으로 모셔오느라 얼마나 큰 고행을 했게 맹탕 풀어준다는거요?》

그의 능청스러운 눈길이 닿자 려은은 털벌레가 얼굴을 기여 지나는듯 한감이 들었다. 려은이는 몸을 결박한 포승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괜한짓이우다. 아가씬 평생 여기에 갇히워 우리 도련님의 갑갑증이나 풀어주어야 하오. 그게 낫지. 아씨야 부친일때문에 더는 이세상에서 그전처럼 살수 없는 형편이 아니요. 송병준대감이나 리용구회장네 집 종으로 되여 퀴퀴한 목욕탕에서 그 역신들의 뒤잔등이나 밀어줄바에야 차라리 우리 도련님의…》

너무도 터무니없는 말에 려은은 억이 막혔다.

려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도련님이… 누구예요?》

《송지갑어르신의 자제분이요.》

송지갑의 아들이라면… 아, 그 난봉군…

려은은 눈앞이 캄캄해지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운다구 달라질건 하나도 없수다. 이제 우리 도련님이 돌아오면 묶이운 당신을 보러 올거요. 물론 포승줄은 풀어주지 않을거우다. 그렇게 안허문 손톱에 허비울수도 있으니께… 그럼 아가씬 더는 체네가 아니지요.》

그 말에 려은은 몸서리를 쳤다.

몸을 움직일수만 있다면 당장 벽에 머리라도 짓쪼아 죽어버리련만… 아, 내가 왜 빨리 서슬을 마시지 못했을가. …

물론 아버지의 당부가 있었기때문이고 평산사람이 나타나지 않았기때문이며 일진회놈들이 빨리 대문가안으로 들어서지 않았기때문이다.

아버지의 당부만 없었더라면, 평산사람이 제때에 나타나주었더라면 그리고 일진회놈들이 대문안으로 이 괴한들보다 먼저 들어섰더라면 그는 앞에 놓인 서슬을 서슴없이 마시였을것이다. 그런데 대문밖을 지켜선 일진회놈들이 마당가로 들어설 때 서슬을 마시여도 늦지 않으리라는 타산이 이처럼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것이다. 일진회놈들도 모르게 이 난봉군들이 먼저 들이닥칠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할수 있었으랴. …

려은은 세차게 어깨를 떨며 울었다. 그걸 보며 괴한이 느릿느릿 말했다.

《울지 마시우. 혹시 알겠소. 화근이 복이 되는 례는 옛말에만 있는게 아니라우.》

그리고나서 괴한은 어정어정 초불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문에 열쇠를 잠그고 사라지자 헛간안은 한줄기의 빛도 없는 새까만 어둠속에 잠겼다.

려은이는 새까만 어둠속에서 절망에 몸부림쳤다.

온몸을 꽁꽁 결박한 노끈은 그를 천길 낭떠러지로 사정없이 끌고가는것 같았다.

려은은 어둠속 어딘가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소리없이 그냥 울었다.

이제 송림이란 그 난봉군이 나타나면 무슨 힘으로 뿌리친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절개를 깨끗하게 지킬수 있단 말인가? 아-

밤이 깊어갈수록 악몽도 더욱 심해졌다.

얼마쯤 밤이 깊었는지?…

무엇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려은은 너무도 무서워 몸을 떨었다.

저게 뭐야? 혹시 쥐가 아닐가?…

려은이는 본래부터 쥐를 무척 무서워하였지만 이 순간에는 저것이 쥐였으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스러우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빠그득- 빠그득-

담벽을 뚫는 소리였다. 무엇이 뒤벽을 허비고있었다.

려은이는 소리치고싶었다. 그러나 여기로 달려올 사람이란 송림이란 난봉군이 아니면 그의 심복들뿐인지라 소리도 못 내고 온몸을 오돌오돌 떨기만 하였다.

한동안 조심스럽게 벽을 허비는 소리가 끊기지 않더니 드디여 구멍이 펑 뚫리였다. 뚫어진 구멍으로 달빛이 흘러들었다. 려은은 정신을 도사리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거기로 웬 사람이 비집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거기가 고익재선생님의 따님이요?》

려은은 너무 반가와 하마트면 큰소리를 지를번 하였다.

다행히 그 사나이가 얼른 주의를 주었기에망정이지 문밖에서 보초를 서며 끄덕끄덕 졸고있을 괴한을 깨워놓을번 했다.

사나이가 나직이 속삭이였다.

《지남이라고 합니다. 혹시 선생님께서 제 소릴 하지 않았습니까?》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들은것 같기도 했다. …꼭 들은것처럼 생각되였다. 들었으면 어떻고 못 들었으면 어떠하랴. …

려은이에게는 이런 절망속에서 구원될 희망이면 되였다. 오직 그 난봉군의 손에서 벗어나면 된다는 생각뿐이였다.

《빨리 여기서 빠져야겠소.》

그는 벽을 뚫던 칼로 려은의 온몸을 결박한 노끈을 끊어주고나서 손을 잡아끌었다.

려은은 그 사람이 이끄는대로 무작정 따라나섰다.

지남이라고 했지? 이름이 어린 총각애의 이름같았으나 그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얼마나 천진하고 명랑하며 사심없는 어린 총각을 그려보게 하는 이름인가? 거기다 생긴품도 눈이 억실거리고 이목구비가 훤칠한게 믿음이 갔다. 량손에 갈라든 두자루의 신식권총을 보니 더더욱 마음이 든든했다.

더구나 아버지가 상종하던 사람이라니 어련하겠는가. 아버지는 품행이 바르지 않은 사람들과는 일체 상종조차 하지 않았던것이다.

그의 손에 이끌려 정신없이 달렸다. 그렇게 얼마쯤 달리고나니 불쑥 마차 한대가 나졌다. 마부도 없는 빈 마차였다. 려은은 그 이상스러운 마차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다. 지남이가 마부좌석에 뛰여오르며 다급한 목소리로 재촉했던것이다.

《빨리 오르시오.》

려은이가 마차에 오르자마자 말이 네굽을 놓고 달리기 시작하였다.

그 마차를 타고 날이 새도록 달렸다.

림진강을 건너서 어느 한 마을에 이르러서부터는 마차를 버리고 길을 걸었다. 꼬박 이틀길을 내처 걸었다. 오불꼬불한 오솔길과 길없는 덤불을 헤치고헤쳐서 이른 곳이 장수산에서 얼마 멀지 않은 어느 외진 산골짜기였다. 다행히 자그마한 집 한채를 만났다. 통나무로 아귀를 맞추어 벽을 세우고 지붕에는 목기와를 얹은 집이였다. 안에 들어가니 놀랍게도 깨끗한 살림도구가 갖추어진 아늑한 방이 나졌다.

아마도 사냥철에 이곳에 와서 살면서 짐승을 잡느라고 어느 한가한 부자가 일부러 꾸려놓은 집인듯싶었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사람에게 죽을수가 한수면 살수가 아홉수라는 말이 이래서 생긴 말인듯 했다.

그들은 주인이 당장 들어설것만 같아 서로 등을 돌려대고 앉아 뜬눈으로 밤을 밝혔다.

다음날 지남이가 말했다.

《나에게 금 두근이 있소. 이 집 주인이 나타나면 그것으로 값을 치르어주고 여기서 거처합시다.》

하여 그들 두사람은 이날부터 아궁에 불을 지피기 시작하였다.

식량도 있어야 했고 소금도 있어야 했다.

지남은 정오가 훨씬 지나도록 서성거리다가 아무래도 안되겠는지 식량을 구하러 나가겠다고 했다.

려은은 낯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불안에 휩싸인 눈길로 지남이를 바라보며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인츰 날이 저물겠는데… 차라리 래일 아침에…》

지남이가 별치않다는듯 씩 웃었다.

《내 걱정은 마오. 제꺽 돌아올터인데…》

려은이는 울고싶었다.

누가 자길 생각해서 그러나? 날이 저물면 이 적막골안에 어떻게 혼자 있는단 말인가.

지남은 려은의 속생각은 아랑곳없이 훌쩍 집밖으로 나섰다.

그가 떠나자마자 려은이는 아직은 새파란 대낮이건만 무서워 말이 아니였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대낮에도 이런데 밤이 되면 아마 까무러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공연한 걱정이였다.

쪽박을 엎어놓은듯 한 뒤쪽산마루에 석양이 비끼기 시작할 때 지남이가 한아름이 넘는 짐을 묶은 지게를 지고 땀을 철철 흘리며 나타났던것이다.

려은이는 너무 반가와 하마트면 그의 가슴에 털썩 안겨들번 하였다.

지게에는 쌀이며 메주장, 마늘쪽을 비롯한 음식감들이 있었고 지게다리에는 몇두름 잘되는 말린 고등어까지 데룽데룽 매달려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였다.

이런 심심산골에 작지 않은 장거리가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듯 한지게를 지고 올수 있단 말인가. …

아마도 멀지 않은 곳에 드넓은 장마당은 있을수 없다고 해도 한성의 골목들에서와 같이 싸구려군들을 수시로 만날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고 단정해버릴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여기도 사람사는 고장이니 그런 곳이 없을텐가.

그날 저녁 려은이는 땀을 빨빨 흘려가며 저녁상을 차렸다.

지남이가 어찌나 밥을 달게 먹는지 려은은 아버지를 여읜 후에 처음으로 저도 몰래 소리없는 웃음을 지었다.

깊은 골안인지라 해가 지기 시작하자부터 범의 울음소리와 승냥이들의 울음소리가 참으로 스산하게 울려왔다.

하여 처녀는 해가 채 떨어지질 않았건만 문밖에 홀로 나서기를 주저하였고 어슬녘이 되자부터는 지남이가 어딜 조금만 나가도 떨어지기 힘들어하였다.

밤이 되니 정말 따분하였다.

날씨마저 쌀쌀한지라 토방에서는 잘수가 없었다. 이부자리도 한자리밖에 없었다.

지남이는 정지문을 열고 부엌바닥으로 내려서며 려은이에게 말했다.

《난 여기서 자겠으니 마음 푹 놓고 쉬오.》

그의 말을 듣고 한동안 바재이던 려은이가 이부자리를 들고 부엌바닥에 노전을 깔고있는 지남이에게 다가섰다.

《저… 이 이부자리를 쓰세요.》

《난 괜찮으니 어서 쓰고 자오.》

《그럼 내가 이부자리를 쓰고 여기서 자겠으니 어서 온돌방으로 올라가세요.》

지남이는 려은이의 다심한 념려에 얼굴을 붉히며 빙그레 웃었다.

《난 여기도 괜찮으니 어서 올라가 자기나 하오.》

려은이가 움직일념을 안하자 지남이는 저어하듯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내게 거기의 덧옷이나 주오. 난 그것이면 한밤을 춥지 않게 잘수 있소.》

려은이는 지남이의 인정미에 눈물이 났다. 맑은 눈물이 슴배인 얼굴을 다소곳이 숙이고 자기의 덧옷을 가져다 지남에게 주었다. 지남은 만족하여 입가에 웃음을 담고 자리에 누웠다.

잠시후 거기에서 지남의 코고는 소리가 셈평좋게 들려왔다.

(꽤 피곤스러웠던 모양이야. …하긴 이 산속길을 종일 걸었겠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가. 난 정말 맹꽁이야. 싫다고 해도 기어코 저이에게 이 솜이불을 주었어야 했어. 래일은 꼭… 그런데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일가? 의병일가? 아니면…)

려은이는 살풋이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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